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저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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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저 동맹은 1444년 알바니아의 영주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한 군사 동맹이다. 스칸데르베그가 주도하여 레저에서 결성되었으며, 알바니아의 주요 가문들이 참여했다. 동맹은 토르비올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오스만 제국에 저항했으나, 내부 분열과 스칸데르베그 사후 쇠퇴했다. 레저 동맹은 알바니아 국가 형성의 기반이 되었으며, 알바니아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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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저 동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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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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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알바니아어) | Lidhja e Lezhës |
다른 명칭 (알바니아어) | Lidhja Arbërore |
존속 기간 | 1444년 – 1479년 |
이념 | 해당 없음 |
본부 | 해당 없음 |
영토 범위 | |
동맹 영토 내 | 두카지니 공국 자하리아 공국 카스트리오티 공국 아리아니티 공국 무자카 공국 |
동맹 영토 외 | 알바니아 베네타 알바니아 산자크 디브라 산자크 |
지리적 위치 | |
정치 및 군사 | |
연합 대상 | 해당 없음 |
전신 | 해당 없음 |
후신 | 해당 없음 |
주요 참전 | 알바니아-베네치아 전쟁 오스만-알바니아 전쟁 |
동맹 | 베네치아 공화국 나폴리 왕국 |
적대 세력 | 오스만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1447년 12월 – 1448년 10월) |
지도자 직책 | 대공 |
주요 지도자 |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1444년-1468년) 레커 III 두카지니 (1468년-1479년) |
2. 배경
레저 동맹군은 토르비올(1444)[25], 모크라(1445), 오토네테(1446), 오라니크(1448)에서 승리했고, 스베티그라드(1448)에서 패배했다. 이후 폴로그(1453), 크루예(1450), 알불레나(1457), 오흐리드(1464), 모크라(1462)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레저 동맹은 창설 직후부터 분열되어 많은 구성원들이 이탈하면서 위태로워졌다.[26] 공식적인 해체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1450년에 이르러 동맹은 원래 의도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스칸데르베그와 아리아니티 가문만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움을 계속했다. 일부 구성원들은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1450년 술탄의 공격 당시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거나 스칸데르베그에 합류하는 사이에서 입장을 বারবার 바꾸었다.[27] 피에테르 스파니와 제르지 두시마니가 동맹을 떠났고,[28] 1450년에는 아리아니티 가문과 두카지니 가문이 이탈하였다. 이후 두카지니 가문은 오스만 제국과 평화를 맺고 스칸데르베그를 음해하기까지 했다.
레저 동맹은 알바니아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알바니아 민족주의 형성의 초기 단계로 평가받는다. 1444년 결성된 레저 동맹은 스칸데르베그를 중심으로 알바니아의 여러 귀족 가문들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결성한 군사 동맹이었다.[16][17][18][19]
레저 동맹은 알바니아 국가의 기초가 되었다.[32] 동맹 결성은 알바니아 역사상 처음으로 알바니아 지도자 아래 통일된 것을 의미한다.[33] 일부 역사가들은 레저 동맹을 독립된 알바니아 국가로 간주하기도 한다.[34]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은 레저 동맹이 군사 동맹일 뿐 독립 국가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저 동맹은 알바니아 통일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제공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35]
게오르기 카스트리오티
1355년 세르비아 황제 스테판 두샨이 사망한 후, 알바니아의 유력자들은 자신들만의 영지를 건설했다. 오스만 군대가 알바니아에 진입했을 때, 그들은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작은 공국들과 마주했다. 알바니아에서 오스만 군대에 맞선 첫 번째 전투는 제타의 영주 발샤 2세의 것이었다. 그는 카를 토피아의 초청으로 오스만군을 불러들였고, 1385년 9월 18일에 일어난 사브라 전투에서 발샤 2세는 패배하여 죽었다.[6][7]
15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현지 기독교 귀족들의 별다른 저항 없이 발칸 반도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여전히 서로 싸우고 있었고, 오스만의 진격을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보지 않았다. 비록 1402년에서 1413년 사이에 바예지드 1세의 아들들 사이에서 내전이 발발했지만, 당시 발칸 반도의 기독교 귀족들은 오스만을 격퇴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오히려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헝가리인들은 심지어 미래의 술탄 메흐메트 1세가 형제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동맹으로 참여하여 권력을 잡는 것을 도왔다. 오스만 내전이 메흐메트 1세에게 유리하게 끝나자 그의 군대는 1415년 토피아로부터 크루야를, 1417년 무자카로부터 베라트를, 1417년 발샤 3세의 미망인으로부터 블로라와 카니나를, 1418년 제네비지로부터 지로카스터를 점령했다.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압력 속에서 알바니아 공국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8] 일부 알바니아 귀족들은 1432-36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1443년 11월, 스칸데르베그는 군대를 이끌고 크루야를 점령하고 술탄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9]
3. 레저 동맹의 결성 (1444년)
1444년 3월 2일, 알바니아 귀족들은 스칸데르베그의 주도로 레저에 모여 군사 동맹을 결성했다.[10] 이 회의에는 레케 자하리아(사티와 다그넘의 영주)와 그의 봉신 팔과 니콜라스 두카지니, 피예테르 스파니(드리바스토 뒤 산의 영주),[11] 레케 두쉬마니(마이너 풀트의 영주),[11] 게르지 스트레즈 발샤, 존 발샤와 고이코 발샤(크루여와 레저 사이의 미시아 영주),[11] 안드레아 토피아(티라나와 두러스 사이의 스쿠리아 영주)와 그의 조카 타누쉬,[12] 게르지 아리아니티, 테오도르 코로나 무자카, 스테판 크르노예비치(상부 제타 영주)[11] 등이 참석했다.
베네치아 대표들도 이 회의에 함께했다.[13] 이 군사 동맹[14]은 알바니아의 봉건 영주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동맹에 병력과 자금을 지원해야 했다.[15] 스칸데르베그는 "알바니아 국민 동맹의 수장"으로 선포되었고,[16][17] 8,000명의 전사로 구성된 연합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18][19] 그는 최고 군사 지도자로서 ''프리무스 인테르 파레스'' 역할을 수행했다.[20][21] 바를레티는 이 회의를 ''generalis concilium'' 또는 ''universum concilium''("일반 평의회" 또는 "전체 평의회")라고 불렀으며, "레저 동맹"이라는 용어는 후대 역사가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다.[22]
베네치아의 후원 하에 시작되고 조직된[23] 이 조약을 통해, 동맹은 알폰소 5세 왕의 지지를 받았고, 스칸데르베그는 대장군이 되었다.[24]
4. 동맹의 활동과 주요 전투
스칸데르베그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거둔 첫 번째 큰 승리는 토르비올 전투였으며, 알바니아군이 튀르크군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소식은 유럽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후 2년 동안 알바니아-테탄 연합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계속 승리했다. 1450년 5월 14일, 첫 번째 크루예 포위전이 시작되었으나, 오스만군은 이듬해 포위를 풀고 물러나야 했다. 1451년, 스칸데르베그는 나폴리 왕국과 잠시 동맹을 맺었지만, 알바니아군은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했다. 1452년, 오스만군은 모크라와 메차디에서 패배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알바니아군은 나폴리, 베네치아, 교황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1462년까지 스칸데르베그의 군대는 매년 오스만군을 격퇴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우위를 크게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술탄은 매년 새로운 군대를 어려움 없이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460년과 1463년에만 휴전을 통해 전투가 일시 중단되었다. 1462년, 스칸데르베그는 중요한 도시인 오흐리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1466년, 두 번째 크루예 성 포위전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오스만군은 슈쿰빈 계곡 남쪽에 엘바산을 건설하여 알바니아에 거점을 마련했다. 1467년, 세 번째 크루예 포위전 역시 실패했다.
1468년까지, 10,000명 규모의 스칸데르베그 군대는 오스만군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알바니아군은 베네치아, 헝가리, 나폴리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1468년 스칸데르베그가 사망하면서 레저 동맹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와 북부 알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다. 슈코드라는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다가 1479년 오스만군에게 점령되었고, 이로써 알바니아 전 지역이 오스만 제국에 편입되었다.
1447년부터 1448년까지 알바니아와 베네치아 사이에 짧은 전쟁이 벌어졌으나, 1448년 10월 4일 스칸데르베그와 니콜라스 두카지니가 베네치아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베네치아는 다그눔을 포함한 알바니아 내 소유지를 유지하는 대신 연간 1,400 두카트를 지불하고, 일부 동맹 회원들은 특정 무역 특혜를 받는 조건이었다.[25]
5. 동맹의 쇠퇴와 해체
6. 스칸데르베그의 지휘관들
이름 비고 게르지 아리아니티 함자 카스트리오티 스칸데르베그의 조카, 1457년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감 모이시 아리아니트 골레미 1457년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감 브라나 콘티 블라단 유리카 스칸데르베그의 육군 병참 장교 타누시 토피아 칼 무자카 토피아 레케 두카지니 니콜레 두카지니 1457년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감 팔 3세 두카지니 1457년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감 피에테르 페를라티 마린 스파니 안드레아 토피아 아지딘 무자카 디미테르 베리샤 니크 페타 팔 골레미
1443년부터 1468년까지 25년 동안 스칸데르베그의 10,000명 규모의 군대는 오스만 영토를 행진하며, 점차 더 크고 더 잘 보급된 오스만 군대와 싸워 승리했다.[29] 헝가리와 나폴리, 베네치아는 스칸데르베그 군대의 재정적 기반과 지원을 제공했다.[30] 1468년 스칸데르베그가 사망한 후, 술탄은 "알바니아를 쉽게 제압"했지만, 스칸데르베그의 죽음이 독립을 위한 투쟁을 끝내지는 못했다.[31]
7. 역사적 유산과 의의
레저 동맹은 알바니아인들이 처음으로 단일 지도자 아래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알바니아 국가 형성의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받는다.[32][33] 일부 역사학자들은 레저 동맹을 독립된 알바니아 국가로 간주하기도 하지만,[34] 군사 동맹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5]
스칸데르베그와 레저 동맹은 알바니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알바니아 민족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칸데르베그는 알바니아의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그의 용맹함과 지도력은 알바니아인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레저 동맹은 비록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알바니아인들의 단결과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알바니아 역사학에서 레저 동맹과 스칸데르베그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공산주의 이전 시대에 대한 연구는 신화적인 요소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도 있지만, 오스만 제국과의 투쟁과 민족 정체성 확립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36]
8. 알바니아 역사 속 레저 동맹
스칸데르베그와 레저 동맹은 알바니아 역사학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어진다. 공산주의 이전 시대로 분류되는 이 시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화적이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외세와의 투쟁, 그리고 민족적 자아를 정의하는 과정은 이 시대와 관련된 이념적 틀을 뒷받침한다.[36]
9. 레저 동맹의 군주
1444–1468 스칸데르베그는 1444년 레저 동맹을 창설하여 알바니아 귀족 가문들을 레저시에 불러 모았다. 그는 자신을 "알바니아 민족 동맹의 수장"이라 칭하며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알바니아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연합 전선을 형성했다. 두카지니 공작
레케 두카지니1468–1479 레저 동맹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레케는 1468년 스칸데르베그 사후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알바니아의 저항을 유지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내부적인 어려움과 1479년 오스만 제국에 의한 슈코더르 점령에도 불구하고, 두카지니의 지도력은 동맹이 독립을 유지하고 오스만 정복에 저항하려는 노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