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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브리 보질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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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브리 보질로프는 불가리아의 정치인이자 경제학자로, 불가리아 국립 은행 총재를 여러 차례 역임하고 소피아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1938년 재무부 장관을 거쳐 1943년 총리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과 협력했다. 전쟁 말기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국립 은행 총재로 복귀했으나, 소련의 침공 이후 체포되어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1945년 처형되었다. 1996년 그의 판결은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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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브리 보질로프
기본 정보
1942년의 보질로프
이름도브리 보질로프
로마자 표기Dobri Bozhilov
다른 이름 (불가리아어)

정치 경력
직위제29대 불가리아 총리
임기 시작1943년 9월 14일
임기 종료1944년 6월 1일
국왕시메온 2세
이전페터 가브로프스키 (대행)
이후이반 이바노프 바그랴노프
소속 정당무소속
개인 정보
출생일1884년 6월 13일
출생지코텔, 동루멜리아
사망일1945년 2월 1일
사망지소피아, 불가리아

2. 생애

도브리 보질로프는 불가리아 코텔 출신으로, 스비슈토프의 고등 상업 학교를 졸업하고 불가리아 국립 은행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여러 차례 은행 총재를 역임했으며, 게오르기 쿄세바노프 내각과 보그단 필로프 내각에서 재무부 장관을 지냈다.[2]

1943년 보리스 3세 사망 이후, 필로프는 섭정이 되었고, 보질로프를 총리로 임명했다. 보질로프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친독 정책을 펼쳤으나, 불가리아 내 유대인 추방 요구는 거부했다.[3] 1944년 소련의 침공 이후, 보질로프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나, 1996년에 명예가 회복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은행 경력

불가리아 코텔에서 태어난 도브리 보질로프는 스비슈토프에 있는 고등 상업 학교를 졸업하고, 1902년 불가리아 국립 은행 큐스텐딜 지점에서 장부 담당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보질로프는 불가리아 국립 은행에서 총 36년간 근무했으며, 여러 차례 은행 총재(1922-1923, 1923-1924, 1931-1932, 1934-1935, 1935-1938, 1944)를 역임했다.[1] 1922년부터 1935년까지는 불가리아 은행 임원을, 1935년부터 1938년까지는 총재를 역임했다. 동시에 소피아 대학교에서 경제 및 금융을 강의했다.

2. 2. 정치 입문 및 재무장관

불가리아 코텔에서 태어난 보질로프는 스비슈토프에 있는 고등 상업 학교를 졸업한 후 1902년 불가리아 국립 은행 큐스텐딜 지점에서 장부 담당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보질로프는 불가리아 국립 은행에서 총 36년간 근무했으며, 여러 차례 은행 총재(1922-1923, 1923-1924, 1931-1932, 1934-1935, 1935-1938, 1944)를 역임했다.[1]

1938년 11월, 보질로프는 게오르기 쿄세바노프 총리의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이 되었으며,[2] 1940년 보그단 필로프가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이 자리를 유지했다.

2. 3. 총리 재임과 제2차 세계 대전

1938년 11월, 보질로프는 게오르기 쿄세바노프 총리의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이 되었으며,[2] 1940년 보그단 필로프가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이 자리를 유지했다. 1943년, 차르 보리스 3세가 사망한 후 필로프는 불가리아의 세 섭정 중 한 명이 되었다. 나치 독일의 열렬한 동맹이자 섭정들 중 가장 강력한 필로프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보질로프(또 다른 친독 성향)를 총리로 임명했다.

총리로서 보질로프는 제2차 세계 대전이 격화되면서 독일인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사실상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가 나치와 대립한 주된 문제는 불가리아 정부가 국내 유대인들을 강제 수용소로 추방하라는 요구였는데, 보질로프는 이를 거부했다.[3] 1944년 6월, 추축국의 전쟁 노력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보질로프는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불가리아 국립 은행으로 돌아가 다시 총재가 되었다.

1944년 9월, 소련은 불가리아에 선전포고하고 침공했으며, 이는 공산주의 유격대에게 콘스탄틴 무라비예프 총리를 전복하고 키몬 게오르기에프로 교체할 기회를 제공했다.

2. 4. 전후 처형과 명예 회복

1944년 9월, 소련불가리아에 선전포고하고 침공하면서, 공산주의 유격대는 콘스탄틴 무라비예프 총리를 전복하고 키몬 게오르기에프로 교체할 기회를 얻었다. 이후 보질로프는 조국 전선 정부가 설립한 인민 법정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1] 그는 전쟁 범죄 및 재무부 장관 재직 중 저지른 다양한 비행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아 1945년 2월에 처형되었다.[1] 1996년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혀 명예가 회복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Bulgarian National Bank Governors http://www.bnb.bg/Ab[...]
[2] 웹사이트 Ministry of Finance :: Ministers https://www.minfin.b[...]
[3] 서적 The Bulgarian Jews and the Final S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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