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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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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꾸인은 본래 이름이 레조안흐우이며, 18세기 후반 베트남 후 레 왕조 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떠이선 왕조가 정권을 잡았을 때 레 민제를 지지하며 청나라와 교류했으며, 청나라에 머리 모양과 복장을 바꾸라는 요구를 거부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1802년 응우옌 왕조가 떠이선 왕조를 멸망시킨 후 베트남으로 돌아와 민제 등의 유해를 안장했지만, 응우옌 왕조의 복식으로 바꾸는 것을 거부했다. 1805년에 사망했으며, 저서로는 《북행총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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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꾸인
기본 정보
레뀐
레뀐
본명레뀐
출생1956년 12월 27일
출생지하이즈엉성
사망2024년 1월 21일 (67세)
사망지하노이
직업배우
활동 기간1978년 ~ 2024년
배우자팜투하
자녀레뚜언아인
레지아린
경력
소속 극단베트남 드라마 극단
주요 작품땅과 사람
변두리 이야기
경찰대 이야기
생명의 선
옛날 여름
법과 운명
세월의 소금
저녁놀 너머
수상
골든 스워드상2013년
인민 예술가 칭호2019년

2. 생애

레꾸인은 레 민제의 명으로 군량 징수를 맡았으나, 응우옌후에가 청군을 격파하고 탕롱을 탈환하면서 민제는 손사의를 따라 남녕으로 물러났다.[1] 레꾸인은 민제의 명으로 국내에 남아 토호(土豪)들을 조유(詔諭)하며 후일을 도모했다.[1] 건륭제는 손사의의 패전에 책임을 물어 파면하고, 복강안을 대신 임명했다.[1] 응우옌후에가 대리인을 청나라에 보내 조현하자, 건륭제는 더 이상 후 레 왕조를 지지하지 않았다.[1]

복강안은 민제에게 머리를 깎고 의복을 바꾸어 떠이선 왕조의 암살을 피할 것을 건의했고, 민제를 비롯한 유신들은 이에 따랐다.[1] 레꾸인 등도 남녕으로 불려왔으나, 복강안의 명령에 "우리들의 머리는 잘라도 좋으나 머리카락은 깎을 수 없다. 피부도 발라내도 좋으나 의복은 바꿀 수 없다."라며 강하게 거부했다.[1] 복강안은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그를 광서(廣西)에 안치하였다.[1]

이후 민제가 연경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건륭제는 레꾸인이 변발과 역복을 거부한 것에 분노하여 유신들을 모두 하옥시켰다.[1] 1799년, 민태후(愍太后)가 죽자 가경제는 유신들을 석방하고 베트남의 머리 모양과 복장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하였다.[1]

1802년 11월, 응우옌 왕조자롱 황제떠이선 왕조를 멸망시키고, 레꽝딘(黎光定)을 청나라에 파견하여 책봉을 요청하였다. 레꾸인은 귀국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다.[1] 그는 민태후, 레 민제, 원자(元子) 레주이투옌(黎維詮)의 영구를 베트남으로 호송하여 북성(北城)에 안장한 뒤 응우옌 왕조의 복식으로 고쳐 입는 것을 거절하였다.[1] 1805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저서로는 《북행총기(北行叢記)》가 있다.[1]

2. 1. 출생과 초기 활동

'''레조안흐우'''(Lê Doãn Hữu|려윤유vie)는 박닌성에 속하는 경북진(京北鎭) 순안부(順安府) 출신이다.

1786년, 떠이선 왕조응우옌후에찐 주를 무너뜨리자, 레꾸인은 300명을 이끌고 북하(北河) 지역에서 근왕하였다. 레 민제 즉위 후 경북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1]

1787년 음력 12월, 부반념탕롱을 점령하자 민제는 북쪽으로 피신했고, 레꾸인은 란군공(瓓郡公) 레주이찌(黎維祗)와 함께 태후(太后) 응우옌티응옥또(阮氏玉素)와 원자(元子) 레주이투옌(黎維詮)을 까오방으로 모셨다. 이후 레꾸인과 응우옌후이뚝(阮輝宿) 등은 태후를 용주(龍州)로 모셨고, 양광총독(兩廣總督) 손사의는 이들을 남녕(南寧)에 안치하였다. 레꾸인과 응우옌꾸옥동(阮國棟)은 민제에게 돌아갔다. 민제는 쩐민안(陳名案)과 레주이단(黎維亶)을 청나라에 보내 건륭제에게 왕조 회복을 요청했다.[1] 1788년, 청군이 탕롱을 점령하고 민제를 복위시키자, 레꾸인은 장파후(長派侯)에 봉해지고 총병(總兵)의 정대(頂戴)를 받았다.[1]

2. 2. 떠이선 왕조 시기

1786년, 떠이선 왕조응우옌후에가 북상하여 찐 주를 붕괴시키자 레꾸인은 3백 명을 이끌고 북하(北河) 지역으로 가서 근왕하였다. 레 민제가 즉위한 뒤 경북으로 파견되어 그곳을 진수하였다.[1]

1787년 음력 12월, 부반념이 군사를 이끌고 탕롱을 정령하자 민제는 북쪽으로 도주하였고, 레꾸인과 란군공(瓓郡公) 레주이찌(黎維祗)는 함께 태후(太后) 응우옌티응옥또(阮氏玉素)와 원자(元子) 레주이투옌(黎維詮)을 까오방으로 호송하였다. 레꾸인과 응우옌후이뚝(阮輝宿) 등은 태후를 용주(龍州)로 호송하였고, 양광총독(兩廣總督) 손사의는 그들을 남녕(南寧)에 안치하였다. 일이 마무리되자 레꾸인과 응우옌꾸옥동(阮國棟)은 민제의 곁으로 돌아갔다. 이후 민제가 쩐민안(陳名案)과 레주이단(黎維亶)을 청나라에 보내 건륭제에게 왕조를 회복시키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1]

1788년, 청군이 탕롱을 점령하고 민제를 복위시켰다. 레꾸인은 그 공로로 장파후(長派侯)에 봉해졌고, 동시에 총병(總兵)의 정대(頂戴)를 받았다.[1]

레꾸인은 민제의 명으로 군대의 양식을 징수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때 응우옌후에가 청군을 격파하고 탕롱을 탈환하자 민제는 손사의를 따라 남녕으로 물러났다. 레꾸인은 민제의 명을 받고 국내에 머물러 토호(土豪)들을 조유(詔諭)하였으며, 회복을 도모하였다. 건륭제는 손사의가 패배하였음을 알고 그를 관직에서 파면하였고, 복강안으로 하여금 대신하도록 했다. 응우옌후에가 대리인을 청나라로 파견해 조현하게 한 뒤 건륭제는 다시 후 레 왕조를 지지하지 않았다. 복강안은 즉시 민제에게 때가 한여름이므로 원정하는 것은 의당치 못하다고 하였고, 머리를 깎고 의복을 바꾸어 떠이선 왕조의 암살을 면하는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민제를 필두로 후 레 왕조의 유신들은 분분히 머리를 깎고 의복을 바꾸었다. 레꾸인 등도 국내에서 남녕으로 불려왔고, 복강안은 그에게 똑같이 할 것을 명령하였다. 레꾸인은 크게 노하여 "우리들의 머리는 잘라도 좋으나 머리카락은 깎을 수 없다. 피부도 발라내도 좋으나 의복은 바꿀 수 없다."면서 거부하였다. 복강안은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그를 광서(廣西)에 안치하였다.[1]

이후 민제가 연경으로 옮겨 머물렀는데, 건륭제가 레꾸인이 머리를 깎고 의복을 바꾸는 것을 거부하였다는 데 크게 분노하여 그들 유신들을 모두 하옥시켰다. 1799년, 민태후(愍太后)가 죽자 가경제는 즉시 그들을 석방하였고, 베트남의 머리 모양과 복장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하였다.[1]

2. 3. 청나라와의 관계

1788년, 청군이 탕롱을 점령하고 레 민제를 복위시키자, 레꾸인은 그 공로로 장파후(長派侯)에 봉해졌고, 동시에 총병(總兵)의 정대(頂戴)를 받았다.[1]

레꾸인은 민제의 명으로 군량 징수를 맡았으나, 응우옌후에가 청군을 격파하고 탕롱을 탈환하면서 민제는 손사의를 따라 남녕으로 물러났다.[1] 레꾸인은 국내에 남아 토호(土豪)들을 조유(詔諭)하며 후일을 도모했다.[1] 건륭제는 손사의의 패배에 책임을 물어 파면하고, 복강안을 대신 임명했다.[1] 응우옌후에가 대리인을 청나라에 보내 조현하자, 건륭제는 더 이상 후 레 왕조를 지지하지 않았다.[1]

복강안은 민제에게 머리를 깎고 의복을 바꾸어 떠이선 왕조의 암살을 피할 것을 건의했고, 민제를 필두로 한 유신들은 이에 따랐다.[1] 레꾸인 등도 남녕으로 불려왔으나, 복강안의 명령에 "우리들의 머리는 잘라도 좋으나 머리카락은 깎을 수 없다. 피부도 발라내도 좋으나 의복은 바꿀 수 없다."라며 강하게 거부했다.[1] 복강안은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그를 광서(廣西)에 안치하였다.[1]

이후 민제가 연경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건륭제는 레꾸인이 머리를 깎고 의복을 바꾸는 것을 거부한 것에 크게 분노하여 유신들을 모두 하옥시켰다.[1] 1799년, 민태후(愍太后)가 죽자 가경제는 유신들을 석방하고 베트남의 머리 모양과 복장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하였다.[1]

2. 4. 응우옌 왕조 시기

1802년 11월, 응우옌 왕조자롱 황제떠이선 왕조를 멸망시키고, 레꽝딘(黎光定)을 청나라에 파견하여 책봉을 요청하였다. 레꾸인은 베트남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1] 그는 민태후(愍太后), 레 민제, 원자(元子) 레주이투옌(黎維詮)의 영구를 베트남으로 호송하여 북성(北城)에 안장한 뒤 응우옌 왕조의 복식으로 고쳐 입는 것을 거절하였다.[1] 1805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저서로는 《북행총기(北行叢記)》가 있다.[1]

3. 저서


  • 북행총기
  • 북소자정부[4]

참조

[1] 서적 Đại Nam thực lục https://vi.wikisourc[...]
[2] 서적 Việt Nam sử lược https://vi.wikisourc[...]
[3] 서적 Hoàng Lê nhất thống chí https://zh.wikisourc[...]
[4] 웹사이트 Đền Cố Lê chìm vào quên lãng http://cinet.vn/?c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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