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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비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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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비 조씨는 고려 우왕의 후궁이다. 본래 이인임의 여종의 딸로, 이름은 봉가이이며, 1384년 우왕과의 관계를 통해 궁에 들어가 숙녕옹주, 헌비, 덕비에 차례로 책봉되었다. 숙비 최씨를 폐출시키고, 우왕에게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말 것을 간언하기도 했다. 우왕이 폐위된 후 사가로 내쫓긴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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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비 조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작위고려 우왕의 후궁
봉가이
재위 기간
재위 형태재임
기간1385년경–1388년
즉위1385년경
이전정비
이후선비
가문
출생 가문조씨
혼인 가문왕씨
가족 관계
배우자우왕
아버지조영길
어머니이인임의 여종
자녀없음
기타 정보
종교불교

2. 생애

덕비 조씨는 고려 말 우왕의 총애를 받은 구비삼옹주 중 한 명이다.[4] 본명은 봉가이(鳳加伊)이며, 조영길의 딸이다. 조영길은 본래 당대 권신 이인임의 여종의 남편이었는데, 1384년(우왕 10년) 음력 6월 우왕이 이인임의 집에 갔다가 봉가이를 알게 되어 관계를 맺었다. 이때 조영길은 을 하사받고 전농부정에 제수되었다.[5] 이후 우왕과 봉가이는 매일같이 교외로 놀러 다녔다.[6]

고려에는 천자수모법이라는 제도가 있어 어머니가 노비일 경우 그 자식도 노비 신분이었다. 따라서 봉가이 역시 이인임의 노비 신분이었다. 그러나 우왕은 덕비를 맞이한 후 이인임을 부모의 예로 대하고, 이인임도 우왕을 사위의 예로 대했다고 한다.[7]

1386년(우왕 12년) 음력 1월, 우왕은 봉가이에게 줄 주옥 장식이 없다는 이유로 크게 화를 내며 보원고의 관리들을 하옥시켰고,[11] 같은 달 전공판서 권주의 집을 수리하여 봉가이에게 주었는데,[12] 숙녕옹주가 새 거처로 이사할 때에는 우왕이 직접 나서서 이사를 도와주었다.[13]

1386년 음력 2월, 봉가이는 2년 전 자신을 무고했던 용덕(숙비 최씨)을 무고하였다.[14] 봉가이는 “용덕이 그 어미와 함께 미도[15]를 끼고 현혹시키는 짓을 한다”라고 하였는데, 당시 용덕에게 애정이 식었던 우왕은 크게 화내며 곧바로 용덕을 숙비의 자리에서 폐출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 최천검의 집을 적몰하고 용덕의 궁인들을 모두 가두었다. 결국 다음 달인 음력 3월 용덕과 최천검은 전주로 귀양을 가고, 그 어미와 시종들은 사형당하였다. 당시 임견미, 이성림, 염흥방 등이 용덕과 그 가족을 애석하게 여기고 도우려 했지만 실패하였다.[16]

1386년 음력 6월, 봉가이는 우왕에게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 것을 간언하기도 하였다.[17]

1388년 (우왕 14년) 음력 6월 우왕이 폐위되면서, 창왕의 모후 근비 이씨를 제외한 나머지 우왕의 후비들은 모두 사가로 내쫓겼다.[18] 이후 덕비 조씨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언제 사망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 수 없다. 우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으며, 는 '''덕비'''(德妃)이다.

다만 덕비 조씨의 아버지 조영길이 1388년 음력 11월 개경에 몰래 들어왔다가 들켜 장형에 처해지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19]

한편 우왕은 신돈의 자식으로 취급되어 《고려사》의 〈세가〉에 오르지 못하고 〈열전〉반역 편에 수록되었고, 우왕의 왕비들 역시 《고려사》〈열전〉에 아예 수록되지 않았다.[7]

2. 1. 가계와 왕비 책봉

덕비 조씨는 고려 말 우왕의 총애를 받은 구비삼옹주 중 한 명이다[4]. 본명은 '''봉가이'''(鳳加伊)이며, 조영길의 딸이다. 조영길은 본래 당대 권신 이인임의 여종의 남편이었는데, 1384년(우왕 10년) 음력 6월 우왕이 이인임의 집에 갔다가 봉가이를 알게 되어 관계를 맺었다. 이때 조영길은 을 하사받고 전농부정에 제수되었다[5]. 이후 우왕과 봉가이는 매일같이 교외로 놀러 다녔다[6].

고려에는 천자수모법이라는 제도가 있어 어머니가 노비일 경우 그 자식도 노비 신분이었다. 따라서 봉가이 역시 이인임의 노비 신분이었다. 그러나 우왕은 덕비를 맞이한 후 이인임을 부모의 예로 대하고, 이인임도 우왕을 사위의 예로 대했다고 한다[7].

2. 2. 왕비 시절

1385년(우왕 11년) 음력 12월 '''숙녕옹주'''(肅寧翁主)에 책봉되었다. 이날 봉가이 외에 기생 출신의 칠점선(영선옹주)도 왕비에 책봉되었는데, 개인의 노비나 기생이 왕비에 책봉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8] 1386년(우왕 12년) 음력 8월에는 '''헌비'''(憲妃)에 책봉되었고, 그녀를 위해 숙녕부(肅寧府)가 설치되었다.[9] 이후 1387년(우왕 13년) 음력 9월 헌비에서 '''덕비'''(德妃)로 개봉되었다.[10]

1386년 음력 1월, 우왕은 봉가이에게 줄 주옥 장식이 없다는 이유로 크게 화를 내며 보원고의 관리들을 하옥시켰고,[11] 같은 달 전공판서 권주의 집을 수리하여 봉가이에게 주었는데,[12] 숙녕옹주가 새 거처로 이사할 때에는 우왕이 직접 나서서 이사를 도와주었다.[13]

1386년 음력 2월, 봉가이는 2년 전 자신을 무고했던 용덕(숙비 최씨)을 무고하였다.[14] 봉가이는 “용덕이 그 어미와 함께 미도[15]를 끼고 현혹시키는 짓을 한다”라고 하였는데, 당시 용덕에게 애정이 식었던 우왕은 크게 화내며 곧바로 용덕을 숙비의 자리에서 폐출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 최천검의 집을 적몰하고 용덕의 궁인들을 모두 가두었다. 결국 다음 달인 음력 3월 용덕과 최천검은 전주로 귀양을 가고, 그 어미와 시종들은 사형당하였다. 당시 임견미, 이성림, 염흥방 등이 용덕과 그 가족을 애석하게 여기고 도우려 했지만 실패하였다.[16]

1386년 음력 6월, 봉가이는 우왕에게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 것을 간언하기도 하였다.[17]

2. 3. 우왕 폐위 후

1388년 (우왕 14년) 음력 6월 우왕이 폐위되면서, 창왕의 모후 근비 이씨를 제외한 나머지 우왕의 후비들은 모두 사가로 내쫓겼다.[18] 이후 덕비 조씨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언제 사망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 수 없다. 우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으며, 는 '''덕비'''(德妃)이다.

다만 덕비 조씨의 아버지 조영길이 1388년 음력 11월 개경에 몰래 들어왔다가 들켜 장형에 처해지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19]

한편 우왕은 신돈의 자식으로 취급되어 《고려사》의 〈세가〉에 오르지 못하고 〈열전〉반역 편에 수록되었고, 우왕의 왕비들 역시 《고려사》〈열전〉에 아예 수록되지 않았다.[7]

3. 가족 관계


  • 아버지 : 조영길 (생몰년 미상)
  • 어머니 : 이인임의 여종
  • 남편 : 제32대 우왕 (1365~1389, 재위: 1374~1388)

참조

[1] 서적 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https://books.google[...] 옥당북스 2019-03-31
[2] 서적 읽기 쉬운 고려왕 이야기 https://books.google[...] 타오름 2009-09-27
[3] 서적 고려사 - 열정과 자존의 오백년 https://books.google[...] 들녘 2014-05-28
[4] 웹사이트 네이버 백과사전 〈구비삼옹주〉항목 http://100.naver.com[...]
[5] 간행물 고려사》권135〈열전〉권48 - 우왕 10년 6월 - 왕이 조영길의 딸 봉가이와 통정하고 총애하다
[6] 간행물 고려사》권135〈열전〉권48 - 우왕 10년 8월 - 왕이 봉가이 등과 함께 매일 교외로 놀러다니다
[7]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덕비〉항목 https://terms.naver.[...]
[8] 간행물 고려사》권135〈열전〉권48 - 우왕 11년 12월 - 사비와 관기를 전례없이 옹주로 봉하다
[9] 간행물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2년 8월 - 숙녕옹주를 헌비로 높여 책봉하다
[10] 간행물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3년 9월 - 헌비를 덕비로 고쳐 봉하다
[11] 간행물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2년 1월 - 숙녕옹주에게 줄 주옥장이 없자 보원고 관리를 하옥하다
[12] 간행물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2년 1월 - 권주의 집을 수리해 숙녕옹주에게 주다
[13] 간행물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2년 2월 - 우왕이 숙녕옹주의 이사를 도와주다
[14] 간행물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2년 2월 - 숙비를 폐출하고 최천검의 집을 적몰하다
[15] 문서 媚道. 뇌물이나 미인계를 써서 남자의 환심을 사는 것을 말한다.
[16] 간행물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2년 3월 - 숙비와 최천검을 유배보내고 어머니 등을 죽이다
[17] 간행물 고려사》권136〈열전〉권49 - 우왕 12년 6월 - 숙녕옹주가 왕에게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말기를 간언하다
[18] 간행물 고려사》권137〈열전〉권50 - 창왕 즉위년 6월 - 왕의 어머니 근비를 왕대비로 높여 책봉하고 전 왕의 왕비와 옹주를 모두 쫓아내다
[19] 간행물 고려사》권137〈열전〉권50 - 창왕 즉위년 11월 - 조영길을 장형에 처하고 유배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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