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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베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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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버트 베일리는 1599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태어난 스코틀랜드의 목사이자 학자이다.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철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631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하고 찰스 2세의 복위를 위해 활동했으며,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베일리는 신학적 저술을 남겼으며, 전례 논쟁과 교회론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두 번 결혼했으며, 1662년에 사망했다.

2. 생애

로버트 베일리는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교육받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종교 개혁과 정치 활동에 참여했다. 1631년 킬위닝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부르주아로 임명되었다. 1638년 어바인 노회를 대표하여 글래스고 총회에 참석했고, 1639년 주교 전쟁에 군목으로 참전했다. 1640년 윌리엄 로드 대주교 고발장을 작성했고, 1642년 글래스고 트론 교회 목사로 임명되었으며, 글래스고 대학교 신학 교수가 되었다.

1643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스코틀랜드 성직자 대표로 파견되었고,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과 운율 시편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에 제출했다. 1649년 찰스 2세를 스코틀랜드로 초청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파견되었다. 공화정 기간에는 종교 논쟁에 참여했지만, 정치 활동은 자제했다. 1661년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이 되었으나, 1662년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로버트 베일리는 1599년 글래스고 솔트마켓에서 상인이자 글래스고 부르주아인 제임스 베일리와 그의 아내 헬렌 깁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그는 글래스고 고등학교와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1620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1] 이후 제임스 로 대주교로부터 인가를 받고 글래스고 대학교 철학 교수가 되었으며, 알렉산더 몽고메리 제6대 에글린턴 백작 아들의 가정교사를 맡기도 했다.[1]

2. 2. 목회 활동과 종교 개혁 참여

1631년, 베일리는 킬위닝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638년,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가 재건되었을 때 어바인 노회를 대표하여 글래스고 총회에 참석했다. 1639년에는 주교 전쟁에 참전하여 알렉산더 레슬리 장군 휘하 스코틀랜드 군대의 군목으로 활동했다. 1640년에는 코버넌트인들에 의해 윌리엄 로드 대주교를 고발하는 고발장을 작성하도록 임명되었다. 1642년, 베일리는 글래스고 트론 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글래스고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 임명되어 데이비드 딕슨과 함께 교수로 재직했다.

2. 3. 웨스트민스터 총회 참석

1643년, 베일리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파견된 다섯 명의 스코틀랜드 성직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1]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작성에 기여했으며, 1647년 1월에는 완성된 신앙고백과 운율에 맞춘 시편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에 제출했다.[1]

2. 4. 찰스 2세 복위와 공화정 시기

1649년, 베일리는 찰스 2세를 스코틀랜드로 초청하고 그의 정부 참여 조건을 정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파견된 위원들 중 한 명이었다.[1] 그는 공화정 시기 동안 종교적 논쟁에는 계속 관심을 가졌지만, 정치적으로는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았다.[1] 스코틀랜드 교회 내에서 결의파 대 반대파 분열이 일어났을 때, 베일리는 결의파를 지지했다. 그는 교회를 불신자와 선택받은 자 모두를 포함하는 '혼합 교회'로 보았으며, 교회의 단결을 유지하고 분파주의자들의 위협에 맞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2. 5.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 재직과 사망

1661년, 베일리는 패트릭 길레스피의 뒤를 이어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그는 복위 이후 찰스 2세가 스코틀랜드에 강요한 주교 제도가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공개적으로 주교의 복귀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1662년, 그는 새로 임명된 글래스고 대주교 앤드루 페어풀을 정중하게 맞이했지만 그의 지위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베일리는 1662년 8월에 사망했다.

3. 신학 및 사상

로버트 베일리는 신학과 관련하여 전례 논쟁과 교회론에 대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임스 6세의 퍼스 조항에 의해 도입된 전례적 변화를 수용하는 입장이었으나, 윌리엄 로드의 '스코틀랜드 기도서'에 대해서는 "가톨릭적"이고 "우상 숭배적"이라고 비난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1] 또한, 교회 구성원에 대해서는 불신자와 선택받은 자 모두를 포함하는 '혼합 교회'를 지지하며, 교회의 단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1]

3. 1. 전례 논쟁

베일리는 제임스 6세의 퍼스 조항(1618)에 의해 도입된 전례적 변화를 수용했으며, 어바인 교구 목사인 데이비드 딕슨과의 긴 서신 교환을 통해 성찬 시 무릎 꿇는 행위에 대한 완벽한 변호를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윌리엄 로드의 ''스코틀랜드 기도서''(1637)를 "가톨릭적"이고 "우상 숭배적"이라고 비난했다.[1] 그는 이 기도서의 캔터베리 출신 저자들의 의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1641년에 A parallel or briefe comparison of the liturgie with the masse-book, the breviarie, the ceremoniall, and other Romish ritualsenm와 ''Ladensium autakakrisis''에 담아 발표했다.

3. 2. 교회론

베일리는 교회를 불신자와 선택받은 자 모두를 포함하는 '혼합 교회'로 보았다. 그는 회원 자격(그리고 더 나아가 교회 직책을 맡을 수 있는 능력)이 경건한 "진실한" 신자에게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더 배타적인 가시적 성도들의 교회에 대한 반대파의 비전을 거부했다. 베일리는 교회의 단결을 유지하고 분파주의자들의 위협에 맞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1]

4. 저서

데이비드 랭이 편집한 『로버트 베일리 서신 및 일지』(1637–1662) (배너타인 클럽, 3권, 에든버러, 1841–1842)에서 그의 저작에 대한 완전한 회고록과 저작 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1]

베일리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1]


  • 로드와 그의 체제를 비판하는 형식으로 존 코르벳의 『Lysimachus Nicanor』에 대한 답변인 『Ladensium αὐτοκατάκρισις』 (이 책은 코버넌트들이 예수회라고 비난한 출판물에 대한 답변)
  • 토마스 램브가 이끈 것과 같은 초기 잉글랜드 침례교회의 부상을 비판하는 설교인 『재세례파, 독립, 브라우니즘, 반율법주의, 가족주의 등의 진정한 근원』
  • 『스코틀랜드 교회의 정부에 대한 역사적 변호』
  •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로드)의 삶을 검토함』(런던, 1643)
  • 『전례서와 미사본, 성무일과, 의식서 및 기타 로마식 의례의 비교』(런던, 1661)


제목연도비고
La densivm AUTOKATAKRISIS : the Canterburians self-conviction ... : with a postscript for the personat Jesuite Lysimachus Nicanor1641코버넌트들이 예수회라고 비난한 출판물에 대한 답변
A dissuasive from the errours of the time : wherein the tenets of the principall sects, especially of the Independents, are drawn together in one map, for the most part in the words of their own authours and their maine principles are examined by the touch-stone of the Holy Scrptures1645
Errours and induration are the great sins and the great judgements of the time : preached in a sermon before the Right Honourable House of Peers, in the Abbey-Church at Westminster, 30 July 1645, the day of the monethly fast1645
Operis historici et chronologici libri duo : in quibus historia sacra & profana compendiosè deducitur ex ipsis fontibus, a creatione mundi ad Constantinum Magnum, & quaestiones ac dubia chronologica, quae ex V. & N. Testamento moveri solent, breviter & perspicuè explicantur & vindicantur. Una cum tribus diatribis ...1668
The letters and journals of Robert Baillie ... 1637–1662 (Volume 1)1841
The letters and journals of Robert Baillie ... 1637–1662 (Volume 2)1841
The letters and journals of Robert Baillie ... 1637–1662 (Volume 3)1841


5. 가족 관계

베일리는 두 번 결혼했다.[1]

첫 번째 부인은 캐더 교구 카다로크 가문 출신 릴리아스 플레밍으로, 1631년에 결혼하여 1653년 6월 7일에 사망했다. 자녀는 다음과 같다.[1]

이름비고
릴리아스1657년 1월 7일과 16일에 윌리엄 에클스 에어 목사와 결혼
헬렌1644년 1월 20일 세례
엘리자베스1647년 10월 23일 세례
기타세 자녀



두 번째 부인은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이었던 존 스트랭 박사의 딸이자, 에든버러 트리니티 교구 목사인 제임스 엘리엇 박사의 미망인이었던 헬렌으로, 1656년에 결혼하여 1679년 2월에 사망했다. 자녀는 다음과 같다.[1]

이름비고
마가렛1657년 7월 21일 세례; 배로우필드와 캄라치의 존 워킨쇼와 결혼;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정부였던 클레멘티나 워킨쇼의 조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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