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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흥습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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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흥습격사건은 1935년 2월 13일 새벽, 동북인민혁명군 1군 1사 소속 이홍광 부대가 평안북도 동흥읍을 기습 공격한 사건이다. 이들은 경찰서, 친일파 가옥 등을 공격하여 일본인 사상자와 재산 피해를 발생시켰으며, 금품을 빼앗고 인질을 납치했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여러 언론에 대서특필되었으며, 2년 후 발생한 보천보 전투 당시에는 '제2 동흥사건'으로 불릴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은폐되었으나, 현대에 들어 무장 독립운동의 다양성을 조명하고 남북 역사 화해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재조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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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흥습격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동흥 습격 사건
날짜1935년 2월 13일
장소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 (현 양강도 김형직군 고읍노동자구)
결과일본 측에 상당한 타격을 줌.
교전 세력
교전국 1동북인민혁명군
지휘관
지휘관 1이홍광(李紅光)
병력 규모
병력 1200여명
병력 2경찰 47명
피해 규모
사상자 1전사자 3명, 중상자 7명, 부상자 10여명을 냄. 대원 양상오(梁尙五)(27세)와 진농화(陳農華)(38세)가 경찰에 체포됨.
사상자 2경관 2명과 그 가족 1명을 부상시키고 일본인 6명을 살상함. 친일 주구배 집 한채를 불사름. 재산가 또는 친일파로 지목한 16호(戶)의 집을 습격하여 상당량의 금품을 빼앗음. 일인(日人) 2명과 친일분자 및 부자로 지목된 한인(韓人) 10명을 납치함. 무고한 주민 2명 사망, 5명 부상.

2. 사건의 경과

1935년 2월 13일 새벽, 이홍광동북항일연군의 전신인 東北人民革命軍중국어 1군 1사 소속 약 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기습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일본 측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6]

장세윤(張世胤)의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에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6]

이홍광 부대는 새벽 1시경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세 방향으로 나누어 동흥읍 시내로 진입했다. 대원들은 장총, 권총, 기관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홍광은 47명의 경찰이 방어하는 경찰서를 기관총으로 집중 공격하게 하고, 다른 대원들은 동흥에서 가장 큰 재산가인 장영록의 집을 비롯하여 친일 행위자로 알려진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집을 공격하게 했다.

약 3시간 동안의 교전 끝에 東北人民革命軍중국어 제1사는 큰 성과를 거두고 압록강을 건너 퇴각했다. 이들은 만주국 측의 전신전화 시설은 파괴했지만, 동흥읍 내 일본 측 시설은 파괴하지 못해 일본 지원 부대가 올 것을 우려하여 일찍 철수했다.

이 작전으로 東北人民革命軍중국어은 일본 경찰 2명과 그 가족 1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일본인 6명을 사살했다. 또한 친일 행위자의 집 한 채를 불태우고, 16가구의 집을 습격하여 많은 금품을 빼앗았다. 일본인 2명과 친일 행위자 및 부자로 지목된 한국인 10명을 납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東北人民革命軍중국어 역시 전사자 3명, 중상자 7명, 부상자 10여 명이 발생했고, 대원 2명이 체포되는 피해를 보았다. 교전 중 무고한 주민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하는 비극적인 결과도 초래되었다.[6]

2. 1. 동흥읍의 배경

동흥읍은 약 500여 호, 주민 2500여 명이 살던 평안북도 최북단의 국경 도시로, 경찰서, 학교, 우체국 등이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6] 1935년 2월 13일 새벽, 이홍광은 동북항일연군의 전신인 동북인민혁명군 1군 1사 약 200여 명을 이끌고 동흥읍을 습격하여 일본 측에 큰 피해를 주고 퇴각했다.[6] 당시 동흥 경찰서는 47명의 경관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홍광 부대의 집중적인 기관총 사격을 받고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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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공격 과정

1935년 2월 13일 새벽, 이홍광은 東北人民革命軍중국어(동북항일연군의 전신) 1군 1사 소속 약 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흥읍을 습격하여 일본 측에 큰 피해를 입히고 퇴각하였다. 당시 동흥 경찰서는 47명의 경관이 방어하고 있었으나, 이홍광 부대의 집중적인 기관총 사격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6]

장세윤(張世胤)은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6]

이홍광은 2월 13일 새벽 1시경 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결빙된 압록강을 건넜다. 동, 서, 남 세 방면으로 분산된 1사(師)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동흥 시가로 진입했다. 이 때 대원들은 장총과 권총, 기관총 등으로 무장했다. 이홍광은 47명의 경찰이 방어하고 있는 경찰서를 향해 기관총 2정을 휴대한 부대로 하여금 집중사격을 가하게 하는 한편, 다른 두 방면의 대원들에게는 미리 지목한 대상에 따라 동흥 제일의 재산가이며 재목상(材木商)인 장영록(張永綠)의 집을 습격케 하고 기타 친일 주구배로 알려진 한인, 일본인 등을 습격하게 했다.

약 3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는 큰 전과를 거두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만주국 측의 전신전화 기관은 파괴했지만, 동흥읍에 있는 일제 측 전신전화 기관을 파괴하지 못해 적의 지원군이 올 것을 우려하여 조기에 철수했다. 이 작전에서 이홍광 부대는 경관 2명과 그 가족 1명을 부상시키고 일본인 6명을 살상했으며, 친일파의 집 한 채를 불태웠고, 재산가 또는 친일파로 지목된 16호(戶)의 집을 습격하여 상당량의 금품을 빼앗았다. 그리고 일본인 2명과 친일분자 및 부자로 지목된 한인 10명을 납치했다. 그러나 이홍광 부대도 전사자 3명, 중상자 7명, 부상자 10여 명을 냈고, 대원 양상오(梁尙五)(27세)와 진농화(陳農華)(38세)가 경찰에 체포되는 피해를 입었다. 또한, 교전 와중에 무고한 주민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하는 안타까운 결과도 있었다.[6]

2. 3. 피해 상황

이홍광 부대의 동흥 습격으로 일본 경찰과 민간인, 동북인민혁명군, 그리고 무고한 주민들에게까지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장세윤(張世胤)의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에 따르면, 동북인민혁명군은 경관 2명과 그 가족 1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일본인 6명을 살상했다. 친일파로 지목된 사람들의 집 한 채를 불태웠고, 재산가 또는 친일파로 지목된 16호의 집을 습격하여 금품을 빼앗았다. 또한 일본인 2명과 친일분자 및 부자로 지목된 한국인 10명을 납치했다.[6]

동북인민혁명군 측도 피해를 입었다. 전사자 3명, 중상자 7명, 부상자 10여 명이 발생했고, 대원 양상오(梁尙五)(27세)와 진농화(陳農華)(38세)가 경찰에 체포되었다.[6]

이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하는 안타까운 사건도 발생했다.[6]

2. 4. 사건의 여파

이홍광 부대의 동흥 습격 사건은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동아일보[8] (호외도 발행[7]), 조선일보[9], 매일신보[10], 경성일보[11]조선중앙일보[12] 등 주요 언론들은 이 사건을 며칠간 연속으로 대서특필했다. 특히, 당시 이홍광이 18세 미소녀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이는 이홍광 측이 심리전 차원에서 퍼뜨린 것으로 사실이 아니었다.[13]

이 사건은 일제 당국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2년 후인 1937년 6월 보천보 습격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매일신보동아일보는 이를 '제2 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고 칭했을 정도였다.[14] 이는 동흥 사건이 당시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동흥 사건은 경찰관 5명이 상주하는 주재소 밖에 없는 국경의 면 단위 마을 보천보를 습격한 사건보다 규모도 더 컸고, 2년 먼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에는 보천보 사건만 알려져 있을 뿐 거의 잊혀졌다. 심지어는 보천보 사건이 최초의 국내 진공 사건이라며 근거 없는 주장까지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는 김일성이 집권하면서 보천보 사건만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자신과 관계없는 이 사건은 고의적으로 은폐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이홍광이 김일성의 지도를 받았다고 허위 선전을 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널리 알려져 보천보 사건을 가릴 우려 때문에 동흥(東興)이란 지명까지 없애버렸다. 당시의 지명 평안북도 후창군(厚昌郡) 동흥읍(東興邑)은 오늘날 양강도 김형직군(金亨稷郡) 고읍노동자구(古邑勞動者區)가 되어 있다.[16][17]

3. 당시 언론 보도

동아일보[8], 조선일보[9], 매일신보[10], 경성일보[11], 조선중앙일보[12] 등 당시 주요 신문들은 이 사건을 며칠간 연속으로 크게 보도하였다. 당시 이홍광이 18세 미소녀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이홍광 측의 심리전이었다.[13] 1937년 6월 보천보 습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매일신보동아일보는 이를 제2 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이 사건의 여파는 컸다.[14]

3. 1. 동아일보 보도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특종으로 다루었으며, 호외까지 발행하여 사건의 긴박함을 알렸다.[7] 1935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호외는 "平北(평북)에 反滿軍侵入(반만군침입) / 民家(민가)에 衝火(충화)코 射擊(사격) / 警察隊(경찰대)와 交戰(교전), 守備隊出動(수비대출동) / 今曉(금효), 東興地方 大混亂(동흥지방 대혼란)"이라는 제목으로 동북인민혁명군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 침입 사실을 보도했다.[7]

동아일보는 사건 발생 다음 날인 1935년 2월 14일 자 조간 및 석간 신문에도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했다.[8] 2월 16일 자 기사에서는 동흥습격사건으로 인한 피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전했다.[8]

이처럼 동아일보는 동흥습격사건을 주요 뉴스로 다루면서 사건의 전개 양상과 피해 상황을 상세히 보도하여 독자들에게 알리려 노력했다. 특히, 1937년 6월 보천보 습격 사건이 발생했을 때, 동아일보는 이를 '제2 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고 칭하며 동흥 사건의 여파가 컸음을 시사했다.[14]

3. 2. 조선일보 보도

동흥습격사건은 동아일보[8] (호외도 간행함[7]), 조선일보[9], 매일신보[10], 경성일보[11]조선중앙일보[12] 등에서 며칠간 연속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당시 이홍광이 18세 미소녀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이홍광 측의 심리전이었다.[13] 1937년 6월 보천보 습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매일신보동아일보는 이를 제2 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이 사건의 여파는 컸다.[14]

3. 3. 매일신보 보도

매일신보는 일제의 기관지로, 동흥 사건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1935년 2월 14일자 (2월 13일 석간) 2면 기사에서는 "내습한 비적과 경찰이 시가전을 벌임"이라는 제목으로 사건을 다뤘다.[10] 같은 날 석간 2면에는 "동흥경찰서장 이하 40여명의 경관대와 침입군이 시가전을 벌였다"는 내용이 실렸다.[10]

1937년 6월 보천보 습격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매일신보는 이를 '제2 동흥사건'이라 칭하며 동흥 사건이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었다.[14]

3. 4. 기타 언론 보도

이 사건은 동아일보(호외도 간행함[7]), 조선일보[9], 매일신보[10], 경성일보[11]조선중앙일보[12] 등에서 며칠간 연속으로 크게 보도하였다. 당시 이홍광은 18세의 미소녀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13], 이홍광 측이 심리전 차원에서 퍼뜨린 것이라고 한다. 이 사건 2년여 후인 1937년 6월 보천보 습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당시 매일신보동아일보는 이를 제2 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고 칭하였을 정도로 동흥 사건의 여파가 컸다[14].

4. 사건의 은폐와 재조명

동흥 사건은 국경 면 단위 마을 보천보를 습격한 사건보다 규모가 크고 2년 먼저 일어났음에도, 일반에는 보천보 사건만 알려져 있고 동흥 사건은 거의 잊혀졌다. 심지어 보천보 사건이 최초의 국내 진공 사건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도 나올 정도이다.

4. 1. 김일성 정권의 역사 왜곡

김일성은 집권 후 보천보 사건만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자신과 관계없는 이 사건은 고의적으로 은폐하였다. 북한에서는 이홍광이 김일성의 지도를 받았다고 허위선전을 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널리 알려져 보천보 사건을 가릴 우려 때문에 동흥(東興)이란 지명까지 없애버렸다.[16][17] 당시 평안북도 후창군(厚昌郡) 동흥읍(東興邑)은 오늘날 양강도 김형직군(金亨稷郡) 고읍노동자구(古邑勞動者區)로 바뀌었다.

4. 2. 남한에서의 망각

동흥 사건은 1935년 2월 13일, 이홍광이 이끄는 동북인민혁명군이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습격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언론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8][9][10][11][12] 1937년 6월 보천보 습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는 이를 제2 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고 칭했을 정도였다.[14]

그러나 이 사건은 보천보 사건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크고 먼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남한 사회에서는 거의 잊혀졌다. 심지어 보천보 사건이 최초의 국내 진공 사건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이다.

이는 김일성이 집권하면서 자신의 업적을 부각하기 위해 보천보 사건만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이홍광의 동흥 사건은 의도적으로 은폐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홍광이 김일성의 지도를 받았다고 허위 선전을 하고, 동흥이라는 지명까지 없애버렸다. 당시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은 현재 양강도 김형직군 고읍노동자구로 바뀌었다.[16][17]

5. 현대적 관점에서의 평가

(요약 또는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현대적 관점에서의 평가를 작성할 수 없습니다.)

참조

[1] 간행물 李紅光열사 약전 http://search.i815.o[...] 『구망일보(救亡日報)』 1937-09-18
[2] 뉴스 李紅光열사전 http://search.i815.o[...] 중국 『구국시보(救國時報)』 1937-07-10
[3] 논문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 http://www.i815.or.k[...]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4] 뉴스 진위 김일성 열전(眞僞 金日成 列傳) (26) 이홍광과 동흥사건 http://news.joins.co[...] 중앙일보 1974-06-05
[5] 보고서 軍歴史関係事項調査の件報告 朝平憲秘庶第140号/昭和10年度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939-11-09
[6] 논문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 http://www.i815.or.k[...]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7] 뉴스 平北(평북)에 反滿軍侵入(반만군침입)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35-02-13
[8] 뉴스 平北(평북)에 人民革命軍(인민혁명군) 侵入(침입) 民家(민가)에 衝火(충화)코 掠奪(약탈)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5-02-14
[9] 뉴스 후창군에 2백 共軍(공군). 민가에 방화 약탈. 동흥에, 기관총도 휴대. 오늘 새벽 4시까지 대접전 조선일보 1935-02-14
[10] 뉴스 今曉頭厚昌에 賊禍 東興邑襲來市街戰 放火, 掠奪警官隊應戰擊退 住民側死傷者不少 https://www.bigkinds[...] 매일신보 1935-02-14
[11] 뉴스 約二百名の匪賊團平北東興を襲擊す/ 直ちに警官隊奮戰し遂に擊退被害相當に上る見込み http://db.history.go[...] 경성일보 1935-02-14
[12] 뉴스 동흥시 습격부대는 인민혁명군으로 판명, 70여 경관대 목하 맹추격, 총사령은 이강광 http://db.history.go[...] 조선중앙일보 1935-02-14
[13] 뉴스 李紅光은 十九歲美人 男便李某가 首領 이들 일단은 전부 조선인 청년 東興襲擊紅軍正體 https://www.bigkinds[...] 매일신보 1935-02-19
[14] 뉴스 함남국경(咸南國境)에 제2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 https://www.bigkinds[...]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06-06
[15] 논문 이홍광연구(李紅光硏究) http://www.i815.or.k[...] 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16] 웹사이트 김형직군(金亨稷郡) 고읍노동자구(古邑勞動者區) http://www.cybernk.n[...] 북한지역정보넷
[17] 백과사전 평안북도 후창군(厚昌郡)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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