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이타 가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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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로이타 가쓰미는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고문서학 연구가로, 1874년 나가사키현에서 태어나 1946년 사망했다. 도쿄 제국대학에서 34년간 교편을 잡으며 고문서학 발전에 기여했고, '국사대계' 편찬을 주재하는 등 일본사 연구의 기초를 다졌다. 또한, 문화재 보존 활동과 에스페란토 보급에도 힘썼다. 그러나 그의 역사관은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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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이타 가쓰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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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구로이타 가쓰미 |
원어 이름 | 黒板勝美 |
출생일 | 1874년 9월 8일 |
출생지 | 일본, 나가사키현 |
사망일 | 1946년 12월 21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
직업 | 역사학자 |
학력 | 도쿄제국대학 |
학위 | 문학박사 |
소속 기관 | 도쿄제국대학 |
주요 관심사 | 역사학 |
2. 생애
구로이타 가쓰미는 1874년 9월 3일, 나가사키현 소노기군 시모하사미촌(현 나가사키현 히가시소노기군 하사미정)에서 옛 오무라번사 구로이타 요헤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2] 나가사키현립 오무라 고등학교의 전신인 구제 오무라 중학교, 구마모토 대학의 전신인 구제 제5고등학교를 졸업하고,[2] 1896년에 제국대학문과대학 국사과를 졸업하고,[3] 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4]
대학원에서는 고문서학을 연구 테마로 삼았다. 이때 선배인 시모무라 미요키치와 《징고문서》를 편찬하였고, 경제잡지사의 다구치 우키치 밑에서 《국사대계》 교정 작업에 참여했다. 또한 제국대학 문과대학 사료편찬계의 사료편찬사항 취조보조를 촉탁받았다.
1901년, 도쿄 제국대학 사료 편찬원이 되었고,[5] 이듬해 도쿄 제국대학 문과대학 강사를 촉탁받았으며, 1905년, 사료 편찬관 겸 도쿄 제국대학 부교수가 되었다.[5] 같은 해, "일본 고문서 양식론"으로 도쿄 제국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5]
1908년부터 2년간 사비로 학술 연구를 위해 구미 각국에 출장했으며, 1919년, 사료 편찬관 겸 도쿄 제국대학 교수로 취임했다.[6] 이듬해 사료 편찬관을 퇴임하고,[7] 도쿄 제국대학 교수 전임이 되었다.
1935년 (쇼와 10년), 도쿄 제국대학 교수를 퇴관하고,[8] 동 대학 명예교수의 칭호를 받았다.[1] 1936년 (쇼와 11년), 『국체의 본의』 편찬 위원 (국사 담당)을 맡았다.[9] 같은 해, 사적 조사 도중 군마현다카사키시에서 쓰러져 10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도쿄도시부야구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73세.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구로이타 가쓰미는 1874년 9월 3일, 나가사키현 소노기군 시모하사미촌에서 옛 오무라번사 구로이타 요헤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2] 오무라 중학교,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를 거쳐[2] 1896년 7월 제국대학 문과대학 국사과를 졸업했다.[3] 이후 제국대학 국사과 대학원에 입학하여 고문서학을 연구했다.[4] 시모무라 미요키치와 《징고문서》를 편찬하고, 다구치 우키치 밑에서 《국사대계》 교정 작업에 참여했다. 제국대학 문과대학 사료편찬계의 사료편찬사항 취조보조를 촉탁받았다.2. 2. 학자로서의 경력
1901년, 도쿄 제국대학 사료 편찬원이 되었다.[5] 1902년, 도쿄 제국대학 문과대학 강사에 위촉되었다.[5] 1905년, 사료편찬관 겸 도쿄 제국대학 조교수가 되었다.[5] 같은 해, 〈일본고문서양식론〉으로 도쿄 제국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5]1908년부터 2년간 사비로 유럽과 미국 등에서 학술 연구를 했다.[6] 1919년, 사료편찬관 겸 도쿄 제국대학 교수로 취임했다.[6] 1920년, 사료편찬관에서 물러나 교수 전임이 되었다.[7] 1935년, 도쿄 제국대학 교수직에서 퇴임하여 명예교수 칭호를 받았다.[1]
2. 3. 은퇴 이후
1935년, 도쿄 제국대학 교수직에서 퇴임하여 명예교수 칭호를 받았다.[1] 이듬해인 1936년, 사적 조사 도중 군마현 다카사키시에서 뇌일혈로 쓰러졌다.[9] 10년 동안의 투병 끝에 1946년 도쿄도 시부야구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9]3. 업적
도쿄 제국대학에서 34년간 교편을 잡으며 많은 후진을 양성하는 동시에 고문서학의 체계화에 힘썼다. 이는 쇼소인 문서 조사의 시작, 도지・곤고부지 등의 고문서 정리, 사료편찬계의 『대일본고문서』 편찬을 주재한 데서 드러난다. 또한, 『국사대계』 『속국사대계』 『국사대계 육국사』 『국사대계 루이쥬 국사』에 이어, 1929년부터 『신정 증보 국사대계』의 편찬에 착수하여 일본사 연구의 기초 사료인 고전적의 보급에 힘썼다.
그 외에도 학자로서의 업적은 다방면에 걸쳐, 고사사 보존회·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조사회·국보 보존회·중요 미술품 등 조사 위원회·조선총독부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회·호류지 국보 보존회 등의 위원을 맡아 문화재의 보존에 진력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보존회 위원으로 활동한 것은 한국 문화재 보존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1934년에는 독자적으로 일본 고문화 연구소를 창설하여 그 소장이 되었고, 후지와라쿄 유적 발굴 조사를 지도하여 후지와라쿄 조당원의 규모를 밝혀냈다. 1936년에는, '국사관'으로 가칭되는 국립 역사 박물관과 연구실을 겸한 기관의 설립 구상이 구체화되었지만, 구로이타의 병, 그리고 사망으로 이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황실 관계의 업적으로는, 1924년에 임시 어력대사 실사 고사 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조케이 천황의 즉위를 밝혀냈으며, 같은 해 임시 동산 어문고 취조계의 촉탁이 되어 어물을 정리했다.
또한, 사회적 사업에 눈을 돌려, 쇼토쿠 태자 봉찬회나 요시노 신궁 봉찬회를 설립했다.
더욱이, 1906년에 일본 에스페란토 협회를 설립하고, 구미 유학 중이던 1908년에는, 드레스덴에서 개최된 제4회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에 최초의 일본 대표로 신무라 이즈루와 함께 참가하는 등, 에스페란토의 보급에 힘썼다.
3. 1. 고문서학 연구 및 사료 편찬
구로이타 가쓰미는 도쿄 제국대학에서 34년간 교편을 잡으며 많은 후진을 양성하는 동시에 고문서학의 체계화에 힘썼다. 쇼소인 문서 조사, 도지・곤고부지 등의 고문서 정리를 담당했다. 사료편찬계의 『대일본고문서』 편찬을 주재했다. 『국사대계』, 『속국사대계』, 『국사대계 육국사』, 『국사대계 루이쥬 국사』, 1929년부터 『신정 증보 국사대계』의 편찬에 참여하여 일본사 연구의 기초 사료를 보급했다.3. 2. 문화재 보존 활동
구로이타 가쓰미는 고사사 보존회,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조사회, 국보 보존회, 중요 미술품 등 조사 위원회, 조선총독부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회, 호류지 국보 보존회 등에서 위원을 맡아 문화재 보존에 힘썼다. 1934년, 일본 고문화 연구소를 창설하여 소장이 되었고, 후지와라쿄 유적 발굴 조사를 지도하여 후지와라쿄 조당원의 규모를 밝혀냈다. 1936년에는 '국사관'으로 가칭되는 국립 역사 박물관과 연구실을 겸한 기관 설립을 구상했으나, 그의 사망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에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되었다.3. 3. 황실 관련 업적
1924년 임시 어력대사 실사 고사 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조케이 천황의 즉위를 밝혔으며, 같은 해 임시 동산 어문고 취조계의 촉탁이 되어 어물을 정리했다.3. 4. 기타 활동
구로이타 가쓰미는 쇼토쿠 태자 봉찬회나 요시노 신궁 봉찬회를 설립하는 등 사회 사업에 힘썼다. 1906년에는 일본 에스페란토 협회를 설립하고, 1908년 드레스덴에서 개최된 제4회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에 신무라 이즈루와 함께 일본 대표로 참가하는 등 에스페란토 보급에 힘썼다.4. 인물됨
문하생 사카모토 타로는 구로이타 가쓰미에 대해 "겉보기에는 호방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심하며, 활동의 장은 체제 쪽에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성격으로는 재야적인 경향이 강했다"고 평가했다. 동료 츠지 젠노스케는 "구로이타 박사의 자질은 '방담하고 쾌활'하며, 학풍 또한 마찬가지여서, 그의 소설은 국사의 대국을 파악하는 것이 많다. ... 하지만 막대한 힘을 기울인 『국사대계』나 『대일본고기록』의 교정 사업에서는, 박사는 '극히 세심하고 치밀'하며, '때로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보일 정도이다"라고 평가했다.
구로이타 가쓰미의 방대하고 꼼꼼한 학문적 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지만, 한편으로 그의 역사관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국체의 본의' 편찬에 참여한 것은 그의 학문적 중립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이다.
5. 수상
6. 저서
구로이타 가쓰미는 일본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여러 저서를 남겼지만, 그의 저작들은 식민사관 및 황국사관의 영향을 받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주요 저서로는 1908년 출간된 《국사 연구》, 1911년 저술한 《서유 2년 구미 문명기》, 1914년작 《요시츠네전》, 1925년작 《국체 신론》 등이 있다. 1928년에는 《페르시아 여행담》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편집 서적으로는 1917년 《특별 보호 건조물 병 국보 목록》, 1928년부터 1932년까지 간행된 훈독 《일본서기》, 1935년 《수정 국사 연구 연표》 등이 있다. 이노우에 데쓰지로와 공저한 《우리나라 체관념》(1925)이 있으며, 1906년에는 《에스페란토-일본어 사전》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가 편찬한 국사대계는 킷카와 고분칸에서 신판으로 출간되었다.
7. 관련 인물
7. 1. 친족 관계
- 역사학자 구로이타 마사오는 구로이타 가쓰미의 양자이며, 고쿠시칸 대학 교수였다.
- 역사학자 구로이타 노부오는 구로이타 가쓰미의 조카이자, 작가 나가이 미치코의 남편이다. 다이고지 레이호칸 관장을 역임했다.
- 사업가 구로이타 덴사쿠는 도쿄 증권 거래소 일부 상장 쓰키시마 기계 주식회사 창업자이며, 구로이타 가쓰미의 친동생이다.
- 일본 경제 단체 연합회 부회장 이마자토 히로키는 구로이타 가쓰미의 사촌이다.
7. 2. 교우 관계
구로이타 가쓰미는 나이토 고난, 아사카와 간이치, 타가와 다이키치로 등과 교우 관계를 맺었다.7. 3. 문하생
- 아이다 지로
- 사카모토 타로
- 하니 고로
- 히라 이즈미
- 마루야마 지로
8. 평가
구로이타 가쓰미는 일본 역사학, 특히 고문서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역사관은 일본 제국주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의 연구 성과는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하지만, '국체의 본의' 편찬 참여 등 제국주의 옹호 행적은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흑판 신오・나가이 미치코 편, 『흑판 가쓰미의 추억과 우리들의 역사 탐구』 (요시카와코분칸, 2015년 3월)가 출판되었다.
참조
[1]
서적
東京大学百年史 資料三
https://hdl.handle.n[...]
東京大学
[2]
문서
第五高等学校編『第五高等学校一覧 自明治25年至明治26年』
https://dl.ndl.go.jp[...]
梅田平次郎
1896
[3]
간행물
『官報』第3910号
https://dl.ndl.go.jp[...]
1896-07-11
[4]
간행물
『官報』第3939号
https://dl.ndl.go.jp[...]
1896-08-14
[5]
간행물
『官報』第6719号
https://dl.ndl.go.jp[...]
1905-11-21
[6]
문서
『東京帝国大学一覧 從大正8年至大正9年』
https://dl.ndl.go.jp[...]
東京帝国大学
1920
[7]
문서
『東京帝国大学一覧 從大正9年至大正10年』
https://dl.ndl.go.jp[...]
東京帝国大学
1921
[8]
문서
『東京帝国大学一覧 昭和11年度』
https://dl.ndl.go.jp[...]
東京帝国大学
1936-07
[9]
뉴스
「国体の本義」編纂委員決まる
大阪毎日新聞
1936-06-02
[10]
간행물
『官報』第126号「叙任及辞令」
https://dl.ndl.go.jp[...]
1912-12-29
[11]
간행물
『官報』第1657号、「叙任及辞令」
191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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