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영 (18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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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김유영(金裕泳, 1869 ~ ?)은 일제강점기에 만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다음은 김유영에 대한 자세한 정보입니다.
생애:
- 본적은 경성부이며, 1905년부터 일진회 회원으로 활동했습니다.
- 일진회는 천도교의 한 분파로 시작되었으며, 김유영도 천도교 지도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일진회가 해체될 때 해산분배금 150원을 수령했습니다.
- 일한합방기념탑에 공로자로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 3·1 운동 이후 천도교 계열의 신흥 종교 제우교(濟愚敎)를 창시하여 초대 대도주가 되었습니다. 제우교는 3·1 운동에 대한 반대파가 결성한 종교였습니다.
- 3·1 운동 직후부터 독립 반대론자로 활동하며 만주의 독립 찬성론자들에게 경고문을 살포했습니다.
- 1920년 만주보민주식회사(滿洲保民株式會社)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습니다.
- 만주보민회에 제우교도들을 이끌고 발기인으로 참가했습니다. 만주보민회는 남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사회 통제, 선전 작업, 항일 세력 탄압 등의 역할을 수행한 밀정 단체였습니다.
- 김유영은 만주보민회 창설과 지부 확장을 주도했습니다.
- 1921년 《신한민보》는 만주보민회의 수괴로 김유영을 지목했습니다.
- 1922년부터 랴오닝성 신빈 현 싱징에 설치된 만주보민회 지부 고문으로 활동했습니다.
- 1924년 만주보민회 해체 시 해산분배금 750원을 받았습니다.
- 1925년, 만주보민회에 참가한 제우교도들이 항일 세력에게 공격받아 300명 이상이 살해되자, 일본 중의원에 피해 상황 조사와 유족 보상을 청원했습니다.
사후:
-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포함되었습니다.
참고:
- 김유영(金裕泳)이라는 동명이인이 여러 명 존재합니다. (1907년생 영화인, 1994년생 야구선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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