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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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김자수(金自粹, 1351년 ~ 1413년)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입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입니다.
생애 및 활동:
-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 우왕 때 정언이 되었으나, 왜구를 토벌한 조민수의 사은 편지에 대한 회답 교서를 짓는 것을 거부하여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 공양왕 때 대사성, 세자좌보덕 등을 역임하며 왕에게 효성, 왕세자 봉숭례, 음사 금지, 숭불 중단, 언관 신분 보장 등을 담은 상소를 올렸습니다.
- 1392년(공양왕 4)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고,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에 이르렀습니다.
- 고려 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습니다.
- 조선 건국 후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자손에게 묘갈(墓碣)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여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켰습니다.
사후:
- 안동시 안기동에 유허비가 남아 있습니다.
-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안동군지(安東郡誌)」의 충신조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동문선(同文選)』에 그의 시문이 실려 있습니다.
가족 관계:
- 아버지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지제고(知制誥)를 지낸 김오(金珸)입니다.
- 손자 김영년은 문종 때 강릉판관을 지냈으며, 선지당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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