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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럼 스티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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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더럼 스티븐스는 1851년 워싱턴 D.C.에서 태어난 인물로, 변호사, 외교관, 그리고 대한제국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1873년 외교관 경력을 시작하여 일본 공사관 서기관, 일본 외무성 영어 전문 촉탁, 그리고 대한제국 외부 고문을 역임했다. 특히, 대한제국 고문으로 활동하며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여, 재미 한인 사회의 반발을 샀다.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제국 관련 발언 후 전명운과 장인환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은 재미 한인 사회의 통합 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에서는 그를 '배신자'로, 암살범들을 '애국자'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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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럼 스티븐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더럼 스티븐스
로마자 표기Durham White Stevens
한자 표기수지분 (須知芬) 또는 수지분 (須知分)
출생일1851년 2월 1일
출생지워싱턴 D.C., 미국
사망일1908년 3월 25일
사망지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미국
사망 원인암살 (총격 사망)
국적미국
직업외교관
1903년 사진 속 스티븐스
1903년 사진
학력
학교오벌린 칼리지
컬럼비안 대학교
하워드 대학교
경력
직책대한제국 외부 고문
주일 미국 공사관 서기관
훈장
훈장훈삼등 욱일중수장
훈이등 서보장
훈이등 욱일중광장
훈일등 서보장

2. 어린 시절

1851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태어났다. 오벌린 대학교를 1871년에 졸업하고, 조지 워싱턴 대학교하워드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873년 워싱턴 D.C.에서 사법시험을 통과했다.[55]

3. 외교관 경력

1873년 10월,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이 더럼 스티븐스를 주일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하면서 외교관 경력이 시작되었다.[55][56] 스티븐스는 당시 주일 공사였던 존 빙엄 아래에서 일했다.[56]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던 그는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 직책을 흔쾌히 수락했다.[57] 1878년부터 1879년까지는 존 빙엄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임시대리공사를 역임했다.[56][58]

3. 1. 일본 외무성 시절

1883년 11월, 스티븐스는 전임 상관 빙엄의 추천으로 워싱턴 D.C. 주재 일본 공사관의 영어 전문 촉탁으로 채용되었다.[59] 1884년 일본 외무성으로 근무지를 옮겼다.[59] 1884년에서 1885년 사이 겨울,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을 따라 조선에 들어와 한성조약 협상을 보조했다.[56] 이 공로로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훈삼등 욱일중수장을 받았다.[56]

1885년부터 1887년까지 스티븐스는 도쿄 회의에서 일본의 불평등 조약 개정 작업에 참여했다.[60] 이후 주미 일본 공사 무쓰 무네미쓰 아래에서 일하며, 일본과 멕시코 간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을 보조했다.[60] 이 조약은 일본이 독립국으로서 주권을 행사할 권리를 온전히 인정한 첫 조약이었다.

청일 전쟁 발발 직후, 스티븐스는 《North American Review》》에 기고문을 올렸다.[61] 그는 청나라의 부패한 보수주의가 조선의 발전을 막고 있으며, 청나라의 영향력을 줄이고 일본의 영향력을 키우면 조선에서 사회적 및 경제적 개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했다.[61] 이러한 주장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궤변으로 평가된다. 스티븐스는 전쟁 중 보여준 공로로 훈이등 서보장을 받았다.[38]

1901년1902년, 스티븐스는 일본을 대표해 하와이 준주를 방문했다.[62]

3. 2. 대한제국 고문 시절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 협약이 체결된 후, 일본 정부는 주한 미국 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의 추천을 근거로 대한제국 정부에 스티븐스를 외부 고문으로 임명하도록 요구했다.[62] 그해 11월, 스티븐스는 대한제국의 외부 고문으로 임명되었다.[63][13][39]

스티븐스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당시 미국에서 일던 반일 정서를 달래고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알리는 임무를 맡았다.[63]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그는 공식적으로는 한국 정부에 고용되었지만, 일본의 선전 활동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수만 달러를 계속 받고 있다는 말이 미국인들 사이에서 나돌았다.[43] 또한 2009년 한국 신문에 따르면, 스티븐스는 1908년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미국 내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한국 지배의 정당성을 알리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44] 일본 정부는 스티븐스에게 외교상 중요한 안건은 모두 주한 일본 공사와 협의해 처리하고, 대한제국의 외교상 중요 사항은 감추지 말고 신속하게 일본 공사에게 알릴 것 등을 요구했다.[64]

알렌은 또한 한국인들의 하와이 이주에 관심이 있던 하와이 설탕 농장주 협회 회장 F. M. 스완지에게 스티븐스를 추천했다.[65][41] 일본 정부는 스티븐스가 한국인들의 하와이 이주를 막으려는 일본 정부의 정책을 지지해 줄 것을 바랐지만, 스티븐스는 한국인들의 하와이 이주를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스완지는 1905년 중반에 도쿄에서 스티븐스와 몇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스완지의 노력은 실패했다.[65][14][41] 이후 그해 후반에 스티븐스는 일본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일본의 위엄에 영향을 주지 않는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일본은 미국이 일본인 이민자들의 입국을 제한하는 법률을 받아들일 것이고 일본인들의 하와이 이주를 막는 것 또한 찬성할 것이라는 입장문을 발표했고, 대신 일본 정부는 이민자들을 한반도나 만주 지역에 정착시키는 것을 바랐다고 밝혔다.[65][15][42]

1906년 초, 스티븐스는 통감부 농상공무총장 기우치 주시로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를 두고 내기를 했는데, 기우치는 3년을 예상했고 스티븐스는 5년을 예상했다.[66][17][45] 1910년 중반 한국 병합 조약이 조인되었으므로, 스티븐스의 예측이 더 정확했다.[45]

4. 암살

1908년 3월, 더럼 스티븐스는 미국을 방문하여 재미 한인들의 분노를 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과의 인터뷰에서 대한제국이 독립할 능력이 없으며, 일본의 통치가 한국 백성들에게 유익하다는 발언을 하였다.[68][69][70]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전명운장인환은 스티븐스에게 접근하여 암살을 시도하였다. 전명운은 권총 발사에 실패하고 스티븐스에게 달려들어 폭행했고, 장인환은 스티븐스에게 총을 쏴 두 발을 맞혔다.[71]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3월 25일 상처의 염증으로 사망했다.[72]

4. 1. 암살 배경

1908년 3월 21일,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과의 인터뷰에서 대한제국은 독립국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68][69][70] 그는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 통치가 한국인에게 유익하며, 이는 미국이 필리핀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또한, 대한제국의 새 정부 조직 후 정치에서 소외된 자들만이 일본을 반대하며, 농민들은 이전 정부의 학정에서 벗어나 일본인을 환영한다고 덧붙였다.[68][69][70]

이러한 발언은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 등 항일 단체 회원들의 분노를 일으켰다.[69] 이들은 회의를 통해 스티븐스에게 항의하고 신문 기사 정정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3월 22일, 이들은 페어몬트 호텔에 머물던 스티븐스를 찾아갔으나, 스티븐스는 오히려 대한제국 황제가 어리석고, 관리들은 백성을 학대하며 재산을 빼앗고, 백성들은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68]

이에 격분한 재미한인들은 스티븐스를 폭행했고, 이후 전명운장인환은 스티븐스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68]

4. 2. 암살 과정

1908년 3월 22일, 스티븐스는 페어몬트 호텔에서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 등 한인 단체 대표들에게 항의를 받고 폭행당했다.[68] 이들은 스티븐스에게 대한제국에 관한 신문 기사를 정정하라고 요구했지만, 스티븐스는 "대한제국은 황제가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가 아니면 러시아에게 빼앗길 것이다"라고 말했다.[68] 이에 격분한 대표들은 스티븐스를 폭행했다.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전명운장인환이 스티븐스를 암살하려 했다. 전명운은 권총 발사에 실패하고 스티븐스를 폭행했고, 장인환이 스티븐스에게 총을 쏴 두 발을 맞혔다.[71]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3월 25일 상처의 염증으로 사망했다.[72]

4. 3. 암살 이후

스티븐스는 세인트프랜시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3월 25일에 사망했다. 스티븐스가 맞은 총알 가운데 한 발은 허파를 관통했고 한 발은 서혜부에 박혔다. 처음에는 의사들이 스티븐스가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3월 25일 아침 스티븐스의 상태는 악화되어 수술을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했다.[72] 사망 당시 그의 곁에는 일본 영사 초조 고이케가 있었다.[72] 장례식은 워싱턴 D.C.의 세인트존스 성공회 성당에서 거행되었고, 미국의 국무장관 엘리후 루트가 상여를 멨다.[72]

전명운장인환은 스티븐스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두 사람이 암살을 공모했다는 증거는 충분하지 않았고 전명운은 곧 무혐의로 풀려났다.[69] 한인 단체들은 장인환을 변호하고자 변호사 세 명을 선임했고, 그 가운데 한 명인 네이선 코플런은 보수를 받지 않고 변호하기로 했다.[71] 코플런은 재판에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애국적 정신병 이론을 근거로 장인환은 일종의 정신 질환 상태였기 때문에 무죄라고 주장했다.[71] 장인환은 1908년 12월 23일에 2급 살인죄를 선고받았다.[74]

스티븐스의 암살을 계기로 재미한인 사회에서 여러 단체들의 통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그 결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가 통합돼 1909년 2월 국민회로 발전했고, 1910년 2월에 대한인국민회가 대동보국회와 결합해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68][75]

5. 암살에 대한 반응

스티븐스의 암살 소식은 일본 외교계와 대한제국의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슬픔으로 전해졌다. 당시 주일 미국 대사였던 토머스 J. 오브라이언은 모두가 매우 슬퍼하고 있으며 스티븐스는 참되고 유능한 벗이었다고 말했다.[73] 예일 대학교 교수 조지 트럼벌 래드는 《뉴욕 타임스》에 기고문을 올려 스티븐스의 암살을 비열하고 몹시 악랄하다고 비난했고, 한국인들을 잔혹한 민족이라고 폄하했다. 래드 교수는 스티븐스 암살을 대한제국에서 있었던 미국인 선교사 조지 허버 존스 암살 미수 등과 비교하면서, 대한제국에서 정치적 암살은 드문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73]

반면, 한국에서는 스티븐스를 "한국의 배신자"로, 전명운장인환을 "애국자"이자 "영웅"으로 평가한다.[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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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The History of Korea East-West Center Press, Honolu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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