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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파르티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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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파르티아 전쟁은 로마 공화국과 파르티아 제국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파르티아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정복한 후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로마와 접촉했고, 기원전 90년경 동맹 제안이 거절된 이후, 기원전 53년 카레 전투에서 파르티아가 로마군을 격파하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로마는 아르메니아를 두고 파르티아와 경쟁했으며,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에는 파르티아 영토를 침공하기도 했다. 2세기 후반부터는 사산 왕조가 파르티아를 대체하면서 로마와 더욱 격렬하게 대립했고, 226년 파르티아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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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파르티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 명칭로마-파르티아 전쟁
일부로마-페르시아 전쟁
시기기원전 66년 - 217년 ()
장소아나톨리아 남동부
아르메니아
로마 남동부 국경
오스로에네
시리아
유대
메소포타미아
교전 세력
교전국 1로마 공화국
이후 로마 제국 및 속국들
교전국 2파르티아 및 속국들
지휘관 및 지도자
로마루쿨루스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트라야누스
루키우스 베루스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율리아 돔나
파르티아프라아테스 3세
수레나스
오로데스 2세
파코루스 1세
프라아테스 4세
아르타바누스 3세
볼로가세스 1세
티리다테스 1세
오스로에스 1세
시나트루케스 2세
볼로가세스 4세
결과
결과파르티아의 승리
영토 변화로마와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 왕국을 공동 통치, 로마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파르티아 왕자가 통치
관련 전투 및 캠페인
주요 전투 및 캠페인카르헤 캠페인 (기원전 53년)
카이사르의 침공 계획 (기원전 44년)
폼페이우스-파르티아 침공 (기원전 40–38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전쟁 (기원전 40–33년)
아르메니아 전쟁 (58–63년)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115–117년)
161–166년 전쟁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원정 (198년)
카라칼라의 파르티아 전쟁 (216–217년)
기타 정보
관련 정보로마-페르시아 전쟁

2. 역사적 배경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셀레우코스 영토의 상당부분을 획득한 파르티아는 서방으로 영토를 확장했다.[26] 미트리다테스 1세는 서쪽으로의 정복 사업을 시작하여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지배력을 확대하였다. 이 무렵부터 국제적인 강국으로 떠오른 파르티아는 처음으로 로마 공화국과 접촉하게 되었다.[26][4] 미트리다테스 2세는 기원전 105년경 술라와 접촉하여 로마와의 동맹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27][5]

기원전 90년 이후 파르티아는 왕권 다툼으로 약화되었고, 같은 시기 로마의 아나톨리아 지역 지배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로마와 파르티아의 접촉은 기원전 69년 루쿨루스가 남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티그라네스 2세를 물리쳤을 때 재개되었으나, 공식적인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다.[28][6]

2. 1. 파르티아의 서방 진출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셀레우코스 영토의 상당부분을 획득한 파르티아는 서방으로 영토를 확장했다.[26] 미트리다테스 1세는 서쪽으로의 정복 사업을 시작하여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지배력을 확대하였다. 이 무렵부터 국제적인 강국으로 떠오른 파르티아는 처음으로 로마 공화국과 접촉하게 되었다.[26][4] 미트리다테스 2세는 기원전 105년경 술라와 접촉하여 로마와의 동맹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27][5]

기원전 90년 이후 파르티아는 왕권 다툼으로 약화되었고, 같은 시기 로마의 아나톨리아 지역 지배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로마와 파르티아의 접촉은 기원전 69년 루쿨루스가 남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티그라네스 2세를 물리쳤을 때 재개되었으나, 공식적인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다.[28][6]

3. 로마 공화국 대 파르티아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로마 군단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였으나, 카레 전투에서 장군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군에게 궤멸적 패배를 입었다.[30] 칸나에 전투 이후 로마군 최대의 패배로 기록된 이 전투에서 지휘관 크라수스와 그의 아들 푸블리우스가 사망하였고, 42,000명의 군단병 가운데 절반이 전사하고 1/4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나머지 1/4 만이 시리아 속주로 귀환하였다.[30] 이듬해 파르티아는 시리아를 약탈하였고, 기원전 51년에는 황태자 파코루스와 오사케스 장군이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했으나, 카시우스에 의해 패퇴했다.[31]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파르티아는 로마에 대한 군사행동을 자제하였으나, 폼페이우스와의 우호관계는 유지되었다.[32]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패하여 사망한 후에는 아파메아 계곡에서 농성중이던 폼페이우스의 부하장군 카이킬리우스 바수스를 구원하기 위해 파코루스가 군사를 끌고 달려왔다.[32] 내전이 끝난 후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에 대한 전쟁계획을 세웠으나 암살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32] 그 후 이어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브루투스 사이의 내전에서 파르티아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기원전 42년 벌어진 필리피 전투에도 지원병을 보냈다.[32]

서기 1년 당시 파르티아와 속국 및 그 주변국들


필리피 전투의 패전 2년 후인 기원전 40년 파코루스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후원자였던 퀸투스 라비에누스와 연합하여 로마 영토를 침공하였다.[33] 시리아 속주의 로마 군단을 빠른 속도로 격파한 연합군은 티레를 제외한 시리아의 모든 해안 도시를 점령하였다.[33] 시리아를 넘어 하스모네아 왕가가 다스리고 있던 유대 속주를 점령한 파코루스는 로마 속국 정부의 왕 히르카누스 2세를 폐위하고 히르카누스의 조카 안티고누스(재위: 기원전 40년-기원전 37년)를 왕좌에 앉혔다.[33] 이때 로마의 동쪽 영토 전체가 파르티아의 손에 넘어가는 듯 보였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아나톨리아를 침공한 라비에누스를 상대하기 위해 벤티디우스를 파견했다.[33] 라비에누스는 곧 벤티디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시리아로 후퇴했고, 동맹군 파르티아가 구원병을 보냈으나 패배하여 로마군에게 사형당했다.[33] 파르티아 또한 로마군에게 패배를 맛보고 시리아에서 후퇴하였다.[33] 파코루스는 기원전 38년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벤티디우스에 패하여 전사하였다.[33] 로마는 이듬해 에돔 왕가 헤로데의 도움으로 유대 속주에서 안티고누스를 몰아내고 지배권을 회복하였다.[33]

|섬네일|250px|2세기경 파르티아 왕족의 거주지이자 묘지였던 니사에서 출토된, 헬레니즘 양식의 헬멧을 쓴 파르티아인의 조각된 머리(더 큰 조각상에서 떨어져 나옴)]

시리아와 유대를 회복한 안토니우스는 대군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하였으나, 파르티아에 의해 공성병기가 파괴되고 아르메니아의 동맹군 또한 달아났다.[34] 교착상태에 빠진 로마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기원전 33년 안토니우스는 다시 아르메니아로 돌아와 옥타비아누스와 파르티아에 대항하기 위해 메디아와 동맹을 시도하였으나, 로마 국내의 정치적 사정으로 후퇴하였고, 아르메니아는 파르티아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34]

3. 1. 폼페이우스와 파르티아의 관계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프라아테스 3세와 동맹을 맺고 아르메니아를 침공하기로 합의했다.[29] 그러나 유프라테스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 문제로 불화가 발생했고, 폼페이우스는 프라아테스 3세에게 "왕 중의 왕" 칭호를 공인하는 것을 거부했다.[29] 대신 티그라네스와 파르티아 사이의 골두엔 지역 영토분쟁에 로마가 중재를 서주겠다고 제안했다.[29] 결국 프라아테스는 로마의 속국이 된 오스로에네 서부를 제외한 메소포타미아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였다.[29]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파르티아는 로마에 대한 군사행동을 자제하였으나, 폼페이우스와의 우호관계는 유지되었다.[32]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패하여 사망한 후에는 아파메아 계곡에서 농성중이던 폼페이우스의 부하장군 카이킬리우스 바수스를 구원하기 위해 파코루스가 군사를 끌고 달려왔다.[32]

3. 2. 카레 전투 (기원전 53년)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프라아테스 3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유프라테스 지역의 국경 문제로 불화가 발생했다.[29] 기원전 53년 크라수스가 로마 군단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했으나, 카레 전투에서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군에게 대패했다.[30] 칸나에 전투 이후 로마군 최대의 패배로 기록된 이 전투에서 크라수스와 그의 아들 푸블리우스가 사망했고, 로마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30] 42,000명의 군단병 가운데 절반이 전사하고 1/4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나머지 1/4 만이 시리아 속주로 귀환하였다.[30] 이 전투는 파르티아가 여러 군단 독수리 깃발을 탈취하면서 로마에게 큰 굴욕을 안겨주었다.[8] 플루타르코스는 파르티아가 크라수스와 가장 닮은 로마군 포로에게 여장을 시켜 파르티아 전역을 행진하게 했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로마의 선전일 가능성도 있다.[8]

이듬해 파르티아는 시리아를 약탈했고, 기원전 51년에는 황태자 파코루스와 오사케스 장군이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했으나, 카시우스에게 패퇴했다.[31] 안티오크가 포위되자 그 해 킬리키아 총독으로 선출된 키케로가 두개 군단을 이끌고 진군하여 포위를 풀었다.[9] 파코루스는 물러섰지만, 안티고네아 근처에서 카시우스에게 매복 공격을 받았고 오사케스는 사망했다.[10]

3. 3.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과 로마의 반격

기원전 53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카레 전투에서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군에게 대패하여 전사한 이후[30], 파르티아는 기원전 51년 황태자 파코루스 1세와 오사케스 장군의 지휘 하에 시리아를 침공했으나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패퇴했다.[31]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파르티아는 폼페이우스를 지원했으며, 내전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계획했으나 암살로 실행되지 못했다.[32] 해방자 내전 동안 파르티아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지원하여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 지원병을 보냈다.[32][11]

기원전 40년, 파코루스 1세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후원자였던 퀸투스 라비에누스와 연합하여 로마 영토를 침공, 시리아와 하스몬 왕조 유대를 점령하고 히르카누스 2세를 폐위, 안티고누스를 왕위에 앉혔다.[33]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를 파견하여 파르티아에 대항하게 했다. 벤티디우스는 라비에누스를 처형하고 파르티아 군을 시리아에서 몰아냈다. 기원전 38년 파코루스 1세는 재차 시리아를 공격했으나 벤티디우스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33] 로마는 헤로데 1세의 도움으로 유대 속주를 회복하였다.[33]

3. 4.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 (기원전 36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시리아 속주와 유대 속주에 대한 로마의 통제 회복 이후, 대군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하였으나, 파르티아에 의해 공성병기가 파괴되고 그의 아르메니아 동맹군 또한 배신하였다.[34] 파르티아 진지에 대한 진전을 이루지 못한 로마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13] 기원전 33년 안토니우스는 다시 아르메니아로 돌아와 메디아 왕과 옥타비아누스와 파르티아 모두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지만,[13] 로마 국내의 정치적 사정으로 후퇴하였고, 아르메니아는 파르티아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34]

4. 로마 제국 대 파르티아

4. 1. 아르메니아 왕위 계승 분쟁

서기 1년,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프라아테스 5세는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에서 군사를 철수하고, 아르메니아가 사실상 로마의 보호령임을 인정하는 합의를 맺었다.[35][14] 그러나 아르메니아에 대한 통제 및 영향력 확대를 둘러싼 로마-파르티아 간의 경쟁은 그 후로도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36년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 2세가 아들 아르사케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히려 시도하여 로마와 전쟁이 발생했다.[36][15] 그러나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와의 협상 끝에 파르티아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였다.

58년, 볼로가세스 1세가 동생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히자 로마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37][16] 코르불로가 이끄는 로마군은 티리다테스 왕실을 전복시키고 카파도키아 왕자를 왕위에 앉혔고, 아르메니아의 반격으로 양군 사이에 여러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전쟁은 63년 티리다테스의 왕위 등극을 로마 황제가 승인하는 조건으로 종료되었다.[38][17] 이후 아르메니아는 파르티아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로마에 대한 명목상의 충성에도 불구하고 파르티아의 영향력이 점차 커졌다.

4. 2.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113년-117년)

113년,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를 완전히 격파하고 아르메니아를 로마 속주로 병합하여 "동방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25][3] 트라야누스의 원정으로 로마 제국의 대 파르티아 전략은 크게 변화했다.[25]

114년 트라야누스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파르티아 왕 오스로에스 1세가 왕위에 앉힌 파르타마시리스를 살해하고 아르메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병합하였다.[39][18] 115년에는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점령하고 역시 속주로 삼았는데, 이는 파르티아가 남쪽으로부터 침공하여 아르메니아 본토와의 길목을 차단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39][18] 로마군은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강을 따라 페르시아만까지 남하했다.[39] 그러나 같은 해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북부, 그리고 유태인들의 반란이 동시에 일어나 로마군의 발목을 잡았다.[40][19] 셀레우키아, 니시비스, 에데사에 주둔한 로마군이 주민들에게 공격받는 때를 놓치지 않고 파르티아는 로마의 주둔지를 공격하였다.[40] 트라야누스는 메소포타미아의 반란을 제압하였으나 파르티아 출신인 파르타마스파테스를 왕좌에 앉히고 시리아로 진군하여 안티오크에 본부를 세웠다.[40] 트라야누스는 군사를 재조직하여 파르티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117년에 사망했다.[40]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을 기념하여 116년에 로마 원로원이 발행한 세스테르티우스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2세기에 걸친 정치적 자세와 격렬한 경쟁"의 절정으로 여겨진다.[20] 트라야누스는 메소포타미아를 성공적으로 침공한 최초의 황제였다.[20] 그러나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그의 거대한 계획은 "동부 정복의 전략적 현실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와 반란이 할 수 있는 일을 과소평가한 상황에 의해 중단되었다."[20]

4. 3. 하드리아누스의 정책과 이후의 전쟁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파르티아 정복이 제국에 부담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유프라테스강을 국경으로 하는 이전 정책으로 복귀했다. 그는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아디아베네를 원래 지배자에게 돌려주고 국경을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렸다. 이후 로마는 반세기 동안 유프라테스 동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40][19]

161년 볼로가세스 4세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에데사를 점령하고 시리아를 약탈하면서 로마와 다시 전쟁이 발발했다.[41][21] 163년 로마 장군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는 아르메니아에서 파르티아군을 몰아내고 로마에 호의적인 속국 정부를 세웠다. 이듬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두라-에우로포스와 셀레우키아에서 파르티아를 패퇴시키고 크테시폰을 파괴했으나, 역병(천연두로 추정)으로 인해 후퇴했다.[41][21]

195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메소포타미아를 다시 침공하여 셀레우키아와 바빌로니아를 점령하고, 197년에는 크테시폰을 다시 파괴했다. 이 전쟁으로 로마는 니시비스와 싱가라 주변에 이르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영토를 획득했다.[42][22]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에서 로마-파르티아 전쟁의 부조


216년, 카라칼라 황제가 마지막으로 파르티아 원정을 일으켜 아르벨라를 파괴했으나, 암살 이후 마크리누스는 니시비스 근처에서 파르티아에 패하여 카라칼라가 입힌 피해에 대해 배상하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43][23]

5. 사산 왕조의 등장과 파르티아의 멸망

226년 아르다시르 1세크테시폰을 점령하면서 파르티아는 멸망하고, 사산 왕조가 등장했다.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보다 중앙집권화된 정치구조를 갖고 있었으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옛 영토 회복을 주장하며 로마와 더욱 격렬하게 대립했다. 이전까지는 로마가 공세적인 입장이었으나, 애국주의로 무장한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보다 훨씬 로마를 어렵게 만들었다.

6. 연표

제1차 파르티아 전쟁은 기원전 53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파르티아를 상대로 원정을 감행하였으나, 카르해 전투에서 파르티아가 승리하였다. 제2차 파르티아 전쟁은 기원전 39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원정으로 이루어졌다. 서기 2년에는 아르메니아 영유권을 두고 아르타바누스 2세가 제3차 파르티아 전쟁을 일으켰다. 58년부터 63년까지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제4차 파르티아 전쟁을 수행하였다. 113년에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크테시폰을 함락시키는 제5차 파르티아 전쟁을 벌였다. 161년에는 볼로가세스 4세가 로마 속주 시리아를 침공하며 제6차 파르티아 전쟁이 발발했다. 194년부터 198년까지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볼로가세스 5세가 제7차 파르티아 전쟁을 벌였다. 217년, 카라칼라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을 아르타바누스 4세가 격퇴한 제8차 파르티아 전쟁이 있었다.

7.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주요 인물 평가

7. 1. 로마 측 인물

7. 2. 파르티아 측 인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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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적 Sicker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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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서적 Sicker 2000
[41] 서적 Sicker 2000
[42] 서적 Campbell 2005
[43] 서적 Campbell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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