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 갤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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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엘 갤러거는 1967년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영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1990년대 브릿팝 시대를 대표하는 밴드 오아시스의 메인 작곡가로서, 밴드의 모든 앨범에 참여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2009년 오아시스 해체 후에는 노엘 갤러거의 하이 플라잉 버즈를 결성하여 솔로 활동을 시작했고, 여러 장의 앨범을 발매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또한 솔직하고 거침없는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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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 갤러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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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노엘 토머스 데이비드 갤러거 |
로마자 표기 | Noel Thomas David Gallagher |
출생일 | 1967년 5월 29일 |
출생지 | 잉글랜드 맨체스터 |
국적 | 영국 아일랜드 |
직업 | 음악가 가수 작곡가 |
배우자 | 메그 매튜스 (1997년 결혼, 2001년 이혼) 사라 맥도날드 (2011년 결혼, 2023년 별거) |
자녀 | 3명 (아나이스 갤러거 포함) |
친척 | 리암 갤러거 (동생) |
음악 활동 | |
장르 | 록 음악 브릿팝 얼터너티브 록 사이키델릭 록 |
악기 | 기타 보컬 키보드 |
활동 기간 | 1991년–현재 |
레이블 | 크리에이션 레코드 빅 브라더 레코딩스 에픽 레코드 소워 매쉬 |
현재 소속 그룹 | 오아시스 노엘 갤러거스 하이 플라잉 버즈 |
공식 웹사이트 | 노엘 갤러거 공식 웹사이트 |
사용 악기 | |
주요 악기 | 깁슨 ES-355 깁슨 레스폴 펜더 텔레캐스터 깁슨 J-200 에피폰 EJ200 에피폰 레스폴 스탠더드 에피폰 쉐라톤 에피폰 리비에라 리켄배커 330 펜더 재즈마스터 |
기타 정보 | |
영향 | 오아시스는 가장 영향력 있는 브릿팝 밴드 중 하나로 평가됨 |
평가 | 뛰어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됨 |
경력 | 솔로 활동 계획을 발표함. |
2. 생애
노엘 갤러거는 맨체스터 근교의 롱사이트에서 아일랜드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72년에 동생 리암 갤러거가 태어난 후, 가족은 버니지로 이사했다.[262] 갤러거 형제는 알코올 중독 아버지에게서 폭력을 당했으며, 이로 인해 노엘과 형 폴은 말더듬증을 앓았다.[262] 1976년, 어머니 페기 갤러거는 남편과 법적 별거를 시작했고, 1982년에 세 아이를 데리고 남편으로부터 떠났다.[11]
1991년, 노엘은 동생 리암이 속한 밴드 더 레인에 합류하며 오아시스 활동을 시작했다. 밴드 내에서 작곡과 리드 기타를 주로 담당하며 밴드의 음악적 방향을 이끌었다. 1995년, 오아시스는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Wonderwall〉, 〈Don't Look Back in Anger〉 등의 히트곡을 냈다. 1990년대 후반, 노엘은 마약 중독과 공황 발작(panic attack)을 겪었으나, 1998년 마약을 끊었다고 밝혔다.[42] 2009년 8월, 노엘은 리암과의 불화로 오아시스를 탈퇴했다.[223]
오아시스 탈퇴 이후, 노엘은 2010년 로열 알버트 홀 자선 공연을 시작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296][297] 노엘 갤러거스 하이 플라잉 버즈라는 이름으로 2011년 첫 솔로 앨범을 발매했고,[224] 이후 2015년, 2017년에도 솔로 앨범을 발매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2024년 8월, 오아시스는 2025년 재결합 월드 투어를 발표했다.[54]
2. 1. 어린 시절 (1967~1991)
노엘 갤러거는 맨체스터 롱사이트에서 아일랜드계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1972년에 막내 리암 갤러거가 태어나자 가족은 버니지의 애쉬번 애비뉴로 이사했다.[262] 노엘은 행복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에게 자주 폭력을 당했으며, 그는 항상 우울했다고 한다. 리암은 그를 "우리 집의 괴짜"라고 표현했다. 아버지의 폭력 때문인지 노엘과 그의 형 폴 갤러거는 말더듬 증세를 가지기도 했다.[262] 장남인 폴은 자기 방을 가졌지만, 노엘은 리암과 같은 방을 써야 했다.[263]페기 갤러거는 1976년 남편과 이혼을 요구했고, 1982년에 세 아이와 함께 토마스 갤러거를 떠났다.[11] 십 대 소년이었던 노엘은 자주 무단 결석을 했으며 경찰과도 문제가 잦았다. 어머니가 학교 식당에서 일하던 시절, 노엘은 점심시간에 어머니를 방문하곤 했다.[264] 그는 15살 때 선생님에게 밀가루 백을 던졌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265]
노엘은 십 대에 자동차 스테레오를 훔치고 주거침입한 적이 있다고 한다.[266] 1980년대에 그는 메인 라인 크루(Maine Line Crew) 등과 같은 축구 팬클럽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267] 13살 때는 가게 물건을 훔친 죄로[263] 6개월 동안 보호관찰을 받았다. 이때 노엘은 아버지가 남겨두고 간 기타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그는 1983년에 더 스미스의 데뷔 싱글 앨범 《This Charming Man》을 듣고 조니 마처럼 되기를 꿈꿨다고 한다.[268]
십 대의 갤러거 형제들은 건축업에 종사하는 아버지를 볼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여전했다. 노엘은 그들이 언제나 다퉜기 때문에 매일 밤 9시까지 일해야 했다고 말했다.[264] 노엘은 아버지 회사를 떠나 브리티쉬 가스라는 건축 회사에서 일하게 되는데, 가스 파이프가 떨어지는 사고로 오른쪽 발을 다친다. 그는 회사 창고에서 육체적 노동을 삼가라는 지시를 받고 그 시간을 기타 연습과 곡을 만드는 데 썼다. 노엘은 〈Live Forever〉, 〈Columbia〉 등을 이 창고에서 썼다고 하며, 그곳을 "대박 창고(The Hit Hut)"라 불렀다.[269] 1980년대 후반, 원룸에 사는 실업 청년이었던 노엘은 대부분 마약, 작곡, 기타로 시간을 보냈다.
1988년 5월, 노엘은 스톤 로지스의 공연에서 인스파이럴 카페츠의 기타리스트 그래함 램버트를 만난다. 둘은 친분을 쌓았고 노엘은 인스파이럴 카페츠 공연의 단골이 되었다. 보컬 스티븐 홀트가 밴드를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노엘은 보컬 오디션에 참가했지만,[270] 탈락하고 2년 동안 밴드의 공연 매니저로 동행한다. 노엘은 비틀즈를 좋아하는 모니터 엔지니어 마크 코일과 친분을 쌓으며 그들의 곡을 분석하곤 했다.
1991년, 노엘은 인스파이럴 카펫츠와 동행한 아메리카 투어에서 돌아와 동생 리암이 더 레인의 리드 보컬이 됐음을 알게 된다. 노엘은 맨체스터의 보드워크에서 그들의 콘서트를 보았으나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다. 노엘은 리암의 밴드 매니저가 되라는 요청을 거절하고,[272] 대신 밴드를 통솔하고 자신만이 밴드의 곡을 쓰겠다는 조건으로 밴드에 가입했다. 밴드 초기 노엘은 밴드와 관련된 대부분의 일을 혼자 맡았으므로 "치프"라는 별명을 얻었다.[273]
2. 2. 오아시스 (1991~2009)
1995년 오아시스의 두 번째 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가 성공을 거두기 전, 싱글 〈Some Might Say〉가 오아시스의 첫 번째 UK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이 앨범은 영국에서 두 번째로 빨리 팔린 앨범이 되었고, UK 앨범 차트 1위와 미국 ''빌보드'' 200 차트에서 4위에 올랐다.[28]오아시스는 〈Wonderwall〉과 〈Don't Look Back in Anger〉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각각 2위와 1위를 차지했다. 원래 노엘은 〈Wonderwall〉의 리드 보컬을 맡고 싶었으나 리암이 자신이 부르겠다고 주장했고, 노엘은 대신 〈Don't Look Back in Anger〉의 리드 보컬을 맡았다.[36] 1995년 노엘은 자선 앨범 《헬프!》에서 조니 뎁과 케이트 모스가 참여한 〈Fade Away〉와 폴 웰러, 폴 매카트니 등이 참여한 비틀즈의 〈Come Together〉를 불렀다.[37]
1996년 6월 NME 기사는 노엘 갤러거가 어떤 그룹을 칭찬하면 그들이 더 많은 명성과 판매량을 얻을 것이라고 언급하며 그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NME는 노엘이 칭찬한 그룹 부 래들리스, 오션 컬러 씬, 캐스트를 "Noelrock"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4]
1996년 5월, 한 신문사가 갤러거의 아버지에게 돈을 줘서 노엘과 리암은 투어 중 아버지를 마주치게 된다. 노엘은 "난 아버지 같은 거 없어.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라고."라며 분노했다.[12] 같은 해, 오아시스는 크네브워스에서 25만여 명의 팬들 앞에서 이틀 동안 공연을 펼쳤다.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와 《Be Here Now》는 오아시스의 팬들이 가장 애타게 기다리던 앨범이었다. 이 앨범의 곡들은 모두 노엘이 작곡했다. 《Be Here Now》는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노엘의 마약 중독과 밴드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앨범이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했다.[40]
이 시기 노엘은 마약 중독으로 인한 공황 발작(panic attack)에 시달렸다. 그는 외로움과 편집증을 겪으며 〈Gas Panic!〉을 썼고, 이 곡은 2000년 앨범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에 실렸다. 그는 1998년 6월 5일부로 마약을 끊었다고 말했다.[42]
1999년 리듬 기타리스트 폴 "본헤드" 아서스와 베이시스트 폴 맥기건이 밴드를 탈퇴했다.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는 갤러거 형제와 드러머 앨런 화이트만으로 녹음되었고, 노엘이 모든 기타 파트를 연주했다. 본헤드의 탈퇴에 대해 노엘은 "폴 매카트니가 비틀즈를 떠나는 것과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46] 녹음 후 갤러거는 젬 아처를 영입했다.
그해 말 앨런 맥기는 크리에이션을 떠났고, 갤러거는 빅 브라더 레코딩스를 설립하여 오아시스의 영국 배급을 맡았다. 에픽 레코드는 밴드의 국제 배급을 계속 담당했다.[48] 앨범 발매 당시 앤디 벨이 베이시스트로 밴드에 합류했다. 2001년 갤러거는 자신의 레이블인 사워 매시 레코드를 설립했다.[49]
2006년 말 갤러거는 젬 아처, 테리 커크브라이드와 함께 영국, 유럽, 일본, 미국, 호주를 순회하며 호평받는 세미 어쿠스틱 공연을 펼쳤다. 2007년 3월 갤러거는 모스크바에서 공연했는데, 이는 오아시스 멤버가 러시아에서 공연한 첫 번째 사례였다.[50] 2007년 초 갤러거는 오아시스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2007 브릿 어워드에서 "음악에 대한 탁월한 공헌" 상을 수상했다.[52]
갤러거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밴드와 함께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을 녹음했다. 2009년 3월, ''더 타임스''는 2007년 3월 27일 로열 알버트 홀에서 열린 노엘 갤러거의 라이브 녹음을 공개했다.
2009년 8월 28일, 갤러거는 동생 리암과의 싸움 끝에 오아시스를 탈퇴했다. 갤러거는 밴드 웹사이트에 탈퇴를 발표하는 성명서를 게시했다.[223]
밴드는 2024년 8월 2025년 재결합 월드 투어를 발표했다.[54]
2. 3. 솔로 활동 (2010~)
오아시스가 아닌 노엘의 첫 번째 콘서트 계획은 2010년 2월 1일에 발표되어[296] 2010년 3월 25일과 26일 런던의 로열 알버트 홀에서 영국의 암환자 청소년들을 위한 공연을 가졌다.[297] 과거 스톤 로지스의, 지금은 프라이멀 스크림의 베이시스트인 매니와[298][299][300] 성가대 크라우치 엔드 페스티벌 코러스(Crouch End Festival Chorus), 그리고 오케스트라 악단 와이어드 스트링즈(Wired Strings)가 이 공연들에서 그와 함께 연주했다.[301] 테리 커크브라이드, 겜 아처,[302][303] 제이 달링턴 또한 그와 함께 했다.[304] 대부분의 셋은 어쿠스틱으로,[305] 다양한 오아시스 앨범 트랙과 B사이드 곡들이 연주되었는데,[306] 이것은 2007년 그가 로얄 알버트 홀에서 가진 공연의 셋과 매우 비슷했다.[307]솔로 활동에 대해서는 노엘 갤러거스 하이 플라잉 버즈 항목도 참조.
- 2010년 3월 25/26일, 런던 로열 알버트 홀에서 Teenage Cancer Trust가 주최하는 자선 콘서트에서 오아시스 탈퇴 후 첫 솔로 공연을 했다. 오아시스 멤버였던 겜 아처와 오아시스 투어에도 참가했던 제이 달링턴 등과 함께 공연했다.
- 2011년 7월 7일 기자회견을 열고 첫 솔로 정규 음반 『노엘 갤러거스 하이 플라잉 버즈』 발매 및 아모르퍼스 앤드로지너스와의 음반 제작을 발표했다.[224] 2011년 10월 17일 음반 발매 후 다음 주부터 투어를 시작했다. 아모르퍼스 앤드로지너스와의 음반 발매는 이후 취소되었다.
- 2015년 3월 2일, 두 번째 솔로 음반 『체이싱 예스터데이』 발매.
- 2017년 11월 24일, 세 번째 음반 『후 빌트 더 문?』(Who Built The Moon) 발매. 일본에서는 같은 달 22일에 선행 발매되었다.
- 2022년 5월 17일, 노엘과 리암 갤러거 형제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바닥에 내던져진 노엘의 기타가 경매에 출품되어[225] 325000GBP(약 51억엔)에 낙찰되었다.[226]
- 2024년 8월 26일, “27.08.24”(2024년 8월 27일), “8am”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영상이 각각 오아시스, 노엘, 리암의 SNS 계정에 게시되었다. 그리고 8월 27일 일본 시간 16시(영국 시간 8시), 재결합 월드 투어 "OASIS TOUR 25" 발표가 있었다.
- 어린 시절 우리가 꾸는 꿈들 (Teenage Cancer Trust를 위한 라이브) (2009)
- 2007년 3월 27일 런던의 로열 알버트 홀에서 열린 Teenage Cancer Trust 주최 어쿠스틱 라이브를 음원화한 것이다. 2009년 3월 15일 영국 「SUNDAY TIMES」지 부록 CD로 무료 배포되었으며, 기간 한정으로 아이튠즈에서도 무료 배포되었다.
3. 사생활
노엘 갤러거는 1997년 메그 매슈스(Meg Matthews)와 결혼하여 2000년 1월에 딸 아나이스(Anaïs)를 낳았지만, 같은 해 9월에 이혼했다. 이후 사라 맥도널드(Sara MacDonald)와 교제를 시작하여 2007년 9월 22일에 아들 도노번(Donovan), 2010년 10월 1일에 아들 소니(Sonny)를 낳았다. 맥도널드와는 2011년 6월 18일에 결혼했으며, 2023년 1월경 이혼했다.[230]
갤러거는 18세에 여자친구 다이앤과 약혼했지만 결혼하지 않고 헤어졌다. 1988년에는 가족 집을 나와 루이즈 존스와 동거하며 그녀를 "소울메이트"라고 칭하고 〈슬라이드 어웨이〉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4년 6월에 헤어졌다.[93] 1997년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메그 매튜스와 결혼했는데, 1994년 레베카 드 루보의 룸메이트를 통해 그녀를 만났고, 당시 레베카 드 루보와 사귀고 있었지만 그녀를 떠나 매튜스와 함께 했다.[94] 2000년 6월 이비자 나이트클럽 스페이스에서 만난 스코틀랜드 홍보 담당자 사라 맥도널드와의 불륜을 이유로 2001년 1월 이혼했다. 이혼 확정 후, 갤러거는 이혼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하기 위해 불륜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95] 이후 맥도널드와 관계를 맺고, 그들의 만남에 대해 "Waiting for the Rapture"를 작곡했다. 2011년 6월 18일 뉴포레스트 국립공원의 라임 우드 호텔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으며, 절친인 러셀 브랜드가 사회를 봤다.[97][98] 2023년 1월, 부부는 11년의 결혼 생활 후 이혼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00]
노엘은 BBC 라디오 2의 러셀 브랜드 쇼(The Russell Brand Show)에 자주 출연했으며, 러셀 브랜드에게 비공식 공동 사회자라고 불리길 원하기도 했다.
그는 가리 마운필드, 리차드 애쉬크로프트(그에게 오아시스 노래 "캐스트 노 섀도우"를 헌정했다), 케미컬 브라더스[102], 존 라이던[103], 스티브 존스[104], 카사비안[105], 앤디 니콜슨[106], 리키 해튼[107], 폴 매카트니[108], 제이미 캐러거, 크리스 마틴, 조니 벅랜드[109], 조니 마[110], 데이먼 알번[111], 모리세이[112], 보노[113], 폴 웰러[114], 조니 뎁(오아시스 노래 "Fade In-Out"에서 슬라이드 기타를 연주했다)[115], 케이트 모스(런던을 방문했을 때 그와 함께 머물렀다) 등과 친구이다.[116][117]
맨체스터 시티 FC의 열렬한 팬인[330] 그는 전(前) 시티 미드필더 조이 바턴의 친구이며,[331]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와도 친구 사이이다.[332]
2001년 그의 개인 자산은 약 5000억원에 육박했으며,[328] 2009년에는 노엘과 리암의 재산을 합쳐 약 1조원이 넘는다고 추산되었다.[329]
2005년 U2의 보노와 기독교적 뿌리와 기도의 방법에 대해 의논했지만,[333] 2006년에는 신이나 인도해주는 힘을 믿지 않는다고 밝혔다.[334] 그의 많은 곡들은 종종 신을 언급하며, 《Dig Out Your Soul》의 모든 트랙들은 '종교적 아마겟돈'이라고 설명했다.[335]
2008년, 제임스 블런트가 가까이 살며 끔찍한 음악을 만들어 낸다는 이유로 이비자(Ibiza)에 있는 집을 팔았다는 소식을 알렸다.[336]
4. 논란
갤러거는 언론에서 논란이 되고 신랄한 발언으로 유명하다. 그는 비 히어 나우 앨범의 "My Big Mouth"라는 노래에서 자신의 실언 경향을 인정하기도 했다.[152] 1996년 브릿 어워드에서 INXS의 가수 마이클 허친스에게 "인기가 시들해진 사람들이 앞으로 인기가 있을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건 안 된다."라고 말해 그를 낙담시키기도 했다.[153][154]
2008년 글래스턴베리 축제에서 미국 힙합 아티스트 제이-Z가 헤드라이너로 공연하는 것에 대해 "글래스턴베리는 기타 음악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힙합은 틀렸다"며 비판했다.[176] 이에 제이-Z는 "힙합은 다른 어떤 음악 형태와 마찬가지로 그만큼의 노력을 기울였다"며 서로의 음악 장르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178] 갤러거는 이후 자신의 발언이 헛소리였다고 인정하며, 제이-Z의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괜찮았다고 말했다.[179] 제이-Z는 갤러거에게 원한을 품지 않으며,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믿을 뿐이라고 밝혔다.[180]
갤러거는 필 콜린스의 음악이 평범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라고 비판하며 자주 비난했다. 그는 콜린스를 "적그리스도"라고 부르기도 했다.[182] 2005년 영국 총선 이전에 그는 필 콜린스가 보수당이 승리하면 영국으로 돌아와 살겠다고 위협하고 있어 노동당 정부를 지지한다고 말했다.[183] 콜린스는 갤러거가 자신을 깎아내리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자신은 보수당 지지자가 아니라고 부인했다.[184][185] 콜린스는 갤러거 형제를 퇴출시키고 싶다며 그들을 "무례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만큼 재능이 없다"고 묘사하기도 했다.[186][187][188]
어린 시절 갤러거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비사교적이고 남을 믿지 않는 어두운 성격으로 변했다. 그는 노동계급 출신이며, 중산계급 사람들을 싫어하는 발언을 자주 한다.
스캔들이 많은 오아시스지만, 노엘이 일으키는 대부분의 문제는 말실수에 불과하며 프로 의식은 매우 높다. 동생 리암 갤러거의 불안정한 목 상태나 만취 상태로 무대에 오르는 것에 대해 자주 비판하며, 이것이 형제싸움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갤러거는 양손잡이이며, 왼손으로 글씨를 쓰고 오른손으로 기타를 친다고 밝혔다.
그는 마약은 홍차를 마시는 것과 같다고 말하거나,[152] 슈퍼마켓 계산대가 혼잡할 때 절도를 했다는 등의 문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1995년에는 블러의 데이먼 알반과 알렉스 제임스가 에이즈에 걸려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말해 사회 문제로까지 발전했고, 이후 사과했다. (이후 해당 내용은 하위 섹션 === 데이먼 알반과 블러 === 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2002년 인터뷰에서 비틀즈에 대해서는 패션이나 사고방식에는 영향을 받았지만, 음악적으로는 롤링 스톤스나 섹스 피스톨스가 더 가깝다고 말했다.
맨체스터 시티 FC의 서포터로 알려져 있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매우 싫어한다.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과 리오넬 메시를 좋아하며,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의견을 자주 내놓는다.
2007년 웨인 루니에게 깁슨 레스폴을 선물하며 맨체스터 시티의 이미지 컬러로 다시 칠하고 "Blue Moon" 가사를 적어 보낸 일화가 있다.
오일 머니로 급성장하는 맨체스터 시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비판에 대해 반박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맨체스터 시티의 유니폼 모델을 맡았다.
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선배 뮤지션들을 존경하며, 동세대 및 후배 뮤지션들과도 친분이 두텁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뮤지션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다음은 그가 언급한 뮤지션들이다.
- U2: 14살 때부터 U2 팬이었으며, 그들을 목표로 삼았다. 좋아하는 앨범은 『액톤 베이비』이며, "원"을 가장 위대한 명곡이라고 평가한다.
- 조니 마: 데뷔 초부터 교류가 있으며, 노엘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 커트 코베인: 자신과 통하는 출생 배경과 왼손잡이, 비틀즈 팬이라는 점 때문에 친밀감을 느꼈다.
- 그린 데이: 그들의 팬들을 싫어하며, "불러바드 오브 브로큰 드림스"가 "원더월"과 유사하다고 항의했다.
- 라디오헤드: 전위성을 평가하면서도 부정적인 면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
- 맘포드 앤 선즈: 그들을 좋아하며, 자신도 저런 곡을 써보고 싶다고 찬사를 보냈다.
- 카사비안, 아틱 몽키즈: 갤러거 형제가 함께 극찬하는 신예 밴드들이다.
- 케미컬 브라더스: "Setting Sun"과 "Let Forever Be"에서 보컬을 담당했다.
- 폴 매카트니: 존경하지만, 최근 작품에 대해서는 혹평했다.
- 더 코럴: 좋은 밴드라고 평가하며, 신작 녹음은 노엘 소유의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 프로디지: 형제로서 앨범에 게스트로 참여했다.
- 폴 웰러: 서로의 앨범에 게스트로 참여하고, 라이브에서 서포터로 등장하는 등 교류하고 있다.
- 트래비스: 데뷔 당시 팬이라고 공언했으며, 오아시스 투어에서 전좌를 맡았다.
- 베이비 샴블스: 피트 도허티가 이끄는 밴드를 오프닝 액트로 기용했지만, 피트가 나타나지 않아 취소되었다.
- 엘튼 존: 노엘의 험담에 대해 "오아시스는 참을 수 없다"고 반발했지만, 최근에는 엘튼의 발언에 동의했다.
- 로비 윌리엄스: 1990년대 중반까지는 사이가 좋았지만, 2000년 브릿 어워드 시상식에서 노엘이 로비를 욕한 것 때문에 관계가 악화되었다.
- 레이디 가가: 음악은 마돈나의 라이트 버전이며, 20년 후 사람들은 그녀의 음악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에밀리 샌데: 할머니를 위한 음악이라고 말했고, 에밀리는 퍽 사인을 하고 있는 노파의 사진으로 반격했다.
- AKB48: 뮤직 스테이션에서 공동 출연했고, 블로그에 "30명 정도의 그룹으로 전원이 13세에서 15세 정도였다"고 적었다.
- 아델: 그녀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으며, 할머니를 위한 음악이라고 말했다.
- 데이비드 보위: 영향을 받은 뮤지션 중 한 명이며, 사망했을 때 애도했다.
- 더 후: 영향을 받은 밴드 중 하나이며, 오아시스 시대에는 마이 제네레이션을 라이브에서 자주 연주했다.
- ABBA: 열렬한 팬이며, 곡뿐만 아니라 퍼포먼스도 평가하고 있다.
그는 무신론자로 여겨지며, 신의 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257]
운전면허는 없지만, 차는 여러 대 소유하고 있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오비완 케노비 역이 결정된 이완 맥그리거와 칼싸움을 하며 놀았다고 한다.[258]
4. 1. 데이먼 알반과 블러
블러와의 브릿팝 전성기였던 1990년대 당시, 맨체스터의 노동계급 출신 오아시스와는 대조적으로 런던의 중산층 출신 예술가 기질의 블러와는 대립이 여러 번 언론에 보도되었다. 싱글 대결에서 패배한 후, 격분한 노엘은 "블러의 데이먼과 알렉스는 에이즈에 걸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욕설을 퍼부었다.[232] 이를 알게 된 어머니에게서 "그런 말을 사용하도록 가르친 기억이 없다"는 질책을 받았고, 에이즈 관련 단체로부터 큰 비난을 받아 사과했다. 현재는 "데이먼 알반은 최고의 아티스트다. 나는 그의 팬이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더 나아가 2011년에는 클럽에서 우연히 데이먼을 만나 술을 나누며 당시 일을 웃어넘겼다고 한다.[232] 2012년 브릿 어워드 애프터 파티에서는 서로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 포옹을 나누었다.[233] 이후에도 여러 번 투샷이 찍혔으며, 2013년에는 라이브에서 공연이 실현되었다. 2017년에는 고릴라즈(Gorillaz) 앨범에 노엘이 게스트로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4. 2. 리암 갤러거

갤러거 형제는 불안정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그들의 다툼 중 하나는 1995년 부틀렉 싱글 "Wibbling Rivalry"로 발매되기도 했다. 후년에는 관계가 안정되었지만, 밴드 초기에는 서로 몸싸움을 벌이는 일이 몇 차례 있었다.[162] 1994년 첫 미국 투어 중 로스앤젤레스 공연에서 리암은 미국인들을 모욕하는 가사로 노래를 바꾸었다. 공연 후 발생한 다툼으로 의자를 던지고 싸움이 벌어져 노엘이 투어를 떠나 라스베이거스로 향했고, 그는 나중에 "'라스베이거스를 향한 두려움과 증오'가 눈앞에 아른거렸다"고 말했다.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녹음 세션 중에는 노엘이 작업 중일 때 리암이 근처 술집 사람들을 스튜디오로 초대하면서 크리켓 배트를 휘두르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162] 1995년 리암이 나타나지 않자 노엘이 ''Later... with Jools Holland''에서 "원더월"을 불렀다.[163]
1996년, 리암이 공연 시작 몇 분 전에 빠져나가자 노엘이 ''MTV 언플러그드'' 공연에서 리드 보컬을 맡았다. 리암은 "목이 아프다"고 주장했지만, 밴드는 나중에 리암이 어쿠스틱 공연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2] 밴드가 공연하는 동안 리암이 발코니에서 야유를 보내고 맥주와 담배로 "목을 달래는" 모습에 노엘은 더욱 화가 났다. 밴드가 대규모 투어를 위해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려던 직전, 리암은 당시 아내인 팻시 켄싯을 위한 집을 찾아야 한다며 공항을 떠났다. 그는 나중에 밴드에 합류하여 마지막 몇몇 공연과 악명 높은 MTV 어워드 공연에 참여했지만, 나머지 공연은 취소되었다.
2000년 바르셀로나 투어 중 알란 화이트의 팔이 마비되어 공연이 취소되었고, 밴드는 대신 저녁 시간을 술 마시며 보냈다. 리암은 노엘의 당시 아내 메그 매튜스에 대해 무례한 발언을 하고 그의 딸 아나이스의 출생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여 노엘이 그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이후 그는 해외 투어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지만, 2000년 7월 8일 더블린에서 열린 오아시스 공연에 복귀했다. 공연 중 두 형제는 "Acquiesce"가 끝나갈 무렵 악수를 나누었다.[164]
리암은 한때 노엘과는 거의 대화하지 않으며 "사실상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마지막 투어에서 그들이 직접 대화한 유일한 시간은 무대 위에서였다.[165] 노엘은 나중에 오아시스 시절 두 사람은 "밴드 밖에서 한 번도 함께 어울린 적이 없다"고 밝혔다.[166]
두 형제의 관계는 2009년 내내 다시 악화되어 결국 8월 28일 파리에서 예정된 오아시스 콘서트가 "그룹 내 다툼"으로 인해 막판에 취소되었다.[167] 같은 날 저녁, 갤러거는 더 이상 리암과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오아시스를 탈퇴했다고 확인했다. 오아시스 웹사이트를 통해 그는 "슬픔과 큰 안도감을 가지고 오늘 밤 오아시스를 탈퇴한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라고 말했다.[168] 8월 29일, 그는 블로그에 더 자세히 설명했다. "나, 내 가족, 친구, 동료들에 대한 언어적, 폭력적 협박의 수준이 참을 수 없게 되었고, 매니지먼트와 밴드 동료들의 지원과 이해 부족으로 인해 망토를 쓰고 새로운 목초지를 찾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169]
2012년 형제와 오아시스 재결합에 대한 질문에 노엘은 "크리스마스에 시티 경기 후 리암에게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냈습니다. 재결합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는 좋을 것입니다. 수백만 명에게는 엄청날 것이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훌륭할 것이지만, 저는 그리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20년 후에 어떤 기분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오아시스에서 거의 20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1년 동안 해왔고, 더 오래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고 싶습니다. 재결합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진지하게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습니다. 리암은 공개적으로 그런 말을 하지만, 그는 공개적으로 많은 말을 합니다.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겠습니다."[170] 노엘이 처음에는 거절했던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원더월"을 공연한 후, 그는 리암의 밴드 비디 아이를 "스트랫퍼드 최고의 오아시스 트리뷰트 밴드"라고 언급했다.[171]
2017년 12월, 호주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리암은 자신과 노엘이 "휴전"을 선언했다고 주장했다.[172] 2018년 2월, 리암은 "술을 몇 잔 마신 후" 휴전이 일어나지 않았고 단지 "자신의 머릿속에 있었던 것"이라고 밝혔다.[173] 2019년 노르웨이-스웨덴 토크쇼 ''Skavlan'' 인터뷰에서 노엘은 리암이 노엘의 아내가 허락하면 오아시스가 재결합할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온라인에 퍼뜨리고 있고, 그 때문에 아내가 많은 욕을 먹고 있다고 말했다.[174] 2024년, 형제는 이듬해부터 시작되는 투어를 위해 오아시스를 재결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75]
- 1995년 “돈트 룩 백 인 앵거”를 누가 부를 것인가를 두고 리암과 다투어 노엘이 2주간 밴드를 떠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 2009년 형제싸움 당시 소중히 여기던 조니 마로부터 받은 기타를 리암에게 부서진 것이 오아시스 해체의 원인 중 하나였다고 한다. 2011년 앨런 카 진행의 TV 프로그램 “Chatty Man”에서 별도 녹화분에서 리암은 “그 자식(노엘)이 내 것을 부쉈다”라고 말했다. 노엘도 동의하며 “리암이 그의 기타를 노엘을 향해 던졌고, 맞지 않고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러나 참을 수 없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5. 정치사상
노엘은 정치적인 관점에 대해 여러 차례 거리낌없이 밝혀왔다. 특히 1997년 다우닝 10가의 토니 블레어를 방문했을 때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356] 그는 1997년 인터뷰에서 블레어를 방문한 이유에 대해 "'인디 커뮤니티'를 대표해서 간 것이 아니"라며, "''''노동당'''' 수상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항상 노동당은 민중을 위한 것이고, 보수당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설명했다.[356]
2007년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평생 실업자였다. 그(노동당)가 당선되었을 때 그것은 나에게 큰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데이빗 카메론은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은 데이빗 카메론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는 마거릿 대처를 "병신"이라고 칭하며, "어떤 사람은 노동 계급을 파괴하려고 한다. 그것은 나를 화나게 한다."라고 말했다.[357]
버락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지지하며, 2008 Dermocratic National Convention에서의 연설을 "spellbinding" (넋을 빼놓는)이라고 표현했다.[358]
1997년, 뉴욕에서 열린 티베트 자유 콘서트에서 5곡을 연주했다.[359] 이로 인해 오아시스는 중국 정부에 의해 '부적합' 판정을 받아 2009년 중국 투어가 취소되었다.[360]
그는 칼을 이용한 범죄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모든 것이 대처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며, 북부 도시들의 텅 빈 집들을 언급하며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말했다.[361]
2010년 영국 총선에서는 해적 복장을 한 후보에게 투표 거부 형식으로 투표했다.[198] 2011년 잉글랜드 폭동에 대해서는 "잉글랜드의 아이들은 트랙슈트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199]
2015년 인터뷰에서는 현 정치인들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며, 데이비드 캐머런은 바보, 에드 밀리밴드는 공산주의자라고 표현했다.[203] 2016년에는 제러미 코빈에 반대하며 "보수당은 취약한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은 열망하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204]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에는 투표하지 않았으며, "우리가 처음부터 투표권을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205] 유럽 연합 잔류를 지지했지만, 결과가 나온 후에는 "합법적인 투표였다. 이제는 끝내고 나아가야 한다."라고 말했다.[205]
COVID-19 범유행 기간인 2020년에는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며, "내가 바이러스에 걸리면, 그것은 내 잘못이지 다른 사람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했다.[206]
2021년에는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을 비판하며 윌리엄 왕세손을 지지했다.[207][208]
2024년에는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의 정치적 발언 경향을 비판했다.[209]
노엘은 노동계급 출신이며, 인터뷰에서 영국의 중산계급 사람들을 싫어하는 발언을 자주 한다.
6. 음악 스타일 및 악기
노엘 갤러거는 오아시스의 주요 작곡가였으며, 밴드 초기에는 대부분의 곡을 작곡했다. 그는 자신의 곡에 대해 자신감을 드러냈으며, "만약 당신이 〈Live Forever〉를 썼다면 당신도 그 곡을 매일 다른 버전으로 부르고 있을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337] 또한 그는 자신의 우상의 음악을 도용했다는 비판에 대해, 존경의 의미로 의도적인 것이라고 밝혔다. 1996년 '기타월드' 인터뷰에서 그는 스스로를 "곡을 쓰는 한명의 팬"이라고 설명하며, "난 내가 최고의 작곡가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야. 보통 난 ''이것들''이 세상 최고의 곡이라고 말한다구."라고 말했다.[338]
노엘은 왼손잡이이지만 기타를 칠 때는 오른손으로 연주한다.[339] 그는 가끔 자신의 가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Don't Look Back in Anger〉와 "Champagne Supernova"의 가사 의미를 잘 모르겠다고 시인했다.
노엘 갤러거는 활동 기간 동안 다양한 종류의 기타, 이펙트 페달, 앰프를 사용했다.[366]
'''일렉트릭 기타'''
종류 | 설명 |
---|---|
에피폰 슈퍼노바(Epiphone Supernova) | 노엘이 직접 디자인한 유니언 잭 무늬의 모델로, 에피폰에서 시그니처로 생산했다. 영국의 기타 회사 Indie Guitar에서 같은 무늬를 IAS 620 Unionjack 라는 이름으로 생산하고 있다. |
에피폰 리비에라(Epiphone Riviera) | 1983년에 일본 마츠모쿠 공업에서 생산한 레드와인색 리비에라를 소유. 1995년 MG투어의 메인기타 및 〈Don't Look Back In Anger〉 뮤직비디오에 사용. |
에피폰 레스폴(Epiphone Les Paul) | 오아시스 데뷔 전 초기에 사용. 〈Supersonic〉 뮤직비디오에 등장. |
에피폰 쉐라톤(Epiphone Sheraton) |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두 종류의 모델을 사용. 하나는 1996년 메인로드 공연에서 스스로 리피니쉬한 유니언 잭 무늬, 다른 하나는 넵워쓰 공연부터 《Be Here Now》투어까지 사용한 선버스트 색상에 맨체스터 시티 FC 마크 스티커가 붙여진 모델. 두 기타 모두 1964년 생산 모델. |
에피폰 카지노(Epiphone Casino) | 《Be Here Now》 투어 공연과 스튜디오에서 사용. |
깁슨 ES-355(Gibson ES-355) | 2002년부터 해체 전까지 거의 모든 공연에서 사용한 메인 기타. 빅스비가 장착된 체리색. 1969 타바코 선버스트 ES-355도 소유. |
깁슨 ES-345(Gibson ES-345) | 체리 ES-355와 달리 빅스비와 "split diamond" 인레이가 없고 "flowerpot" 헤드스톡 인레이가 있음. |
깁슨 ES-335(Gibson ES-335) | 다양한 스튜디오 녹음에 사용. |
깁슨 레스폴(Gibson Les Paul) | 조니 마에게 받은 깁슨 레스폴을 DM투어 메인기타로 사용. 더 후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센드의 소유였던 기타도 포함. 2000년부터 2002년 공연에서 59년 히스토릭 타바코 선버스트를 메인 기타로 사용. |
깁슨 트리니 로페즈(Gibson Trini Lopez) | 〈Lyla〉와 〈Hindu Times〉 뮤직비디오에 사용. |
깁슨 플라잉 브이(Gibson Flying V) | 1997년부터 1998년경 잠시 사용. 〈D'You Know What I Mean?〉 뮤직비디오에 등장. |
깁슨 SG(Gibson SG) | 1996년 메인 로드에서 사용한 커스텀 모델. 최근 조지 해리슨이 사용했던 모델과 비슷한 모델을 입수. |
깁슨 파이어버드(Gibson Firebird) | 〈Morning Glory〉, BBC 프로그램 Top of the Pops의 〈Rock and Roll Star〉무대, 〈Live Forever〉 미국 홍보 비디오 등 많은 녹음에 사용된 1967 깁슨 파이어버드는 후에 매각.[362] 〈Cigarettes and Alcohol〉 뮤직비디오에서 리버스 파이어버드를 볼 수 있음. |
리켄배커 330 메이플글로(Rickenbacker 330 Mapleglo) | 2000년 즈음 사용. 폴 웰러에게서 선물받은 것도 있음. |
펜더 텔레캐스터(Fender Telecaster) | 다양한 펜더 텔레캐스터를 사용. 2000년에는 〈Don't Look Back in Anger〉 연주를 위해 분홍색 페이즐리 텔레캐스터를 사용.[363] 조니 뎁에게 선물한 것도 있음. |
펜더 재규어(Fender Jaguar) |
'''어쿠스틱 기타'''
종류 | 설명 |
---|---|
깁슨 SJ-200 | 주로 사용하는 두 개의 다른 깁슨 SJ-200을 소유. 하나는 넥 조인트 바로 위에 아디다스 스티커가 붙어있고 클래식 깁슨 블록 타입 프렛마커가 있는 것으로 주로 라이브 공연에 사용되며 사운드홀 싱글코일 픽업이 장착. 다른 하나는 Ronnie Wood 시그니쳐 모델. |
깁슨, 마틴 등 빈티지 기타 | 넓은 범위의 빈티지 깁슨과 마틴 기타들을 소유. 《Dig Out Your Soul》에서는 1970 마틴 D-28이 사용. |
타카미네 EF-325SRC, FD-460SC, EG335 12현, NV360S | 스튜디오 혹은 무대 위에서 사용. |
에피폰 EJ-200 | 오아시스 초기 깁슨 SJ-200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사용. 〈Wonderwall〉 뮤직비디오와 폴 웰러와 함께한 〈Talk Tonight〉 라이브 무대에서 볼 수 있음. |
'''앰프'''
종류 | 설명 |
---|---|
마샬 발브스테이트 8080, 오버드라이븐 복스 AC-30 | 오아시스 초기와 《Definitely Maybe》 녹음 기간 동안 사용. |
WEM 도미네이터 25-와트 튜브 콤보 | 오아시스 첫 텔레비전 출연 시 복스 대신 사용. |
100-와트 마샬 JCM-900 헤드, 매칭 4x12 캐비닛 | 앨범 출시 전 투어 시 사용. |
오렌지 오버드라이브 120 헤드, 매칭 4x12 캐비닛 |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앨범 출시와 동시에 사용했다는 자료가 있지만, 사진 상으로는 JCM 900 스택을 사용하고 있음이 확인됨. |
15-와트 펜더 블루스 주니어 | 2000년부터 거의 바뀌지 않고 사용. 한때는 마샬 4x12 캐비닛과 함께 사용. |
클라크 보퍼트 콤보, 클라크 타이거 콤보 | 이 시기 사용했다고 보여지는 앰프. |
빈티지 복스 AC-50 헤드, 오렌지 헤드 | 현재 가장 자주 보이는 장치. |
펜더 베이스맨 헤드, 복스 AC50 헤드 | 《Don't Believe the Truth》 투어 기간 동안 사용. |
2x12 세로용 하이와트 100콤보, 블루스 주니어 | 2008년 사용. |
2x12 하이와트 콤보, 하이와트 앰프 헤드, 매칭 2x12 캐비닛 | 영국 캠던 라운드하우스에서 열린 아이튠즈 페스티발에서 사용. |
'''이펙트'''
- 아이바네즈 TS-9 튜브스크리머 (Ibanez TS-9 Tubescreamer)
- 피트 코니쉬 SS-2 (Pete Cornish SS-2 )
- THC 핫플레이트 파워 감쇠기 (THC Hotplate Power Attenuator)
- 롤랜드 스페이스 에코 (Roland Space Echo)
- 보스 DD-3 디지털 딜레이 (Boss DD-3 Digital Delay)
- 보스 PH-2 슈퍼 페이저 (Boss PH-2 Super Phaser)
- 보스 CS-3 컴프레션/서스테이너 (Boss CS-3 Compression/Sustainer)
- 보스 TU-2 크로마틱 튜너 (Boss TU-2 Chromatic Tuner)
- 라인 6 DL4 딜레이 모델러 (Line 6 DL4 Delay Modeler)
- 휴즈 & 케트너 튜브 로토스피어 (Hughes & Kettner Tube Rotosphere(레슬리 스피커(Leslie speaker)를 모방)
- 보스 AC-2 와 AC-3 어쿠스틱 시뮬레이터 (Boss AC-2 and AC-3 Acoustic Simulators)
- 웨이 휴즈 아쿠아 퍼스 딜레이 (Way Huge Aqua Puss Delay)
- 던롭 크라이베이비 와 (Dunlop Crybaby Wah)
- 다양한 복스 와 페달 (Various Vox Wah pedals)
- 보스 RV-3 와 RV-5 리버브 (Boss RV-3 and RV-5 reverb)
- 보스 PN-2 트레몰로/팬 (Boss PN-2 Tremolo/Pan)
- SIB 에코드라이브 (SIB Echodrive)
- 보스 LS-2 라인 셀렉터 (Boss LS-2 Line Selector)
- 아날로그맨 킹 오브 톤 오버드라이브 (Analogman King Of Tone Overdrive)
- 댄일렉트로 댄-에코 딜레이 (Danelectro Dan-Echo Delay)
- 보스 HR-2 하모니스트 (Boss HR-2 Harmonist)
노엘은 오아시스 활동 기간 동안 상당수의 랙마운트와 함께 엄청난 양의 이펙트 페달을 사용했기 때문에, 완전한 목록을 편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366]

7. 음반 목록
(Teenage Cancer Trust를 위한 라이브)
- 로열 앨버트 홀 라이브
(Teenage Cancer Trust를 위한 라이브)
(Teenage Cancer Trust를 위한 라이브)
(Teenage Cancer Trust를 위한 라이브)
(Teenage Cancer Trust를 위한 라이브)
(더 스모킹 모조 필터스)
(케미컬 브라더스(The Chemical Brothers) 피처링 노엘 갤러거)
(골디(Goldie) 피처링 노엘 갤러거)
(트래비스(Travis) 피처링 노엘 갤러거)
(케미컬 브라더스(The Chemical Brothers) 피처링 노엘 갤러거)
(이언 브라운(Ian Brown) 피처링 노엘 갤러거)
(캐멀팻(CamelPhat) 피처링 노엘 갤러거)
(이멜다 메이(Imelda May)와 노엘 갤러거 피처링 로니 우드(로니 우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