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왕국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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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 왕국 교리는 기독교 신학의 한 분파로, 하나님이 세상의 통치를 두 영역으로 나누어 관리한다고 주장한다. 루터교는 영적 왕국과 세상 왕국을 구분하며, 국가가 교회를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지상의 섭리 사역을 구분하며, 교회의 외부 행정에 대한 국가의 간섭에 제한을 두었다. 재세례파는 세상의 왕국과 그리스도의 왕국을 완전히 분리하며, 두 왕국 간의 교제를 부정한다. 두 왕국 교리는 에라스투스주의와 구별되며, 존 볼과 조지 길레스피 등의 신학자들이 이 교리에 대한 견해를 제시했다. 이 교리는 종교 개혁 시기 교회 정부에 영향을 미쳤으며, 루터교와 칼뱅주의의 교회 정치에 차이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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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왕국교리 | |
---|---|
개요 | |
교리 | 루터교 |
주제 | 신학 |
목적 |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이해 |
역사적 맥락 | |
기원 | 마르틴 루터 |
발전 | 종교 개혁 시기 |
주요 저서 | 《세속 권위에 관하여》 《군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 |
교리 내용 | |
핵심 내용 | 하나님은 세상을 두 가지 방식으로 통치한다. |
첫 번째 통치 | 영적인 통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 전파 |
두 번째 통치 | 세속적인 통치 정부를 통해 법과 권위 유지 |
주요 주장 | |
그리스도인의 이중 시민권 | 천국 시민 세상 시민 |
세속 정부의 역할 | 정의와 평화 유지 |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 | 기도 정의로운 법 지지 |
영향 | |
정치 신학 | 현대 정치 신학에 영향 |
사회 윤리 |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강조 |
관련 개념 | 칼뱅주의의 영역 주권 신정 정치 |
논쟁과 비판 | |
악용 가능성 | 권위에 대한 맹목적 복종 정당화 |
사회 정의 문제 외면 | 현실 문제에 대한 소극적 태도 |
참고 문헌 | |
관련 자료 | 《루터 선집》 (Luther's Works) 《기독교 강요》 (존 칼빈) |
관련 문서 | |
관련 항목 | 기독교 윤리 정치 신학 사회 정의 |
2. 신학
두 왕국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모델에 기반을 두고 발전했으며, 루터교, 칼뱅주의(개혁주의), 재세례파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루터교'''에서 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발전시켜 두 왕국 교리를 정립했다.[1] 루터는 참된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영적 왕국은 칼이 필요 없으며, 정의와 응징에 관한 성경 구절은 세상(자연) 왕국만을 언급한다고 보았다. 또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설명하며, 세상 왕국은 영적 왕국에 대한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세속 문제에 관여하고, 군주들이 종교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비판했다.[1] 루터의 율법-복음 구분은 기독교인이 성도이자 죄인이며, 두 왕국의 시민이라는 교리와 연결되며, 필리프 멜란히톤의 저술에서 기원한다.[3],[4],[5]
'''칼뱅주의(개혁주의)'''에서 존 칼빈을 비롯한 후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구속적 구원 사역과 지상의 섭리 사역을 구분했다. 앤드루 멜빌은 이 교리를 명확히 설명했으며, 스코틀랜드의 ''제2 치리서''는 시민 권위와 교회 권위의 영역을 정의했다. 새뮤얼 러더퍼드와 같은 신학자들도 두 왕국에 대한 개혁주의 개념을 사용했다. 프란시스 투레틴은 시간적인 왕국을 창조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지위와, 영적인 왕국을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그의 지위와 연결하여 교리를 발전시켰다. 개혁파는 루터교와 달리 교회의 외부 행정, 즉 출교할 권리를 국가에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는 칼빈의 주장을 따랐다.
'''재세례파'''는 세상의 왕국과 그리스도의 평화로운 왕국이라는 두 개의 다른 왕국이 있으며, 이들은 서로 교제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6] 세상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은 육적인 무기로 싸우지만,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은 영적인 무기로 무장하여 싸운다. 그리스도는 이 두 왕국을 분리하셨고, 결국 그리스도의 왕국이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믿는다.[6]
2. 1. 루터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모델은 마르틴 루터 교리의 기초가 되었지만, 루터는 더 나아갔다.[1] 두 왕국 교리에 따르면, 참된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영적 왕국은 칼이 필요 없다. 따라서 정의와 응징에 관한 성경 구절은 단지 세상(자연) 왕국만을 언급한다. 루터는 또한 이 아이디어를 사용하여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는 세상 왕국은 영적 왕국에 관한 문제에 대해 권한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세속적인 문제에 관여해 온 방식과, 특히 신약성경 인쇄 금지와 같은 종교 문제에 대한 군주들의 관여를 지적했다.[1]이 율법-복음의 구분은 기독교인이 동시에 성도이자 죄인이며, 두 왕국의 시민이라는 루터의 교리와 병행되고 확대된다. 루터는 그들을 자연 왕국에 살아 있고 존재할 때 죄, 율법, 죽음의 종으로 묘사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면 죄, 율법, 죽음의 주가 된다고 묘사한다.[3] 율법-복음의 구분은 필리프 멜란히톤의 1521년 로마서 주석,[4] 그리고 멜란히톤의 1521년 '''로키 코무네스'''에서 기원한다.[5]
개혁파의 교리 적용은 교회의 외부 정부 문제에서 루터교와 달랐다. 루터교도들은 국가가 교회의 행정을 통제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데 만족했으며, 이는 토마스 에라스투스가 공유한 개혁주의 세계의 견해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개혁파는 파문권을 포함한 교회의 외부 행정권을 국가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칼빈의 주장을 따른다.
2. 2. 칼뱅주의 (개혁주의)
존 칼빈을 비롯한 후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구속적 구원 사역과 지상의 섭리 사역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앤드루 멜빌은 특히 이 교리를 명확하게 설명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스코틀랜드의 ''제2 치리서''는 시민 권위와 교회 권위의 영역을 명확히 정의했다. 새뮤얼 러더퍼드와 같은 정통 신학자들 또한 두 왕국에 대한 개혁주의 개념과 용어를 사용했다. 프란시스 투레틴은 이 교리를 더 발전시켜, 시간적인 왕국을 영원하신 하나님이자 세상의 창조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지위와 연결하고, 영적인 왕국을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그의 지위와 연결했다.두 왕국 교리에 대한 개혁주의의 적용은 교회의 외부적 통치 문제에서 루터교와 달랐다. 루터교는 국가가 교회의 행정을 통제하도록 하는 것에 만족했는데, 이는 토마스 에라스투스가 공유한 개혁주의 세계의 견해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개혁주의자들은 교회의 외부 행정, 즉 출교할 권리를 국가에 넘겨주지 말 것을 주장하는 칼빈의 지도력을 따랐다.
2. 3. 재세례파
재세례파는 "두 왕국 교리"를 따르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6]지상에는 세상의 왕국과 그리스도의 평화로운 왕국이라는 두 개의 다른 왕국이 있다. 이 두 왕국은 서로 공유하거나 교제할 수 없다. 세상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은 육신으로 태어나 세상적이고 육적인 생각을 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거듭나 영에 따라 살며 영적인 생각을 한다. 세상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은 창, 칼, 갑옷, 총, 화약과 같은 육적인 무기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갑옷,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과 같은 영적인 무기로 무장하여 마귀, 세상, 자신의 육체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반대되는 모든 것에 맞서 싸운다. 세상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면류관과 세상의 왕국을 위해 싸운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은 썩지 않을 면류관과 영원한 왕국을 위해 싸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왕국을 서로 대립하게 만드셨고 분리하셨다. 그러므로 그들 사이에는 평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권능과 영원한 왕국으로 다른 모든 왕국을 쳐부수고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그의 왕국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6]
3. 에라스투스주의와의 구별
토마스 에라스투스는 신자가 죄를 범하면, 교회의 성만찬 금지와 같은 제재보다 국가 위정자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기존의 두 왕국 교리가 유지되어, 국가가 교회의 일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지정하였다.[8]
4. 주요 신학자들의 견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모델은 마르틴 루터 교리의 기초가 되었지만, 루터는 더 나아갔다.[1] 두 왕국 교리에 따르면, 참된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영적 왕국은 칼이 필요 없다. 따라서 정의와 응징에 관한 성경 구절은 단지 세상(자연) 왕국만을 언급한다. 루터는 이 개념을 사용하여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세상 왕국은 영적 왕국 문제에 대해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세속 문제에 관여해 온 방식과, 특히 신약성경 인쇄 금지와 같은 종교 문제에 대한 군주들의 관여를 비판했다.[1]
율법-복음의 구분은 기독교인이 동시에 성도이자 죄인이며, 두 왕국의 시민이라는 루터의 교리와 병행된다. 루터는 자연 왕국에 속할 때 죄, 율법, 죽음의 종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 율법, 죽음의 주가 된다고 묘사한다.[3] 율법-복음 구분은 필리프 멜란히톤의 1521년 로마서 주석,[4] 그리고 멜란히톤의 1521년 '''로키 코무네스'''에서 기원한다.[5]
존 칼빈과 후대의 개혁주의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세상의 섭리 사역을 명확히 구분했다. 스코틀랜드 신학자 앤드루 멜빌은 이 교리를 명확히 설명한 것으로 유명하며, 스코틀랜드의 ''제2 치리서''는 시민 권위와 교회 권위의 영역을 명확히 정의했다. 새뮤얼 러더퍼드와 같은 정통 신학자들도 두 왕국에 대한 개혁주의 개념과 용어를 사용했다. 프란시스 투레틴은 이 교리를 발전시켜, 시간적인 왕국을 영원하신 하나님이자 세상의 창조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지위와 연결하고, 영적인 왕국을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지위와 연결했다.
개혁주의는 루터교와 달리 교회의 외부 통치 문제, 즉 출교할 권리를 국가에 넘겨주지 말 것을 주장했다. 이는 토마스 에라스투스가 공유한 견해와 대립되는 존 칼빈의 입장이었다.
재세례파는 "두 왕국 교리"를 따르는데, 세상의 왕국과 그리스도의 평화로운 왕국은 서로 공유하거나 교제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6]
4. 1. [[존 볼 (사제)]]
존 볼은 은혜언약에 관한 논문에서 그리스도와 국가 또는 교회와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으로서 자연 왕국을 통치하며, 이 자연 왕국이 그에게 속해있는 것은 그가 성부 하나님과 같은 본성이며 함께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리스도가 교회를 통치하는 것은 중보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자연 왕국과 대조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자연 왕국과 중보적 왕국으로 구분한 것이다.[9]4. 2. [[조지 길레스피]]
조지 길레스피는 그의 저서 《아론의 싹난 지팡이》에서 두 왕국의 공통점과 다른 점에 대하여 열 가지를 상술하였다.[10]5. 두 왕국 교리 반대자
새뮤얼 루더포드는 두 왕국 교리를 반대했던 신학자들의 명단을 공개하였다.
6. 영향
루터의 두 왕국 교리에 대한 설명은 종교 개혁 시기 루터교 영토에서 교회 정부의 실제 현실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1] 쿠이우스 레지오, 에이우스 렐리기오의 등장으로, 시민 권력은 해당 지역 교회의 형태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루터는 1525년부터 교회 관계자들에게 이전에 부여했던 권력의 많은 부분을 양보해야 했다.[2] 그러나 칼빈은 제네바에서 상당한 갈등을 겪은 후 ''교회 규례''에 따라 훨씬 더 큰 권한을 가진 형태의 교회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네바 종교회의가 교회 구성원들을 출교할 수 있는 배타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3]
참조
[1]
논문
Luther's Two Kingdoms Revisited
http://search.ebscoh[...]
2013-11-10
[2]
웹사이트
The Two Governments and the Two Kingdoms in Luther' Thought
https://www.elca.org[...]
Elca
2002-07-01
[3]
서적
Only the Decalog is Eternal, Martin Luther's Antinomian Disputations
Lutheran Press
2008
[4]
문서
Concordia 1992
[5]
서적
Philip Melancthon, Common Places 1521
Concordia
2014
[6]
웹사이트
Anabaptist archives: The two kingdoms
https://christianhis[...]
Christian History Institute
1985
[7]
웹사이트
Ecclesial Calvinist
http://theecclesialc[...]
[8]
서적
The theology of the Westminster standards : historical context and theological insights
https://www.worldcat[...]
[9]
서적
The theology of the Westminster standards : historical context and theological insights
https://www.worldcat[...]
[10]
서적
The theology of the Westminster standards : historical context and theological insights
https://www.world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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