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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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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연극은 표현주의, 신즉물주의, 나치 시대, 전후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사조와 발전을 겪었다. 표현주의는 주관적인 영혼의 외침을 통해 인간 주체성을 회복하려 했으며, 신즉물주의는 보고 형식과 르포르타주를 주제로 다루었다. 나치 시대에는 많은 극작가들이 망명하며 침체기를 겪었으나, 전후에는 동서독의 분단 속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동독은 브레히트의 서사극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따랐고, 서독은 부조리극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 막스 라인하르트를 비롯한 연출가들과 배우들이 독일 연극 발전에 기여했으며, 무대 미술 또한 표현주의 이후 추상적인 방식으로 변화했다.

2. 독일 현대극의 사조와 발전

독일 현대 연극은 20세기 초 표현주의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는 자연주의의 객관적 묘사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주관적 감정과 경험을 강렬하게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1910년대부터 1920년대에 걸쳐 활발히 전개된 표현주의는 기존의 연극 형식에 도전하며 혁신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표현주의의 감정 과잉에 대한 반성으로, 현실을 보다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직시하려는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de) 경향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는 사회 비판적인 시각과 함께 르포르타주 형식 등을 활용한 연극이 주목받았으며, 피스카토르 등에 의해 정치 연극이 시도되기도 했다. 브레히트추크마이어 등 주요 극작가들이 이 시기에 활동을 시작하며 표현주의와 신즉물주의의 영향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그러나 나치스의 집권은 독일 연극계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많은 재능 있는 극작가들이 망명하거나 활동을 중단해야 했고, 연극은 정치적 선전 도구로 전락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고, 연극계 역시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발전을 모색했다. 전쟁 직후의 공백기를 거쳐 동독에서는 브레히트서사극 이론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주요 흐름을 형성했고, 서독에서는 브레히트의 영향과 더불어 부조리극, 다큐멘터리 연극 등 다양한 현대 연극 사조가 실험되었다. 스위스프리쉬, 뒤렌마트오스트리아한트케 등 독일어권 작가들의 활동 역시 전후 독일 연극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독일 현대 연극은 다양한 사조와 형식을 포용하며 풍부한 발전을 이루었다.

2. 1. 표현주의 (1910년대~1920년대)

자연주의 연극이 과학적 관찰과 분석을 통해 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려 했던 것과 달리, 표현주의 연극은 주관적인 감정과 영혼의 외침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 이는 1910년대부터 약 10여 년간 독일 연극계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기존의 사실적인 무대 표현 방식을 깨뜨리는 혁신적인 움직임이었다. 뷔흐너나 스트린드베리, 그리고 베데킨트슈테른하임 등에서도 표현주의의 초기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인상주의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은 호프만스탈, 슈니츨러 등이 활동했지만, 헤르만 바르, 오스카 코코슈카, 발 등에 의해 표현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표현주의 희곡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 자유로운 장면 구성: 극의 논리적 흐름보다는 작가의 내면 상태에 따라 장면을 자유롭게 배열한다.
  • 격정적인 독백: 등장인물의 내면적 고뇌와 절규를 강렬한 독백으로 표현한다.
  • 기성 사회에 대한 반항: 기존의 사회 질서, 도덕, 가치관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비판한다.
  • 인류애적·종교적 탐구: 인간 존재의 의미와 구원에 대한 갈망을 인류애나 종교적인 색채로 드러내기도 한다.
  • 원시적 에너지: 문명화된 사회 이면의 원초적인 생명력과 충동을 표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표현주의는 평화주의나 반전(反戰) 사상을 담기도 했으며, 점차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다(에른스트 톨러).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탐구하며 종교적인 색채를 띠기도 했다(에른스트 바를라하).

초기 표현주의 작품 중에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을 부자(父子) 간의 갈등이라는 주제로 다룬 경우가 많았다. 반전 사상을 담은 작품들도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다.

표현주의 주요 작품 예시
테마작가작품명
부자(父子) 대립라인하르트 조르게거지 Der Bettlerde
하젠클레버아들 Der Sohnde
브로넨부친 살해 Vatermordde
반전(反戰) 경향라인하르트 괴링해전(海戰) Seeschlachtde
운루일족(一族) Ein Geschlechtde
베르펠트로이의 여인들 Die Troerinnen des Euripidesde



세련된 기교를 보여준 게오르크 카이저 역시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중요한 작가이다. 또한, 조형 예술 분야의 바우하우스 예술가들도 연극, 미술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통합하여 표현주의적인 연극 실험을 시도했다.

2. 2. 신즉물주의 (1920년대)

1920년대 독일 연극계에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표현주의의 다소 허무한 도취감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면서, 보고 형식이나 르포르타주를 주요 소재로 삼는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de) 경향이 새롭게 부상했다. 이 시기에는 피스카토르가 정치 연극을 강력히 주창하며, 정치적 메시지를 우선시하는 아지프로극(선전선동극)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주요 극작가들, 예를 들어 브레히트, 추크마이어, 프리드리히 볼프 등은 표현주의와 신즉물주의라는 두 가지 흐름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다. 실제로 이들의 초기 작품에서는 표현주의적 특징이 나타나기도 한다. 1920년대에는 이들 외에도 레온하르트 프랑크, 브루크너, 브로넨, 오토 란벨,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작품을 각색한 한스 요아힘 클라우스, 호르바트 등 다양한 작가들이 등장하여 활동했다.

추크마이어의 ''즐거운 포도산''은 소박한 자연 묘사와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로 표현주의 경향에 염증을 느끼던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며, 이후 발표한 ''케페니크의 대위''를 통해 극작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브레히트는 이미 1920년대부터 기존 연극의 틀을 깨는 혁신적인 서사적 연극 이론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28년에는 ''서푼짜리 오페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독일 연극계는 큰 위기를 맞았다. 나치즘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표현주의 작가 요스트와 같은 일부를 제외하고, 재능 있는 대다수의 극작가들은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새롭게 움트던 연극의 발전 가능성은 꺾이고 말았다. 브레히트가 예견했듯이, 파시즘 연극은 극적인 감동을 정치적 선전에 오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치스가 시도했던 게르만 민족 공동체극인 '징슈필(Thingspiel)' 등은 예술적으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 3. 전후 독일 연극 (1945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9년 동서로 분단된 독일은 패전의 충격 속에서 연극계 역시 큰 변화를 맞았다. 전쟁 직후에는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표현주의 운동과 같은 활발한 움직임 없이 공백기를 겪었으며, 이 시기에는 외국 연극이나 스위스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후 동독과 서독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현대 연극을 모색하게 된다.

2. 3. 1. 전후 상황과 새로운 경향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9년에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된 독일 연극계는 부분적으로 공통된 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지향하는 현대극의 방향은 서로 달랐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는 패전의 충격이 매우 커서,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표현주의 운동과 같은 활발한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 시기에는 보르헤르트의 희곡 <집 밖>이 전쟁으로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고발의 목소리를 낸 것이 주목할 만한 활동이었다.

추크마이어는 <악마의 장군>과 같은 작품을 가지고 망명 생활에서 돌아왔고, 이후 여러 작품을 발표했지만, 독일 연극계 전체적으로는 큰 공백기를 맞이했다. 이 공백은 주로 외국 연극을 상연하며 겨우 메워나가는 실정이었다. 오히려 이 시기에는 스위스의 두 작가, 프리쉬뒤렌마트가 독일어권 연극의 공백을 채우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3. 2. 동독의 연극

1949년 브레히트가 동베를린으로 넘어간 후, 망명 중에 쓴 작품들을 차례로 발표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화효과(異化效果)와 같은 새로운 기법을 통해 극장을 인식의 장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의 서사적 연극은 동독에서 공식적인 연극 사조로 여겨지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실은 낡고 감정적인 연극을 모태로 한) 신봉자들과 대립하기도 했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시도를 변증법적 연극으로 발전시키던 중 세상을 떠났다.

동독에서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아 활동을 시작한 젊은 작가로는 학스, 슈트리트마터, 바이에르, 뮐러 등이 있다. 한편, 볼프가 이끌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에 충실했던 작가들로는 치너, 쿠버, 자트코프스키, 푸파이퍼, 하우저 등이 있으며, 이들의 공식적인 직장작가(職場作家) 작품이 우대받았다.

2. 3. 3. 서독의 연극

브레히트는 서독에서도 젊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사회의 변혁을 지향하고 '오늘의 세계를 연극으로 재현하는' 사회적인 자세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시도도 크게 강조되었다. 전후 서독 연극계에는 부조리극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데, 힐데스하이머, 하이, 그라스 등이 대표적이다. 대체로 낡은 감동 위주의 연극이 이미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경향은 <차가운 빛> 이후 추크마이어의 활동이 부진했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1950년대부터 60년대에 걸쳐 서독에서는 아르젠, 즈르바노스, 아스모디, 비트링거, 히르비에, 뷴셰, 미헤르젠, 렌츠, 헤커, 만스페르트, 발트만, 마이어멜스 등이 등장했으나, 스위스 작가인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이나 프리슈의 <안도라>에 미칠 만한 작품은 낳지 못하였다.

1963년과 1964년에 호흐후트의 <신(神)의 대리인>, 키프하르트의 <오펜하이머 사건>, 바이스의 <마라의 박해와 암살> 등이 등장하면서부터 독일극은 또다시 국제적인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라스는 동서 독일의 분열에 메스를 댄 <<천민(賤民)의 폭동연습>>을 쓰고, 발저는 브레히트의 한계와 그의 극복을 탐구하면서 일련의 사회적인 희곡을 발표했다. 이들 작품은 모두 현실 참여적인 작가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는데, 한편 프리슈뒤렌마트는 희곡의 사회적인 유효성에 관한 의문이 브레히트 비판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반대로 바이스는 명확한 정치적 참여의 자세를 분명히 했다. 가장 젊은 세대로는 서독의 슈펠, 랑게 등이 기대된다.

2. 3. 4. 오스트리아의 연극

오스트리아에서는 전통적인 작극술을 계승한 호흐발더가 선배 작가인 메르, 쵸콜의 뒤를 이어 전후에 등장했다. 이후 프우바아레크, 츠자네크, 큐넬트, 베티, 라팔트 등이 활약했다. 특히, 도발적인 작품 '관객을 욕한다'를 쓴 한트케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독일 연극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3. 독일의 연출가와 배우

독일 연극은 시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연출가들과 개성 넘치는 배우들의 활약을 통해 풍부하고 다채롭게 발전해 왔다. 20세기 초 막스 라인하르트와 같은 거장의 등장은 독일 연극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표현주의와 같은 혁신적인 연극 운동은 기존의 틀을 깨는 실험적인 시도들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분단된 독일의 상황은 연극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동독에서는 세계적인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단하여 서사극 이론을 실제 무대에 구현하며 전후 독일 연극뿐 아니라 세계 연극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서독에서도 여러 극장에서 다양한 연출가들이 활동하며 현대 연극의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에르빈 피스카토르와 같이 정치극을 통해 사회 현실을 반영하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연출가들의 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배우 분야 역시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명배우들을 배출했다. 막스 라인하르트 시대에 활동했던 다수의 배우들은 독일 연극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나치 정권 하에서는 정치적 신념이나 배경에 따라 망명을 떠나거나 활동에 제약을 받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 전후 독일 연극계는 이러한 역사를 딛고 일어나 헬레네 바이겔과 같은 뛰어난 배우들을 중심으로 다시 활기를 띠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실력 있는 배우들이 독일 연극 무대를 빛내고 있다.

3. 1. 20세기 초 연출가

거장 막스 라인하르트표현주의의 도래를 미리 짐작하고, 자신의 극장 범위 안에서 1910년대에 이미 몇몇 표현주의 작품(라인하르트 조르게의 <거지>, 하젠클레버의 <아들>, 괴링의 <해전> 등)을 상연했다. 그러나 기존의 환상적인 극장 틀을 완전히 파괴하려는 급진적인 표현주의 운동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바우하우스에서는 모홀리 나기, 슐레머, 칸딘스키와 같은 조형 미술가들이 연극 실험을 시도했다. 이들은 조형 미술, 조명 기술 등 다양한 예술 분야를 통합하여 총체적인 표현주의 연극을 구현하고자 했다.

3. 2. 전후 연출가

서독에서는 세대교체기에 해당하며, 서베를린의 발로크, 뒤셀도르프의 슈톨크스를 제외하고는 함부르크에는 오스카 플리츠슈가, 뮌헨 소극장에서는 에버딩이 총감독으로 취임하고, 프랑크푸르트의 부크비츠도 은퇴했다. 다름슈타트를 일류 연극도시로 만들어 낸 젤너는 1960년 이래 서베를린의 독일 오페라로 옮겨 앉았다. 그의 연출은 현대적인 고대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서독의 중견 연출가로서는 브레히트 문하생이었던 파아리츄가 슈투트가르트에서 브레히트 연출의 선을 발전시켜 가장 급진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으며, 브레멘에서는 쇼크의 효과를 강조하는 차데크가 가끔 이벤트를 일으키고 있다. 피스카토르는 죽기 수년 전에 서베를린의 민중무대로 복귀하여 호흐후트, 키프하르트 등의 발견으로 마지막 생애를 장식했다.

동독에서는 브레히트가 귀환해서 그의 아내인 여배우 헬레네 바이겔을 중심으로 베를리너 앙상블을 형성하여 분위기적인 것을 거부하고 극장을 실시교시에 의한 관객을 인식의 터전으로 하는 그의 연극 이념에 의해 많은 후계자를 육성했다. 예부터 브레히트의 협력자였던 엥겔이 1965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현재는 베크웰트(1929년~)에 기대를 걸고 있다. 같은 베를린의 독일좌(Deutsches Theater)는 오랫동안 랑그호프가 감독이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브레히트에게 배운 벳슨이 전통있는 이 극장을 혁신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은 라이프치히를 근거지로 하여 브레히트의 생전에는 이와 대립하는 교조적인 역할도 하였으나, 현재의 동독에서는 브레히트 이론과 통일시키려는 경향이 보이고 있다.

오페라에서는 서독의 바그너 형제와 대조적인 방향을 보이는 펠젠슈타인이 극에 포인트를 두는 새 연출로 저명하다. 스위스는 나치스 시대에 유일한 독일어권(圈)의 자유로운 극장으로서 망명작가의 작품상연도 행하였으나 이는 릴트벨크, 웰타린 등의 연출가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3. 3. 주요 배우

라인하르트 시대에는 많은 명배우가 활동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배우로는 모이시, 아이졸트, 폰 빈터시타인, 슈타인리에츠크, 하르트만, 에카스벨크, 야닝스, 베르너 크라우스, 알베르트 바서만, 팔렌베르크, 티라, 도류, 실트 크라우트, 베게너, 아이벤슈츠, 파가이, 그리고 테이미히 일족(헬레네, 헤르만, 한스) 등을 꼽을 수 있다.

라인하르트 시대 주요 배우
배우 이름
모이시
아이졸트
폰 빈터시타인
슈타인리에츠크
하르트만
에카스벨크
야닝스
베르너 크라우스
알베르트 바서만
팔렌베르크
티라
도류
실트 크라우트
베게너
아이벤슈츠
파가이
테이미히 일족 (헬레네, 헤르만, 한스)



이들 중 일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활동했으며,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경우도 있다. 나치 시대에는 배우들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운명이 갈리기도 했다. 도류나 테이미히 일족처럼 피스카토르를 도왔던 이들이나 하인리히 게오르게처럼 정치극 활동 경력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이어간 경우도 있었지만, 붓슈, 페터 로레, 유대계인 에른스트 도이치 등 많은 배우가 박해를 피해 망명을 선택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많은 뛰어난 배우들이 독일 연극계를 이끌고 있다.

현대 주요 배우
구분배우 이름
여배우헬레네 바이겔
기제
케르너
베셀리
하타이어
흐리켄실트
돌슈
남배우핫세
링겐
헬비거
데 코버
류만
보와
만케
긴스베르크
플레르힝거



또한 중견 및 신진 배우들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많다.

중견 및 신진 주요 배우
구분배우 이름주요 활동 / 계파
여배우우이머-
골빈
코티언
팔머
엘자 바그너
핑크
슈타인
기젤라 마이
풀비츠
호프
라이헬
남배우카이저브레히트
타아테
슈뢰더서독
셀로
볼헬트
크바트프리크
차이틀러
헬트
마인라트
크바트링거


4. 독일 무대미술

라인하르트 시대의 무대미술은 화려하고 시각적인 스펙터클을 중시했으며, 오리크, 슈테른, 스레포크트 등이 대표적인 무대미술가로 활동했다.

표현주의 연극의 실험적인 정신은 무대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바우하우스의 조형미술가들은 연극을 조형미술, 조명 기술 등 다양한 예술 요소를 통합하는 '총체 예술'로 보고 실험적인 무대를 시도했다. 모홀리 나기, 슐레머, 칸딘스키 등이 이러한 흐름을 이끌었다.

정치적인 메시지를 강조했던 정치연극 시기에는 트라우고트 뮐러와 같은 미술가가 기존의 틀에 박힌 무대 장치를 과감하게 해체하며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다. 이후 브레히트와 협력했던 카스퍼 넬과 테오 오토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도 활발히 활동하며 독일 무대미술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표현주의 이후 독일 무대미술에서는 사실적인 자연 묘사 방식이 점차 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상징적인 표현을 추구하거나 새로운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연극 모두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대 독일 무대미술은 가장 극단적인 대립으로, 추상적인 장치와 조명을 활용하여 분위기 중심의 연극 공간을 만드는 바이로이트풍 방식과, 브레히트가 제창한 방식으로 배우의 '나타내는' 연기를 보완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사실적인 요소를 도입하고 새로운 조명 기술을 활용하는 무대 간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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