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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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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창제는 1877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한국의 교육자, 문필가, 기독교 신자이다.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YMCA 활동을 시작했으며, 안동교회 창립을 주도했다. 함경도 지역에서 영생학교 학감과 함흥YMCA 창설에 참여했으며, 청년지 발행인과 여러 잡지에 기고하며 문필 활동을 했다. 송도고등보통학교와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중학교 등에서 교사로 봉직했으며, 3.1 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2. 생애

김창제는 1877년 충청남도 보령군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문물을 접하며 서구 문물 수용의 뜻을 품었다. 관립한성사범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진학하여 기독교 장로교로 개종하고,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창설에 참여하는 등 초기부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09년 3월에는 윤치소와 함께 안동교회 창립을 주도하고 자신의 집을 예배당으로 헌당하기도 했다.

을사조약 이후에는 교육, 실력 양성, 신앙 전도 활동에 전념했다. YMCA 학관 교사, 학생Y 및 하령회 강사 등으로 활동하며 특히 일요강화 강사로 큰 활약을 했다.[1] 1912년 학생하령회에서는 감동적인 강연으로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1913년에는 YMCA를 지키기 위해 일본인 명예이사 선출에 반대하는 등 주체적인 모습을 보였다.[1] 1915년부터는 함경북도 경성 함일학교, 1917년부터는 함경남도 함흥 영생학교 학감으로 부임하며 지방 YMCA 육성에 힘썼다.[1] 특히 함흥 YMCA 창설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1]

YMCA 회보인 청년지의 발행인 겸 주필, 개벽(開闢), 조광(朝光) 등 잡지의 필진,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문필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다.[1] 그의 글은 주로 신앙생활, 교육, 계몽, 근로 의식 고취 등 비정치적인 내용을 다루었으며, 뛰어난 웅변 솜씨로 YMCA 일요강좌에서 청년들에게 인기를 얻었다.[1]

1920년부터 1924년까지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와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1924년부터 1939년까지 이화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2] 1926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국어교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1923년부터는 한국농촌운동의 핵심위원, 경성YMCA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1933년 잡지 과학조선(科學朝鮮)의 필진 겸 편집고문을 맡았고, 1934년에는 과학지식보급회(科學知識普及會)를 창립하였다.[2]

8.15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으며, 1957년 11월 4일 사망했다.

2. 1. 초기 활동 (개화기~1910년대)

1877년 충청남도 보령군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문물을 접하고 서구 문물 수용의 뜻을 품은 그는 일찍이 상경하여 관립한성사범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들어갔다. 관립한성사범학교 재학 중 기독교 장로교로 개종하고,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설될 때부터 학생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관립한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 YMCA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3월 유성준, 박승봉, 민준호, 이주완 등의 양반 출신들은 안국동에 안동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윤치소와 함께 안동교회 창립을 주도했다. 그는 자신의 집이 있던 홍수례골 자택(현재 재동초등학교의 뒤편)을 안동교회의 예배당으로 헌당하여 1년간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2. 2. 교육 및 신앙 활동 (1910년대~1920년대)

을사조약 이후 김창제는 공직 제의를 거절하고 교육, 실력 양성, 신앙 전도 활동에 전념했다. YMCA 학관 교사, 학생Y 및 하령회 강사, YMCA 이사 및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일요강화 강사로 크게 활약했다.[1] 1912년 학생하령회에는 강사로 초빙되어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는 강연을 했다.[1] 1913년 유신회 회원들이 YMCA 총회 주도권을 잡으려 명예이사제를 채택하려 하자, 김창제는 YMCA를 지키기 위해 일본인 명예이사 선출에 반대했다.[1]

지방 YMCA 육성을 위해 1915년 함경북도 경성 함일학교 학감으로 부임했고, 1917년 함경남도 함흥 영생학교 학감으로 부임했다.[1] 함경남북도 체류 중 신자들을 모아 함흥 YMCA 창설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1] 1917년 이순기, 현원국, 영(L. L. Young) 등을 창립준비위원으로 삼아 영생학교 학생 YMCA를 조직했다.[1] 이때 L. 영은 캐나다 선교부에 연락하여 YMCA 활동 지원을 교섭했고, 현원국은 학생들을 위한 도서 구입에 힘썼다.[1] 그해 3월 25일 창립총회를 열었다.[1] 초대 회장에는 캐나다 선교사 맥그레이(D. M. McRae, 마구례), 부회장에는 모학복, 서기에 이순기, 이사에는 김창제와 허헌, 최영학, 홍기진 등이 선임되어 함흥 YMCA를 출범시켰다.[1]

2. 3. 문필 활동 (1910년대~1940년대)

그는 문필가로서 YMCA 회보인 청년지의 발행인 겸 주필이었고, 개벽(開闢), 조광(朝光) 등 잡지의 필진으로 참여했으며,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일간신문에도 많은 글과 칼럼을 기고했다.[1] 그의 글은 대부분 비정치적인 내용으로, 신앙생활, 교육 활동, 계몽, 근로 의식 고취, 배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1] 그는 뛰어난 웅변 솜씨로 YMCA 일요강좌에서 해박한 지식과 유창한 언변을 선보여 청년들에게 인기를 얻기도 했다.[1]

그의 논설로는 '금일 경제적 상태와 학생의 각성', '신인(新人)', '생명의 저축', '현대 청년의 고민', '소사(小事)는 대사(大事)', '소', '신(神)과 인(人)', '인내하라', '인문발달과 기독교의 공헌', '첫째 날', '예수의 교훈과 유술주의' 등이 있다.[1]

2. 4. 교육 활동과 최후 (1920년대~1957년)

1920년부터 1924년까지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와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지냈고, 1924년 7월 이화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으며, 1939년 3월 정년퇴직하였다.[2] 1923년부터 시작된 한국농촌운동의 핵심위원이자, 경성YMCA 이사, 중앙YMCA연합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1926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국어교사로 출강하였다.

1933년 잡지 과학조선(科學朝鮮)의 필진 겸 편집고문을 맡았다. 1934년 7월 5일 서울 태서관(太西館)에서 이인, 김용관(金容瓘), 박길룡(朴吉龍) 등 발명학회 간부들과 서울 시내 중등학교 교사 100여 명과 함께 과학지식보급회(科學知識普及會)를 창립하였다.[2]

8.15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57년 11월 4일 강직한 삶을 마감했다.

3. 3.1 운동에 대한 관점

그는 윤치호에게 3.1 만세 운동 당시 각종 미신과 유언비어가 확산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3.1 운동에 대해 애국적이기는 하지만 투기, 미신, 허황된 말, 음모에 기초하고 있어서 동조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3]

The voice of the majority is the voice of God, as many think, but it is not necessarily so. It was also the demand of the majority that had Jesus nailed to the cross. Nor is it true that the union of Chondogyo and Christianity is the will of God. It was also the union of the Pharisees and Herod that sentenced the Son of God to death.|다수의 목소리가 곧 주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도 다수의 요구잖아요.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얘기도 사실이 아닙니다. 주님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도 바리새인과 헤롯의 연합이었잖아요.영어 [4]

그는 자신이 3.1 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 뒤, 다수의 생각, 다수의 선택이 반드시 올바른 선택은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아울러 김창제는 다수의 선택이 무조건 올바른 선택이고 민주주의라고 해석하는 것을 반대했다. 윤치호는 그의 견해에 적극 공감하였다.

4. 평가

대표적인 친일 인사 윤치호는 김창제가 현명한 사람이라는 평을 남겼다. 그는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깊은 사람이다. 그는 독립소요에 가담하지 않아 균형 잡힌 의식의 소유자임을 입증했다. 물론 그를 욕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반드시 올바른 길을 가는 것도 아니면서 모든 사람을 반역자라고 낙인 찍는 어떤 친구들보다는 교육과 사업, 청년 계몽에 헌신하는 김씨가 좀더 현명한 애국자다[5]'라고 평가했다.

참조

[1] 서적 윤치호 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인물과 사상사 2001
[2] 웹사이트 과학지식보급회 https://terms.naver.[...]
[3] 서적 윤치호 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인물과 사상사 2001
[4] 서적 윤치호 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인물과 사상사 2001
[5] 서적 윤치호 일기 1916~1943: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시기 인물과 사상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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