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레 리아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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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파엘레 리아리오는 15세기 이탈리아의 추기경으로, 교황 식스토 4세의 종손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추기경이 되었으며, 여러 교구의 관리자를 역임하며 재산을 모았다. 메디치 가문에 대한 파치 음모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로렌초 데 메디치의 도움으로 석방되었고, 교황청 재무원과 교황 궁무처장을 지냈다. 예술 후원에 힘써 미켈란젤로를 후원하고 칸첼레리아 궁전 건설을 주도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재임 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517년 교황 레오 10세 암살 음모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으며, 여러 드라마와 만화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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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레 리아리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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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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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 오스티아-벨레트리 주교급 추기경 |
임기 | 1511–1521년 |
서임 | 1504년 4월 9일 |
서임자 | 율리오 2세 |
추기경 서임 | 1477년 12월 10일 |
추기경 서임자 | 식스토 4세 |
계급 | 주교급 추기경 |
출생일 | 1461년 5월 3일 |
출생지 | 사보나 |
사망일 | 1521년 7월 9일 |
사망지 | 나폴리, 나폴리 왕국 |
국적 | 이탈리아 |
종교 | 로마 가톨릭 |
매장지 | 산티 아포스톨리 성당 |
2. 생애
리아리오는 1477년 산 조르조 인 벨라브로 추기경에 임명된 후 여러 교구 관리직을 맡아 많은 수입을 얻었지만, 대리인 임명 외에 별다른 의무는 없었다. 피사 대학교에서 교회법을 공부하던 중 페스트로 인해 피사를 떠났다.[2] 1478년 봄, 로마로 돌아가던 중 피렌체에서 파치 음모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시에나에서 정식 추기경으로 임명되고, 페루자로 사절로 파견되었다.[2]
1480년 사제 서품을 받고 산 로렌초 인 다마소 직함을 받은 리아리오는 1483년 카메를렌고에 임명되었다. 1484년 오르시니 가문과 콜론나 가문 간의 전쟁에 휘말려 친구를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488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리아리오를 포를리와 이몰라 통치자인 외삼촌 지로라모 리아리오에게 특사로 보냈다. 한편, 리아리오는 산 로렌초 인 다마소 성당 옆에 자신의 궁전을 짓도록 위임했다(1486년).
인노첸시오 8세의 아들이 리아리오의 저택에서 카드 게임으로 큰 돈을 잃자, 교황이 돈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리아리오는 이미 궁전 건설에 사용했다고 답했다. 인노첸시오 8세 사후, 리아리오는 챔벌린으로서 로마의 질서를 유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2] 1492년 교황 선거에 참여했으나 젊은 나이로 인해 초기 투표에서 제외되었고, 결국 로드리고 보르자에게 투표하여 카르타헤나 주교직을 받았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재임 기간(1492-1503년) 동안 리아리오는 외교관이자 교황의 조언자로 활동하며, 1493년 카테리나 스포르차에게 특사로 파견되어 프랑스 군대가 포를리와 이몰라를 통과하는 것을 막았다. 교황 율리오 2세는 리아리오의 친척이었지만 항상 동맹은 아니었으며, 그를 오스티아와 벨레트리 주교직으로 임명했다.
1517년 알폰소 페트루치 추기경 등이 교황 레오 10세 암살 음모를 꾸몄으나, 리아리오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페트루치의 살해 의도를 알고도 묵인했다. 레오 10세는 음모를 사전에 감지하고 관련자들을 처형했으며, 리아리오는 파치 음모 연루 전력 때문에 산 로렌초 인 다마소 옆 궁전을 교황에게 바치고 목숨을 건졌다. 이 궁전은 클레멘스 7세(줄리오 데 메디치)에게 넘어갔고, 이후 칸첼레리아 궁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리아리오는 60세의 나이로 나폴리에서 사망했고, 그의 묘는 로마의 사도 성당에 있다.
2. 1. 어린 시절
사보나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리아리오는 안토니오 산소니(Antonio Sansoni)와 비올란테 리아리오(Violante Riario)의 아들이었다. 비올란테 리아리오는 훗날 1471년 교황 식스토 4세가 되는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의 질녀였다.[2]교황 식스토 4세는 자신의 가문의 번영을 위해 친족중용 정책을 펼쳤다. 리아리오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종손(형제의 자녀가 낳은 후손, 질녀의 아들)이었기에 1477년 12월 10일에 산 조르조 인 벨라브로 교회의 추기경이 되었고,[3] 쿠엔카 교구, 피사 교구, 살라망카 교구, 트레기에 교구, 오스마 교구 등 여러 교구의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이 교구들은 그에게 좋은 수입을 가져다주었으며, 대리인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책무도 없었다. 그는 16세의 나이로 피사 대학교에서 교회법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2]
2. 2. 파치 음모 연루
1478년 봄, 17세의 리아리오는 로마로 돌아가던 중 파치 음모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파치 음모는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에서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하려는 시도였다.[2] 리아리오는 암살 계획에 대해 알지 못했고 단지 삼촌 프란체스코 살비아티의 심부름으로, 로렌초 데 메디치와 줄리아노 데 메디치 형제에게 피렌체 대성당에서 열리는 일요일 미사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을 전달했을 뿐이었다.[2]그러나 리아리오는 음모 주동자인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대주교 프란체스코 살비아티의 친척이라는 이유로[2] 피렌체 당국에 체포되었다. 몇 주 후, 로렌초 데 메디치의 중재로 석방되었다.[2] 1478년 6월 22일, 시에나에서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4일 후 페루자로 사절로 파견되었다.[2]
2. 3. 교황 궁무처장 경력
1484년, 리아리오는 오르시니 가와 콜론나 가문 사이의 전쟁에 개입하여 친구 로렌초 오도네 콜론나의 목숨을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콜론나는 오르시니 가 인물을 살해한 혐의로 교황 식스토 4세에게 처형되었다.[2] 1488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리아리오 추기경을 그의 외삼촌 지롤라모 리아리오에게 교황 특사로 보냈다. 지롤라모 리아리오는 당시 교황령에 반기를 든 이몰라와 포를리의 책임자였다. 한편, 리아리오 추기경은 산 로렌초 인 다마소 성당 옆에 자신의 궁전 건설을 이미 의뢰한 상태였다(1486년).인노첸시오 8세의 아들 프란체스케토 치보가 리아리오의 거처에서 열린 카드 게임에서 15000두캇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교황이 추기경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이미 그 돈을 궁전 건설에 사용했다고 답했다.
교황 궁무처장으로서 리아리오는 인노첸시오 8세 사후 로마의 질서를 확립한 공로를 인정받았다.[2] 그는 1492년 콘클라베에서 교황 후보였으나, 젊은 나이 때문에 초기 투표에서 제외되었다. 그는 결국 로드리고 보르자(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투표했고, 그 대가로 수익성이 좋은 카르타헤나 주교직을 받았다.
알렉산데르 6세 재임 기간(1492-1503년) 동안 리아리오는 외교관이자 교황의 고문으로 활약했다. 1493년, 그는 지롤라모 리아리오의 미망인 카테리나 스포르차에게 교황 특사로 파견되어 프랑스 군대가 포를리와 이몰라를 통과하는 것을 막도록 설득했다.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년)는 리아리오의 친척이었지만 항상 그의 동맹은 아니었음에도, 그를 오스티아 주교직으로 올려주었다.
2. 4. 교황 독살 미수 사건 가담
1517년 6월, 페트루치 추기경 등은 교황 레오 10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1] 리아리오 추기경은 이 음모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페트루치의 교황 살해 의도를 알고도 묵인했다.[1] 교황 레오 10세는 이 음모를 사전에 감지하고 관련자들을 체포, 처형했다.[1] 리아리오는 과거 파치 음모에 연루된 전력이 있었기에, 산 로렌초 인 다마소 교회 옆 자신의 궁전을 교황에게 바치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졌다.[1] 레오 10세는 이 궁전을 사촌 줄리오 데 메디치에게 넘겨주었고, 그는 이곳을 교황청 상서원으로 사용했다.[1] 이후 리아리오의 궁전은 칸첼레리아 궁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3. 예술 후원과 명성
미술과 특히 조각에 대한 열정으로 알려진 리아리오 추기경의 예술적 안목은 로마가 전성기 르네상스에 도달하는데 기여했다. 피렌체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은 그의 거대한 주거지는 교황 율리오 2세 시기 로마에서 유행한 새로운 기념물 양식의 첫 번째 건축물이었다.[1] 리아리오는 종교 문제에는 무관심하고, 성직자라기보다는 정치인, 신학자라기보다는 메세나스와 같은 당대의 전형적인 고위 성직자로 여겨진다.[1]
3. 1. 미켈란젤로 후원
미술과 특히 조각에 열성적이었던 리아리오 추기경은 젊은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하였다.[1] 1496년 잠자는 에로스상(혹은 잠자는 큐피드)이 고대 조각상으로 속여 팔렸는데, 심미안을 지녔던 리아리오는 이것이 가짜임을 알아차렸지만 조각상의 뛰어남에 매료되었다.[1] 그는 조각가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초청하였고, 미켈란젤로는 그곳에서 생애 주요 세 작품을 맡게 된다.[1]3. 2. 칸첼레리아 궁전 건설
미술과 특히 조각에 대한 열정으로 알려진 리아리오 추기경의 예술적 안목은 로마가 전성기 르네상스에 도달하는 데 기여했다. 피렌체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은 그의 거대한 주거지는 교황 율리오 2세 시기 로마에서 유행한 새로운 기념물 양식의 첫 번째 건축물이었다. 리아리오는 또한 젊은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했다. 1496년 잠자는 에로스(잠자는 큐피드)상이 고대 조각상으로 그에게 판매되었는데, 심미안을 가진 리아리오는 이것이 가짜임을 알아차렸지만 조각상의 뛰어남에 매료되어 그 제작자인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초대했다. 미켈란젤로는 그곳에서 그의 생애 주요 작품들을 의뢰받게 된다.[1]4. 대중 문화
리아리오는 여러 대중 매체에 등장했다. 드라마로는 메디치와 보르지아에 등장했고,[1] 만화로는 체자레: 파괴를 창조한 자의 주요 등장인물이며, 2023년에는 이 만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에서 키야마 하루키가 리아리오 역을 연기했다.
4. 1. 드라마 "메디치"
메디치 시즌 2와 3에 등장한다. 시즌 2에서는 프란체스코 디 라이몬도가, 시즌 3에서는 로리스 데 루나가 연기했다.[1]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방영된 TV 시리즈인 보르지아에서는 미국 배우 스콧 윌리엄 윈터스가 연기했다.[1] 보르지아에서 그는 먼 친척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의 측근 공모자로, 로드리고 보르지아와 보르지아 가문에 대항하며, 정치적 능력과 유용함 덕분에 알렉산데르 통치 하에서 교회의 부총리까지 오른다.[1]4. 2. 드라마 "보르지아"
스콧 윌리엄 윈터스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방영된 TV 시리즈 보르지아에서 라파엘레 리아리오를 연기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먼 친척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의 측근 공모자로, 로드리고 보르지아와 보르지아 가문에 대항한다. 정치적 능력과 유용함 덕분에 알렉산데르 통치 하에서 교회의 부총리까지 오른다.4. 3. 만화 "체자레"
체자레: 파괴를 창조한 자 만화에서 라파엘레 리아리오는 주요 등장인물로 묘사된다. 이 만화는 체사레 보르자가 알렉산데르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해에 피사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기를 다룬다. 만화에서 리아리오는 피사 대주교이며, 체자레는 그의 궁전에서 함께 생활한다. 2023년 무대 뮤지컬 각색에서는 키야마 하루키가 리아리오 역을 맡았다.참조
[1]
웹사이트
15th century overview - 06
http://augnet.org/de[...]
Spirit Media Australia
2014-11-18
[2]
웹사이트
Sansoni Riario, Raffaele (1460-1521)
https://cardinals.fi[...]
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
[3]
서적
Hierarchia catholica medii aevi
Monasterii
[4]
웹인용
15th century overview - 06
http://augnet.org/de[...]
Spirit Media Australia
201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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