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차량제작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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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제차량제작 시발은 1955년 국제차량제작 3형제가 제작한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로,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서 최우수상과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대중에게 알려졌다. 미군 지프의 부품을 활용하고 드럼통을 가공하여 제작되었으며, 4기통 지프형 모델과 세단, 픽업 등의 파생 모델이 존재했다. 초기에는 수공업 방식으로 제작되었으며, 택시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57년 이승만 정부의 자동차 수 제한 조치와 1962년 새나라자동차의 등장으로 판매가 감소하여 1963년 단종되었다. 현재는 생산 당시의 차량은 남아있지 않으며, 복원된 차량(복각차량)이 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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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차량제작 시발 - [자동차]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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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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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종 | 지프 |
차체 스타일 | 2도어 지프 |
엔진 | 1.3 L 1322 cc 4기통 |
변속기 | ADV 3 (전진 3단, 후진 1단) 수동 변속기 |
생산 기간 | 1955년-1963년 |
조립 장소 | 을지로 종로 용산, 대한민국 |
관련 차종 | 윌리스 지프 닛산 패트롤 (4W60) |
한글 표기 | 시발 |
한자 표기 | 始發 |
로마자 표기 | Sibal |
2. 역사
1955년 10월, 국제차량제작의 창업자인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가 국산장려회가 주최한 산업박람회에 시발 자동차를 출품하여 최우수 상품과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일반인에게 알려졌다.[4]
1957년 5월 8일, 이승만 정부가 자동차 수를 제한하는 긴급조치인 5·8 라인을 발동하면서, 시발 자동차는 판매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5·16 군사 정변 이후 정부 보조금 중단과 1962년 새나라자동차가 닛산 블루버드를 반제품으로 수입해 판매하면서, 판매 급감으로 1963년 5월에 단종됐다.[5]
2. 1. 개발 배경
1955년 8월,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과 그의 형제들은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를 유용하고 차체는 드럼통을 가공하여 시발 자동차를 제작하였다.[4] 그 해 10월에 열린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 박람회에 시발 자동차를 출품했는데, 최우수상과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고 주문이 쇄도했다. 대통령상을 받고 쇄도하는 주문으로 얻은 계약금으로 공장 설비를 갖추고, 양산 체제에 들어갈 수 있었다.[5]2. 2. 초기 생산 및 발전 (1955년 ~ 1962년)
1955년 10월, 국제차량제작의 창업자인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가 광복 10주년을 기념하여 국산장려회가 주최한 산업박람회에 시발 자동차를 출품하여 최우수 상품과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일반인에게 알려졌다.[4] 4기통 지프형으로 6인승이었던 시발 자동차는 엔진, 타이어, 전조등, 차체, 프레임 등의 부품 국산화에 성공하였으나, 이로 인해 많은 품질 문제를 겪었다. 유리는 2중접합유리나 강화유리가 아닌 일반 유리를 사용하여 비포장 도로에서 깨지는 일도 있었다.경향신문 1955년 10월 1일자 기사에 따르면, 시발 자동차의 당초 생산 가격은 90만 환이었다.[4] 처음에는 8만 환이었으나, 1년 뒤 택시 운송 회사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30만 환까지 가격이 올랐다.[5] 모델 후기에는 시발 픽업과 시발 세단이 있었는데, 시발 세단은 국내 최초의 스테이션 왜건으로 월 100대까지 생산 가능하도록 생산량을 늘렸고, 미국 승용차 디자인을 도입했다. 하지만 높은 가격과 생산성 문제로 인해 몇 대 생산되지 못했다. 시발 픽업은 시발 자동차의 부품 운반용으로 2대 생산되었다.[5]
1955년 8월, 서울특별시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과 그의 형제들이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를 사용하고, 차체는 드럼통을 가공하여 시발을 제작했다. 초기에는 수공업 방식으로 제작하여 완성까지 4개월 정도 소요되었으나, 산업 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주문이 쇄도하면서 계약금으로 공장 설비를 갖추고 양산 체제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시발은 주로 택시용 차량으로 사용되었으며, 1963년 5월 생산 종료까지 3,000대 이상 생산되었다. 2도어였지만 택시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조수석을 젖혀서 승객이 타고 다녔다.
그러나 1957년 5월 8일, 이승만 정부가 자동차 수를 제한하는 긴급조치인 5·8 라인을 발동하면서 판매에 타격을 입었다. 5·16 군사 정변 이후 정부 보조금 중단과 1962년 새나라자동차가 닛산 블루버드를 반제품으로 수입해 판매하면서 판매가 급감하여, 1963년 5월 누적대수 2,235대를 생산하고 단종됐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자동차 산업 보호법을 제정하여 외국 제조업체들이 국내 자동차 회사와 제휴하도록 강제했다. 그 결과 기아 자동차, 쌍용 등과 같은 회사의 초기 버전이 진출하게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생산 당시의 차량은 존재하지 않으며, 후일 남아 있는 자료 등을 바탕으로 똑같이 만든 차량(복각차량)만이 존재한다. 대한민국에 보존되어 있는 시발은 5대 정도이다.
2. 3. 단종과 그 이후 (1962년 ~ 1963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자동차 산업 보호법을 제정하여 외국 제조업체들이 국내 자동차 회사와 제휴하도록 강제했다. 그 결과 기아 자동차, 쌍용 등과 같은 회사의 초기 버전이 진출하게 되었다. 시발은 1963년에 단종되었다.3. 모델
1955년 8월, 서울특별시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과 그의 형제들이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를 사용하고, 차체는 드럼통을 가공하여 제작하였다. 초기에는 수공업 방식으로 제작하여 완성까지 4개월이 걸렸다. 같은 해 10월,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 박람회에 출품하여 최우수상과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주문이 쇄도했다.
주로 택시 차량으로 사용되었으며, 1963년 5월까지 3,000대 이상 생산되었다. 2도어였지만 택시로 사용할 때는 조수석을 젖혀서 승객을 태웠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5대 정도가 보존되어 있다.
3. 1. 시발 지프
국제차량제작에서 제작한 시발 자동차는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을 기념하여 국산장려회가 주최한 산업박람회에 출품되어 최우수 상품과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일반인에게 알려졌다.[4] 4기통 지프형으로 6인승이었고, 엔진, 타이어, 전조등, 차체(바디), 프레임 국산화에 성공하였다. 다만 이로 인해 많은 품질 문제를 유발하였다고 한다. 유리는 2중 접합 유리가 아닌 일반 유리를 사용하여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 깨지는 일도 있었다. 경향신문의 1955년 10월 1일 자 기사에 따르면 당초 생산 가격은 90만 환이었다.[4] 처음에는 8만 환이었고, 1년 뒤에 택시 운송 회사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자 30만 환까지 오른 가격에 판매되었다.1955년 8월, 서울특별시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과 그의 형제들이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를 사용하고 차체는 드럼통을 가공하여 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수공업적 방식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완성까지 4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해 10월에 열린 광복 10주년을 기념하는 산업 박람회에 시발 자동차를 출품했는데, 최우수상뿐만 아니라 대통령상까지 수상하여 신문에 크게 보도되면서 주문이 쇄도했다. 대통령상을 받고 주문이 쇄도하면서 얻은 계약금으로 공장 설비를 갖추고, 양산 체제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55년에 처음 생산된 시발은 초기에 주로 수입 부품을 사용하여 수작업으로 제작되었으며, 차체는 낡은 드럼통으로 만들어졌다. 윌리스 지프를 기반으로 한 이 차량은 대통령상을 받기 전까지 생산이 더뎠지만, 이후 한국 택시 회사에서 비교적 인기 있는 선택이 되었다. 주로 택시용 차량으로 사용되었으며, 생산을 종료한 1963년 5월까지 3,000대 이상이 생산되었다. 2도어였지만 택시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조수석을 젖혀서 승객이 타고 다녔다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 보존되어 있는 시발은 5대 정도이다.
4. 국산화 논란
시발 자동차의 엔진은 당시 자동차 정비 및 재생 업체였던 국제차량공업에 1953년 입사한 기술자 김영삼 주도로 국산화가 이뤄졌다. 처음에는 주로 미군의 지프를 개조하는 작업을 하다, 1955년 3월 실린더 헤드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하였고 변속기와 차축 등은 미군 지프의 부품을 재생해 사용했다. 이후 김영삼은 실린더 블록의 국산화에도 기여하였다(1956년도까지 국제차량 근무). 국제차량공업은 점진적으로 메탈 베어링, 밸브가이드, 클러치 디스크, 클러치 압력판, 배터리, 브레이크 라이닝 등을 직접 제작하는 국산화 계획을 추진하였다.
1958년 정부 제출용 자료에 따르면, 1958년까지 차체 및 엔진을 포함한 시발 자동차의 국산화율은 약 56% 정도였으며, 1960년까지 자체 생산 84%에 대한민국산 부품 16%를 사용하여 100% 국산화를 달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955년에 제작된 자동차는 엔진의 일부 부품 정도만 국산화된 엔진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발 자동차의 엔진이 군용 지프에 사용되었던 고-데빌(Go-Devil) 엔진을 복제하는 것으로 국산화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당시부터 시발 자동차의 엔진이 미군 지프의 엔진을 재생해 사용했다는 논란도 있었다. 이에 창업주인 최무성과 당시 공장장이었던 오원철은 1992년 월간 자동차생활과의 인터뷰에서 카뷰레터(carburetor), 미션기어, 차동기어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품을 점진적으로 국산화했다고 밝혔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자동차와 엔진을 만들어보겠다는 의지는 높이 평가받았지만, 당시 시발 자동차는 최초의 대한민국 자동차라기보다는 개조 자동차에 가까웠다.
5. 복각
현재 대한민국에는 시발 자동차의 생산 당시 진품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몇몇 유지들에 의해 윌리스 MB, 쌍용 코란도 등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복각차량들이 제작되어, 현재 2곳의 박물관에 나누어 보존 중에 있다.
복각차량은 드라마/CM 촬영용 올드카 렌트업체인 금호상사에서 만든 2대 이상의 모델과, 경기도 용인 삼성교통박물관에서 만든 1대가 있다. 이 중 삼성교통박물관에서 만든 복각차량은 1955년 산업박람회 대통령상 수상 당시의 프로토타입을 재현한 것으로, 박물관 차원에서 직접 재현 프로젝트를 구성해 최무성 일가의 후손 및 기타 관련자들의 조언을 받아 만들어 오리지널 모델에 훨씬 가까운 인상을 주고 있다.
5. 1. 복각차량들의 소재지
현재 대한민국에는 시발 자동차의 생산 당시 진품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몇몇 유지들에 의해 윌리스 MB, 쌍용 코란도 등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복각차량들이 제작되어, 현재 2곳의 박물관에 나누어 보존 중에 있다.복각차량은 드라마/CM 촬영용 올드카 렌트업체인 금호상사에서 만든 2대 이상의 모델과, 경기도 용인 삼성교통박물관에서 만든 1대가 있다. 이 중 삼성교통박물관에서 만든 복각차량은 1955년 산업박람회 대통령상 수상 당시의 프로토타입을 재현한 것으로, 박물관 차원에서 직접 재현 프로젝트를 구성해 최무성 일가의 후손 및 기타 관련자들의 조언을 받아 만들어 오리지널 모델에 훨씬 가까운 인상을 주고 있다.
구 분 | 소 재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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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상사 제작 차량(민트색) | 촬영 대여용 1대 |
삼성교통박물관 1대 (독립기념관 소장 차량 대여 전시 중) | |
제주 세계자동차박물관 1대 |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대 | |
삼성교통박물관 제작 차량(백색) | 삼성교통박물관 1대 |
6. 의의 및 평가
국제차량제작의 창업자인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가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을 기념하여 국산장려회가 주최한 산업박람회 때 시발 자동차를 출품하여 최우수 상품과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일반인에게 알려졌다.[4] 시발 자동차는 처음에는 8만 환에 판매되었으나, 1년 뒤 택시운송회사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30만 환까지 가격이 올랐다.[5]
1955년 8월, 서울특별시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과 그의 형제들은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를 사용하고 차체는 드럼통을 가공하여 시발 자동차를 제작하였다. 초기에는 수공업적 방식으로 제작하여 완성까지 4개월 정도가 소요되었으나, 산업 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주문이 쇄도하면서 얻은 계약금으로 공장 설비를 갖추고 양산 체제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시발 자동차는 주로 택시용 차량으로 사용되었으며, 1963년 5월 생산 종료 시까지 3,000대 이상이 생산되었다. 2도어였지만 택시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조수석을 젖혀서 승객이 타고 다녔다. 현재 대한민국에 보존되어 있는 시발 자동차는 5대 정도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자동차 산업 보호법을 제정하여 외국 제조업체들이 국내 자동차 회사와 제휴하도록 강제했다. 그 결과 기아 자동차, 쌍용 등과 같은 회사의 초기 버전이 진출하게 되었다. 시발 자동차는 1963년에 단종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Sibal (1955–63)
https://autocade.net[...]
2011-12-06
[2]
웹사이트
Meet the first ever Korean car
https://www.topgear.[...]
2015-08-21
[3]
서적
韓国(大韓民国)がよ~くわかる本:歴史、民族、社会、生活の実際が見える!
秀和システム
[4]
뉴스
躍進「産業」의발자취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55-10-01
[5]
서적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9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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