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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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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캄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나치 독일과 그 협력국에 대한 보복을 시도한 비밀 조직이다. 1945년 압바 코브너가 결성했으며, 주로 유대인 파르티잔 출신 5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나캄은 독일인 다수를 살해하는 '플랜 A'와 수용소의 SS 포로들에게 독극물을 먹이는 '플랜 B'를 계획했다. 플랜 A는 실패했고, 플랜 B는 뉘른베르크의 제빵소에서 비소를 빵에 칠하려 했으나, 3천 개의 빵에만 독을 바르는 데 그쳐 실패했다. 나캄은 이스라엘 건국 후 해체되었으며, 이들의 이야기는 여러 책, 영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다. 나캄의 활동은 복수, 정의, 용서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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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캄
지도
기본 정보
이름나캄
다른 이름"다브" (דָּב)
"복수자들" (נוקמים)
활동 시기1945년 ~ 1946년
목표나치 독일의 민간인에 대한 복수
관련 사건빵 작전
독살 계획
배경
관련 사건홀로코스트
제2차 세계 대전
구성
성격유대인 파르티잔 조직
복수 단체
창설자아바 코브너
규모약 50 ~ 60명
활동
작전"빵 작전" (1946년)
목표독일군 포로 수용소
나치 잔당
특징독살 계획
목표에 대한 무차별적 보복
평가
성격논란의 여지가 있는 활동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복수심 반영
영향유대인들의 복수심 표출
이후 유대인 조직에 영향
기타
관련 인물아바 코브너
비텍 켐프너
파시아 라이클린
관련 단체브리하

2. 역사적 배경

홀로코스트 당시,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 및 협력자들은 아인자츠그룹에 의한 집단 총살과 가스실을 이용한 가스 살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1] 가족과 공동체를 모두 잃은 많은 생존자들은 정상적인 삶으로의 복귀를 상상하기 어려웠고, 나치 전범이나 전체 독일 국민에 대한 복수심이 널리 퍼져 있었다.[1]

1942년 후반부터 홀로코스트 소식이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 전해지면서 유대인 신문들은 보복을 요구하는 기사들로 가득 찼고, 바르샤바 봉기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이츠하크 추커만은 "복수에 집착하지 않는 유대인을 몰랐다"고 말할 정도였다.[1]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생존자들은 소수였고, 대부분은 삶과 공동체를 재건하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데 집중했다.

해방 후 빌뉴스의 유대인 파르티잔들; 코브너가 중앙에 서 있다.


1945년, 압바 코브너는 포나리 학살 현장과 마이다네크 집중수용소를 방문하고 아우슈비츠 집중수용소 생존자들을 루마니아에서 만난 후 복수를 결심했다. 그는 주로 전직 유대인 파르티잔들을 포함해 약 50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모집했는데, 그중 몇몇은 소비에트 연방으로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은밀하게 생활하고 무너지지 않는 능력으로 모집된[1] 이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이었고[1] 빌뉴스, 로브노, 첸스토호바, 또는 크라쿠프 출신이었다.[1]

이들은 히브리어로 "복수"를 뜻하는 "나캄(Naka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심판"을 의미하는 דיןhe () 또는 "이스라엘의 피가 복수한다"는 뜻의 דם ישראל נוטרhe ()의 머리글자를 사용하기도 했다.[1]

나캄 조직원들은 나치 독일의 패배가 유대인들을 또 다른 홀로코스트로부터 안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고 믿었다. 코브너는 600만 명의 독일인을 죽이는 비례적인 복수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으며, "그 행위는 충격적이어야 한다. 독일인들은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1]

코브너의 "최면적인" 설득력 있는 말은 생존자들이 느끼고 있던 감정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들은 당시 법률이 홀로코스트와 같은 극단적인 사건을 적절하게 처벌할 수 없으며, 세상의 완전한 도덕적 파탄은 파괴적인 응보적 폭력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고 믿었다.[1]

나캄은 다수의 독일인을 죽이는 A 계획과 미국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수천 명의 SS 포로들에게 독을 먹이는 B 계획을 세웠다.[1] 코브너는 유대인 여단 군인들의 도움을 거절하고, 지하 조직망 개발, 자금 모금, 독일 인프라 침투, 독극물 확보에 나섰다. 이들은 하쇼메르 하차이르 특사로부터 위조된 영국 통화를 받았고, 투기꾼들에게 강제로 기부하게 했으며, 유대인 여단의 동조자들로부터도 자금을 얻었다.[1]

2. 1. 홀로코스트와 유대인 사회의 분노

홀로코스트 당시,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 및 협력자들은 아인자츠그룹에 의한 집단 총살과 가스실을 이용한 가스 살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1] 가족과 공동체를 모두 잃은 많은 생존자들은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워했다. 나치 전범이나 전체 독일 국민에 대한 복수심이 널리 퍼져 있었다.[1]

1942년 후반부터 홀로코스트 소식이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 전해지면서 유대인 신문들은 보복을 요구하는 기사들로 가득 찼다. 바르샤바 봉기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이츠하크 추커만은 나중에 "복수에 집착하지 않는 유대인을 몰랐다"고 말했다.[1] 그러나 매우 소수의 생존자들만이 이러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고, 대신 삶과 공동체를 재건하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데 집중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디나 포라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약 200~250명이 폭력적인 복수를 시도했으며, 나캄이 그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고 추산한다.[1] 모사드가 수행한 암살을 포함하여 이러한 작전으로 최대 1,000~1,500명이 사망했다.[1]

3. 나캄의 조직과 활동

압바 코브너를 중심으로 한 나캄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로 구성된 비밀 조직이었다. 이들은 나치 독일에 대한 복수를 목표로, 독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플랜 A'와 SS 포로를 대상으로 한 '플랜 B'라는 두 가지 계획을 추진했다.

나캄은 지하 조직망을 통해 자금을 모으고, 독일 사회에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했으며, 독극물을 확보하는 등 치밀하게 활동했다. 이들은 하쇼메르 하차이르 특사로부터 위조 화폐를 지원받고, 투기꾼들을 협박하여 자금을 모았으며, 유대인 여단 내 동조자들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플랜 A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플랜 B는 뉘른베르크 인근 랑바서 수용소에서 부분적으로 실행되었다. 나캄 조직원들은 제빵소에 잠입하여 빵에 비소를 발랐으나, 여러 요인으로 인해 목표했던 만큼의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이후 나캄 조직원들은 대부분 이스라엘로 귀환하여 엔 하호레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일부는 유럽에 남아 복수 활동을 계속하려 했다. 그러나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여 결국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으며, 독일인들이 그럴 만한 일을 당했다고 믿었다.

3. 1. 조직 구성과 주요 인물



압바 코브너는 1945년 포나리 학살 현장과 마이다네크 집중수용소를 방문하고 루마니아에서 아우슈비츠 집중수용소 생존자들을 만난 후 복수를 결심했다. 그는 주로 전직 유대인 파르티잔들을 포함해 약 50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모집했는데, 그중 몇몇은 소비에트 연방으로 탈출한 사람들이었다.[1] 이들은 은밀하게 생활하고 무너지지 않는 능력을 갖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로, 빌뉴스, 로브노, 첸스토호바, 크라쿠프 출신이었다.[1]

나캄 조직원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히브리어로 "심판"을 뜻하는 דיןhe()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이스라엘의 피가 복수한다"는 뜻의 דם ישראל נוטרhe ()의 머리글자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는 ("복수")으로 알려졌다.[1]

이들은 나치 독일의 패배가 유대인들을 또 다른 홀로코스트로부터 안전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믿었다. 코브너는 600만 명의 독일인을 살해하는 비례적인 복수만이 유대인의 적들에게 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다.[1] 그는 "그 행위는 충격적이어야 한다. 독일인들은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1]

생존자들에 따르면, 코브너의 "최면적인" 설득력은 그들이 느끼고 있던 감정을 표현한 것이었다. 나캄 조직원들은 당시 법률이 홀로코스트와 같은 극단적인 사건을 적절하게 처벌할 수 없으며, 세상의 완전한 도덕적 파탄은 파괴적인 응보적 폭력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고 믿었다.[1]

나캄 지도부는 독일인 다수를 살해하는 A 계획과, 미국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수천 명의 SS 포로에게 독을 먹이는 B 계획을 세웠다.[1] 코브너는 유대인 여단 군인들로부터 알리야 베트(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령으로의 불법 이민) 조직을 돕고자 했으나, 이미 복수를 결심했기에 거절했다.[1] 나캄은 지하 조직망을 개발하고 즉시 자금 모금, 독일 인프라 침투, 독극물 확보에 나섰다. 이들은 하쇼메르 하차이르 특사로부터 위조된 독일-영국 통화를 대량으로 받았고, 투기꾼들에게 강제로 기부하게 했으며, 유대인 여단의 동조자들로부터도 일부 자금을 얻었다.[1]

3. 2. 복수 계획 (플랜 A와 플랜 B)

나캄은 독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독살 계획(플랜 A)과 SS 포로를 대상으로 한 독살 계획(플랜 B), 두 가지 주요 복수 계획을 세웠다.
플랜 A뉘른베르크 상수도 시스템에 독극물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요세프 하르마츠는 폴란드 출신 강제 이주민으로 위장하여 뉘른베르크 상수도 시설에 잠입,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기술자를 뇌물로 매수해 시립 상수도 회사에 취업시켰다. 이를 통해 상수도 시스템 설계도와 주요 밸브 통제권을 확보하여 독극물 투입 위치를 계획했다. 그러나 아브바 코브너가 독극물을 구하는 데 실패하면서 플랜 A는 실행되지 못했다.
플랜 B는 랑바서 수용소에 수감된 SS 포로들을 독살하는 계획이었다. 나캄 대원들은 수용소와 제빵소에 잠입하여 빵에 비소를 발랐다. 미군 경비병에게는 흰 빵이, 독일 포로들에게는 검은 빵이 제공된다는 점을 이용하여 독일 포로들만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다하우 근처 수용소에서도 비슷한 계획이 준비되었으나, 정보 누출 우려로 실행 직전에 중단되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6명의 나캄 대원이 제빵소에 잠입하여 며칠에 걸쳐 비소를 밀반입하고, 빵 바닥에 비소 혼합물을 발랐다. 그러나 제빵소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계획에 차질이 생겨 약 3천 개의 빵에만 독을 칠 수 있었다. 1946년 4월 23일, ''뉴욕 타임스''는 2,283명의 독일 포로가 중독 증세를 보였다고 보도했지만,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독살 실패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독극물이 얇게 퍼졌거나 포로들이 빵에 독이 든 것을 알고 적게 먹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3. 2. 1. 플랜 A: 뉘른베르크 상수도 독살 미수 사건

요세프 하르마츠는 "마임 멘델레"라는 이름의 폴란드 출신 강제이주민으로 가장하여 뉘른베르크의 상수도 시스템 침투를 시도했다. 나캄이 이 도시를 표적으로 삼은 것은 나치당의 본거지였기 때문이었다. 연합군 폭격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어 주택 부족이 발생했기에 하르마츠는 공모자들을 위한 방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뇌물을 사용하여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크라쿠프 출신 기술자인 빌렉 슈베르츠라이히(빌렉 시나르)를 시립 상수도 회사에 취업시키는 데 성공했다.[1] 슈베르츠라이히는 상수도 시스템 설계도와 주요 밸브의 통제권을 확보했고,[1] 최대한 많은 독일인을 살해할 수 있도록 독극물을 투입할 위치를 계획했다.[1] 파리에서는 파샤 라이히만이 빌나 게토 지하 조직 출신이자 코브너의 미래 아내인 비트카 켐프너를 포함한 나캄 세포를 지휘했다. 라이히만은 독일의 강제이주민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다비드 벤구리온과 대화했지만, 벤구리온은 홀로코스트 복수보다는 이스라엘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선호했다.

3. 2. 2. 플랜 B: 랑바서 수용소 SS 포로 독살 미수 사건

코브너가 충분한 양의 독극물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뉘른베르크의 나캄 조직은 1946년 초에 SS 포로들을 독살하는 계획으로 전환했다.[3] 대부분의 나캄 작전반은 해산되었고, 구성원들은 이주민 수용소로 흩어졌지만, 지도자들은 나중에 계획을 재실행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뉘른베르크와 다하우의 조직은 인근에 대규모 미군 포로 수용소가 있었기 때문에 활동을 유지했다.[4] 이츠하크 랫너는 현지에서 독극물을 구하기 위해 조직에 영입되었다. 그는 1945년 10월 파리에 있는 나캄 본부에 실험실을 설치하고, 맛과 냄새가 없고 지연 효과가 있는 독극물을 찾기 위해 다양한 배합을 실험했다. 랫너는 결국 비소, 접착제 및 기타 첨가제를 혼합하여 빵에 발라 사용할 수 있는 독극물을 만들었고, 고양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혼합물의 치사성이 입증되었다. 그는 무두질 업계에서 일하는 친구들로부터 비소를 얻어 독일로 밀반입했다.[4][3]

뉘른베르크의 (소비자 협동조합 제빵소)


나캄은 뉘른베르크 근처에 있는 랑그바서 수용소(옛 슈탈락 XIII-D)에 집중했다. 이곳에는 주로 전직 SS 장교나 저명한 나치당원 1만 2천 명에서 1만 5천 명이 미국에 의해 수감되어 있었다.[5] 처음에 나캄 대원 두 명이 수용소에 고용되었는데, 한 명은 운전수로, 다른 한 명은 창고 관리원으로 일했다.[5] 랑그바서 수용소의 빵은 뉘른베르크의 Konsum-Genossenschaftsbäckereide (소비자 협동조합 제빵소)라는 단일 제빵소에서 공급되었다. 여러 나치 강제 수용소를 생존한 (Leipke Distel)은 캐나다에 있는 삼촌의 제빵소에서 일하기 위해 비자를 기다리는 폴란드 이주민으로 위장했다. 그는 관리인에게 무료로 일할 수 있도록 부탁했고, 결국 담배, 술, 초콜릿으로 뇌물을 준 후 제빵소 창고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나캄 대원들은 매일 밤 퓌르트의 임대 방에서 만나 독일 포로들에게만 공격을 집중하고 미군 경비병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방법 등 그들의 발견 내용을 논의했다. 하르마츠가 몇몇 대원들을 수용소의 사무직에 배치시키자, 일요일에는 미군 경비병에게는 특별히 흰 빵이 제공되었기 때문에 독일 포로들만 검은 빵을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토요일 밤에 공격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5]

다하우 근처의 수용소와 그곳에 빵을 공급하는 제빵소에 대해서도 비슷한 준비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 생존자인 (Simcha Rotem)이 주도했다. 제빵소에서 일하는 폴란드인들과 친구가 된 로템은 관리인을 술에 취하게 하고 그의 열쇠를 복사한 다음 그가 술이 깨기 전에 열쇠를 돌려주었다.[1] 계획된 공격 며칠 전, 라이히만은 미 육군의 유대인 정보 장교로부터 두 명의 대원이 경찰의 수배 대상이라는 첩보를 받았다. 지시에 따라, 다하우 나캄 대원들은 1946년 4월 11일에 작전을 중단했다. 라이히만은 한 번의 공격 실패가 미국으로 하여금 수용소의 보안을 강화하게 하고 두 번째 공격을 막을 것이라고 우려했다.[5]

이때쯤 뉘른베르크의 Konsum-Genossenschaftsbäckereide에는 여섯 명의 나캄 대원이 일하고 있었다. 식량 절도를 막기 위한 삼엄한 경비를 무력화시키면서, 그들은 며칠에 걸쳐 비소를 밀반입하여 레인코트 아래에 숨기고 마루 바닥 아래에 숨겼다. 실험 결과 비소 혼합물이 고르게 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대원들은 각 빵의 바닥에 비소를 바르기로 결정했다. 4월 13일 토요일, 제빵소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여 나캄 대원들의 작업을 지연시켰고, 세 명은 제빵소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결과 디스텔과 그의 두 명의 공범은 원래 계획했던 1만 4천 개 대신 약 3천 개의 빵에만 독을 칠 시간밖에 없었다. 빵에 독을 친 후, 그들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생존자 예후다 마이몬의 도움을 받아 체코슬로바키아로 도망쳤고, 이탈리아를 거쳐 남부 프랑스로 계속 이동했다.[6][2][1]

1946년 4월 23일, ''뉴욕 타임스''는 2,283명의 독일 포로가 독극물 중독으로 병에 걸렸고, 그중 207명이 입원하여 중태에 빠졌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작전은 결국 알려진 사망자를 발생시키지 않았다.[7] 정보자유법 요청을 통해 미국 국립기록원에서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제빵소에서 발견된 비소의 양은 약 6만 명을 죽일 수 있는 양이었다. 독살이 실패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독극물이 너무 얇게 퍼졌거나 포로들이 빵에 독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많이 먹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2]

3. 3. 이스라엘 건국과 나캄의 해체

약 30명의 전 나캄 요원들이 1946년 6월 23일 '비리야'호에 승선하여 영국 당국의 짧은 구금 후 7월 말에 도착했다. 그들은 코브너의 키부츠인 엔 하호레시(Ein HaHoresh)에서 하가나이스라엘 노동당의 주요 인사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전국을 여행하도록 초청받았다.[1] 코브너와 대다수의 요원들은 복수할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볼렉 벤 야코브가 이끄는 소규모 그룹은 임무를 계속하기 위해 유럽으로 돌아갔다.[2] 1947년 봄, 9명의 다른 나캄 요원들이 이탈하여 노동당 정치인 아바 후시(Abba Hushi)의 도움을 받아 이듬해 유럽으로 돌아왔다.[3]

1940년 엔 하호레시


유럽에 남은 나캄 조직원들은 물류 및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고, 1949년 독일 연방 공화국의 수립은 불법 작전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많은 구성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범죄 생활에 손을 댔고, 전 프랑스 레지스탕스(French Resistance) 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독일 감옥에서 탈출하려고 했다. 대부분은 1950년과 1952년 사이에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벤 야코브는 인터뷰에서 복수를 시도하지 않았다면 "거울 속의 자신을 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고, 여전히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한다고 말했다.[4] 이스라엘에 온 후, 전 나캄 구성원들은 수십 년 동안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거부했고, 1980년대에 들어서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5] 포랫은 코브너가 나캄에 참여함으로써 "정치적 자살"을 저질렀다고 쓰고 있으며, 그 실패를 "기적"이라고 묘사한다.[6] 나캄 조직원들은 후회를 보이지 않았고, 독일인들이 "그럴 만했다"고 말했으며, 용서보다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인정을 원했다.[7]

1999년, 하르마츠와 디스텔은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나캄에서의 역할에 대해 논의했다.[8] 디스텔은 나캄의 행동이 도덕적이었고 유대인들은 "독일인들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었다"고 주장했다.[9] 독일 검찰은 그들에 대해 살인미수(attempted murder) 혐의로 수사를 시작했지만, "이례적인 상황" 때문에 2000년에 예비 조사를 중단했다.[8] 2019년 11월 현재, 나캄 조직원 중 4명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7]

4. 한국 사회의 반응과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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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와 유산

나캄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결성한 복수 단체로, 이들의 활동은 역사적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스라엘 정착 후, 전 나캄 구성원들은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거부했고, 1980년대에 들어서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1] 디나 포랫은 아브라함 코브너가 나캄에 참여함으로써 "정치적 자살"을 저질렀다고 평가하며, 그 실패를 "기적"이라고 묘사한다.[1]

나캄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으며, 독일인들이 "그럴 만했다"고 주장하며 용서보다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인정을 원했다.[1] 1999년, 요세프 하르마츠와 하임 디스텔은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나캄에서의 역할에 대해 논의했다.[2] 디스텔은 나캄의 행동이 도덕적이었고 유대인들은 "독일인들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었다"고 주장했다.[2] 독일 검찰은 그들에 대해 살인미수 혐의로 수사를 시작했지만, "이례적인 상황" 때문에 2000년에 예비 조사를 중단했다.[2] 현재, 그룹 구성원 4명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나캄의 이야기는 문학, 음악,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마이클 바르조하르의 저서, 마이클 엘킨스와 조나단 프리드랜드의 소설, 다니엘 카한 앤드 더 페인티드 버드의 노래, 채널 4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도론 파즈와 요아브 파즈의 영화 등이 나캄을 다루고 있다.

5. 1. 역사적 평가와 논란

마이클 바르조하르의 1969년 저서 《복수자들(The Avengers)》에는 나캄 작전에 대한 초기 언론 보도가 실려 있다. 이 이야기는 마이클 엘킨스가 1971년에 쓴 《분노 속에서 단련되다(Forged in Fury)》에서 허구화된 형태로 다루어졌으며, 조나단 프리드랜드의 소설 《최후의 결산(The Final Reckoning)》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3] 나캄의 이야기는 독일 대중문화에도 스며들었다. 2009년, 독일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클레즈머 밴드인 다니엘 카한 앤드 더 페인티드 버드는 "6백만 명의 독일인들(나캄)"이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코브너가 나캄에서 활동했던 내용을 죽음 직전에 녹음한 테이프를 바탕으로, 채널 4는 《시크릿 히스토리》 시리즈의 일환으로 《홀로코스트 – 복수 계획》이라는 제목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이는 2018년 1월 27일 홀로코스트 기념일(영국)에 처음 방영되었다.[4]

이스라엘의 대테러 전문가 에후드 스프린자크와 이디트 쩨르탈에 따르면, 나캄의 세계관은 세상이 너무 악해서 대규모 재앙을 받을 만하다고 믿었던 메시아주의적 집단이나 컬트와 유사했다. 나캄 대원들은 "극심한 폭력을 경험한 공동체" 출신이었는데, 스프린자크와 쩨르탈에 따르면 이러한 공동체는 때때로 파국적인 폭력을 고려하기도 한다.[1]

디나 포랫은 이 단체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학계 역사가로, 많은 생존자들을 만나 그들의 사적인 문서에 접근했다. 그녀는 이 공격이 실패한 것이 의도적이었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데, 코브너와 다른 지도자들이 이 공격이 유대인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캄 대원들의 성격과 그들이 수행하려고 했던 행동을 조화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을 수 있는 공격을 어떻게 계획할 수 있었는지 묻자, 한 생존자는 "만약 당신이 전쟁 말기에 나와 함께 있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1] 포랫이 2019년에 출판한 나캄에 관한 책 제목은 《나의 것은 복수와 보복이다(Vengeance and Retribution Are Mine)》(히브리어: לי נקם ושילםhe)이며, 이 구절은 신명기에서 나온 것으로, 그녀는 유대인들이 복수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고 믿는다는 것을 나타낸다.[1]

2021년에는 도론 파즈와 요아브 파즈가 감독 및 제작한 영화 《플랜 A》가 이 이야기를 영화화했다.[5][6][7]

5. 2. 현대 사회에 주는 교훈

나캄의 사례는 복수와 용서, 정의와 화해라는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나캄 대원들은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경험을 겪은 후 복수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일부 대원들은 복수의 무익함을 깨닫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테러리즘 전문가 에후드 스프린자크와 아이디스 젠탈은 나캄의 세계관이 세상이 매우 악하기 때문에 대규모 재앙에 합당하다는 신념에 따라 메시아니즘 단체 또는 컬트와 유사한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이들은 무차별적인 살상을 원했으며, 이는 "매우 잔혹한 대우를 받은 공동체" 출신이었기 때문에 때로는 파멸적인 폭력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8]

역사가 디나 포라트는 나캄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아바 코브너와 다른 지도자들이 복수가 유대인에게도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계획을 의도적으로 실패하게 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녀는 복수는 신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는 신념을 피력하며, 나캄의 사례를 통해 복수보다는 용서와 화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8]

나캄 대원들은 자책감을 보이지 않았고, 독일인들은 "그럴 만했다"고 말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용서보다는 인정받기를 원했다.[8] 1999년,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디스텔은 나캄의 행동은 도덕적인 것이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독일인들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었다"고 단언했다.[9]

나캄의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끔찍한 범죄에 대한 복수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복수는 진정한 정의를 가져다주는가? 아니면 또 다른 폭력과 증오를 낳을 뿐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지만, 나캄의 사례는 복수와 용서, 정의와 화해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길을 모색하도록 이끈다.

참조

[1] 뉴스 'An Eye for an Eye': The Jews Who Sought to Poison Six Million Germans to Avenge the Holocaust https://www.haaretz.[...] 2019-11-08
[2] 뉴스 Jewish avengers unapologetic for targeting Nazis after WWII https://www.foxnews.[...] 2016-08-31
[3] 웹사이트 The Jewish avengers who survived the death camps and tracked down their tormentors https://www.theguard[...] 2008-07-25
[4] 웹사이트 Film to show new details of Jewish post-war revenge plot to poison German cities https://www.timesofi[...] 2017-01-20
[5] 웹사이트 Plan A https://www.imdb.com[...] iMDb 2021-08-21
[6] 웹사이트 Plan A movie review & film summary (2022) | Roger Ebert https://www.rogerebe[...]
[7] 뉴스 'Plan A' Review: Seeking Vengeance for the Holocaust https://www.nytimes.[...] 2022-10-13
[8] 뉴스 'An Eye for an Eye': The Jews Who Sought to Poison Six Million Germans to Avenge the Holocaust https://www.haaretz.[...] 2019-11-08
[9] 뉴스 Jewish avengers unapologetic for targeting Nazis after WWII http://www.foxnews.c[...] 2016-08-31
[10] 웹사이트 The Jewish avengers who survived the death camps and tracked down their tormentors https://www.theguard[...] 2008-07-25
[11] 웹사이트 Film to show new details of Jewish post-war revenge plot to poison German cities https://www.timesofi[...] 2017-01-20
[12] 뉴스 Holocaust survivors' stunning revenge plot revealed https://nypost.com/2[...] 2018-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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