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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다라노 가나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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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다라노 가나와리(巨勢金成)는 헤이안 시대 초기의 화가로, 개인의 이름이 남아있는 최초의 화가이며, 헤이안 시대 세속화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그는 초상화를 실물과 똑같이, 산천초목을 살아있는 듯이 묘사하는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다이도 3년(808년) 좌근위에 임명되었으며, 미마사카권소목, 빗추카이, 하리마카이, 아키카이 등 지방관을 역임했다. 조와 7년(840년)에는 백제 아손 성씨를 하사받았으며, 닌주 3년(853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가인 조영에 참여하여 어전 벽화를 그리고 폭포전의 석조를 만들었으며, 무예에도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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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다라노 가나와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명여 (무성) → 백제 조신
이름백제 하성
백제하성/기쿠치 요사이 그림 '전현고실'
시대헤이안 시대 초기
출생엔랴쿠 원년 (782년)
사망닌주 3년 8월 24일 (853년9월 30일)
관위종5위 하・아키노스케
주군헤이제이 천황 → 사가 천황 → 준나 천황 → 닌묘 천황 → 몬토쿠 천황
씨족여 (무성) → 백제 아손
부모아버지: 여시선
형제복성, 하성
자녀미네토
종교불교

2. 경력

808년(다이도 3년) 좌근위에 임명되었으나, 그림 실력으로 궁중에 불려갔다. 823년(고닌 14년) 미마사카권소목에 임명되었다. 833년(덴초 10년) 외종5위하에 서임되었다. 조와 연간(834년~848년)에는 빗추카이, 하리마카이, 아키카이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840년(조와 7년) 형 후쿠나리 등과 함께 백제 아손(百濟朝臣) 성씨를 하사받았다.[8] 845년(조와 12년) 내종5위하에 서임되었다. 853년(닌주 3년) 8월 24일 사망하였다. 향년 72세. 최종 관위는 산위 종5위하였다.

연도내용
808년 (다이도 3년)좌근위 임명
823년 (고닌 14년)미마사카권소목 임명
833년 (덴초 10년)종5위하 서임
조와 연간(834년~848년)빗추카이, 하리마카이 역임
840년 (조와 7년)백제 아손 성씨 하사[8]
845년 (조와 12년)종5위하 서임
846년 (조와 13년)아키카이 임명
853년 (닌주 3년)사망 (향년 72세, 최종 관위: 산위 종5위하)


3. 인물

구다라노 가나와리는 헤이안 시대 세속화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인물로, 개인 이름이 남아있는 최초의 화가이다.[2] 초상화는 실물과 똑같았고, 산천초목은 정교하여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 사가인 조영에 참여하여 어전 벽화를 그리고 폭포전(나고소 폭포)의 석조를 만들었으며,[4] 무예에도 능하여 활도 잘 쏘았다.[3]

3. 1. 일화

가와나리가 궁중에 근무할 때, 어떤 사람이 밖에 있는 종자를 부르라고 명했지만, 종자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가와나리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종자의 초상화를 그렸고, 덕분에 그 사람은 신속하게 종자를 데려올 수 있었다.[3]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히다노 타쿠미(飛騨工)라고 불린, 비할 데 없는 장인이 있었다. 헤이안쿄(헤이안경) 천도 때 히다노 타쿠미가 조성한 호라쿠인은 정취가 깊었고, 아름다움과 묘미가 있었다. 이때, 히다노 타쿠미와 가와나리는 각자의 기술을 겨루고 있었다. 어느 날, 히다노 타쿠미가 한 칸 4면의 당을 지었으므로, 보러 와서 벽에 그림이라도 그려 달라고 가와나리를 자택으로 초대했다. 서로 경쟁하면서도 사이가 좋았으므로, 가와나리는 히다노 타쿠미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히다노 타쿠미의 집에 가보니, 매우 흥미로운 작은 당이 세워져 있었고, 동서남북 네 면의 문이 모두 열려 있었다. 히다노 타쿠미가 "당에 들어가서 안쪽을 봐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자, 가와나리가 툇마루에 올라 남쪽 문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이 쾅 닫혀 버렸다. 놀라서 서쪽 문으로 돌아 들어가려 하자 이번에는 서쪽문이 닫히고, 남쪽 문이 열렸다. 북쪽 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 문은 닫히고, 서쪽 문이 열렸다. 동쪽 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또 문이 닫히고 이번에는 북쪽 문이 열리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빙글빙글 돌면서 몇 번이고 당에 들어가려고 시도했지만, 문이 닫히거나 열리거나 해서 도저히 들어갈 수 없어, 가와나리는 포기하고 툇마루에서 내려왔다. 이것을 본 히다노 타쿠미는 매우 크게 웃었고, 가와나리는 분하게 생각하고 귀가했다.

며칠 후, 가와나리가 히다노 타쿠미에게 사자를 보내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으니, 저희 집에 와주십시오"라고 전했다. 히다노 타쿠미는 분명히 뭔가 속이려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해서 가지 않았지만, 여러 번 정중하게 불렀으므로, 마침내 히다노 타쿠미는 가와나리의 집에 가기로 했다.

"이쪽으로 들어오십시오"라는 말에 따라, 히다노 타쿠미는 복도가 있는 미닫이를 열자, 방 안에 몸이 검고 부풀어 썩어 있는 큰 시체가 가로 놓여 있었고, 부패 냄새가 코를 찔렀다. 히다노 타쿠미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본 탓에, 앗 소리를 지르며 놀라, 방에서 뛰쳐나왔다. 같은 방에 있던 가와나리는 히다노 타쿠미의 소리를 듣고 매우 크게 웃었다.

히다노 타쿠미는 무서워하며 뜰에 서 있었지만, 가와나리가 그 미닫이에서 얼굴을 내밀고 "야, 나는 여기에 있어요. 신경 쓰지 말고 오세요"라고 말했으므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자세히 보니, 히다노 타쿠미가 본 시체는, 실은 창호지(실내를 구분하는 건구)에 그려진 단순한 시체의 그림이었다.[4]

4. 관력

육국사에 따르면, 다이도 3년(808년) 좌근위에 임명되었으나, 그림에 뛰어났기 때문에 궁중에 불려갔다.[8] 고닌 14년(823년) 미마사카권소목을 역임했다.[8] 닌묘 천황 초기인 덴초 10년(833년) 외종5위하에 서임되었고,[8] 조와 연간에 빗추카이, 하리마카이, 아키카이 등 지방관을 역임했다.[8] 조와 7년(840년) 형 후쿠나리 등 3명과 함께 백제 아손 성씨를 하사받았고,[8] 조와 12년(845년) 내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8]

연도내용
808년좌근위 임명
823년미마사카권소목 역임
833년종5위하 서임
840년백제 아손 성씨 하사
845년내 종5위하 서임
조와 연간빗추카이, 하리마카이, 아키카이 역임


5. 계보


  • 부: 여시선[9]
  • 모: 불명
  • 처: 불명
  • 아들: 백제심인[9]

6. 평가

구다라노 가나와리는 개인 이름이 남아있는 최초의 화가로, 헤이안 시대 세속화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2] 명인으로서 전설이 많지만, 그림 작품은 남아있지 않다. 그가 그렸던 초상화는 본인과 똑같았고, 산천초목은 정교하여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3]고 한다. 정원 조영도 맡아, 사가인 조영 때 어전 벽의 그림을 그리는 것과 함께 폭포전의 석조도 만들었다고 한다.[4] 이 폭포전은 나고소 폭포라고 불렸지만, 물은 헤이안 시대 중기에 말라 석조만 남았다.[5] 1922년 "오사와 연못 부속 나고소 폭포 유적"[6]이라는 명칭으로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고, 1994년부터 실시된 발굴 조사에서 중세의 유수가 발견되어 1999년에 복원이 완료되었다.[7]

또한, 무예에 능하여 활도 잘 쏘았다고 한다.[3]

참조

[1] 서적 新撰姓氏録 左京諸蕃
[2] 서적 マイペディア 平凡社
[3] 서적 日本文徳天皇実録 0824
[4] 서적 今昔物語集 巻24-5
[5] 웹사이트 『フィールド・ミュージアム京都』「大沢池附名古曽滝趾」 https://www2.city.ky[...]
[6] 문서 読みは「おおさわいけ つけたり なこそのたきあと」
[7] 웹사이트 『京都観光Navi』「名勝 名古曽滝跡」 http://kanko.city.ky[...]
[8] 서적 続日本後紀 0622
[9] 서적 百家系図稿 鈴木真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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