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약탈 (5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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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약탈 (546년)은 동고트 왕국의 왕 토틸라가 이끄는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한 사건이다. 배경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동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지배했으나,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정복 전쟁을 시작하면서 혼란이 발생했다. 토틸라는 동고트족을 규합하여 로마를 포위했고, 동로마 제국의 무능한 방어 속에 로마 시민들은 기근에 시달렸다. 546년 12월 17일 밤, 동고트 군은 성벽을 넘어 로마를 점령하여 약탈을 자행했으며,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일부를 파괴했다. 이후 벨리사리우스가 로마를 재점령했지만, 토틸라의 재공격으로 로마는 다시 함락되었고, 이탈리아는 황폐화되었다. 이 사건은 로마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동로마 제국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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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약탈 (546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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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분쟁 | 고트 전쟁 (535–554) |
날짜 | 546년 3월 – 546년 12월 17일 |
장소 | 로마 |
결과 | 동고트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동로마 제국 |
교전 2 | 동고트 왕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동로마 제국 | 베사스 벨리사리우스 |
동고트 왕국 | 토틸라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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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476년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를 통치했으나 비잔티움 제국(동로마)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488년 비잔틴 황제 제논은 동고트 왕 테오도릭에게 오도아케르 토벌을 위탁했고, 테오도릭은 493년 라벤나를 함락시키고 오도아케르를 죽인 후 이탈리아를 통치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535년 벨리사리우스에게 이탈리아 정복을 명했다.[1] 벨리사리우스는 536년 나폴리와 로마를 점령하고,[1] 540년에는 라벤나를 탈환했다.[1]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를 해임하고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했고, 이탈리아는 무능한 사령관들에게 맡겨졌다.[1]
541년, 동고트족은 토틸라를 왕으로 추대하고 세력을 결집하여 이탈리아를 다시 점령해나갔다. 토틸라는 비잔틴 관료들의 폭정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3년 만에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대부분을 점령했다. 546년 토틸라는 로마로 진격했다.
2. 1.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동고트 왕국의 등장
476년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를 통치했으나 비잔티움 제국(동로마)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488년 비잔틴 황제 제논(재위 474-491)이 동고트 왕 테오도릭(재위 474~526)에게 오도아케르 토벌을 위탁한다. 테오도릭은 자신의 부족 10만 명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493년 수도 라벤나를 함락시키고 오도아케르를 직접 죽였다. 이후 황제의 위임을 받아 이탈리아를 대리 통치하였다. 그의 통치는 원만했으며 33년간 이탈리아는 평화로웠다.2. 2.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정복 전쟁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5년 벨리사리우스에게 군권을 위임하여 이탈리아 정복을 명했다.[1] 벨리사리우스는 빠르게 시칠리아를 정복한 후 이탈리아에 상륙해 536년 나폴리와 로마를 점령했다.[1]
540년 동고트 수도 라벤나를 포위하고 압박하자 동고트족 귀족들이 벨리사리우스에게 왕위를 제안했다.[1] 벨리사리우스는 승낙하는 척 한 후 라벤나에 입성하여 탈환했다.[1]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격노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벨리사리우스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1] 또한 황제는 즉각 벨리사리우스를 해임한 후 소환하여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했고, 이탈리아는 다섯 명이나 되는 무능한 하급 사령관들에게 맡겼다.[1]
2. 3. 토틸라의 등장과 동고트족의 부활
벨리사리우스 때문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던 동고트족은 541년에 토틸라를 왕으로 추대한 후 세력을 결집하여 벨리사리우스가 떠난 이탈리아를 다시 점령해나갔다. 명민한 토틸라는 토착 귀족들과 교섭하여 그들을 끌어들였고, 무능한 비잔틴 관료들의 폭정과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줄 해방군 역할을 자임했다. 불만을 품고 탈영한 비잔틴 병사들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이용하여 추가 탈영을 종용하였다. 고트족 병사들에게는 약탈과 민간인에 대한 습격을 엄금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전투를 통해 무능한 비잔틴 사령관들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러한 토틸라의 노력은 3년 만에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대부분을 점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토틸라는 546년 로마로 진격했다.3. 로마 포위와 약탈 (546년)
545년 말부터 토틸라가 이끄는 동고트 군세에 의해 로마가 포위되었다. 로마를 지키는 동로마 제국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주둔군 사령관) 베사스는 포위된 로마에서 주민이 탈출하는 것을 금지했고, 주둔군은 비축된 곡물을 비싼 값에 팔았다. 6세기 역사가 프로코피오스는 가난한 주민들은 군대로부터 충분한 식량을 살 수 없어 기근에 시달렸고, 밀 껍질(겨)과 잡초, 쥐와 개, 심지어 인분까지 먹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살인에 손을 댄 자들까지 나왔다. 마침내 주둔군 사령관은 주민들이 로마에서 탈출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기아 상태의 주민들 중 많은 수가 도중에 굶어 죽거나 쉽게 적의 손에 떨어졌다.[8]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로 피난한 교황 비길리우스는 곡물을 가득 실은 수송 함대를 로마로 보냈지만, 테베레 강 하구에서 동고트 군세에 의해 저지당하고 배를 빼앗겼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은 테베레 강 하구의 포르투스에 포진했지만, 군 내부 노선 대립과 벨리사리우스가 병을 앓게 되면서 로마 구출은 실행되지 않았다.[9]
546년 12월 17일 밤,[9] 동고트 군 병사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몰래 기어올라 아시나리아 문을 안쪽에서 열었다. 프로코피오스는 동로마 제국군 주둔지에서 군무에 종사하던 이사우리아인 병사가 동고트와 내통한 것이 원인 중 하나였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의 수비대가 다른 문으로 도주해 버렸기 때문에, 아시나리아 문에서 진군한 동고트 군세는 저항을 받지 않고 로마 시내로 입성했다. 프로코피오스는 로마 수비대 중 남아 있던 것은 500명 정도였고, 그것도 각처의 교회로 피난했다고 기록했다. 이때 로마 측의 사망자는 26명의 병사와 60명의 시민이었다.[10]
토틸라는 로마를 약탈했지만, 도시를 양의 목초지로 만들려던 처음 의도와는 달리 마음을 바꿨다. 그러나 아풀리아에 있는 로마군을 추격하기 전에 방어벽의 약 3분의 1을 허물었다.[4]
3. 1. 토틸라의 포위 작전
토틸라가 이끄는 동고트족 군대는 로마를 포위한 후, 치밀하고 느긋하게 봉쇄 작전을 펼쳤다. 20km에 달하는 아우렐리우스 성벽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수도교를 파괴하여 물 공급을 차단했다. 테베레 강에 쇠사슬을 설치하여 오스티아로부터의 선박 접근을 막아, 외부 지원을 완전히 차단했다.[13] 이는 로마 시민들을 고립시켜 굶주림으로 몰아넣으려는 장기전 전략이었다.545년에서 546년 겨울, 공성전이 시작되면서 로마 시민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2] 제국 수비대 사령관 베사스는 비축한 곡물을 비싼 가격에만 판매하고, 도시를 떠나려는 민간인들의 요청을 거부했다. 동시대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가난한 로마인들이 겨, 쐐기풀, 개, 쥐, 심지어 서로의 똥까지 먹어야 했고, 일부는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고 기록했다.[1] 결국 베사스는 도시를 떠나려는 사람들을 풀어주었지만, 이미 기아로 쇠약해진 많은 이들이 이동 중 사망하거나 적에게 살해당했다.[1]
교황 비질리오는 시라쿠사로 피신하여 로마에 곡물을 보내려 했으나, 토틸라의 해군이 테베레 강 어귀에서 함대를 나포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제국군은 증원을 기다리며 포르투스에 주둔했지만, 부하 지휘관들의 신뢰성 부족으로 로마 구출 시도는 실패했고, 벨리사리우스는 병에 걸려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2]
3. 2. 로마 시민들의 고통과 비잔틴 수비대의 무능
시간이 지나면서 성안 로마 시민들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완벽하게 봉쇄된 로마 시내는 모든 물자가 부족했고, 그중에서도 식량 부족이 심각했다. 식량이 떨어지자 시민들은 쐐기풀을 캐 먹었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로마 시민들을 방어해야 할 비잔틴 군인들은 사기가 떨어져 방어에는 관심이 없었고, 예비 군량으로 비축해 놓았던 밀을 비싼 값에 팔아 폭리를 취하는 데만 열중했다.[14]벨리사리우스는 로마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탈리아로 달려왔다. 배를 이용해 테베레 강의 쇠사슬을 끊고 포위망을 뚫어 시민들을 도우려 했지만 실패했다. 공격 전에 성안으로 밀사를 보내 공격에 호응해 전투를 시작하라고 했지만, 성안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게다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벨리사리우스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지원과 보급을 끊어버렸고, 결국 벨리사리우스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545년에서 546년 겨울, 공성전이 시작되었다.[2] 동로마 제국의 수비대 사령관 베사스는 곡물을 비축하고 있었지만, 민간인에게는 매우 비싼 가격에만 판매했다. 또한 베사스는 민간인들이 도시를 떠나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도 거부했다. 당시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공성전 동안의 기근을 묘사했는데, 군대로부터 곡물을 살 만큼 부유하지 못한 평범한 로마인들은 겨, 쐐기풀, 개, 쥐, 그리고 마침내 "서로의 똥"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일부는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다. 마침내 제국 사령관들은 "도시를 떠나고 싶어 하는 로마인들을 풀어주었다." 프로코피우스는 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이미 쇠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여정 중에 사망했고, 많은 이들이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했다.[1]
교황 비질리오는 시라쿠사로 피신하여 로마에 식량을 보내기 위해 곡물 수송선을 보냈지만, 토틸라의 해군이 티베르 강 어귀 근처에서 이들을 가로막아 함대를 나포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제국군은 증원을 기다리며 포르투스에 주둔했다. 로마를 구원하려는 시도는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부하 지휘관들의 신뢰성 부족으로 실패했다. 그 후 벨리사리우스는 병에 걸려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2]
3. 3. 로마 함락과 약탈
545년 말부터 토틸라가 이끄는 동고트 군세는 로마를 포위했다. 로마를 지키던 동로마 제국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주둔군 사령관) 베사스는 포위된 로마에서 주민이 탈출하는 것을 금지했고, 주둔군은 비축된 곡물의 판매 가격을 올려 받았다. 6세기 역사가 프로코피오스의 서술에 따르면, 가난한 주민들은 군대보다 충분한 식량을 살 수 없어 기근에 시달렸고, 밀 껍질(겨)과 잡초, 쥐와 개, 심지어 인분까지 먹게 되었다고 한다. 살인에 손을 댄 자들까지 나왔다고 한다. 결국 주둔군 사령관은 주민들이 로마에서 탈출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기아 상태의 주민들 중 많은 수가 도중에 굶어 죽거나 쉽게 적의 손에 떨어졌다[8]。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로 피난한 교황 비길리우스는 곡물을 가득 실은 수송 함대를 로마로 보냈지만, 테베레 강 하구에서 동고트 군세에 의해 저지당하고 배를 빼앗겼다.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은 테베레 강 하구의 포르투스에 포진했지만, 군 내부의 노선 대립과 벨리사리우스가 병을 앓게 되면서 로마 구출은 실행되지 않았다[9]。
546년 12월 17일 밤[9], 동고트 군의 병사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몰래 기어올라 아지나리아 문을 안쪽에서 열었다. 역사가 프로코피오스에 따르면, 동로마 제국군 주둔지에서 군무에 종사하던 이사우리아인 병사가 동고트와 내통한 것이 원인 중 하나였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의 수비대가 다른 문으로 도주해 버렸기 때문에, 아지나리아 문에서 진군한 동고트 군세는 저항을 받지 않고 로마 시내로 입성했다. 프로코피오스는 로마 수비대 중 남아 있던 것은 500명 정도였고, 그것도 각처의 교회로 피난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로마 측의 사망자는 26명의 병사와 60명의 시민이었다고 한다[10]。
546년 12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시민들은 성문을 열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토틸라가 군대를 이끌고 시내로 입성했으나 이미 비잔틴 군인들은 도망가고 없었다. 동고트족 군사들에 의한 약탈이 시작되었다. 우선 아우렐리우스 성벽을 군데군데 1/3 정도 부쉈다. 그리고 남아있던 로마 시민들 중 원로원 의원들과 가족들을 붙잡아서 몸값을 챙겼다. 약탈이 끝난 로마는 황량했고 고트족이 그곳에 더 이상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몸값을 받아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원로원 의원들을 억지로 끌고 고트족들은 로마를 떠나버렸다.
로마 시내에서 약탈을 벌인 토틸라는 로마를 완전히 파괴할 생각이었지만, 이탈리아 반도 남단의 풀리아에 포진한 동로마 제국군을 추격하기 위해 결국 로마 시를 둘러싼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3분의 1을 파괴하는 데 그쳤다[11]。
4. 약탈 이후의 상황
546년 로마 약탈 이후, 도시는 황폐화되었다. 547년 벨리사리우스가 로마를 재점령하고 성벽을 복구하는 등 재건을 시도했지만, 동고트족과의 분쟁은 계속되었다. 벨리사리우스는 548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었고, 이후 나르세스가 이탈리아 정복을 완수할 때까지 이탈리아 반도는 동고트족과 동로마 제국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552년 타기나이 전투에서 토틸라가 전사하고, 553년 동고트족 잔당이 전멸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를 완전히 점령했지만, 18년간의 전쟁으로 이탈리아 반도는 황폐화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와 동로마 제국 관리들의 무능함 속에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졌고, 이는 훗날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불러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9][10][11][12]
4. 1. 벨리사리우스의 로마 재점령과 한계
547년 봄, 벨리사리우스는 토틸라가 남겨둔 병력을 격파하고 로마를 재점령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벨리사리우스는 무너진 성벽의 파괴된 부분을 "순서에 상관없이 돌을 쌓아" 급하게 재건했다.[5] 토틸라는 즉시 돌아왔지만, 수비대에 의해 격퇴되었다.[6] 그러나 벨리사리우스는 이점을 활용하지 못했다. 페루자를 포함한 여러 도시가 고트족에게 점령당했고,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에서 소환되었다. 549년, 토틸라는 세 번째로 로마를 공격했고, 또 다른 장기간의 공방전 끝에 로마를 점령했다.[7]4. 2. 동고트족의 재기와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지배
547년 2월, 벨리사리우스가 돌아온 로마는 황폐함 속에 버려진 것과 같았다. 벨리사리우스는 성벽 복구부터 시작하여 재건을 시도했으나, 황제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고트족을 몰아내라고 명령했다. 548년, 황제는 벨리사리우스를 콘스탄티노폴로 소환한 후 한직에 머물도록 하였다. 벨리사리우스가 떠난 이탈리아는 다시 동고트족의 세상이 되어갔다. 황제는 자신의 측근이자 환관인 나르세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 정복 전쟁을 마무리 짓도록 했다.[5][6]552년 타기나이 전투에서 토틸라가 전사하면서 동고트족의 세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553년이 되자 나머지 잔당들이 전멸하며 비잔틴 제국이 이탈리아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그러나 535년부터 553년까지 18년 동안이나 진행된 전쟁으로 이탈리아 반도는 황폐화되었다.[7]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548년에 황후 테오도라가 사망한 후에 종교 문제에만 집착하며 통치에 소홀했다. 아울러 비잔틴 제국의 관리들은 기본적인 치안 유지나 해적의 약탈에 대한 적절한 대응 등 행정 서비스에는 무관심한 채 백성들로부터 세금만 걷어가는 무능력함을 드러내었다. 이런 일들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사망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래서 북아프리카, 중근동, 이집트, 발칸반도, 이탈리아에서 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았으며 7세기 말에 이교도인 이슬람 군이 침공하자 이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할 정도였다.
5. 역사적 영향
546년 로마 약탈은 로마와 이탈리아 역사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동로마 제국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5. 1. 동로마 제국에 대한 반감 증폭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48년에 황후 테오도라가 사망한 후 종교 문제에만 집착하며 통치에 소홀했다. 비잔틴 제국의 관리들은 기본적인 치안 유지나 해적의 약탈에 대한 적절한 대응 등 행정 서비스에는 무관심한 채 백성들로부터 세금만 징수하는 무능력함을 드러내었다.[1] 이러한 상황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 결과 북아프리카, 중근동, 이집트, 발칸반도, 이탈리아에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으며, 7세기 말 이슬람 군이 침공하자 이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할 정도였다.[1]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Wars: Book VI (continued) and Book VII
https://archive.org/[...]
William Heinemann Limited, London
1914
[2]
서적
Justinian and the Later Roman Empir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6
[3]
서적
https://archive.org/[...]
[4]
서적
https://archive.org/[...]
[5]
서적
https://archive.org/[...]
[6]
서적
[7]
간행물
Totila
[8]
서적
History of the Wars: Book VI (continued) and Book VII
https://archive.org/[...]
William Heinemann Limited, London
1914
[9]
서적
Justinian and the Later Roman Empir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6
[10]
서적
https://archive.org/[...]
[11]
서적
https://archive.org/[...]
[12]
서적
[13]
서적
로마제국 쇠망사 7
대광서림
[14]
서적
로마제국 쇠망사 7
대광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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