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우스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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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미트리우스 작전은 1971년 8월 9일, 북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공화주의 무장 세력에 대한 구금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시작된 작전이다. 영국군과 왕립 얼스터 경찰(RUC)은 450명의 체포 대상자 명단을 작성했으나, 실제 체포된 인원은 342명이었다. 이 작전은 발리머피 학살, 시민 불복종 운동, 폭력 사태를 촉발하여 북아일랜드 분쟁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구금자들은 심문 과정에서 '5가지 기술'로 알려진 고문적 심문을 받았으며, 이는 유럽 인권 재판소(ECHR)에서 비인간적이고 굴욕적인 처우에 해당한다고 판결받았다. 작전 데메트리우스는 북아일랜드 직접 통치로 이어졌고, IRA 가입을 증가시키는 등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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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우스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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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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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 드미트리우스 작전 |
관련 분쟁 | 북아일랜드 분쟁 배너 작전 |
목표 | 아일랜드 공화주의 무장 세력 용의자 체포 |
날짜 | 1971년 8월 9일 – 10일 |
시작 시간 | 04:00 |
종료 시간 | ? |
시간대 | UTC+01:00 |
장소 | 북아일랜드 |
실행 주체 | 영국 육군 왕립 얼스터 경찰대 |
결과 | 총 1,981명 체포 및 구금, 처음에는 342명 민간인 7,000명 이주 |
피해 규모 | |
사상자 | (작전 및 즉각적인 여파 참조) |
2. 배경 및 계획
196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 분쟁이 시작되면서 얼스터 충성파 준군사 조직인 얼스터 자원군(UVF)은 1966년부터 폭력 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 북아일랜드 폭동 이후, 영국군은 경찰 (왕립 얼스터 경찰(RUC))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이 시기에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은 활동이 거의 없었으나, 폭력 사태가 심화되면서 임시 IRA와 공식 IRA로 분열되었다. 1970-71년에 임시 IRA는 영국군과 RUC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시작했다.[7]
아일랜드 공화주의자 무장 세력에 대한 구금 제도 재도입은 연합주의 성향의 북아일랜드 정부에서 제안되었으며, 브라이언 포크너 총리가 주도했다. 1971년 8월 5일, 포크너와 에드워드 히스 영국 총리는 구금 제도 재도입에 합의했다. 구금의 목표는 IRA를 약화시키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충성파의 반발을 막고 포크너 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8][9]
영국 내각은 충성파 무장 세력 체포, 사격 클럽 무기 회수, 퍼레이드 금지 등 "균형 잡힌 조치"를 권고했다. 그러나 포크너는 이를 거부하고, 8월 9일에 구금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7]
구금은 영국 정부 최고위층에서 계획 및 시행되었다. 특별 훈련을 받은 인력이 북아일랜드로 파견되어 현지 병력에게 '5가지 기법' 심문 방법을 교육했다.[13]
2. 1. 초기 북아일랜드 분쟁
1960년대 후반, 얼스터 자원군(UVF)의 활동과 1969년 북아일랜드 폭동으로 인해 긴장이 고조되었다. 영국군은 왕립 얼스터 경찰(RUC)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은 임시 IRA와 공식 IRA로 분열되었고, 1970-71년에 임시 IRA는 영국군과 RUC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시작했다.[7]아일랜드 공화주의자 무장 세력에 대한 구금 제도 재도입 아이디어는 연합주의 성향의 북아일랜드 정부에서 나왔으며, 총리 브라이언 포크너가 이끌었다. 1971년 8월 5일, 포크너와 영국 총리 에드워드 히스 간의 회의에서 구금 제도 재도입에 합의했다.[8][9]
RUC 특별반과 MI5가 작성한 체포 대상자 명단에는 450명의 이름이 있었지만, 이 중 350명만 찾아냈다. 이 명단에는 비폭력 북아일랜드 시민권 협회와 인민 민주주의의 지도자인 이반 바와 마이클 파렐 등이 포함되었다.
얼스터 충성파 준군사 조직 또한 주로 가톨릭교도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를 대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보안 당국은 장관들에게 충성파가 국가 안보나 형사 사법 제도에 대한 즉각적이고 심각한 위협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조언했으며, 충성파는 단 한 명도 구금되지 않았다.[1]
2. 2. 구금 도입 결정
1971년 8월 5일, 브라이언 포크너 북아일랜드 총리와 에드워드 히스 영국 총리는 회담을 통해 아일랜드 공화주의자 무장 세력에 대한 구금 제도 도입에 합의했다.[8][9] 구금의 목표는 임시 IRA를 약화시키고 공격을 줄이는 것이었지만, IRA에 대한 더 강력한 조치가 얼스터 충성파의 반발과 포크너 정부의 붕괴를 막을 수 있기를 바랐다.영국 내각은 얼스터 충성파 무장 세력 체포, 북아일랜드 사격 클럽의 무기 회수, 오렌지 결사와 같은 연합주의/충성파 단체의 퍼레이드에 대한 무기한 금지와 같은 "균형 잡힌 조치"를 권고했다.[10] 그러나 포크너는 퍼레이드 금지가 실현 불가능하고, 사격 클럽이 보안 위험을 초래하지 않으며, 충성파 테러의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10]
결국 퍼레이드에 6개월간 금지 조치를 취하되 충성파는 구금하지 않으며, 8월 9일에 구금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7] 포크너는 후에 "정치적 미용을 위한 행위로서 누구를 체포한다는 생각은 내게 혐오스러웠다"고 썼다.[12]
2. 3. 체포 대상자 명단
왕립 얼스터 경찰(RUC) 특별반과 MI5는 450명의 체포 대상자 명단을 작성했지만, 실제로는 이 중 350명만 체포되었다.[1] 이 명단에는 이반 바와 마이클 파렐과 같은 북아일랜드 시민권 협회와 인민 민주주의 소속 비폭력 시민단체 지도자들도 포함되었다.[1]얼스터 자원군(UVF)을 비롯한 얼스터 충성파 준군사 조직들도 가톨릭교도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을 대상으로 공격을 감행했지만, 이들은 체포 대상에서 제외되어 형평성 논란이 일었다.[1] 팀 패트 쿠건은 "그들이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단 한 명의 충성파였다"고 언급했다.[11]
3. 법적 근거
구금은 처음에는 1922년 특별 권한 법(일명 "태형 법")의 권한에 따라 제정된 1956년 규정 11 및 12조와 1957년 규정 10조(특별 권한 규정)에 따라 수행되었다. 1922년 특별 권한 법은 매년 갱신되었고, 1928년에는 5년으로 갱신되었으며 1933년에 영구화되었다. 이 법은 1973년에 폐지되었다.[15] 1972년 11월 7일 테러리스트 구금 명령은 직접 통치가 시행된 후 임시 조항 법의 권한에 따라 제정되었다.
드미트리우스 작전에 따라 재판 없이 체포된 피구금자들은 1957년 6월 27일 영국이 유럽 평의회에 "협약 제15조(1)의 의미 내에서 공공 비상 사태"가 있다고 선언하는 통지를 제출했기 때문에 유럽 인권 위원회에 유럽 인권 협약 (ECHR) 제5조 위반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다.[16]
4. 작전 실행 및 즉각적인 여파
드미트리우스 작전은 1971년 8월 9일 월요일 오전 4시에 시작되어, 다음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17]
# 구금자들을 벨파스트의 Girdwood, 다운주의 Ballykinler, 또는 런던데리 주의 Magilligan의 세 지역 구금 센터 중 한 곳으로 체포 및 이동.
# 신원 확인 및 심문 과정. 이 과정을 통해 구금자를 석방하거나 크럼린 로드 교도소 또는 HMS ''Maidstone''에 구금. ''Maidstone''은 벨파스트 항구에 정박한 감옥선이었다.[17]
북아일랜드 전역에서 실시된 첫 번째 급습에서 342명이 체포되었다.[18] 체포된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이 군인들에게 폭행당하고, 언어적 학대를 받았으며, 위협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군인들이 경고 없이 집으로 쳐들어가 문과 창문을 통해 고무탄을 쏘았다는 주장도 있었다. 체포된 많은 사람들은 또한 구금 센터에서 3일 동안 구금되는 동안 학대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구타당하고, 언어적 학대를 받고, 위협을 받고, 개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굶주렸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일부는 개틀릿을 통과하도록 강요당하고, '장애물 코스'를 달리도록 강요당하고, 머리카락을 강제로 깎이고, 옷을 벗겨진 채, 담배로 지지고, 머리에 자루를 오랫동안 씌우고, 목에 밧줄을 매달고, 총구를 머리에 들이대고, 머리카락을 잡아 끌리고, 맨발로 장갑차 뒤에 끌려가고, 인간 방패로 장갑차에 묶여 있었다고 보고했다.[19][20] 일부는 두건을 쓰고 구타당한 후 헬리콥터에서 던져졌다. 그들은 수백 피트 상공에 있다고 들었지만 실제로는 지면에서 불과 몇 피트 떨어져 있었다.[21]
8월 13일까지 언론 보도는 폭력이 IRA와 치안군의 소진으로 인해 잦아들기 시작했다고 밝혔다.[26] 8월 15일, 민족주의 사회민주노동당 (SDLP)은 구금 도입에 대응하여 시민 불복종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10월 17일까지 약 16,000가구가 시민 불복종 캠페인의 일환으로 시의회 주택의 임대료와 세금을 보류한 것으로 추산되었다.[18]
8월 16일, 8,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구금에 항의하여 데리에서 파업을 벌였다. 당시 임시 IRA의 참모총장이었던 조 케힐은 기자 회견을 열어 임시 IRA 대원 30명만 구금되었다고 주장했다.[18]
8월 22일, 구금에 항의하여 약 130명의 아일랜드 민족주의/공화주의 의원들이 더 이상 지방 의회에서 활동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SDLP는 또한 여러 공공 기관에서 대표를 철수했다.[18] 10월 19일, 존 흄, 오스틴 커리, 버나데트 데블린 등 5명의 북아일랜드 국회의원 (MP)들이 구금에 반대하여 런던 다우닝가 10번가 근처에서 48시간 동안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18] 시위는 1975년 12월 구금이 종료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2013년, 기밀 해제된 문서에서 발리켈리에 심문 센터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어떠한 조사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인권 단체인 팻 피너케인 센터는 영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조사 및 유럽 인권 재판소로부터 이 사실을 숨겼다고 비난했다.[46] 2014년 6월, RTÉ 다큐멘터리 "고문 파일"에서 1977년 당시 영국 내무부 장관 멀린 리스가 당시 영국 총리 제임스 캘러헌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이 편지에서 영국 정부 장관들, 특히 1971년 국방부 장관 피터 캐링턴이 '고문' 정책을 실제로 승인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아일랜드 정부 또는 ECHR의 지식과는 상반되는 내용이었다. 편지에는 "1971/72년 북아일랜드에서 고문 방법을 사용하기로 한 결정은 장관들, 특히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캐링턴 경에 의해 내려졌다고 생각합니다(고인은 브라이언 포크너에 의해 확인됨)"라고 명시되어 있다.[4][47]
2014년 폭로 이후, 신 페인의 대표 게리 애덤스는 영국 정부가 "심문 대상자에게 사용된 방법의 심각성, 그들의 장기적인 신체적 및 심리적 결과, 이러한 심문이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 누가 이에 대한 정치적 권한과 허가를 부여했는지에 대해 유럽 인권 재판소에 거짓말을 했다"며 아일랜드 정부에 이 사건을 ECHR로 되돌릴 것을 촉구했다.[48] 2014년 12월 2일, 아일랜드 정부는 새로운 증거를 검토하고 생존자들의 요청에 따라 1978년 판결을 공식적으로 ECHR에 재검토를 요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5]
2018년 3월, ECHR은 원래 판결을 재검토하지 않는다는 6:1 결정을 발표했다.[49] 같은 해 9월, ECHR은 대심판정에서 이 사건을 심리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이는 더 이상 이 사건에 대해 항소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50]
2021년, 영국 대법원은 5가지 기술의 사용이 고문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6]
4. 1. 폭력 사태 발생
이 작전은 즉각적인 폭력 사태를 촉발하여 1969년 8월 폭동 이후 최악의 사태를 빚었다.[18] 영국군은 특히 벨파스트에서 IRA와 아일랜드 민족주의 폭도들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언론인 케빈 마이어스에 따르면 "도시가 광기에 사로잡혔다. 수백 대의 차량이 납치되고 공장이 불탔다. 왕당파와 IRA 무장 세력이 도처에 있었다."[22] 사람들은 영국군이 자기 동네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타오르는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도로와 거리를 막았다. 데리에서는 프리 데리 주변에 다시 바리케이드가 세워졌고, "이 지역은 이후 11개월 동안 영국 통치로부터 효과적으로 분리되었다."[23] 8월 9일부터 11일 사이에 24명이 사망하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구분 | 사망자 수 | 상세 내용 |
---|---|---|
민간인 | 20명 | 가톨릭 14명, 개신교 6명 |
임시 IRA 대원 | 2명 | 영국군에 의해 사살 |
영국군 대원 | 2명 | 임시 IRA에 의해 사살 |
[24]
사망한 민간인 중 17명은 영국군에 의해 사살되었고 다른 3명은 신원 미상의 공격자에 의해 사망했다.[24] 서벨파스트의 발리머피 주택 지구에서는 제1대대, 공수연대가 이틀에 걸쳐 가톨릭 민간인 11명을 살해하여 발리머피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 다른 쟁점은 북벨파스트의 아도인으로, 군인들이 8월 9일에 3명을 사살했다.[24] 종파적 폭력도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발생했다. 많은 개신교 가족들이 아도인을 탈출했고, 약 200명의 개신교인들이 "가톨릭 세력의 손에 넘어갈까 봐" 떠나면서 자기 집을 불태웠다.[25] 개신교와 가톨릭 가족은 "나중에 이 지역에 영구적인 평화선의 기초가 될 분계선의 양쪽으로" 도망쳤다.[22] 가톨릭 집은 아도인과 다른 곳에서도 불탔다.[25] 약 7,000명(대부분 가톨릭 신자)이 집을 잃었다.[25] 약 2,500명의 가톨릭 난민이 국경 남쪽의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도망쳐 새로운 난민 캠프가 세워졌다.[25]
5. 장기적인 영향
내부 구금은 북아일랜드의 종파적 긴장을 악화시키고, IRA의 핵심 구성원을 체포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북아일랜드 커뮤니티 관계 위원회의 가톨릭 의장이었던 모리스 헤이즈 상원의원은 내부 구금을 "정부가 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일 중 최악의 일"이라고 묘사했다.[28] 영국 국방부(MoD)는 내부 구금이 전체적으로 "큰 실수"였다고 평가했다.[29]
체포된 많은 사람들은 IRA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서두름과 무능함으로 인해 그들의 이름이 목록에 나타났다. 목록의 신뢰성 부족, 체포 과정, 그리고 구금자 학대 보고서는 더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비폭력적인 방법에 대한 희망을 잃게 만들었다.[10]
1972년은 사망자 수와 공격 횟수 면에서 트러블스에서 가장 폭력적인 해였다. 영국 왕립 해병대의 한 장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내부 구금은) 실제로 테러 활동을 증가시켰고, IRA 모집을 촉진했으며, 가톨릭과 개신교 공동체를 더욱 양극화시켰고, 절실히 필요한 가톨릭 온건파의 수를 줄였다.[30]
2013년, 기밀 해제된 문서에서 발리켈리에 심문 센터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어떠한 조사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인권 단체인 팻 피너케인 센터는 영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조사 및 유럽 인권 재판소(ECHR)로부터 이 사실을 숨겼다고 비난했다.[46] 2014년 6월, RTÉ 다큐멘터리 "고문 파일"은 1977년 당시 영국 내무부 장관 멀린 리스가 당시 영국 총리 제임스 캘러헌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이 편지에서 영국 정부 장관들, 특히 1971년 국방부 장관 피터 캐링턴이 '고문' 정책을 실제로 승인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아일랜드 정부 또는 ECHR의 지식과는 상반되는 내용이었다. 편지에는 "1971/72년 북아일랜드에서 고문 방법을 사용하기로 한 결정은 장관들, 특히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캐링턴 경에 의해 내려졌다고 생각합니다(고인은 브라이언 포크너에 의해 확인됨)"라고 명시되어 있다.[4][47]
2014년 폭로 이후, 신 페인 대표 게리 애덤스는 영국 정부가 "심문 대상자에게 사용된 방법의 심각성, 그들의 장기적인 신체적 및 심리적 결과, 이러한 심문이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 누가 이에 대한 정치적 권한과 허가를 부여했는지에 대해 유럽 인권 재판소에 거짓말을 했다"며 아일랜드 정부에 이 사건을 ECHR로 되돌릴 것을 촉구했다.[48] 2014년 12월 2일, 아일랜드 정부는 새로운 증거를 검토하고 생존자들의 요청에 따라 1978년 판결을 공식적으로 ECHR에 재검토를 요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5]
2018년 3월, ECHR은 원래 판결을 재검토하지 않는다는 6:1 결정을 발표했다.[49] 같은 해 9월, ECHR은 대심판정에서 이 사건을 심리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이는 더 이상 이 사건에 대해 항소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50]
2021년, 영국 대법원은 5가지 기법의 사용이 고문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6]
5. 1. 북아일랜드 직접 통치
내부 구금에 대한 반발은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 정부와 의회를 정지하고, 웨스트민스터에서 영국 북아일랜드 장관의 권한 아래 직접 통치를 시행하는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1972년 3월 23일에 일어났다.[27]5. 2. IRA 가입 증가
드미트리우스 작전 이후, 많은 수의 신병들이 임시 IRA와 공식 IRA에 가입했다.[25] 이 작전으로 인해 민족주의자들은 IRA와 자신들을 동일시하게 되었고, 비폭력적인 방법에 대한 희망을 잃게 되었다.[10]5. 3. 피의 일요일
1972년 1월 30일, 데리에서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은 반(反) 내부 구금 행진 중에 발생했으며, 영국군 공수부대가 비무장 시위대 14명을 사살했다.[31]6. 구금자 심문
드미트리우스 작전으로 체포된 구금자들은 영국군과 북아일랜드 경찰청(RUC)에 의해 심문을 받았다. 이들 중 일부는 '5가지 기술'로 알려진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32]
첫 급습에서 342명이 체포되었는데,[18] 체포된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이 군인들에게 폭행, 언어적 학대 및 위협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군인들이 경고 없이 집으로 쳐들어가 문과 창문을 통해 고무탄을 쏘았다는 주장도 있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구금 센터에서 3일 동안 구금되는 동안 구타, 언어적 학대, 위협을 당하고, 개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굶주렸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일부는 개틀릿을 통과하거나 '장애물 코스'를 달리도록 강요당하고, 머리카락을 강제로 깎이고, 옷을 벗겨진 채, 담배로 지지고, 머리에 자루를 씌우고, 목에 밧줄을 매달고, 총구를 머리에 들이대고, 머리카락을 잡아 끌리고, 맨발로 장갑차 뒤에 끌려가거나 인간 방패로 장갑차에 묶였다고 보고했다.[19][20] 일부는 두건을 쓰고 구타당한 후 헬리콥터에서 던져졌는데, 수백 피트 상공에 있다고 들었지만 실제로는 지면에서 불과 몇 피트 떨어져 있었다.[21]
12명의 피구금자들은 감각 박탈을 사용한 추가적인 "강도 높은 심문"을 위해 런던데리 주 배리켈리 외곽의 섀클턴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은 비밀 심문 센터였다. 10월에는 추가로 2명의 피구금자가 강도 높은 심문을 위해 선택되었다. 이 14명은 "복면인" 또는 "기니피그"로 알려졌다.[32]
이들은 후드를 씌우고, 수갑을 채워 헬리콥터로 이송되었는데, 가는 길에 군인들은 그들을 심하게 구타하고 헬리콥터에서 던져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도착 후에는 옷을 벗기고 사진을 찍었으며 의사의 검사를 받았다.[32]
7일 동안 심문을 받지 않을 때는 후드를 쓴 채 수갑을 차고 차가운 감방에 갇혀 지속적인 시끄러운 쉬 소리에 시달렸다. 이들은 여러 시간 동안 스트레스 자세로 서 있어야 했고 신체의 모든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구타를 당했다. 또한 수면, 음식, 음료를 박탈당했다. 일부는 생식기를 발로 차이고, 머리를 벽에 부딪히고, 공포탄으로 총을 맞고, 주사를 맞겠다는 협박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그 결과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탈진, 심한 불안, 우울증, 환각, 방향 감각 상실, 반복적인 의식 상실이 발생했다.[32][33]
6. 1. 5가지 기술
복면인에게 사용된 심문 방법은 '5가지 기술'로 알려졌다. 유럽 인권 재판소(ECHR)는 5가지 기술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32]- 벽에 세우기: 구금된 사람들에게 몇 시간 동안 "스트레스 자세"를 유지하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이를 겪은 사람들은 "손가락을 머리 위로 벽에 대고 다리를 벌리고 발을 뒤로 하여 몸무게를 주로 손가락에 싣고 발가락으로 서도록" 묘사했다.
- 후드 씌우기: 구금된 사람들의 머리에 검은색 또는 감색 가방을 씌우고 심문하는 동안을 제외하고는 처음에는 항상 그곳에 두는 것.
- 소음에 노출: 심문을 기다리는 동안, 지속적으로 시끄럽고 쉬 소리가 나는 방에 구금된 사람들을 가두는 것.
- 수면 박탈: 심문을 기다리는 동안, 구금된 사람들에게 수면을 박탈하는 것.
- 음식과 음료 박탈: 센터에 머무는 동안과 심문을 기다리는 동안 구금된 사람들에게 제한된 식단을 제공하는 것.
14명의 복면인은 5가지 기술 전체를 적용받은 유일한 피구금자였다. 그러나 그 후 몇 달 동안 일부 피구금자들은 5가지 기술 중 최소 하나와 다른 심문 방법에 시달렸다.[34] 여기에는 물고문,[35] 전기 충격, 성냥과 양초로 태우기, 뜨거운 전기 불 위에서 서서 구타하기, 생식기를 구타하고 쥐어짜기, 항문에 물건 삽입, 주사, 발바닥 채찍질, 러시안 룰렛과 같은 심리적 학대가 포함된다.
6. 2. 파커 보고서
영국 정부는 허버트 파커, 와딩턴 남작 파커를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 위원회를 통해 '5가지 기술'의 법적, 윤리적 측면을 조사했다. "파커 보고서"[36]는 1972년 3월 2일에 발표되었으며, 5가지 기술이 국내법에 따라 불법이라고 결론 내렸다.같은 날 에드워드 히스 영국 총리는 영국 하원에서 이 기술들을 향후 심문 보조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37]
7. 유럽 인권 기구의 판결
유럽 인권 재판소(ECtHR)는 1978년 ''아일랜드 대 영국'' 사건(사건 번호 5310/71)에서 복면인에게 사용된 심문 방법인 '5가지 기술'이 조합되어 사용된 것은 비인간적이고 굴욕적인 처우에 해당하지만, 고문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는 특정한 강도와 잔혹함의 고통을 유발하지는 않았다고 판결했다.[45] 즉, 5가지 기술의 사용이 유럽 인권 협약 제3조를 위반하는 비인간적이고 굴욕적인 처우의 관행에 해당한다고 결론 내렸다.
1977년 2월 8일, ECHR 심리에서 영국 법무 장관은 파커 보고서 및 영국 정부 정책에 따라 '5가지 기술'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문 보조 수단으로 다시 도입되지 않을 것이라는 무조건적인 약속을 했다.
7. 1. 유럽 인권 위원회
아일랜드 정부는 다섯 가지 기술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을 대신하여 유럽 인권 위원회에 영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아일랜드 대 영국'', 1976 Y.B. Eur. Conv. on Hum. Rts. 512, 748, 788–94 (유럽 인권 위원회)).[43] 위원회는 다섯 가지 방법을 결합하여 사용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고문에 해당한다고 만장일치로 판결했다.[43][44]# 감각 박탈을 일으키는 기술로 인한 스트레스의 강도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인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
# "정보를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술을 적용하는 것은 정보를 얻고 자백을 강요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거부터 알려져 온 조직적인 고문 방법과 명백한 유사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보를 얻고 자백을 강요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거 시대에 적용된 체계와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현대적인 고문 체계이다."
7. 2. 유럽 인권 재판소 (ECHR)
유럽 인권 재판소(ECtHR)는 복면인에게 사용된 심문 방법인 '5가지 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1978년 ''아일랜드 대 영국'' 사건(사건 번호 5310/71)에서[45], 법원은 5가지 기술이 조합되어 사용된 것은 비인간적이고 굴욕적인 처우에 해당하지만, 고문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는 특정한 강도와 잔혹함의 고통을 유발하지는 않았다고 판결했다. 즉, 5가지 기술의 사용이 유럽 인권 협약 제3조를 위반하는 비인간적이고 굴욕적인 처우의 관행에 해당한다고 결론 내렸다.
1977년 2월 8일, ECHR 심리에서 영국 법무 장관은 파커 보고서 및 영국 정부 정책에 따라 '5가지 기술'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문 보조 수단으로 다시 도입되지 않을 것이라는 무조건적인 약속을 했다.
8. 이후 경과
내부 구금에 대한 반발은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 정부와 의회를 정지하고 웨스트민스터에서 영국 북아일랜드 장관의 권한 아래 직접 통치로 대체하는 결정에 기여했는데, 이는 1972년 3월 23일에 일어났다.[27] 북아일랜드 정부 정지 이후, 내부 구금은 1975년 12월 5일까지 직접 통치 행정부에 의해 일부 변경되어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총 1,981명이 구금되었는데, 1,874명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출신이었고 107명은 연합주의자 출신이었다.[1]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내부 구금 기간이 북아일랜드의 종파적 긴장을 악화시키는 동시에 IRA의 핵심 구성원을 체포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본다. 당시 북아일랜드 커뮤니티 관계 위원회의 가톨릭 의장이었던 모리스 헤이즈 상원의원은 내부 구금을 "정부가 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일 중 최악의 일"이라고 묘사했다.[28] 영국 국방부(MoD)의 검토에 따르면 내부 구금은 전체적으로 "큰 실수"였다.[29]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정책이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계획과 실행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며 더 미묘한 견해를 보였다. 국방부 검토에서는 작전 데메트리우스가 50명의 임시 IRA 장교, 107명의 IRA 지원병을 체포하고 IRA와 그 구조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얻어 상당한 무기와 폭발물 은닉처를 발견하는 등 단기적인 이점을 얻었다고 주장한다.[29]
체포된 많은 사람들은 IRA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그들의 이름은 서두름과 무능함으로 인해 목록에 나타났다. 이 목록의 신뢰성 부족과 그 뒤에 이어진 체포, 그리고 구금자 학대 보고서가 더해져 더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IRA와 동일시하고 비폭력적인 방법에 대한 희망을 잃게 되었다.[10] 작전 데메트리우스 이후, 많은 수의 신병들이 임시 IRA와 공식 IRA에 가입하기 위해 나섰다.[25] 내부 구금은 또한 폭력의 급증으로 이어졌다. 작전 전 8개월 동안 북아일랜드에서 34명이 분쟁 관련 사망을 했다. 작전 후 4개월 동안 140명이 사망했다.[25] 영국 왕립 해병대의 현역 장교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그것(내부 구금)은 실제로 테러 활동을 증가시켰고, 아마도 IRA 모집을 촉진했으며, 가톨릭과 개신교 공동체를 더욱 양극화시켰고, 절실히 필요한 가톨릭 온건파의 수를 줄였다.[30]
사망자 수와 공격 횟수 면에서 1972년은 트러블스에서 가장 폭력적인 해였다. 14명의 비무장 시위대가 영국 공수부대에 의해 사살된 피의 일요일 (1972년 1월 30일)의 치명적인 행진은 반 내부 구금 행진이었다.[31]
2013년, 기밀 해제된 문서에서 발리켈리에 심문 센터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어떠한 조사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인권 단체인 팻 피너케인 센터는 영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조사 및 유럽 인권 재판소로부터 이 사실을 숨겼다고 비난했다.[46] 2014년 6월, RTÉ 다큐멘터리 "고문 파일"에서 1977년 당시 영국 내무부 장관 멀린 리스가 당시 영국 총리 제임스 캘러헌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이 편지에서 영국 정부 장관들, 특히 1971년 국방부 장관 피터 캐링턴이 '고문' 정책을 실제로 승인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아일랜드 정부 또는 ECHR의 지식과는 상반되는 내용이었다. 편지에는 "1971/72년 북아일랜드에서 고문 방법을 사용하기로 한 결정은 장관들, 특히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캐링턴 경에 의해 내려졌다고 생각합니다(고인은 브라이언 포크너에 의해 확인됨)"라고 명시되어 있다.[4][47]
2014년 폭로 이후, 신 페인의 대표 게리 애덤스는 영국 정부가 "심문 대상자에게 사용된 방법의 심각성, 그들의 장기적인 신체적 및 심리적 결과, 이러한 심문이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 누가 이에 대한 정치적 권한과 허가를 부여했는지에 대해 유럽 인권 재판소에 거짓말을 했다"며 아일랜드 정부에 이 사건을 ECHR로 되돌릴 것을 촉구했다.[48] 2014년 12월 2일, 아일랜드 정부는 새로운 증거를 검토하고 생존자들의 요청에 따라 1978년 판결을 공식적으로 ECHR에 재검토를 요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5]
2018년 3월, ECHR은 원래 판결을 재검토하지 않는다는 6:1 결정을 발표했다.[49] 같은 해 9월, ECHR은 대심판정에서 이 사건을 심리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이는 더 이상 이 사건에 대해 항소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50]
2021년, 영국 대법원은 5가지 기술의 사용이 고문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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