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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양방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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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경양방죽은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과 중흥동 일대에 있었던 인공 호수입니다. 현재는 매립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1960년대까지 존재했던 호남 최대의 저수지였습니다.
역사:


  • 조성 시기: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 세종 때(1440년경)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광주목사 김방이 축조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16세기 문헌에 경양방죽에 대한 기록이 없어 16세기 후반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김방이 김제 벽골제 공사를 완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경양방죽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 규모: 처음에는 약 20만㎡ (6만여 평) 규모였으나, 1930년대 후반 일제강점기에 1차 매립으로 약 6만㎡로 축소되었습니다.
  • 매립: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거주 지역을 만든다는 이유로 1차 매립(1930년대)이 이루어졌고, 1960년대 말 인구 증가와 주택난 해소를 이유로 2차 매립이 진행되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 명칭: '경양방죽'이라는 이름 외에도 금교방축(金橋防築), 경호(鏡湖), 서방지(瑞坊池), 연지(蓮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위치 및 구조:

  • 위치: 현재의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홈플러스(구 시청) 및 계림1동 일대입니다. 조선시대 광주읍성 동문과 북문에서 북쪽과 북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했습니다.
  • 구조: 해발 30~40m 평지에 남북 방향으로 약 1km 길이의 둑을 쌓아 물을 가두는 방식으로 축조되었습니다. 둑 안쪽은 반달 또는 부채꼴 모양의 저수 공간이었습니다. 무등산 장원봉 기슭에서 내려오는 시냇물과 광주천에서 공급되는 물이 방죽을 채웠습니다.

기타:

  • 경양방죽은 농업용수 공급 외에도 여름에는 물놀이,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즐기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 경양방죽의 매립 과정은 광주의 근대화 과정에서 자연 공간이 어떻게 소멸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경양방죽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는 연구와 문화예술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경양방죽
개요
유형방죽
위치대한민국 광주광역시 동구 대인동 (과거)
좌표현재 위치 정보 없음 (소멸)
조성 시기조선 시대
소멸 시기일제강점기
관리 주체과거 지역 공동체 (마을)
역사적 배경
조성 목적농업용수 확보, 홍수 조절
변화 과정농업 기술 발전 및 도시화로 기능 상실
일제강점기 도시 개발로 매립
현재 상태소멸, 흔적 없음
특징
규모기록 미비 (과거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
주변 환경과거 농경지
현재 도시 지역
관련 기록구전 설화, 일부 문헌 기록
문화적 의미
지역 문화과거 지역 공동체의 중심 역할
관련 설화 및 전승
현재의 영향지명, 역사 교육 자료
도시 개발로 인한 역사적 장소의 소멸에 대한 교훈
참고 자료
관련 연구지역사 연구, 도시사 연구
관련 기관광주광역시청, 지역 문화 연구 기관
관련 웹사이트광주드림 - 경양방죽이 간직한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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