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니시키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니시키에는 다색 목판화 기법을 사용하여 제작된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의 한 종류이다. 1765년경, 부유한 하이카이 시인들의 그림 달력 교환 모임에서 시작되어, 스즈키 하루노부, 이소다 고류사이 등 우키요에 화가들의 참여로 기술이 발전했다. 아즈마니시키에라는 이름으로 대중화되었으며,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를 거치며 전쟁화, 개화화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으나, 점차 쇠퇴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우키요에 - 화지
    화지는 7세기 무렵 한반도에서 전래된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발전한 종이로, 닥나무 등을 원료로 하여 얇고 질기며 수명이 길고, 서예, 목판화, 문화재 보존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 우키요에 - 소가 형제의 복수
    1193년 소가 스케나리와 소가 토키무네 형제가 아버지의 원수 구도 스케츠네를 살해한 소가 형제의 복수 사건은 가마쿠라 막부 초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사냥 행사에서 발생하여 권력 관계와 무사들의 가치관을 반영하며 의리와 효를 상징하는 설화로 알려졌다.
  • 에도 시대의 문화 - 요미혼
    요미혼은 18세기 중국 백화소설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등장한 소설 장르로, 고전적인 지식을 가진 지식인 계층에 의해 쓰였으며, 우에다 아키나리의 『우게쓰 이야기』, 다키자와 바킨의 『난소 사토미 팔견전』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 에도 시대의 문화 - 구사조시
    구사조시는 에도 시대 일본에서 유행한 그림이 많은 대중 소설로, 초기에는 여성과 어린이에게 인기 있었으나 점차 성인 남성을 위한 풍자적인 내용으로 변화하며 장편화되어 서민 문화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니시키에
니시키에
우타가와 쿠니사다의 가부키 극 배우들
우타가와 쿠니사다의 가부키 극 배우들
다른 이름에도 그림 (江戸絵, Edo-e)
로마자 표기Nishiki-e
일본어 표기錦絵 (にしきえ)
의미비단 그림
특징
기법다색 목판화
제작 시기에도 시대
설명
유래초기에는 붓으로 채색했지만, 후에는 다색 목판화 기법으로 발전
발전1740년대에 벤자라에 (紅摺絵) 등장
1760년대에 스즈키 하루노부 (鈴木春信)에 의해 다색 목판화 니시키에 (錦絵) 완성
소재가부키 배우
유녀
풍경
역사적 사건
참고 자료
외부 링크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시종을 거느린 행진하는 창녀'

2. 역사

1765년 (메이와 2년) 무렵, 부유한 하이카이인들 사이에서 그림 달력 교환 모임이 유행했다. 오쿠보 쿄센, 아베 사토리 등이 주도하여 제작 기술을 개발했다. 당시에는 태음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30일이 있는 큰 달과 29일이 있는 작은 달을 수수께끼 그림처럼 나타낸 인쇄물을 제작하여 동료끼리 교환했다. 약 3년에 한 번 윤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해의 크고 작은 달을 나타낸 달력이 배포되었다. 이들은 더 화려한 인쇄물을 찾기 위해 우키요에 화가인 스즈키 하루노부, 이소다 고류사이 등에게 작화를 의뢰했고, 조각사와 습사도 기술을 향상시켜 여러 색상의 목판화로 발전해 갔다.[1]

1766년 (메이와 3년) 상반기에는 그림 달력 교환 모임의 유행이 지나갔다. 그러나 발행소는 미려한 인쇄물에 착안하여 주문자의 이름 등을 삭제하고, ‘아즈마니시키에’(東錦絵)라고 칭하고 외부에 내놓았다. 이것이 니시키에의 시작이었다. 니시키에라는 명칭은 기존의 ‘베니즈리에’(紅摺絵) 등 우키요에 판화에 비해 비단 직물과 같은 아름다움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사용하는 종이도 더 상질의 호쇼시였으며, 안료에 호분을 넣은 중간색도 사용되어 미묘한 색조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이후 니시키에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했다. 또한 목판에는 양질의 벚꽃, 박이 사용되었다.[1]

스즈키 하루노부1770년 (메이와 7년)에 급사했지만, 그 후 미인화는 기타오 시게마사가 더욱 사실적인 표현으로 발전시켰고, 야쿠샤에(役者絵)에서는 가쓰가와 슌쇼와 이피츠 사이분조 등이 기존의 도리이파(鳥居派)와는 다른 독특한 작품을 그려냈다. 간세이 시대에는 기타가와 우타마로가 미인화로, 도슈사이 샤라쿠가 야쿠샤에와 오쿠비에(大首絵)로 명성을 떨쳤다. 샤라쿠의 야쿠샤에는 우타가와 도요쿠니, 우타가와 구니마사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2]

1806년 (분카 3년), 우타마로가 급사했지만, 대중은 여전히 그의 미인화를 선호했다. 기쿠가와 에이잔은 우타마로 만년풍의 미인화로 인기를 얻었다. 분세이 시대에는 우타가와 구니사다, 게이사이 에이센의 요염한 미인화가 유행했다. 우타가와 구니요시는 ‘수호전’ 시리즈, 무사 그림, 캐리커처 등 다방면으로 활약했으며, 가쓰시카 호쿠사이우타가와 히로시게풍경화를 발전시켰다. 1859년 (안세이 6년) 요코하마 개항 후, 우타가와 사데히데 등은 요코하마 그림을 제작했다.[1]

메이지 시대에는 문명개화에 따라 도요하라 지카노부, 오치아이 요시이쿠, 3대 우타가와 히로시게, 2대 우타가와 구니테루 등이 붉은색을 강조한 개화화(開化絵)를 그렸다. 우타가와 요시쿠의 《도쿄매일신문》(1874년), 쓰키오카 요시토시의 《우편호치신문》(1875년) 등에서 신문 니시키에(新聞錦絵)가 그려졌지만, 몇 년 만에 쇠퇴했다. 1876년 고바야시 기요지카는 광선화(光線画)를 발표하여 이노우에 야스하루, 오구라 류손, 노무라 요시쿠니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국수주의 대두로 1880년에 사라졌다.[2]

웨이하이웨이에서 항복, 미즈노 도시가타의 니시키에


청일 전쟁러일 전쟁을 계기로 고바야시 기요지카, 미즈노 도시가타, 미기타 도시히데 등이 전쟁화(戦争絵)를 그렸으며, 이 시기가 니시키에의 마지막 붐이었다. 야마모토 쇼운은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지금 모습’(今すがた) 시리즈를 발표했지만, 니시키에는 점차 쇠퇴해 갔다.[3]

2. 1. 에도 시대

1765년(메이와 2년) 스즈키 하루노부, 이소다 고류사이 등 우키요에 화가들이 하이카이 시인들의 에고요미 교환 모임에 참여하면서 조각사와 습사의 기술이 향상되어 다색 목판화(니시키에)가 발전했다.

1766년(메이와 3년) 에고요미 교환 모임은 쇠퇴했지만, 판화 제작자들은 '아즈마니시키에'라는 이름으로 니시키에를 판매하며 대중화시켰다. 니시키에는 비단 직물과 같은 아름다움, 고급 종이(호쇼시) 사용, 중간색 표현 등으로 인기를 얻었다.

1770년 스즈키 하루노부 사후, 기타오 시게마사 등은 더 사실적인 미인화를, 가쓰가와 슌쇼와 이피츠 사이분조 등은 독특한 야쿠샤에(배우 그림)를 선보였다. 간세이 시대(1789년 ~ 1801년)에는 기타가와 우타마로 (미인화), 도슈사이 샤라쿠 (야쿠샤에, 오쿠비에)가 명성을 얻었다.

1806년(분카 3년) 우타마로 사후, 기쿠가와 에이잔은 우타마로풍의 미인화로 인기를 얻었다. 분세이 시대에는 우타가와 구니사다, 게이사이 에이센의 요염한 미인화가 유행했다. 우타가와 구니요시는 '수호전' 시리즈, 무사 그림, 캐리커처 등에서 활약했고, 가쓰시카 호쿠사이우타가와 히로시게풍경화를 발전시켰다. 1859년(안세이 6년) 요코하마 개항 후, 우타가와 사데히데 등은 요코하마 그림을 제작했다.

2. 1. 1. 탄생과 초기 발전 (1765년 ~ 1770년)

1765년(메이와 2년) 무렵, 부유한 하이카이 시인들 사이에서 그림 달력(에고요미) 교환 모임이 유행하면서 니시키에가 탄생했다. 오쿠보 쿄센, 아베 사토리 등이 주도하여 기술 발전을 이끌었다. 초기에는 태음력을 기반으로 한 달력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동료들끼리 교환하며 즐기는 문화였다. 스즈키 하루노부, 이소다 고류사이 등 우키요에 화가들이 참여하면서, 조각사와 습사의 기술이 향상되어 다색 목판화로 발전했다.[1]

1766년(메이와 3년)에 그림 달력 교환 모임은 쇠퇴했지만, 판화 제작자들은 주문자의 이름을 삭제하고 '아즈마니시키에'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며 니시키에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니시키에는 비단 직물과 같은 아름다움, 고급 종이(호쇼시) 사용, 중간색 표현 등으로 인기를 얻었다.[1]

2. 1. 2. 전성기 (1770년 ~ 1806년)

1770년 스즈키 하루노부가 사망한 후, 기타오 시게마사 등은 더 사실적인 미인화를 선보였다.[2] 가쓰가와 슌쇼와 이피츠 사이분조 등은 기존의 도리이파와는 다른 독특한 야쿠샤에(배우 그림)를 그렸다.[2] 간세이 시대(1789년 ~ 1801년)에는 기타가와 우타마로가 미인화로, 도슈사이 샤라쿠가 야쿠샤에로 명성을 얻었으며, 오쿠비에(얼굴 중심 그림)가 유행하였다.[2] 1790년(간세이 2년)에는 우키요에 표현 내용을 검열하는 제도가 생겨 출판에 제약이 따랐다.[4]

2. 1. 3. 쇠퇴기 (1806년 ~ 1868년)

1806년(분카 3년), 우타마로가 사망했지만, 대중은 여전히 그의 미인화를 선호했다. 기쿠가와 에이잔은 우타마로 말년의 화풍으로 다소 연약한 여성을 그려 인기를 얻었다.[1] 분세이 시대에는 우타가와 구니사다, 게이사이 에이센 등 당대 유행하던 요염한 미인화가 인기를 끌었다.[1] 한편, 분세이 말기에는 우타가와 구니요시가 '수호전' 등장인물들을 시리즈로 그려 수호전 열풍을 일으켰고, 무사 그림, 미인화, 캐리커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1] 가쓰시카 호쿠사이우타가와 히로시게는 기존의 우키에와는 다른 풍경화를 발전시켰다.[1] 1859년(안세이 6년) 요코하마 개항 이후, 우타가와 사데히데 등은 요코하마 그림을 제작하여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유행시켰다.[1]

2. 2. 메이지 시대 (1868년 ~ 1912년)

메이지 시대에는 문명개화의 영향으로 도요하라 지카노부, 오치아이 요시이쿠, 3대째 우타가와 히로시게, 2대째 우타가와 구니테루 등이 붉은색을 강조한 개화화(開化絵)를 그렸다.[2] 1874년에는 우타가와 요시쿠가 그림을 그린 《도쿄매일신문》, 1875년에는 쓰키오카 요시토시가 그림을 그린 《우편호치신문》 등에서 신문 니시키에(新聞錦絵)가 그려졌지만, 몇 년 만에 쇠퇴했다.[2]

1876년 고바야시 기요지카는 광선화(光線画)를 발표하여 이노우에 야스하루, 오구라 류손, 노무라 요시쿠니에게 영향을 주었지만,[2] 때마침 대두된 국수주의에 의해 1880년대에 사라졌다. 1877년에는 야마자키 도시노부가 세이난 전쟁 관련 그림을 많이 그렸다.

1894년에 발발한 청일 전쟁1904년에 일어난 러일 전쟁을 계기로, 고바야시 기요지카 외에도 미즈노 도시가타, 미기타 도시히데 등이 보도화로서 전쟁화(戦争絵)를 그렸는데, 이 시기가 니시키에의 마지막 붐이었다.[3] 특히 청일 전쟁 기간 동안에는 3,000점의 판화가 제작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으며, 이러한 판화들은 일본군을 찬양하고 중국을 비하하는 경향을 보였다.[3]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야마모토 쇼운은 우타가와파(歌川派)와 다른 미인화 ‘지금 모습’(今すがた) 시리즈를 발표했지만,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지 못하고 니시키에는 점차 쇠퇴해 갔다.

2. 3. 다이쇼 시대 (1912년 ~ 1926년)

다이쇼 시대에 잘 알려진 목판화가로는 야마모토 쇼운(山本昇雲), 오하라 고분(小原古邨), 사카마키 고교(坂巻耕陽) 등이 있다. 전반적으로 니시키에(錦絵) 판화 제작량은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비해 크게 감소했다.

다이쇼 초기에는 야마모토 쇼운이 미인화(美人画)와 아동화(子供絵)를 그렸고, 쓰키오카 고교(月岡耕漁)가 노가쿠에(能楽絵) 등을 그린 것을 비롯하여, 우타가와 구니마쓰(歌川国松) 등이 센자후다(千社札)를 그리거나, 가사이 호우사이(笠井鳳斎)가 다이쇼 대례(大正大礼)의 니시키에를 그렸다. 또한, 1921년(1921년)에는 우다 도시히데(右田年英)가 도시히데 수필 간행회(年英随筆刊行会)를 결성하여, 『도시히데 수필(年英随筆)』이라는 화집을 출판했다. 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간토 대지진(関東大震災)으로 피해를 입어, 그대로 폐업으로 몰리는 판원(版元)이 많았다.[1]

3. 갤러리

참조

[1] 웹사이트 'Parading Courtesan with Attendants' http://www.vam.ac.uk[...] Victoria and Albert Museum 2007-10-14
[2] 웹사이트 News nishikie https://archive.toda[...]
[3] 서적 Impressions of the Front Philadelphia Museum of Art
[4] 웹인용 'Parading Courtesan with Attendants' http://www.vam.ac.uk[...]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2007-10-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