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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파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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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이빗 파레우스는 1548년 슐레지엔 프랑켄슈타인에서 태어난 신학자이자 개신교 목사였다. 그는 유비쿼티 교리에 반대하며 루터교와 칼뱅주의자 간의 통합을 시도하는 등 다양한 신학적 논쟁에 참여했다. 파레우스는 또한 통치자들의 행동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저작물은 잉글랜드에서 불태워지기도 했다. 그는 성경 주석과 평화주의적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1622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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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파레우스
기본 정보
본명다비트 빌헬름 파레우스
출생1548년 12월 30일, 실레지아 뢰벤베르크 (현재 폴란드 르부베크실롱스키)
사망1622년 6월 15일 (향년 73세), 바덴뷔르템베르크 아노
국적독일
직업신학자
종교개신교
소속개혁교회
학력
교육슐플포르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지도교수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경력
직위1571년: 교사, 노이슈타트 안 데어 하르트
1577년: 사제, 묄른
1580년: 사제, 빈징엔
1584년: 교수, 알테 콜레기움
1598년: 교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2. 생애

데이비드 파레우스는 1548년 12월 30일 슐레지엔 프랑켄슈타인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성은 '벵글러'(Wängler|벵글러deu)였으나, 그리스어 '파레이아'(παρειά|파레이아grc)에서 유래한 '파레우스'(Parēus|파레우스lat)로 바꾸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밑에서 수학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1571년부터 목회 활동을 시작했으며, 팔츠 선제후국의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여러 지역에서 목회 및 교육 활동을 이어갔다. 팔츠 백작 요한 카시미르의 후원으로 하이델베르크로 돌아와 콜레기움 사피엔티애의 교수가 되었고, 이후 원장을 역임했다. 1598년부터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부에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가르치며 명성을 얻었다.

30년 전쟁스페인 군대의 침공으로 피신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1622년 6월 15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필립 파레우스(1576-1648)는 아버지의 저작물을 출판하고 그의 삶을 기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데이비드 파레우스는 1548년 12월 30일 슐레지엔 프랑켄슈타인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성은 '벵글러'(Wängler|벵글러deu, '뺨'이라는 뜻)였으나, 어느 시점에서 그리스어 '파레이아'(παρειά / παρηή|파레이아 / 파레에grc, '뺨')에서 유래한 '파레우스'(Parēus|파레우스lat)로 헬라화했다.

그는 초기에 약제사와 구두 수선공 밑에서 도제 생활을 했다. 1564년에는 히르슈베르크에 있는 크리스토프 쉴링의 학교에 입학했으며, 1566년에는 스승 쉴링을 따라 암베르크로 갔다. 그러나 곧바로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콜레기움 사피엔티애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밑에서 공부하는 동안 형성된 그의 신학적 견해로 인해 아버지로부터 상속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2. 2. 목회 및 교육 활동

1564년 옐레니아 구라에 있는 크리스토프 쉴링의 학교에 입학했으며, 1566년 스승 쉴링을 따라 암베르크로 갔다가 곧바로 하이델베르크의 명문 학교인 콜레기움 사피엔티애에 입학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그는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밑에서 공부하며 개혁주의 신학 사상을 형성했는데, 이로 인해 그의 아버지는 그를 상속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1571년 5월 13일, 그는 니더슐레텐바흐의 목사로 임명되었고, 약 6개월 후에는 하이델베르크의 파이다고기움(Pädagogium, 교육기관)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1573년 8월 24일에는 이전에 로마 가톨릭교회였던 헴스바흐의 목사직을 맡아, 교인들의 동의를 얻어 개혁주의 노선에 따라 교회를 성공적으로 재건했다.

그러나 개혁주의를 후원했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한 후 들어선 루트비히 6세 치하에서 그는 목사직에서 해임되었다. 1577년,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이자 독실한 개혁주의 신자였던 팔츠 백작 요한 카시미르에 의해 오거스하임의 목사로 임명되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1580년에는 빈칭엔으로 전근했으며, 인근 노이슈타트에 설립된 카시미리아눔의 교사들과 교류하며 학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루트비히 6세가 사망하고 요한 카시미르가 팔츠의 섭정으로 활동하게 되자, 1584년 9월 파레우스는 다시 콜레기움 사피엔티애의 교사로 초빙되었다. 그는 1591년 콜레기움의 원장 자리에 올랐고, 1598년에는 신학부의 구약성서 교수로 임명되었다. 1602년부터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약성서를 가르쳤다. 그의 뛰어난 학문과 가르침은 널리 알려져, 먼 지역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찾아왔다. 또한 1592년부터는 팔츠 교회 평의회(Kirchenrat)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교회 정책 결정에도 참여했다.

30년 전쟁이 격화되던 1621년 9월, 스페인 군대가 팔츠 지역으로 진격해오자 파레우스는 안바일러로 피신했고, 이후 노이슈타트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잠시 팔츠 지역을 수복하자 1622년 5월 하이델베르크로 돌아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622년 6월 15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2. 3. 팔츠 교회 평의회 활동과 망명

1592년부터 파레우스는 팔츠 교회 평의회에 소속되었다. 1621년 9월 30년 전쟁스페인 군대가 팔츠에 접근하자, 그는 안바일러로 피신했다가 이후 노이슈타트로 옮겨갔다.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일시적으로 팔츠로 돌아오자 파레우스도 1622년 5월 하이델베르크로 복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622년 6월 15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3. 신학 사상과 주요 저작

데이빗 파레우스의 ''Operum Theologicorum Partes quatuor'' (1647) 표지.


데이빗 파레우스는 다양한 신학적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펼쳤다. 그의 저술 활동은 유비쿼티 교리를 비판하는 논문 Methodus ubitquitariae controversiaela (1586)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루터의 번역본을 기반으로 한 Neustadter Bibel|노이슈타터 비벨de (1587) 출판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야콥 안드레아 등 루터교 신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많은 신학적 논쟁에 참여했지만 본질적으로 평화주의자였으며, 특히 Irenicum sive de unione et synodo evangelicorum liber votivus|이레니쿰 시베 데 우니오네 에트 시노도 에반겔리코룸 리베르 보티부스la (1614-1615)를 통해 루터교와 칼뱅주의의 통합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구약신약 성경에 대한 방대한 주석 작업(1605-1618)은 그의 중요한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신학적 입장을 정리한 Summarische Erklärung der Katholischen in der Churpfalz geübten Lehrede 역시 여러 차례 출판되었다.

파레우스는 통치자 역시 신의 법 아래 있으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치 사상을 가졌는데, 이는 영국의 제임스 1세와 같은 절대 군주에게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져 1622년 옥스퍼드에서 그의 저작물이 불태워지는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3. 1. 루터교와의 논쟁



파레우스는 유비쿼티 교리를 비판하는 논문인 Methodus ubitquitariae controversiaela (노이슈타트, 1586)를 발표하며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1587년에는 루터의 성경 번역본에 목차와 표제를 추가하여 Neustadter Bibel|노이슈타터 비벨de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는데, 여기에 포함된 일부 내용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루터교 신학자 야콥 안드레아는 자신의 저서 Christliche Erinnerungde (튀빙겐, 1589)에서 이 출판을 "사기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파레우스는 Rettung der Neustadter Bibelde (노이슈타트, 1589)에서 비교적 온건한 어조로 반박했다.

이후에도 파레우스는 다른 루터교 신학자들과 논쟁을 이어갔다. Sieg der Neustädtischen Bibelde (노이슈타트, 1591)에서는 요한 게오르크 지크바르트와 논쟁했으며, 1593년부터 1599년까지는 에기디우스 후니우스와 논쟁했다. 후니우스는 파레우스를 개혁파의 유대교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파레우스는 또한 교황청에 반대하는 여러 논문을 1604년부터 1617년 사이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많은 신학 논쟁에 참여했지만, 파레우스는 본질적으로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담은 Summarische Erklärung der Katholischen in der Churpfalz geübten Lehrede를 1593년 이후 여러 차례 출판했으며, 구약과 신약 성경에 대한 주석서들을 1605년부터 1618년까지 꾸준히 내놓았다. 특히 Irenicum sive de unione et synodo evangelicorum liber votivusla (하이델베르크, 1614-1615)에서는 모든 복음주의 교파가 참여하는 총회를 열어 루터교와 칼뱅주의가 하나 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두 교파가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일치하며, 믿음의 기초에 영향을 주지 않는 부차적인 문제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파레우스의 이러한 통합 노력은 동시대인들로부터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루터교 신학자인 레온하르트 후터와 지크바르트는 그의 평화 제안을 거부했다.

3. 2. 성서 주석



데이빗 파레우스는 다양한 신학적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그중 성서 주석 작업은 그의 중요한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저술 활동은 1586년 유비쿼티 교리를 비판하는 논문 ''Methodus ubitquitariae controversiae''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587년에는 루터의 번역본에 기반한 ''노이슈타터 비벨''을 출판했는데, 여기에 포함된 주석과 내용 때문에 야콥 안드레아와 같은 신학자들로부터 "사기 행위"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파레우스는 이에 ''Rettung der Neustadter Bibel'' (1589)을 통해 반박했다.

이후에도 그는 요한 게오르크 지크바르트, 에기디우스 후니우스 등 여러 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으며, 교황청의 권위에 도전하는 글들도 발표했다(1604–17). 이러한 신학적 논쟁에도 불구하고 파레우스는 본질적으로 평화주의자였으며, 신학적 통합을 추구했다. 그의 ''Irenicum sive de unione et synodo evangelicorum liber votivus'' (1614-1615)는 루터교와 칼뱅주의의 통합을 위한 복음주의자들의 총회를 제안하는 내용이었으나, 동시대 신학자들, 특히 레온하르트 후터와 지크바르트 등 루터교 신학자들의 반대로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파레우스의 건설적인 저술 활동의 핵심은 1605년부터 1618년 사이에 출판된 구약신약 성경에 대한 방대한 주석들이다. 이 주석들은 그의 신학 사상을 집대성한 결과물로 평가된다. 또한, 그의 신학적 입장을 요약한 ''Summarische Erklärung der Katholischen in der Churpfalz geübten Lehre''는 1593년 이후 여러 차례 재판되었다.

파레우스는 성서 해석을 통해 통치자 역시 신의 법 아래 있으며, 백성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 절대 왕정을 추구하던 영국의 제임스 1세에게 위험하게 받아들여졌다. 결국 1622년, 옥스퍼드 당국은 파레우스의 모든 저작물을 수색하여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그의 성서 해석과 신학 사상이 당대 정치 질서에 미친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3. 3. 개신교 통합 노력과 이레니쿰

파레우스는 여러 신학 논쟁에 참여했지만, 본질적으로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건설적인 활동으로 1593년 이후 자신의 저서 Summarische Erklärung der Katholischen in der Churpfalz geübten Lehrede의 여러 판본을 출판하고, 구약 및 신약 성경에 대한 수많은 주석(1605-1618년 출판)을 남겼다.

특히 그는 Irenicum sive de unione et synodo evangelicorum liber votivus|이레니쿰 시베 데 우니오네 에트 시노도 에반겔리코룸 리베르 보티부스la (복음주의자들의 연합과 총회에 관한 서원서)를 하이델베르크에서 1614년부터 1615년까지 출판하며,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참여하는 총회 개최를 제안했다. 이를 통해 루터교와 칼뱅주의 진영의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파레우스는 두 교파가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분명히 하나이며, 믿음의 기초에 영향을 주지 않는 지엽적인 부분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통합 노력과 평화를 위한 제안은 동시대인들로부터 거의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루터교 신학자인 레온하르트 후터와 지크바르트 등에 의해 거부되었다.

3. 4. 정치 사상

파레우스는 통치자 역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 영국의 절대 군주였던 제임스 1세의 의심을 샀다. 결국 1622년, 옥스퍼드 당국은 제임스 1세의 명령에 따라 도서관과 서점을 수색하여 파레우스의 모든 저작물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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