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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평민의 철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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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평민의 철수 투쟁은 기원전 494년부터 기원전 287년까지 로마 공화정 시대에 평민들이 귀족의 권력 남용에 저항하여 벌인 일련의 정치적 투쟁을 의미한다. 이 투쟁은 평민들이 도시를 떠나 철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빚 탕감, 호민관 직 설치, 12표법 제정, 평민의 집정관직 진출 등 평민의 권리 확대를 위한 요구를 관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차례에 걸친 철수 투쟁을 통해 평민회 결의의 법적 구속력을 확보하는 호르텐시우스 법이 통과되면서 신분 투쟁이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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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평민의 철수 투쟁
개요
명칭로마 평민의 철수 투쟁
로마자 표기Secessio plebis
유형파업, 시위
위치로마
목표정치적 양보 획득, 평민의 권리 옹호
관련 인물메넬니우스 아그리파
평민 대표
배경
주요 원인귀족과의 사회적 불평등
가혹한 채무 조건
정치 참여 제한
전개 과정
1차 철수기원전 494년
장소몬스 사크루스 (Sacred Mountain)
결과평민 대표직 신설, 평민회 결성
2차 철수기원전 449년
배경10인 위원회의 횡포
결과12표법 복원, 평민회 강화
3차 철수기원전 445년
배경귀족과 평민 간의 통혼 금지
결과카눌레이우스 법 제정, 통혼 허용
4차 철수기원전 342년
배경채무 문제, 정치적 불만
결과채무 관련 법률 제정, 평민의 정치 참여 확대
5차 철수기원전 287년
장소야니쿨룸 언덕
배경채무 문제, 법률 집행 불만
결과호르텐시우스 법 제정, 평민회 결의의 법적 구속력 부여
영향 및 의의
주요 결과평민의 정치적 권리 신장
로마 공화정 발전 기여
계급 갈등 완화
역사적 의의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 사례
법치주의 확립에 기여

2. 로마사상 평민의 철수 투쟁

바르로치니의 조각, 1849년, 몬스 사케르로의 인민 철수


기원전 495년부터 로마 평민(플레브스) 계급은 귀족(파트리키) 계급의 정치적 통치에 점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당시 로마는 두 명의 집정관원로원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귀족으로 구성되었다.

평민들은 채무 문제와 귀족들의 권력 남용에 대한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철수 투쟁을 벌였다. 주요 철수 투쟁은 다음과 같다.

  • 제1차 철수 (기원전 494년경): 평민들은 몬스 사케르(성산)로 철수하여 호민관 설치와 부채 탕감을 요구했다.
  • 제2차 철수 (기원전 449년): 12표법 제정을 요구하며 아벤티노 언덕으로 철수했다.
  • 제3차 철수 (기원전 445년): 귀족과 평민 간의 결혼 금지법 폐지를 요구하며 군사적 파업을 벌였다.
  • 제4차 철수 (기원전 342년): 리비우스에 의해 기록된 "모호한 군사 반란"이다.
  • 제5차 철수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 통과를 요구하며 야니쿨룸 언덕에서 철수 투쟁을 벌였다.


이러한 철수 투쟁의 결과, 평민들은 점차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고 귀족과의 격차를 줄여나갔다. 특히 호르텐시우스 법은 평민회(플레비스키토)의 결정이 귀족을 포함한 모든 로마 시민에게 구속력을 가지도록 하여, 약 200년간 이어진 신분 투쟁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공화정 로마 지도, 윌리엄 R 셰퍼드, 1923

2. 1. 기원전 494년 (제1차 철수)

기원전 495년, 로마의 평민들은 채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채권자가 채무자를 구타하고 투옥하는 것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이 포함되었다.[2]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는 전직 군인이 포룸에 몸을 던져 자신의 어려움을 백성에게 이야기하는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는 사비니와의 전쟁 중 그의 영지가 적에 의해 불태워지고 재산이 도난당했다고 설명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야 했고, 이는 고리대금으로 인해 그를 깊은 빚에 빠뜨렸다. 이로 인해 그는 조부와 아버지의 농장을 포함한 가족 재산을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충분하지 않자 채권자들은 그를 감옥으로 데려가 채찍질하고 죽음의 위협을 가했다. 포럼에 있던 사람들은 분노했고, 이 이야기는 빠르게 퍼져 대규모 군중을 격분시켰다.[2]

집정관이나 원로원이 대중의 채무 문제에 대처할 것이라는 기대가 많았지만, 집정관 아피우스는 채권자에 의한 채무자 투옥을 강화하는 인기 없는 법령을 통과시켜 상황을 악화시켰다.[3] 이러한 분노는 지속적인 원로원의 무대응으로 더욱 악화되어, 평민들은 루키우스 시키니우스 벨루투스의 조언에 따라 도시에서 약 4.83km 떨어진 몬스 사케르(성산)으로 철수했다.[4] 그 후 평민들은 해당 지역에 기본적인 방어 시설을 설치하고 원로원의 조치를 기다렸다.[4]

철수 이후 원로원은 마침내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조치를 취했다. 원로원은 평민 대표 세 명과 협상하여 해결책을 찾았다. 귀족들은 평민들의 부채를 일부 탕감하고 호민관 직을 창설함으로써 권력을 일부 양보했다.[5] 이 직책은 평민이 처음으로 맡게 된 정부 직책이었는데, 당시에는 집정관 직책은 오직 귀족만이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민 호민관은 임기 동안 개인적으로 신성불가침이 되었으며, 이는 그들을 해치는 모든 사람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음을 의미했다.[6][7]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기원전 494년으로 비정한 것은 연대를 너무 올려잡은 것이 확실하며, 실제로 철수 투쟁이 처음으로 일어난 연대는 기원전 471년경으로 아벤티누스 언덕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1][22]

2. 2. 기원전 449년 (제2차 철수)

기원전 449년, 평민들은 12표법 제정을 요구하며 다시 철수 투쟁을 벌였다. 이전에는 사제들만이 비밀스럽게 법을 전승해왔지만, 12표법은 성문화되어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었다. 이는 로마 평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기본법으로서의 의미를 가졌다. 귀족들은 성문법 제정에 반대했지만, 결국 10인 입법 위원회를 구성하여 로마 광장에 12표법을 내걸었다. 이로써 평민들은 재판에서 부정과 자의적인 판결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2표법은 채무 노예제를 인정하는 등 한계도 있었다.

제2차 로마 평민의 철수 투쟁은 십인관(라틴어로 "열 명의 사람") 위원회의 학대 행위로 인해 발생했으며, 평민 호민관(평민의 대표자) 복원과 중단되었던 상소권 복원을 요구했다.[1]

기원전 450년, 로마는 법전을 편찬하기 위해 십인관을 임명했다. 이 위원회는 1년 임기 동안 국가 관직을 중단시키고 상소에서 면제되는 권한을 받았다. 십인관은 법을 발표했지만 임기가 끝나도 권력을 유지하며 비판자들을 살해했다. 특히 십인관 중 한 명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가 베르기니아라는 여성에게 강제로 결혼을 요구하자,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죽이고 그를 저주했다. 이 사건은 군중들의 폭동과 아벤티노 언덕으로의 철수를 불러왔다.[1]

원로는 십인관에게 사임을 압박했지만 거부당했고, 사람들은 몬스 사케르로 철수했다. 원로는 십인관의 사임을 이끌어내고,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티투스와 마르쿠스 호라티우스 바르바투스를 협상 대표로 선출했다. 몬스 사케르에 모인 사람들은 평민 호민관과 상소권 복원을 요구했고, 원로원은 이를 수용하여 평민들은 아벤티노 언덕으로 돌아가 호민관을 선출했다.[1]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티투스와 마르쿠스 호라티우스 바르바투스는 기원전 449년의 집정관이 되어 평민의 권한을 강화하는 새로운 법을 도입했다. 발레리우스-호라티우스 법은 평민회에서 통과된 법이 원로원의 반대에도 모든 로마 시민에게 구속력을 가지도록 규정했지만,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했다. ''렉스 발레리아 호라티아 데 세나투스 콘술타''는 ''세나투스 콘술타''(원로원의 포고)를 평민 호민관의 보좌관이 케레스 신전에 보관하도록 하여, 평민 호민관과 보좌관이 포고에 대한 지식을 갖게 했다. ''렉스 발레리아 호라티아 데 프로보카티오''는 상소 대상이 아닌 국가 관직의 창설을 금지했다.[1]

2. 3. 기원전 445년 (제3차 철수)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역사가 플로루스가 이 세 번째 철수 투쟁을 언급했다.

로마법12표법 제정 과정에서 두 번째 10인 위원회는 평민 계급에 심각한 제약을 가했는데, 여기에는 귀족과 평민의 결혼 금지가 포함되었다.[11][12] 기원전 445년, 호민관 중 한 명인 가이우스 카눌레이우스는 이 법을 폐지하는 ''로가티오''를 제안했다. 로마 집정관들은 카눌레이우스에게 맹렬히 반대하며, 호민관이 로마가 외부 위협에 직면한 시점에 로마의 사회적, 도덕적 구조의 붕괴를 제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13]

카눌레이우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낮은 출신의 로마인들이 기여한 많은 공헌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키며, 원로원은 귀족과 평민의 결혼이 국가에 해롭다고 주장하면서도 패배한 적들에게 기꺼이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코누비움''의 권리 회복뿐 아니라, 법을 변경하여 평민이 집정관직을 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다른 호민관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든 호민관이 이 조치를 지지했다.[14]

집정관이 혼혈 결혼의 자녀들이 신들의 노여움을 살 수 있다고 발언하자, 평민들은 군사적 파업에 돌입하여 공격하는 이웃에 맞서 도시를 방어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집정관들은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카눌레이우스의 원래 ''로가티오''에 대한 투표를 허용했고, 귀족과 평민 간의 결혼 금지는 폐지되었다.[15]

그러나 평민의 집정관직 출마 허용 제안은 투표에 부쳐지지 않았는데, 이는 평민 회의와 귀족 원로원 간의 갈등이 급격하게 확대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16][17] 대신 집정관 권한을 가진 군사 호민관을 양 계급에서 선출할 수 있다는 타협안이 제시되었다. 이 제안은 호평을 받았고, 다음 해에 첫 번째 집정관 호민관들이 선출되었다.[16][18]

2. 4. 기원전 342년 (제4차 철수)

리비우스가 기록한 네 번째 철수 투쟁은 옥스퍼드 고전 사전에서 "모호한 군사 반란"으로 언급된다.[1]

2. 5. 기원전 287년 (제5차 철수)

기원전 287년 평민들은 트리부스 평민회의 결의(plebiscita)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도록 호르텐시우스 법 통과를 요구하며 야니쿨룸 언덕에서 마지막으로 철수 투쟁을 했다.[19]

기원전 290년,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가 이끄는 로마 군대는 사비니족으로부터 리에티와 아미테르눔 평원에서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다. 전쟁 후, 토지는 오로지 귀족들에게만 분배되었다. 한편, 전쟁에 참전했던 많은 평민 농부들은 부유한 귀족들에게 진 빚을 갚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번에 평민들은 항의하기 위해 아벤티노 언덕으로 철수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독재관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군중에게 철수를 중단하도록 설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르텐시우스는 호르텐시우스 법을 공포했는데, 이 법은 평민회(플레비스키토)에서 결정된 법률이 귀족을 포함한 모든 로마 시민에게 구속력을 갖도록 규정했다.[6] 이 법은 마침내 두 계급 간의 정치적 불평등을 해소하여 약 200년 간의 투쟁 끝에 신분 투쟁을 종식시켰다. 이 사건은 귀족과 평민 사이의 모든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지만, 로마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으며, 공화국 정부의 연속성을 가능하게 하고 그 경제적, 군사적 확장의 주요 요소 중 하나를 구성하는 새로운 유형의 귀족-평민 귀족(노빌리타스) 형성에 기여했다.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Rome Macmillan
[2] 문서 Livy, 2.23
[3] 문서 Livy, 2.27
[4] 문서 Livy, 2.32
[5] 서적 Tribuni plebis https://onlinelibrar[...] Wiley Online Library 2018
[6] 웹사이트 Secessio plebis https://www.imperium[...]
[7] 문서 Livy, 2.33
[8] 문서 Livy, 3.55.13
[9] 문서 Cornell, p. 265
[10] 문서 Cornell, p. 277
[11] 문서 Livy, iv. 4.
[12] 문서 Dionysius, x. 60.
[13] 문서 Livy, iv. 1.
[14] 문서 Livy, iv. 3–5.
[15] 문서 Livy, iv. 6.
[16] 문서 Livy, iv. 7.
[17] 문서 Dionysius, xi. 60.
[18] 문서 Dionysius, xi. 60, 61.
[19] 문서 "'''[[Works attributed to Florus|Florus]]''' , ''Epitome'' , Lib. I, X"
[20] 서적 A History of Rome
[21] 서적 로마사(A History of the roman people)
[22] 문서 기원전 471년, 볼레로 푸블릴리우스 법: 평민회와 호민관이 승인을 받음. 《로마사》, M.하이켈하임, p.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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