결성 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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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결성 장씨는 장갑을 시조로 하고 장하를 중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본관은 충청남도 홍성군에 속하는 결성이다. 고려 시대 문하평리를 역임한 장하를 비롯하여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6명, 무과 급제자 38명, 생원시 합격자 10명, 진사시 합격자 18명, 역과 합격자 2명을 배출했다. 2015년에는 약 2만 5천 명의 인구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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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성 장씨 - 장덕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교육자, 정치인이었던 장덕수는 와세다 대학교 유학 중 조선인 유학생 단체를 이끌고 신한청년당 결성에 참여했으며, 동아일보 주필과 고려공산당 상하이파 국내 지부 조직 등의 활동을 하였고,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암살당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 - 결성 장씨 - 장욱진
장욱진은 충청남도 연기군 출신의 한국 화가로, 단순하고 순수한 화풍으로 일상적인 소재를 표현하여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낸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양주시에 장욱진미술관이 건립되었다.
결성 장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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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나라 | 한국 |
관향 |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
시조 | 장갑(張甲) |
중시조 | 장하(張夏) |
집성촌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천안시 공주시 경기도 가평군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등 |
년도 | 2015 |
인구 | 24,921명 |
순위 | 238 |
인물 | |
주요 인물 | 장하 장가순 장혼 장도빈 장덕수 장덕준 장덕진 장욱진 장예준 장왕록 장일남 장병희 장학엽 장치혁 장정길 장진호 장영희 장명진 |
2. 역사
결성 장씨의 시조 '''장갑'''(張甲)은 장원백(張元伯)의 아들로 호장(戶長)을 지냈으며, 그의 증손 장하는 고려 말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하였다.[1]
2. 1. 시조 및 기원
시조 '''장갑'''(張甲)은 장원백(張元伯)의 아들로 호장(戶長)을 지냈으며, 고려 말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한 장하는 장갑의 증손이다.[1]2. 2. 고려 시대
시조 '''장갑'''(張甲)은 장원백(張元伯)의 아들이고 호장(戶長)이었으며, 고려 말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한 장하(張夏)는 장갑의 증손이다.[1]3. 본관
결성(結城)은 충청남도 홍성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결기군(結己郡) 또는 결사현(結巳縣)이라 불렸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결성군(潔城郡)으로 개칭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운주(運州 : 洪州)의 관할이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결성현(結城縣)으로 이름을 바꾸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1733년(영조 9) 보령에 편입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결성군으로 홍주부에 개편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홍주군과 결성군을 통합한 홍성군에 병합되었고 지금은 홍성군 결성면이 되었다.
4. 인물
장하는 고려 시대의 인물로, 홍건적의 난 때 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2등공신에 올랐고, 신돈 사후 그의 일당을 탄핵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밀직부사, 산성순심사, 한양부윤 등을 역임하며 왜구를 물리치고 간첩을 체포하는 등 공을 세웠다. 경상도도관찰출척사를 거쳐 문하평리에 올랐으나, 이성계 일파를 모함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4. 1. 고려
장하는 장용문의 아들이다.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363년(공민왕 12) 전의주부로서 2등공신에 올랐다.[1] 1372년 신돈이 제거된 뒤 이보림 등과 함께 간관으로 있으면서 신돈의 일당인 김문현을 탄핵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 1378년(우왕 4) 밀직부사에 올랐으며, 1381년 가뭄이 심하자 밀직제학으로서 개경 대정에 비를 빌었더니 비가 내려 포상을 받았다.[1] 다음해 각 도의 산성순심사에 임명되었다.[1] 1383년 한양부윤으로 있으면서 의성에서 왜구를 쳐부수기도 하였고, 몰래 숨어 들어온 왜구의 간첩 3명을 체포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1] 1388년(창왕 즉위년) 제도의 안렴사를 도관찰출척사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경상도도관찰출척사가 되었다.[1] 1389년(창왕 1) 왜적의 위협에 절개를 지키고 죽은 진주의 열녀 최씨의 행실을 임금께 알려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1] 이어 개경으로 돌아와 문하평리에 올랐다.[1] 1390년(공양왕 2) 명나라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이성계 일파를 모함하였다는 윤이·이초의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먼곳으로 유배를 당하였다가 얼마 뒤에 풀려 나왔다.[1]4. 2. 조선
장하는 장용문(張用文)의 아들이다. 1363년(공민왕 12)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전의주부(典儀注簿)로서 2등공신에 올랐다.[1] 1372년 신돈이 제거된 뒤 이보림(李寶林) 등과 함께 간관으로 있으면서 신돈의 일당인 김문현(金文鉉)을 탄핵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 1378년(우왕 4) 밀직부사에 올랐으며, 1381년 가뭄이 심하자 밀직제학으로서 개경 대정(大井)에 비를 빌었더니 비가 내려 포상을 받았다.[1] 다음 해 각 도의 산성순심사(山城巡審使)에 임명되었다.[1] 1383년 한양부윤으로 있으면서 의성에서 왜구를 쳐부수기도 하였고, 몰래 숨어 들어온 왜구의 간첩 3명을 체포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1] 1388년(창왕 즉위년) 제도(諸道)의 안렴사(安廉使)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경상도도관찰출척사(慶尙道都觀察黜陟使)가 되었다.[1] 1389년(창왕 1) 왜적의 위협에 절개를 지키고 죽은 진주(晉州)의 열녀(烈女) 최씨(崔氏)의 행실을 임금께 알려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1] 이어 개경으로 돌아와 문하평리에 올랐다.[1] 1390년(공양왕 2) 명나라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이성계 일파를 모함하였다는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먼 곳으로 유배를 당하였다가 얼마 뒤에 풀려 나왔다.[1]5. 과거 급제자
결성 장씨는 고려시대 문과 급제자 1명(장하)과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6명, 무과 급제자 41명, 생원시 합격자 10명, 진사시 합격자 18명, 역과 합격자 2명을 배출하였다.[2]
5. 1. 고려 문과
장하[2]5. 2. 조선 문과
이름 | 한자 |
---|---|
장덕량 | 張德良 |
장복현 | 張復炫 |
장성좌 | 張聖佐 |
장세용 | 張世瑢 |
장진일 | 張振一 |
장취오 | 張聚五 |
결성 장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6명을 배출하였다.[2]
5. 3. 조선 무과, 생원시, 진사시, 역과
6. 항렬자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51세 | 52세 | 53세 | 54세 | 55세 | 56세 |
---|---|---|---|---|---|---|---|---|---|---|---|---|---|---|---|
순(淳) | 래(來) | 훈(勳) | 균(均) | 선(善) | 택(澤) | 직(稙) | 혁(赫) | 규(珪) | 용(鏞) | 연(演) | 동(東) | 열(烈) | 원(遠) | 호(鎬) | 한(漢) |
7. 문화재
- 세종 육영재
- 봉서재
- 숙인언양김씨정려
- 유인한양조씨정려
- 효자장명항.처.열려배씨지문
- 시조장하충신묘소
- 평산서원발굴
8. 인구
연도 | 가구 수 | 인구 수 |
---|---|---|
1985년 | 4,758 | 19,432명 |
2000년 | 6,708 | 21,068명 |
2015년 | 24,921명 |
참조
[1]
서적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2]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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