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교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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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구교도소는 1908년 대구부에 대구감옥으로 개청하여 1923년 대구형무소로 개칭되었으며, 196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일제강점기 시기 저항 시인 이육사가 투옥되었던 곳으로, 한국 전쟁 직후에는 재소자 학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현재는 달성군 하빈면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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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도소 | |
---|---|
교도소 정보 | |
이름 | 대구교도소 |
설치년도 | 1908년 |
국가 | 대한민국 |
주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하빈로 204 (감문리) |
상급기관 | 대구지방교정청 |
2. 역사
1908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전에 대구부에 '''대구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1910년에 중구 삼덕동(경북대학교 치과병원 ~ 일신학원 사이)으로 이전했으며, 1923년에는 '''대구형무소'''로 개칭되었다.
일제강점기 시기 저항시인인 이육사는 의열단에 소속되어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 등의 의열 투쟁에 참여하였으며,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의 필명 이육사는 당시 대구 형무소에서 그가 받은 수인번호 264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그대로 형무소로 사용되다가, 1961년에 대구교도소로 개칭되었다.
- 1908. 07. 16. 대구감옥 개청(경상감영)
- 1910. 04. 기관 이전(대구 삼덕동 102번지)
- 1923. 05. 05. 대구형무소 명칭변경
- 1961. 12. 23. 대구교도소 명칭변경
- 1971. 06. 01.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 472로 이전
- 2023. 11. 28. 현 위치로 이전(달성군 하빈면 감문리)
- 2024. 05. 02. 감문리 청사 개청식
2. 1. 대한제국 시기
1908년 대구부에 '''대구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1910년에 중구 삼덕동(경북대학교 치과병원 ~ 일신학원 사이)으로 이전했으며, 1923년에는 '''대구형무소'''로 개칭되었다.2. 2. 일제강점기
1908년 대구부에 '''대구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1910년 중구 삼덕동(경북대학교 치과병원 ~ 일신학원 사이)으로 이전했으며, 1923년 '''대구형무소'''로 개칭되었다.일제강점기 시기 저항시인인 이육사는 의열단에 소속되어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 등의 의열 투쟁에 참여하였으며,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의 필명 이육사는 당시 대구 형무소에서 그가 받은 수인번호 264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 3. 해방 이후
1961년에 대구교도소로 개칭되었다. 1971년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로 이전하였다. 2023년 달성군 하빈면 감문리로 이전하였고, 2024년 새 청사 개청식을 가졌다.3. 사건
한국 전쟁 직후 대구형무소 재소자 중 총 2,574명이 학살되었다는 주장이 있다.[1] 희생자 중에는 정치범뿐만 아니라 25일 구류 처분을 받은 경미한 범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1] 이들은 전쟁 발발 후 부산구치소로 이감되었다가 살해되었다.[1]
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 정책과 전시 상황의 혼란 속에서 자행된 국가폭력의 대표적인 사례로,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육사는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으로, 의열단에 소속되어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 등의 의열 투쟁에 참여하였다.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그의 필명 '이육사'는 당시 대구 형무소에서 그가 받은 수인번호 264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3. 1.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한국 전쟁 직후 대구형무소 재소자 중 총 2,574명이 학살되었다는 주장이 있다.[1] 희생자 중에는 정치범뿐만 아니라 25일 구류 처분을 받은 경미한 범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1] 이들은 전쟁 발발 후 부산구치소로 이감되었다가 살해되었다.[1]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 정책과 전시 상황의 혼란 속에서 자행된 국가폭력의 대표적인 사례로,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3. 2. 이육사 투옥
이육사는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으로, 의열단에 소속되어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 등의 의열 투쟁에 참여하였다.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그의 필명 '이육사'는 당시 대구 형무소에서 그가 받은 수인번호 264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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