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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센터 9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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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뉴스센터 9시는 1974년 4월 1일부터 1988년 4월 1일까지 NHK에서 방송된 뉴스 프로그램이다. 이소무라 나오토쿠, 키무라 타로 등이 메인 캐스터를 맡았으며, 당시 획기적인 뉴스 전달 방식과 세련된 오프닝으로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프로그램은 정치, 경제, 사회뿐 아니라 문화 및 연예계 소식까지 다루며 뉴스 프로그램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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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센터 9시 - [TV프로그램]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로그램 명칭뉴스센터 9시
장르보도 프로그램
방송 시간평일 21:00 - 21:40
방송 분량40분
방송 기간1974년 4월 1일 - 1988년 4월 1일
방송 국가일본
제작국일본방송협회(NHK)
출연자이소무라 히사노리
가쓰베 료주
스에쓰네 히사시
고하마 고레토
기무라 타로
미야자키 미도리
그 외 (출연자 목록 참조)
오프닝 테마해당 항목 참조

2. 프로그램 역사

1974년 4월 1일, 이소무라 나오토쿠를 초대 앵커로 하여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1] 이소무라는 오른쪽 어깨를 약간 열고 왼쪽 팔꿈치를 책상에 올린 독특한 자세로 뉴스를 전달해 시청자들로부터 다양한 반응을 얻었다. 초기 시청률은 저조했지만, 이소무라의 패션이 여성 잡지에 소개되면서 점차 상승했다.[1]

이소무라는 원고를 읽는 대신 메모지에 적힌 키워드를 보며 "말하듯이" 뉴스를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의 경쾌하고 쉬운 해설과 "잠깐, 멋있지만…"이라는 머리말은 인기를 끌었다.[1]

나시마 시게오의 은퇴 경기 직후 인터뷰, 오노다 히로오의 귀환 다큐멘터리, 다나카 금맥 문제 최초 공개 등 이전 뉴스 프로그램과 차별화된 다양한 시도를 했다.[1]

1982년부터 기무라 타로가 메인 캐스터로, 미야자키 미도리가 프로그램 계약 캐스터로 합류했다. 미야자키는 프로그램 전체 진행을 담당한 첫 여성 캐스터였다.[1] 두 사람은 각자의 전문 분야를 살려 뉴스를 전달했다.

1983년부터 스튜디오를 CT-510으로 옮기고, 방송 타이틀을 "NC9"로 변경했다.[2] 비디오 모니터, 워드 프로세서, 개인용 컴퓨터 등 다양한 장비를 갖춘 "워킹 스튜디오" 방식을 도입했다.[3] 1984년에는 세계 지도와 시계를 설치하는 등 스튜디오 디자인을 변경했다.[4]

1988년 4월 1일, 14년간의 방송을 종료하고, 후속 프로그램으로 『'''NHK 뉴스 TODAY'''』가 시작되었다.[7]

2. 1. 프로그램 탄생 배경 (1966년 ~ 1974년)

1966년 말, 보도국 차장 호리 시시오는 편집부 주간 아키야마 라이키치에게 "야간 와이드 뉴스쇼 신설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호리는 영국 유학 시절 "더 많은 일반 시청자에게 어필하는 텔레비전의 특징을 살린, 알기 쉬운 뉴스쇼를 만들고 싶다"고 느꼈고, "국가도, 조직도, 인간도 뜻이 없으면 멸망한다"는 영국인 기자의 말에 감명받았다.[1]

이에 각 부서에서 35세 전후의 중견들이 모여 검토위원회가 만들어졌고, 1966년부터 1967년까지 10여 차례 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은밀하게 "뉴스센터 303" 프로젝트라고 불렸다.[1]

1967년 9월, 위원회는 "뉴스쇼에 관한 일고찰"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를 토대로 1968년 4월 시작을 목표로 테스트판을 제작했다. 이 테스트판에서 메인 캐스터는 NHK 해설위원실의 오카무라 카즈오, 서브 캐스터는 아나운서 니시자와 쇼헤이가 기용되었다.[1]

그러나 1967년 말, 당시 NHK 회장 마에다 요시노리의 승인을 받지 못해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마에다는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분명히 전달 수단으로서 박력이 있고, 속보성도 뛰어나다. 그러나, 그것에는 그것에 걸맞은 내용의 뉴스를 취재하는 훈련,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1]

호리는 "마에다 씨가 있는 동안 이 프로젝트의 실현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프로젝트 철수를 결단한다.[1]

6년 후인 1973년 9월, 방송 총국 부총국장에 취임한 호리는 밤 9시의 대형 뉴스 프로그램 실현을 위해 뉴스 센터장 반마치 마사키 등에게 지시를 내렸다. 시마 케이지는 "밤 9시대에 새로운 스타일의 뉴스를 하겠다. 텔레비전은 신문을 따라갈 뿐이고, 진짜 텔레비전다운 텔레비전 뉴스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의 기본 구상은 이미 6년 전 "뉴스센터 303" 프로젝트 때 만들어졌다.[1]

1973년 10월 말, 우메무라와 시마는 외신 담당 부장 이소무라 나오토쿠에게 캐스터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호리는 "이소무라가 생각하는 대로 프로그램을 맡겨도 좋다. 편집권도 주겠다."라고 생각했다.[1]

편집 책임 분담은 편집 책임자에 정리부의 타나베 마사오, 사회부 기자였던 카츠베 료쥬, 프로그램부에서 타코 사네유키 등 3명이 맡게 되었다. 최종 책임은 이소무라를 포함한 4명의 회의에서 이소무라가 책임을 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1]

뉴스 센터가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각 국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던 기기를 전용 기기로 확보하는 한편, 보도국 내에 "NC9·프로젝트 팀"을 설치하고, 디렉터·기자를 모아 70명이 독자적인 뉴스 구성과 영상 제작에 도전하게 되었다.[1]

이는 당시 주 전장이었던 "7시 뉴스"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팀 내에는 "7시 뉴스"를 정통으로 성장해 온 보도국원이 있었기 때문에, 시마는 "협력하지 않는 놈은 빼겠다"고 압박했다. 또한, 기자 집단과 디렉터 집단의 융화를 추진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1]

2. 2. 이소무라 나오토쿠 시대 (1974년 ~ 1981년)

1974년 4월 1일,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회색 양복에 폭이 넓은 넥타이를 맨 이소무라가 비춰졌다.[1]

이소무라는 카메라를 향해 오른쪽 어깨를 약간 열고, 왼쪽 팔꿈치를 책상에 올린 자세로 뉴스를 전달했는데, 시청자들로부터 "버릇이 없다", "저 넥타이 멋지다" 등 생방송 중에 다양한 의견이 전화로 쏟아졌다. "무례하다"는 의견도 있었고, 스태프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이소무라는 "시청자들로부터 이런 의견이 있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다.[1]

첫날 시청률은 10%였으나 다음 날부터 6~9% 사이를 맴돌며 3, 4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시청률 상승의 계기는 이소무라의 패션이 여성 잡지에 실린 것이었다. 그 결과, 8월쯤에는 평균 시청률이 8.9%로 상승했다.[1]

이소무라는 원고를 읽지 않고 "말하듯이" 뉴스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원고를 읽는 말은 겉만 맴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4.5cm 정사각형 메모지에 키워드를 적어 보면서 전달했는데, 예를 들어 "정부는 오늘 각의에서 노령 후생 연금의 20% 증액을 결정했습니다"라는 원고를 "어르신 여러분, 정부는 오늘 각의에서 연금을 20% 인상하기로 했습니다"와 같이 전달했다. 이에 대해 뉴스의 출 হিন들은 수준 낮은 원고처럼 들린다고 했다.[1] 그의 경쾌하고 알기 쉬운 뉴스 해설과 "잠깐, 멋있지만…"의 머리말은 인기를 끌었다.[1]

나시마 시게오의 은퇴 경기 직후 NHK에 초청하거나, 즉석 취재나 내레이션 없이 8분 동안 영상과 소리만으로 제작한 "돌아온 오노다 히로오 씨" 다큐멘터리, 1974년 10월 초 미국 NBC가 촬영한 영상을 빌려와 처음으로 공개한 "다나카 금맥 문제" 등 많은 시도를 했다.[1]

이전까지의 정치·경제·사회라는 방송 순서의 의식적인 배제, 구어체 스타일, 뉴스 영상의 가치 향상 등 뉴스 프로그램에 대한 기여는 컸다.[1] 캐스터 중 외국 주재 경험자가 많았고, 서미트 취재도 빠지지 않았다. 코하마 이레토 캐스터 담당 시기까지, 진행 보조로 아나운서도 출연했다.[1]

이전 뉴스 프로그램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던 문화 및 연예계 화제도 다루었는데, 방송 시작 직후인 1974년에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베르사이유의 장미』 공연 대히트 요인을 취재했다.[1]

2. 3. 키무라 타로 시대 (1982년 ~ 1988년)

기무라 타로를 메인으로 영입하고, 파트너로 프로그램 계약 캐스터 미야자키 미도리를 기용했다. 미야자키는 프로그램 전체 진행을 담당하는 첫 여성 캐스터였다. 초기 2년간 기상 캐스터가 부재하여 미야자키가 겸임했지만, 이후 일본 기상 협회 직원에게 그 역할을 넘겼다.[1]

기무라와 미야자키는 각자의 이미지와 특기를 살려 분야별 전달을 분담했다. 예를 들어, 과학 기술 분야는 이과 출신인 미야자키가, 컴퓨터 기술은 기무라가 담당했다.

1983년부터 스튜디오를 CT-510으로 이동하고, 방송 타이틀을 "NC9"로 변경했다.[2] 스튜디오는 "워킹 스튜디오" 방식을 도입하여, 캐스터 뒤에 약 20대의 비디오 모니터를 설치하고, VTR 편집 기기, 워드 프로세서, 개인용 컴퓨터, 팩시밀리, 텔렉스, 전화, 복사기 등을 배치하여 프로그램 제작 준비를 했다.[3]

1984년 4월부터 세트를 전면 개수하여, 왼쪽 벽면에 세계 지도와 세계 각 도시의 시각을 나타내는 5대의 아날로그 시계를 설치했다.[4] 이 스튜디오는 다른 프로그램(『NHK 뉴스 와이드』, 『오늘의 스포츠와 뉴스』, 『선데이 스포츠』 등)에서도 사용되었다.

1988년 4월 1일, 14년간의 방송을 종료했다. 최종회에는 초대 캐스터인 이소무라와 스에토모가 출연했다. 후속 프로그램은 히라노 지로를 앵커맨으로 내세운 『'''NHK 뉴스 TODAY'''』였다. 프로그램 종료 후, 기무라는 NHK를 퇴직하고 후지 TV 전속 뉴스 캐스터로 전향했고, 미야자키는 TV 아사히 등에서 캐스터를 맡았다.

공휴일이나 연말연시에는 10분 정도의 『NHK 뉴스』를 방송했다. 중대한 뉴스가 있을 경우 "'''뉴스센터 특집'''"으로 방송 시간을 확대하거나, 『NHK 특집』 타이틀로 본 프로그램 스튜디오에서 캐스터가 담당하기도 했다.[7]

3. 역대 오프닝 변천

昭和일본어 49년(1974년) 4월 1일부터 6월까지는 검은색 배경에 오후 9시를 나타내는 아날로그 시계가 표시되었다. 시보(피아노의 웅장한 소리 사용)와 함께 스튜디오 부조정실의 생방송 영상으로 전환되어 "뉴스 센터"가 한 글자씩 표시되고, 7세그먼트 디지털 스타일로 "9"자가 크게 확대되어 표시된 후, 그 옆에 "시"자가 표시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날의 헤드라인 사진을 비췄다.

1974년 7월부터 1976년 3월까지는 오노 유지가 작곡한 밝은 BGM으로 변경되었다. 시보 소리가 사라지고, 부조정실 배경이었던 영상이 파란색 배경으로 바뀌었으며, 로고 색상도 흰색에서 크림색으로 변경되었다. 다만, 처음의 검은색 배경에 아날로그 시계, 한 글자씩 나오는 로고 애니메이션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76년 4월부터 1977년 3월까지는 오노 유지가 작곡한 두 번째 BGM이 사용되었지만, 소리가 더욱 선명해지고 일부 멜로디도 변경되는 마이너 체인지가 있었다. 9자를 본뜬 세트 윗부분 빈 공간에 아날로그 시계가 오후 9시를 가리키려 하고 있었다. 9시가 되면 카메라를 뒤로 빼서 세트에 함께 표기되어 있던 "뉴스 센터 9시(9는 세트를 그대로 사용)" 제목을 표시했다. 또한 빈 공간의 시계가 확대되고, 크로마키로 그날의 톱 항목(혹은 주목할 만한 뉴스 헤드라인, 또는 녹화 스튜디오의 풍경) 영상이 비춰졌다.

1977년 4월부터 1978년 3월까지는 사나에 시게아키가 작곡한 음악이 사용되었다. 9자를 본뜬 세트는 유지되었지만 배경이 약간 바뀌었다. 윗부분 빈 공간에 있는 아날로그 시계가 오후 9시를 가리키려 하고 있었다. 9시가 되면 카메라를 뒤로 빼서 세트 전체를 비추고, 텔롭으로 "뉴스 센터 9시" 제목을 표시했다. 또한 빈 공간의 시계가 확대되고, 크로마키로 그날의 톱 항목 영상이 비춰졌다.

1978년 4월부터 1979년 3월까지는 2대, 3대와 마찬가지로 9자를 본뜬 세트를 사용했다. 윗부분 빈 공간에 아날로그 시계가 있고, 오후 9시를 가리키려고 했다. 9시가 되면 텔롭으로 "뉴스 센터 9시"라고 표시되고, 시계가 확대되면 크로마키로 그날의 톱 항목 영상이 비춰졌다.

1979년 4월부터 9월까지는 카시와기 레이코(전자 오르간)의 Jet Pluse 음악이 사용되었다. 검은색 배경에 스캐니메이트를 사용한 애니메이션이 사용되었다. 9시가 되는 시점에서 "NC9" 오렌지색 문자군이 화면 왼쪽 상단의 블랙홀에서 회전하며 등장했다. 최종적으로 디지털 스타일 청색 테두리의 "9"자가 오른쪽으로 크게 비춰진 후, 디지털 스타일 오렌지색 테두리의 "뉴스 센터", "시"가 더해져 "뉴스 센터 9시" 타이틀이 완성되었다. 그 후, 헤드라인 2~3항목에 이어 스튜디오 전경을 배경으로 방송일 텔롭을 내고, 사회자의 인사로 뉴스가 시작되었다.

1979년 10월부터 1982년 3월까지는 텔롭을 활용한 애니메이션으로, 배경은 감색이었다. 아날로그 시계가 9시를 나타내는 모습을 재현하고, 그것을 9자로 감싸듯이 작아지고, 약칭인 "NC9"가 오렌지색에서 흰색으로 표시되었다. 그 후, "NC9" 문자가 잔상을 그리며 화면 중앙으로 일단 쓰러진 후, "뉴스 센터 9시" 문자가 화면 중앙에서 반전되어 등장하고, 흰색에서 오렌지색 문자로 잔상을 그리며 화면 아래에 비춰졌다.

1982년 4월부터 1983년 3월까지는 컴퓨터 그래픽스로, 감색 배경이었다. "NC9" 로고가 앞에서 뒤로 빛을 내면서 등장했다. 그 후, "9"만 남기고 배경이 검은색으로 변하고 오렌지색 입체 로고가 앞에서 나타나, 마지막으로 "뉴스 센터 9시"로 표시되었다.

1983년 4월부터 1988년 4월 1일까지는 기타로가 작곡한 음악이 사용되었다. 컴퓨터 그래픽스로, 정식 프로그램명인 "뉴스 센터 9시" 자막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먼저 "NC9" 문자를 감색 배경, 금색 문자로 비추고, C 부분이 구슬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그 후, 청록색으로 바뀌어 N은 안쪽, 9는 바깥쪽으로 쓰러지고, 9 부분에서 구슬이 확대되고, 물웅덩이 같은 시각을 보인 후, 다시 "NC9" 문자가 줌업되고, 마지막으로 감색 수정 구슬에 "NC9", 바깥쪽에 이것을 거꾸로 한 타이틀이 나왔다.

4. 역대 캐스터

기간메인 캐스터스포츠날씨
월 - 수목・금
1974년 4월 1일1976년 4월 3일이소무라 나오토쿠후쿠시마 유키오모리타 유키코
1976년 4월 5일1977년 3월 30일사이토 케이코
1977년 4월 2일1978년 4월 6일카츠베 료키
스에츠네 히사시
와카츠키 준코
1978년 4월 9일1979년 4월 5일후루카와 사요코
1979년 4월 8일1980년 4월 4일코하마 유이토[8]하사마 마사오노다 카즈미
1980년 4월 7일1981년 4월 2일토모스기 유코
1981년 4월 5일1982년 4월 2일쿠사노 히토시
1982년 4월 5일1983년 4월 1일키무라 타로
미야자키 미도리
(부재)
1983년 4월 3일1984년 3월 29일(부재)
1984년 4월 1일1985년 3월 28일쿠라시마 아츠시
1985년 3월 30일1988년 4월 1일쿠라시마 아츠시야마시타 히로시


5. 평가 및 영향

아사히 방송(ABC)의 사원이었던 오카무라 레이메이일본어는 저서 『텔레비전은 변한다』에서, 민영 방송이야말로 친근한 뉴스가 필요한데 선수를 빼앗겼다는 의미로, 이 프로그램을 보고 민영 방송은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는 취지의 내용을 썼다.[1]

1981년 12월 3일, 대한민국 문화방송(MBC)의 『MBC 뉴스데스크』 개국 20주년 특집에서 후지 텔레비전 『FNN 뉴스 리포트 6:00』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뉴스 프로그램으로 소개되었다. 당시 이 프로그램의 종합 사회자였던 코하마가 인터뷰를 받았으며, 『FNN-』 대표로 인터뷰를 받은 것은 해당 프로그램의 당시 종합 사회자였던 야마카와 치아키였다.[2]

참조

[1] 서적 ニュースへの挑戦
[2] 간행물 NHKトピックス/新年度の放送番組改定 日本放送教育協会 1983-04-01
[3] 보고서 テレビ美術から見る 「キャスターショー」の誕生と発展 ~『ニュースセンター9時』と『ニュースステーション』のスタジオセット分析を中心に~ https://www.nhk.or.j[...] NHK방송문화연구소 2009-11-04
[4] 잡지 報道の時代 角川書店 1984-10
[5] 웹사이트 鎌倉から『6 4最後の日 昭和から平成へ』(2021年5月23日) https://ameblo.jp/ky[...] 川端義明Official Blog 2022-01-19
[6] 웹사이트 NHKクロニクル『NHKモーニングワイド』(1988年12月24日) https://www.nhk.or.j[...] 日本放送協会 2022-01-19
[7] 서적 NHK年鑑'82 NHK出版 1982-09-25
[8] 서적 NHKテレビ美術読本 日本放送出版協会 1981-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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