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닝다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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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따닝따이도는 역사적으로 미얀마 남동부 지역을 포괄하던 지역으로, 현재의 따닝따이도, 몬 주, 꺼인 주의 남부에 해당한다. 1057년까지 따톤 왕국, 이후 버간 왕조의 일부였으며, 버간 멸망 후 수코타이 왕조와 아유타야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564년 버마족이 다시 지배했으나 이후 시암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1824~1826년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 이후 영국령이 되었다. 영국 식민지 시대 몰러먀잉이 수도였으며, 1948년 독립 후 꺼인 주가, 1974년 몬 주가 분리되었다. 현재는 3개의 군(더왜군, 몌이군, 꼬따웅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더왜대학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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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닝다이도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지리 | |
위치 | 미얀마 남부 |
면적 | 43,328 |
일반 정보 | |
버마어 이름 | တနင်္သာရီတိုင်းဒေသကြီး |
로마자 표기 | ta.nangsari tuing: desa. kri: |
주도 | 더왜 |
인구 (2000년) | 1,356,000여 명 |
민족 및 종교 | |
민족 | 버마족 여카잉족 몬족 샨족 타이족 꺼인족 말레이족 |
종교 | 불교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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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역사적으로 떠닝따이 지역은 오늘날의 떠닝따이도, 몬주, 꺼인주 남부에 해당하는 말레이 반도 상부 전체를 포함하였다. 초기 따톤 왕국과 버간 왕조의 지배를 거쳐 시암계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와 아유타야 왕조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이후 따웅우 왕조와 꼰바웅 왕조 시기 버마족과 시암족 간의 오랜 영토 분쟁 끝에 버마의 지배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 이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미얀마가 독립한 1948년 이후 행정 구역 개편을 통해 꺼인주와 몬주가 분리되고 수도가 더왜로 이전되어 현재의 떠닝따이도가 형성되었다.
2. 1. 고대 및 중세 시대
역사적으로 떠닝따이 지역은 오늘날의 떠닝따이도, 몬주, 꺼인주 남부에 해당하는 말레이 반도 상부 전체를 포함했다. 이 지역은 1057년까지 따톤 왕국의 일부였으며, 이후 버간 왕조의 어노여타 왕에 의해 정복되어 버간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1287년 버간 왕조가 멸망한 후, 이 지역은 시암족 왕국인 수코타이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이후 아유타야 왕조로 계승되었다. 당시 지역의 북쪽 경계는 오늘날의 몰러먀잉 부근 땅륀강 근처였다.1564년, 따웅우 왕조의 버인나웅 왕이 시암을 정복하면서 이 지역은 다시 버마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유타야 왕조는 1587년에 독립을 되찾은 후, 1593년에는 떠닝따이 남부를, 1599년에는 반도 상부 전체를 다시 차지했다. 1614년, 따웅우 왕조의 어나우패룬 왕은 북쪽의 더왜 해안 지역을 되찾았으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1759년, 꼰바웅 왕조의 얼라웅퍼야 왕이 이 지역 전체를 다시 회복하였다. 버마족은 이후 수십 년간 떠닝따이를 여러 차례의 시암 침공을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했다. 시암족은 1792년에 떠닝따이를 되찾으려 시도했으나 버마족에 의해 격퇴당했다. 1808년부터 1809년까지 버마족은 떠닝따이를 기반으로 마지막 시암 침공을 시도하여 끄라 지협을 따라 남하해 푸껫을 공격했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2. 2. 버마족 왕조와 시암과의 갈등
역사적으로 현재의 따닝다이도, 몬주, 꺼인주 남부에 해당하는 말레이 반도 상부 전체가 떠닝따이 지역에 포함되었다. 이 지역은 1057년까지 따톤 왕국의 일부였으나, 이후 버간 왕조의 어노여타 왕에 의해 정복되어 버마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287년 버간 왕조가 멸망한 뒤, 이 지역은 시암 왕국인 수코타이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후 아유타야 왕조로 계승되었다. 당시 떠닝따이 지역의 북쪽 경계는 오늘날의 몰러먀잉 근처 땅륀강 주변이었다.
1564년, 따웅우 왕조의 버인나웅 왕이 시암을 정복하면서 떠닝따이는 다시 버마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아유타야 왕조는 1587년에 독립을 되찾은 후 반격에 나서, 1593년에는 떠닝따이 남쪽 지역을, 1599년에는 반도 상부 전체를 다시 차지했다. 1614년, 따웅우 왕조의 어나우패룬 왕은 북쪽의 더왜 해안 지역을 되찾는 데 성공했지만, 나머지 지역까지 점령하지는 못했다.
1759년, 꼰바웅 왕조의 얼라웅퍼야 왕이 마침내 떠닝따이 지역 전체를 회복하였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버마 왕조는 떠닝따이를 시암 침공을 위한 전초 기지로 삼았다. 시암 왕조는 1792년에 떠닝따이를 되찾으려 시도했지만 버마 왕조에게 격퇴당했다. 1808년부터 1809년까지 버마 왕조는 마지막으로 떠닝따이를 발판 삼아 시암을 침공하여 끄라 지협을 따라 남하해 푸껫을 공격했으나, 이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2. 3. 영국 식민지 시대
영국은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1824~1826) 이후 이 지역을 차지하였다. 전쟁 직후 영국과 시암은 1826년 6월 20일과 1868년에 국경 조약을 맺어 경계를 확정했다. 몰러먀잉은 영국령 버마의 첫 수도가 되었다. 이후 영국은 1852년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을 통해 저지 미얀마 전체를 점령하였고, 수도를 얀군으로 옮겼다. 1852년부터 떠닝따이도는 오늘날의 몬주, 꺼인주, 버고도의 따웅우군을 포함하는 미얀마 남동부 지역을 아우르게 되었으며, 몰러먀잉이 떠닝따이도의 수도 역할을 하였다.2. 4. 독립 이후
1948년 영국으로부터 미얀마가 독립했을 때, 떠닝따이도의 북동쪽 지역이 분리되어 새롭게 꺼인주가 만들어졌다. 이후 1974년에는 떠닝따이도의 남은 북부 지역이 다시 분리되어 몬주가 신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수도였던 몰러먀잉은 몬주에 속하게 되었고, 떠닝따이도의 수도는 더왜로 이전되었다.3. 행정 구역
3개의 군으로 구성된다.
- 더왜군
- 몌이군
- 꼬따웅군
4. 교육
- 더왜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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