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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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동군은 과거 서해의 섬이었던 교동도의 행정 구역이었다. 삼한 시대에는 소석삭국으로 불렸으며, 고구려 장수왕 때 고목근현이 되었다.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으로 개칭되어 강화군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 시대에는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간척 사업이 진행되어 현재의 교동도 모습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부로 승격되었고, 1895년 23부제 시행으로 강화군에 합병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복구되어 경기도 관할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강화군에 통폐합되었고, 1934년 화개면과 수정면을 합쳐 교동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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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군 | |
---|---|
지도 | |
기본 정보 | |
한자 표기 | 喬桐郡 |
위치 | 교동도 및 주변 섬 |
소속 | 경기도 |
역사 | |
고려 시대 | 교동현 설치 |
조선 시대 | 교동군으로 승격 |
1895년 | 인천부 교동군 |
1896년 | 경기도 교동군 |
1914년 | 강화군에 통폐합 |
행정 구역 | |
면 | 교동면 서도면 |
주요 섬 | 교동도 주문도 볼음도 |
기타 | |
관련 문서 | 교동현 |
2. 유래
교동도는 대운도(戴雲島), 고림(古林), 달을신(達乙新)이라고도 불린 서해의 섬이다.[2] 나중에 큰 나무뿌리라는 뜻을 지닌 고목근(高木根)으로 불리고 그게 유래가 되어 큰 오동나무라는 뜻의 교동(喬桐)이 되었다.[2]
삼한시대에 소석삭국(小石索國)이었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3] 옛날부터 강화도의 영향권으로 여겨졌다. 백제의 영역에 속해 있다가 장수왕 대에 고구려에 점령당해 고목근현(高木根縣)이 되었다.
3. 역사
757년 경덕왕 16년에 행정제도 개편으로 교동현(喬桐縣)으로 개칭된 후 해구군(海口郡)의 영현이 되었다.[1] 교동이라는 이름은 그 뒤 변함없이 이어진다.
1232년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강화도 일대에 피난민이 대거 유입되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토지와 식량확보등을 목적으로 강화도와 인근 섬들에 대한 간척이 시작되었다.[4] 이 시기에 시작된 간척은 시간을 두고 20세기까지 지속되어 현재의 강화도 연안의 해안선을 만들었다.[4] 당초에 몇 개의 작은 섬이었던 교동도 본 섬도 이와 같은 간척으로 현재의 커다란 한 개의 섬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1629년 인조7년 부(府)로 승격되어 수사(水使)가 부윤(府尹)을 겸임하였다.[1]
1895년 23부제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읍 자체가 폐지되어 강화군에 합병되었다가 이듬해 복구되었지만 군(郡)으로 격하되어 경기도관할 교동군이 되었다.[1] 관할에 본 섬의 4개면과 석모도 북쪽의 송가면등 5개면이 있었다. 송가면은 당초에 독립된 섬이었다가 나중에 간척으로 지형적으로 석모도에 합쳐졌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일제에 의한 행정폐합으로 강화군에 통폐합되었다.[1] 송가면이 삼산면에 편입되었고 본 섬의 4개면은 화개면과 수정면, 2개면이 되었다.
1934년, 화개·수정면을 합면하여 지금의 교동면이 되었다. 현재 법정리 13개, 행정리 17개로 지금에 이른다.
3. 1. 삼한 및 삼국시대
삼한시대에 소석삭국(小石索國)이었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3]. 옛날부터 강화도의 영향권으로 여겨진다. 백제의 영역에 속해 있다가 장수왕 대에 고구려에 점령당해 고목근현(高木根縣)이 되었다. 757년 경덕왕 16년에 행정제도 개편으로 교동현(喬桐縣)으로 개칭된 후 해구군(海口郡)의 영현이 되었다.[1] 교동이라는 이름은 그 뒤 변함없이 이어진다.
3. 2.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
고구려 시대에는 고목근현(高木根県)이었다가 신라 경덕왕 때 조동(喬桐)으로 이름이 바뀌어 해구군(현재의 강화군)의 영현이 되었다. 조동도는 대운도(戴雲島), 고림(高林), 달을신(達乙斬)이라고도 불렸다.[1]
이씨조선 시대 1629년(인조 7년)에 부(府)로 승격되었고, 1895년(고종 32년)에 강화에 편입되었으나, 곧바로 이전 상태로 돌아가 군(郡)이 되어 이십삼부제 인천부의 관할이 되었다. 그러나 1914년에 군이 폐지되어 강화군에 합쳐졌다.[1]
3. 3. 조선시대
삼한시대에 소석삭국(小石索國)이었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3] 옛날부터 강화도의 영향권으로 여겨진다. 백제의 영역에 속해 있다가 장수왕 대에 고구려에 점령당해 고목근현(高木根縣)이 되었다.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 행정제도 개편으로 교동현(喬桐縣)으로 개칭된 후 해구군(海口郡)의 영현이 되었다.[1] 교동이라는 이름은 그 뒤 변함없이 이어진다.
1232년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파천하면서 강화도 일대에 피난민이 대거 유입되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토지와 식량확보등을 목적으로 강화도와 인근 섬들에 대한 간척이 시작되었다.[4] 이 시기에 시작된 간척은 시간을 두고 20세기까지 지속되어 현재의 강화도 연안의 해안선을 만들었다.[4] 당초에 몇 개의 작은 섬이었던 교동도 본 섬도 이와 같은 간척으로 현재의 커다란 한 개의 섬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1629년 인조7년 부(府)로 승격되어 수사(水使)가 부윤(府尹)을 겸임하였다.[1]
1895년 23부제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읍 자체가 폐지되어 강화군에 합병되었다가 이듬해 복구되었지만 군(郡)으로 격하되어 경기도관할 교동군이 되었다.[1] 관할에 본 섬의 4개면과 석모도 북쪽의 송가면등 5개면이 있었다. 송가면은 당초에 독립된 섬이었다가 나중에 간척으로 지형적으로 석모도에 합쳐졌다.
3. 4. 일제강점기 및 현대
삼한시대에 소석삭국(小石索國)이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3] 옛날부터 강화도의 영향권으로 여겨진다. 백제의 영역에 속해 있다가 장수왕 대에 고구려에 점령당해 고목근현(高木根縣)이 되었다. 757년 경덕왕 16년에 행정제도 개편으로 교동현(喬桐縣)으로 개칭된 후 해구군(海口郡)의 영현이 되었다.[1] 교동이라는 이름은 그 뒤 변함없이 이어진다.
1232년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파천하면서 강화도 일대에 피난민이 대거 유입되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토지와 식량확보등을 목적으로 강화도와 인근 섬들에 대한 간척이 시작되었다.[4] 이 시기에 시작된 간척은 20세기까지 지속되어 현재의 강화도 연안의 해안선을 만들었다.[4] 당초에 몇 개의 작은 섬이었던 교동도 본 섬도 이와 같은 간척으로 현재의 커다란 한 개의 섬이 되었다.
조선시대인 1629년 인조7년 부(府)로 승격되어 수사(水使)가 부윤(府尹)을 겸임하였다.[1] 1895년 23부제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읍 자체가 폐지되어 강화군에 합병되었다가 이듬해 복구되었지만 군(郡)으로 격하되어 경기도관할 교동군이 되었다.[1] 관할에 본 섬의 4개면과 석모도 북쪽의 송가면등 5개면이 있었다. 송가면은 당초에 독립된 섬이었다가 나중에 간척으로 지형적으로 석모도에 합쳐졌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일제에 의한 행정폐합으로 강화군에 통폐합되었다.[1] 송가면이 삼산면에 편입되었고 본 섬의 4개면은 화개면과 수정면, 2개면이 되었다. 1934년, 화개·수정면을 합면하여 지금의 교동면이 되었다. 현재 법정리 13개, 행정리 17개로 지금에 이른다.
참조
[1]
서적
증보 새 국사사전 (ENCYCLOPEDIA OF KOREAN HISTORY [증보] 새 국사사전)
敎學社
[2]
삼국사기
삼국사기
[3]
이론
천관우설
[4]
이미지
강화도 간척
http://imagesearc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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