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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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티스는 1078년 비잔틴 제국 황제 미카일 7세를 몰아내고 즉위한 황제이다. 그는 아나톨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황위에 올랐으며,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반란과 음모에 직면했다. 니키포로스는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 재정난, 귀족들의 반란 등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려 했으나,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반란으로 퇴위하고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생애와 통치는 미하일 아탈레이아테스, 미하일 프셀로스, 안나 콤네네 등 동시대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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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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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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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니케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 |
로마자 표기 | Nikēphoros III Botaneiatēs |
그리스어 표기 | Νικηφόρος Βοτανειάτης |
통치 | |
작위 | 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 |
재위 | 1078년 1월 7일 – 1081년 4월 1일 |
대관식 | 1078년 3월 24일 |
이전 통치자 | 미하일 7세 |
다음 통치자 | 알렉시오스 1세 |
배우자 | |
배우자 | 베브데네 마리아 오브 알라니아 |
가문 | |
가문 | 두카스 가문 |
가문 유형 | 가족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002년 |
사망일 | 1081년 (79세) |
사망 장소 | 콘스탄티노폴리스 페리블렙투스 수도원 (현재 튀르키예 이스탄불) |
종교 | |
종교 | 동방 정교회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미하일 보타니아테스 |
2. 사료와 역사적 기록
니키포로스 3세의 생애와 통치에 대한 기록은 여러 역사서를 통해 전해진다.
- '''미하일 아탈레이아테스의 《역사》''': 니키포로스 3세에게 헌정된 이 책은 그의 통치 시기를 다룬 가장 중요한 동시대 자료이다. 아탈레이아테스는 니키포로스 3세의 업적을 강조하며, 지고스 고개 전투 이후의 후방 지휘와 같은 세부적인 내용도 기록했다. 니키포로스 3세로부터 ''베스테스'' 작위를 받는 등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니키포로스 3세에게 우호적인 경향을 보인다.[1] 또한, 만지케르트 전투와 셀주크 제국의 아나톨리아 침공에 대한 비잔틴 제국 일반 대중의 인식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1]
- '''미하일 프셀로스의 《연대기》''': 비잔틴 귀족의 관점을 제공하지만, 사건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이지 않다. 미하일 7세 두카스가 니키포로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당시 사건에 대한 의견을 엿볼 수 있다.
- '''안나 콤네네의 《알렉시아스》''':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딸인 안나 콤네네는 아버지의 관점에서 니키포로스 3세의 통치 말년과 수도원 추방을 기록했다. 따라서 알렉시오스 1세에게 편향된 서술을 보인다.
- '''기타 사료''': 요한 스킬리체스의 《역사 요약》과 《계속》,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더 유망의 《역사 자료》, 노르만 역사가 윌리엄 오브 아풀리아의 기록, 마태 오브 에데사와 미카엘 시리아인의 연대기 등에서도 니키포로스 3세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윌리엄 오브 아풀리아는 외국인의 시각에서 객관적인 평가를 제공한다.
- '''송사''': 중국의 역사서인 『송사』에는 1081년 "불름"국 왕 "멸력의령개살"의 사신이 북송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니키포로스 3세 또는 미하일 7세 두카스의 사신으로 추정된다.
2. 1. 미하일 아탈레이아테스의 《역사》
미하일 아탈레이아테스가 1070년대에 저술하여 니키포로스 3세에게 헌정한 《역사》는 니키포로스 3세의 생애와 통치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기록이다.[1] 아탈레이아테스는 니키포로스 3세의 통치에 대한 주요 동시대 자료이며, 다른 유일한 동시대 자료인 미하일 프셀로스의 《연대기》의 서술에 반박한다.[1] 아탈레이아테스는 니키포로스의 업적을 강조하며, 다른 자료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그의 행동에 대한 기록을 자주 포함하는데, 예를 들어 지고스 고개 전투 이후 11일간의 후방 지휘와 관련하여 여러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1] 아탈레이아테스가 니키포로스를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은 니키포로스가 그를 ''베스테스''의 지위로 승진시키고, 니키포로스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1] 그의 저술은 개인적인 의견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예를 들어 니키포로스의 전임자인 미하일 7세 두카스 황제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1]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 대해 프셀로스는 단락 하나에서 언급하며, 주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 황제가 전략을 더 잘 연구했어야 한다고 논평한다.[1] 그러나 아탈레이아테스는 이 결정적인 전투의 세부 사항, 즉 전투 전후의 사건에 한 장을 할애하고, 자신의 논평과 일화, 그리고 행해진 행동과 실수에 대해서도 언급한다.[1] 아탈레이아테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귀족을 제외한 비잔틴 제국의 일반 대중이 투르크의 아나톨리아 침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1] 이러한 의견은 아탈레이아테스가 미하일 7세를 비난하고 니키포로스를 칭찬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즉, 일반적인 비잔틴인의 시각에서 미하일은 비잔틴 아나톨리아, 즉 아탈레이아테스의 고향을 잃는 데 주로 책임이 있었고, 반면에 니키포로스는 동족인 아나톨리아인으로서 비잔틴 제국의 추가 붕괴를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1]
아탈레이아테스는 일반적으로 니키포로스에 대해 호의적인 기록을 제공하지만, 1063년 오구즈 투르크에게 패배한 것과 같은 그의 몇 가지 실패를 언급하기도 한다.[1]
2. 2. 미하일 프셀로스의 《연대기》
미하일 프셀로스의 《연대기》는 니키포로스 3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프셀로스는 비잔틴 귀족의 관점에서 동시대의 자료를 제공하지만, 사건에 대한 그의 평가는 객관적이지 않다. 그러나 미하일 7세가 니키포로스에게 보낸 편지를 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미하일 7세와 프셀로스의 사건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기 때문에 유용하다.프셀로스는 찬사 챕터에서 미하일 7세의 아나톨리아를 셀주크 투르크에게 잃은 것과 그 시대의 통화 가치 하락을 포함하여 몇 가지 실패를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는 프셀로스가 단락 하나에서 언급하며, 주로 로마노스 4세 황제가 전략을 더 잘 연구했어야 한다고 논평한다.
2. 3. 안나 콤네나의 《알렉시아스》
안나 콤네네의 《알렉시아스》는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티스의 통치 말년과 수도원 추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안나 콤네네는 사건 이후에 태어났고 그녀의 기록 첫 부분은 남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더 유망의 저술에서 파생되었다. 또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황제의 딸이기 때문에 편향되어 있으며, 알렉시오스가 니키포로스 3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과 알렉시오스의 부상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그녀의 서술은 주로 알렉시오스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2. 4. 기타 사료
미하일 아탈레이아테스가 1070년대에 저술하여 니키포로스 3세에게 헌정한 《역사》는 니키포로스 3세의 생애와 통치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기록이다. 아탈레이아테스는 니키포로스 3세의 통치에 대한 주요 동시대 자료이며, 다른 유일한 동시대 자료인 미하일 프셀로스의 《연대기》의 서술에 반박한다.[1] 아탈레이아테스는 니키포로스의 업적을 강조하며, 다른 자료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그의 행동에 대한 기록을 자주 포함하는데, 예를 들어 지고스 고개 전투 이후 11일간의 후방 지휘와 관련하여 여러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1] 아탈레이아테스가 니키포로스를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은 니키포로스가 그를 ''베스테스''의 지위로 승진시키고, 니키포로스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1]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 대해 프셀로스는 단락 하나에서 언급하며 주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 황제가 전략을 더 잘 연구했어야 한다고 논평하는 반면, 아탈레이아테스는 이 결정적인 전투의 세부 사항, 즉 전투 전후의 사건에 한 장을 할애하고, 자신의 논평과 일화, 그리고 행해진 행동과 실수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아탈레이아테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귀족을 제외한 비잔틴 제국의 일반 대중이 투르크의 아나톨리아 침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프셀로스의 《연대기》는 니키포로스의 삶을 이해하는 데 거의 쓸모가 없다. 그는 비잔틴 귀족의 관점에서 동시대의 자료를 제공하지만, 사건에 대한 그의 평가는 객관적이지 않다. 아탈레이아테스는 일반적으로 니키포로스에 대해 호의적인 기록을 제공하지만, 1063년 오구즈 투르크에게 패배한 것과 같은 그의 몇 가지 실패를 언급하기도 한다. 니키포로스 통치의 다른 주요 자료는 안나 콤네네의 《알렉시아스》이지만, 그녀는 사건 이후에 태어났으며, 그녀의 기록의 첫 부분은 일반적으로 남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더 유망의 저술에서 파생되었다. 그녀는 또한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딸이기 때문에 편향되어 있으며, 알렉시오스가 니키포로스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면서 알렉시오스의 부상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니키포로스는 요한 스킬리체스가 그의 《역사 요약》에서 간략하게 언급되는데, 이 책은 811년부터 1057년까지의 사건을 다루지만, 스킬리체스의 《계속》에서 훨씬 더 많이 언급된다. 스킬리체스는 동시대 자료이지만, 그의 《계속》은 알렉시오스 치하에서 쓰여졌으며, 그를 편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더 유망의 《역사 자료》는 아버지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장로와 알렉시오스 자신을 포함한 동시대인들의 증언에 주로 의존한다. 그러나 아탈레이아테스, 프셀로스, 스킬리체스의 저술에도 의존한다.
1090년대에 저술한 노르만 역사가 윌리엄 오브 아풀리아는 1081년 로베르 기스카르의 비잔틴 제국 침공에 대한 그의 기록에서 니키포로스를 언급한다. 그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의 궁정 정치와 거리가 멀었고, 따라서 니키포로스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니키포로스는 또한 마태 오브 에데사와 미카엘 시리아인의 기록에서도 언급되는데, 그들은 사건 발생 몇 세기 후에 연대기를 썼으므로 니키포로스에 대한 처리에서 정치적 음모가 없이 매우 객관적이다.
중국의 정사 『송사』 권490에 따르면, 북송의 원풍 4년 (1081년)에 "불름"국의 왕 "멸력의령개살"의 사신이 북송을 방문하여 공물을 헌상했다. 이를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테스, 혹은 선제 미하일 7세 두카스(미카일 카이사르)의 사신으로 보는 설이 있다.
3. 생애
미카일 7세 두카스 황제 시대에 비잔티움 제국은 셀주크 제국의 침공과 황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 재정 파탄 등으로 혼란을 겪었으며, 각지의 유력자들에 의한 내란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가운데, 아나톨리콘 테마의 장관이었던 니키포로스는 소아시아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1078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퇴위한 미카일 7세를 이어 황제로 즉위했다. 이때 니키포로스는 미카일 7세의 황후였던 마리아 바그라티오니와 결혼했다.
니키포로스 3세는 아들이 없었고, 마리아와의 사이에서도 자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미카일 7세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콘스탄티노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란과 셀주크 제국의 침공 등에 대처하느라 내정을 돌볼 여유가 없었고, 제국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1081년,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가 반란을 일으켜 수도로 진군해 오자, 니키포로스 3세는 퇴위를 강요당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했다.[1]
3. 1. 초기 생애와 가문
니키포로스는 1002년 미카일 보타니아테스와 그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보타니아테스 가문의 일원이었다. 보타니아테스 가문은 아나톨리아 테마 출신의 저명한 군인 가문이었다.[1] 아탈리아테스에 따르면, 니키포로스(니키포로스 3세의 할아버지)와 그의 아버지 미카일은 모두 바실 2세 (976년 ~ 1025년) 치세 동안 조지아와의 전쟁과 불가리아 정복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이 정보는 아탈리아테스가 유일한 출처이다. 아탈리아테스는 또한 보타니아티 가문이 비잔틴 황제 니케포루스 2세 포카스와 포카스 가문과 친족 관계에 있었다고 언급했다. 이는 니키포로스가 이후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프셀로스는 니키포로스 3세를 미카일 7세 두카스 황제가 보낸 편지에서 "포카스"라고 칭하며 이를 뒷받침한다. 크리스티앙 세티파니는 니키포로스 3세의 증조부 미카일이 니케포루스 2세의 익명의 딸과 결혼했다고 추정한다. 알려지지 않은 시점에 니키포로스는 베브데네라는 여성과 결혼했지만, 나중에 미카일 7세의 전 부인이었던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결혼했다. 그는 베브데네와의 사이에서 적어도 한 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보이며, 안나 코메네는 《알렉시아스》에서 그의 손자를 언급한다. 1053년 이전의 니키포로스의 삶에 대해서는, 그가 1048–1053년의 페체네그 반란 동안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코스 황제 휘하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1]3. 2. 초기 군사 경력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티스는 1053년 지고스 고개 전투에서 페체네그족의 반란 당시 퇴각하는 기병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비잔틴 동시대인들과 역사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기병들에게 긴밀한 대형을 유지하도록 명령하여 기마궁수들이 입힐 수 있는 피해를 제한하고, 정찰병을 배치하여 매복을 방지했다. 페체네그족은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격퇴되었고, 11일 동안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아노플에 도착하여 페체네그족은 추격을 포기했다.[1]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고위 궁정 직위인 ''마기스트로스''를 수여했다.[1]1057년, 니키포로스는 미하일 6세 브링가스 황제에 대항한 이삭 1세 콤네노스의 반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페트로 전투에서 이삭의 군대 중 한 부대를 이끌었으며, 프랑크족 용병 란돌프와 결투를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1] 이삭 1세는 1059년 니키포로스를 다뉴브 전선 지휘관으로 임명했고, 그는 1064년까지 그 자리에 있으면서 미래의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1]καὶ|카이grc Ῥωμανὸν τὸν Διογένην ἐρρύσατο|에리사토grc.
1061년 10월, 니키포로스는 테살로니카의 ''두크스''로 복무했다. 아토스 산의 이비론 수도원 관련 문서에 그의 서명과 활동 기록이 남아있다. 이 문서들은 테살로니카 테마에서 발생한 여러 분쟁을 해결하는 그의 역할을 보여준다. 그는 이비론 수도원의 재산 몰수 문제, 라브라 수도원과 토지 소유주 간의 분쟁, 이비론 수도원과 에조바 주교 간의 경계 분쟁, 이비론 수도원과 멜리수르게이온의 ''메토치온'' 사이의 분쟁 등을 해결했다.[1]
1064년 가을, 오구즈 투르크족의 침입으로 니키포로스는 바실 아포카페스와 함께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불가리아 습격과 질병으로 오구즈 투르크족의 군대가 궤멸된 후 탈출했다.[1]
니키포로스는 1060년대 중반 키프로스의 ''두크스''로도 복무했을 가능성이 있다.[1]
3. 3. 이사키오스 1세의 반란 가담
니키포로스는 1057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하일 6세 브링가스(재위 1056년 ~ 1057년)에 대항한 이사키오스 1세 콤네노스의 반란에 가담했다. 이 반란은 미하일 6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민간 관료들을 편애하고 군사 엘리트들을 경멸한 결과였다. ''다이나토이''가 미하일 6세에게서 어떤 선물도 받지 못해 굴욕을 당한 후, 이사키오스 1세는 미하일 6세와 화해하려 했지만, 그로부터 개인적인 모욕을 받게 되어 내전이 발발했다.[1] 이 내전은 스킬리체스, 프셀로스, 아탈리아테스에 의해 언급되었으며, 프셀로스 자신이 미하일 6세에서 이사키오스 1세로 가는 사절단을 이끌었다. 이사키오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기 전에 다른 군사 엘리트들의 지원을 모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페트로 전투가 1057년 8월 20일에 벌어졌고, 이는 이사키오스 1세의 결정적인 승리였으며,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내전 중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 중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이사키오스 1세의 승리는 군사 귀족을 다시 확고하게 통제했고, 1025년 황제 바실 2세가 사망한 이후 처음으로 장군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음을 의미했다. 니키포로스는 전투에서 이사키오스 1세 군대의 한 부대를 이끌었으며, 이는 그가 이사키오스 1세의 핵심 측근이었음을 시사한다. 스킬리체스는 이 전투에서 니키포로스가 미하일 6세의 용병 중 한 명인 프랑크족 란돌프와 결투를 벌였다고 언급한다.[1] 1059년, 이사키오스 1세는 니키포로스를 다뉴브 전선 지휘관으로 임명했고, 그는 1064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직책에 있는 동안 그는 이사키오스 1세의 헝가리 원정에서 미래의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의 생명을 구했다.[1]3. 4. 테살로니카와 안티오키아 두크스 역임
니키포로스는 늦어도 1061년 10월까지 테살로니카의 두크스로 복무했다. 아토스 산의 이비론 수도원에 남아있는 여러 문서에서 그의 활동이 확인된다. 1061년 12월에 작성된 문서에는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의 명령을 받아 테살로니카의 두크스인 니키포로스에게 전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062년 8월에 작성된 두 문서에는 니키포로스의 인장이 남아있고, 그의 서명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세 문서 모두에서 니키포로스는 자신의 이름을 잘못 표기했다.[1]이비론 문서들은 테살로니카 테마에서 발생한 여러 분쟁을 해결하는 니키포로스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비잔틴 정부가 아토스 산의 이비론 수도원 재산과 농노 일부를 몰수한 사건을 조사하여, 바실 2세의 크리소스불에 따라 수도원의 재산과 농노는 세금 면제 대상이므로 정부가 몰수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1062년 2월에는 라브라 수도원과 아이흐말로토우의 테오도로스 간의 토지 분쟁에서 수도원의 편을 들어주었다. 또한 이비론 수도원과 에조바 주교 간의 경계 분쟁에서는 지역 주민들의 지식을 바탕으로 판결을 내렸다. 니키포로스가 판결한 마지막 테살로니카 분쟁은 이비론 수도원과 멜리수르게이온의 메토치온 사이의 분쟁이었는데, 니키포로스는 황후 테오도라의 판결을 재확인했다.
1064년 가을, 오구즈 투르크족이 비잔틴 발칸 반도를 침공했을 때, 니키포로스는 파리스트리온의 아르콘인 바실 아포카페스와 함께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불가리아에서의 습격과 질병으로 오구즈 투르크족 군대가 궤멸된 후, 두 사람은 포로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바르 헤브라이우스에 따르면, 니키포로스는 1060년대 중반 키프로스의 두크스로도 복무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후 안티오키아를 다스렸다고 한다.
3. 5. 루셀 드 바일의 반란 진압
미카엘 7세 황제는 70대 초반의 니키포로스를 은퇴에서 불러내어 쿠로팔라테스이자 아나톨리아 테마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쿠로팔라테스 칭호는 통치 왕조와 관련이 없는 제국의 존경받는 구성원에게 주어졌으며, 공식적으로 그를 고위 장군으로 지정했다. 쿠로팔라테스 칭호는 노빌리시무스보다 낮고, 카이사르 칭호보다 두 계급 낮았다. 니키포로스는 두카스 황제 치하에서 복무했던 명성 있는 지휘관이었고, 로마노스 4세에게 충성심이 없었으며, 주요 전장이 비잔틴 제국의 동부 지역, 즉 니키포로스가 잘 알고 있는 지형이었기 때문에 다시 군대를 이끌도록 소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아나톨리아 테마의 군사 총독직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미카엘 7세는 이후 니키포로스와 카이사르 요한 두카스를 루셀 드 바일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했다. 니키포로스는 요한에게 좀포스 다리를 건너 루셀의 군대와 교전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요한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1074년 좀포스 다리 전투에서 자신의 군대를 패배로 이끌었다. 후위 부대를 지휘하던 니키포로스는 전투에 참전하지 않도록 자신의 군대를 붙잡아 두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그가 정확히 왜 자신의 군대를 투입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전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요한 휘하의 군대가 패배한 후, 니키포로스는 생존자들을 모아 자신의 군대와 함께 아나톨리아 테마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3. 6. 미카일 7세에 대한 반란
미카일 7세 두카스 황제 시대에 비잔틴 제국은 셀주크 제국의 침공, 황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 재정 파탄 등으로 혼란스러웠고, 각지의 유력자들에 의한 내란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나톨리콘 테마의 장관이었던 니키포로스는 소아시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077년 7월 2일/10월에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고, 토착 군대와 튀르크 용병으로 군대를 조직했다.[1]미하일은 니키포로스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유배에서 데려온 황제에게 많은 것을 빚졌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한 달 후인 1077년 11월, 장군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장로)도 미하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니키포로스 3세의 군사적 수완과 명성은 그가 지지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되었고, 미하일의 폭정은 심지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엘리트들 중 일부가 니키포로스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튀르크족은 1078년까지 아나톨리아 깊숙이 침투해 있었으며, 이는 니키포로스의 반란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괴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1078년 1월 7일, 비잔틴 원로원은 니키포로스 3세를 황제로 선포했지만, 그는 여전히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미하일의 아내인 알라니아의 마리아는 미하일이 곧 폐위될 것을 알고 니키포로스 편으로 돌아섰다. 미하일 7세는 대중 봉기 후 퇴위했고 3월 31일에 수도사가 되도록 강요받았다. 사흘 후인 4월 3일,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퇴위한 미카일 7세를 이어 황제로 즉위했다. 이 때 니키포로스는 미카일 7세의 황후였던 마리아 바그라티오니와 결혼했다.
3. 7. 통치
미카일 7세 두카스 시대에 비잔티움 제국은 셀주크 제국의 침공과 황위 계승 다툼, 재정 파탄 등으로 혼란스러웠고, 각 지역 유력자들의 반란도 자주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아나톨리콘 테마의 장군이었던 니키포로스는 소아시아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1078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퇴위한 미카일 7세를 이어 황제로 즉위했다. 이때 니키포로스는 미카일 7세의 황후였던 마리아 바그라티오니와 결혼했다.니키포로스 3세는 아들이 없었고, 마리아와의 사이에서도 자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미카일 7세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콘스탄티노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란과 셀주크 제국의 침공 등에 대처하느라 내정을 돌볼 여유가 없었고, 제국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니키포로스 3세는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반란 전까지 네 번의 반란과 음모에 맞서 싸웠다.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 니케포로스 바실라케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그리고 바울파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1081년,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반란을 일으켜 수도로 진군해 오자, 니키포로스 3세는 퇴위를 강요당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3. 7. 1. 내정 개혁
니키포로스 3세는 황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정당성이 부족했다. 그래서 비잔틴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군대와 지지자들에게는 많은 사례금을 주었는데, 이는 국가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그들에게 많은 직함을 주고, 자선 단체에도 많은 기부를 했다. 미하일 7세가 자신에게 대항하기 위해 교회에서 가져온 금은 장신구도 돌려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니키포로스의 통치 기간 동안 반란과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전 황제들이 겪었던 배신을 막기 위해 기부와 직함을 주는 정책을 펼쳤을 것으로 보인다. 니키포로스가 시행한 많은 개혁들은 제국의 안전보다는 자신의 불안정한 위치를 굳건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니키포로스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 두카스 왕조 시대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체된 모든 빚을 탕감하는 법령을 발표했다.[1] 또한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채권자가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것을 금지하여 갑작스러운 빈곤을 막으려 했고, 빚이 탕감된 후 채권자가 채무자의 재산을 압류하는 것도 금지했다.[1] 아탈리아테스는 이러한 법률이 "빚에 대한 두려움을 없앴다"고 말했으며, 두카스 왕조 시대에 비잔틴 시민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던 문제를 해결했다고 평가했다.[1]
니키포로스는 더 많은 정당성을 얻고 자신을 지지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미하일 7세의 칙령을 취소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의 작은 부두 소유주들에게 권리를 돌려주어 그들이 다시 항구를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아탈리아테스는 니키포로스가 "수도의 축제에 열심히 참여하고 신하들에게 자주 선물을 주었다"고 기록하며, 니키포로스가 단순한 찬탈자가 아니라 정당한 황제로 보이도록 황제의 상징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탈리아테스는 니키포로스의 법전 개혁과 황제로서의 직무 수행에 대한 성실함을 칭찬했다. 니키포로스는 재판을 주재하고, 여가 시간에는 사건을 판단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책을 읽었다. 1079년에는 몇 가지 중요한 법적 문제를 해결했는데, 첫째는 배우자의 정신 이상에 관한 법을 만들었고, 둘째는 새로운 증거가 제시되거나 판사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인지 검토할 수 있도록 선고와 처형 사이의 기간을 30일로 늘렸다. 또한 사적인 하인과 동일한 법적 권리와 보호를 제국의 하인에게도 확대하는 법을 발표했다. 니키포로스의 개혁은 사소하지만, 비잔틴 제국을 괴롭히던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비잔틴 법원의 부패를 바로잡으려는 그의 열망을 보여준다.
3. 7. 2. 반란 진압
미카일 7세 두카스 시대에 비잔티움 제국은 셀주크 제국의 침공과 황위를 둘러싼 내분, 재정 파탄 등으로 혼란을 겪었으며, 각지의 유력자들에 의한 내란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니키포로스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네 번의 반란과 음모에 맞서 싸워야 했다.첫 번째 반란은 니키포로스 3세와 동시에 미카엘 7세의 왕위를 다퉜던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의 반란이었다. 늙은 니케포로스는 알렉시오스 콤네노스를 보내 그를 물리치게 했다. 브리엔니오스가 패배하자 니케포로스 3세는 그를 맹인으로 만들었지만 그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사면을 베풀었다. 두 번째 반란은 브리엔니오스의 지지자인 니케포로스 바실라케스가 1078년 디라키움(오늘날의 두러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지만, 그는 알렉시오스에게 신속하게 패배했고 마찬가지로 맹인이 되었다.
1079년 바랑기안 근위대는 저녁 검사 중에 니케포로스를 암살하려 했지만, 니케포로스가 자신의 수행원에게 명령을 내리고 황실 근위대가 도착하여 바랑기안족을 물리칠 때까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기에 실패했다. 니케포로스는 음모의 주동자들을 외딴 요새로 보내고 나머지를 사면했다.
같은 무렵,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는 황제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니케포로스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다. 니케포로스는 신속하게 사절을 콘스탄티노스에게 보내 그가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묻고 콘스탄티노스 휘하의 병사들이 사면 제안을 통해 그들의 장군을 항복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스가 자신의 부대에 의해 니케포로스에게 넘겨진 후 그는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
1078년 바울파 종파는 브리엔니오스와 바실라케스의 반란으로 인한 혼란과 발칸 반도에서의 그들의 증가하는 인기를 이용하여 니케포로스에 대항하여 일어섰다. 레카 더 바울파는 니케포로스에 대항하여 선동했고, 도브로미르 더 바울파는 메셈브리아에서 레카와 협력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주변 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레카와 도브로미르는 니케포로스가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신속하게 군대를 소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곧 반란을 포기했다. 그들은 니케포로스에게 용서를 구했고, 니케포로스는 자비를 베풀어 그들에게 사면을 베풀고 선물과 칭호를 함께 주었다.
3. 7. 3. 외교 정책
니키포로스 3세는 1078년에 필라레토스 브라차미오스와 그의 봉토 복속을 협상하여 ''두크스'' 칭호를 부여하고 새로 비잔틴 제국에 편입된 속주의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했다. 이러한 재통합은 비잔틴 제국에 이익이 되었는데, 필라레토스가 자신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주변의 비잔틴 마을들을 공격하면서 이 지역의 셀주크 투르크에 대한 비잔틴의 군사적 초점이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성공적인 협상은 보타니아티스 가문의 위신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미카일 7세 두카스는 필라레토스가 부패한 로고테테스 니케포리치츠를 싫어했기 때문에 필라레토스와 유사한 협정을 체결하는 데 실패했었다. 비록 외교적 승리였지만, 필라레토스가 사실상 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니키포로스 3세가 해당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재확립하는 데 얻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양측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이 협상에서 얻은 유일한 실질적인 성과는 니키포로스 3세가 전임 황제가 할 수 없었던 일을 달성했기 때문에 정당성을 얻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탈리아테스가 이를 니키포로스 3세의 성공 중 하나로 언급한 것은 주로 그의 정당성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뒷받침한다.3. 8. 퇴위와 죽음
1081년, 알렉시우스 콤네노스(후의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가 반란을 일으켜 수도로 진군해 오자, 니키포로스 3세는 퇴위를 강요당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했다.[1]4. 북송과의 관계
북송 원풍 4년(1081년) 중국의 정사 『송사』 권490에 따르면, "불름"국의 왕 "멸력의령개살"의 사신이 북송을 방문하여 공물을 헌상했다.[1] 이를 니케포로스 3세 혹은 선제 미카일 7세의 사신으로 보는 설이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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