룽터우산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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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룽터우산 고분군은 발해 문왕이 수도를 중경으로 옮긴 745년 이후 건설된 고분군으로, 발해 멸망 시까지 사용되었다. 1980년 정효공주 묘 발굴을 통해 발해의 회화, 복식, 문자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었으며, 1988년에는 중점보호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분군은 용호, 용해, 석국 세 구역으로 나뉘며, 정효공주 묘는 용해 구역에 위치한다. 정효공주 묘는 793년에 만들어진 발해 초기의 무덤으로, 벽화와 묘지명을 통해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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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터우산 고분군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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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상세 정보 | |
건축 양식 | 돌 널 무덤 |
문화 | 발해 |
축조자 | 문왕 |
연대 | 745–926 |
발견 | 1970년대 |
발굴 | 1980년, 1982년, 2005년 |
기타 위치 정보 | , |
2. 역사
룽터우산 고분군의 첫 번째 무덤 건설은 문왕이 발해의 수도를 중경으로 옮긴 745년 이후에 시작되었다.[1] 이 묘역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룽터우산 고분군에서의 첫 번째 발굴은 1980년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용해 구역에 있는 정효공주 묘를 발굴했다. 동시에 박물관 관계자들은 다른 기관들과 함께 7.5km2 면적의 조사를 실시했다. 또한, 지역 고고학자들을 초청하여 다른 고분들에 대한 시험 발굴을 실시했는데, 이 과정에서 다양한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1]
룽터우산 고분군은 크게 세 개의 매장 구역으로 나뉜다.[2]
정효공주의 묘비가 발견되면서, 이곳이 발해의 현덕부(顯德府)가 위치했던 곳이라는 학계의 오랜 추정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1]
이 유적지는 1988년 1월 13일부터 중점보호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무덤의 벽과 벽화는 부식 방지 처리가 이루어졌으며, 과거에는 무덤 위에 적어도 하나의 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2][3]
3. 발굴
1982년, 옌볜 박물관은 용해 구역에서 7기의 고분을 발굴했다. 7기 모두 상당히 가깝게 밀집되어 있었지만, 고분들의 덮개는 이미 붕괴된 상태였다. 일부 고분은 더 오래된 고분을 관통하기도 했다. 이 중 두 기의 고분에는 두 사람이 동시에 매장되었고, 네 기의 고분에는 두 사람이 순차적으로 매장되었으며, 한 기의 고분에는 네 사람이 매장되었는데, 한 사람은 먼저 매장되었고, 다른 세 사람은 별도의 시기에 매장되었다. 이차 매장의 경우,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시신의 머리나 발 위에 놓였다.[1]
4. 묘역 배치
5. 정효공주 묘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는 793년에 축조된 발해 초기의 고분으로,[4] 발해 예술가들이 제작한 최초의 완전하고 상세한 벽화가 발견되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4] 묘는 지상 구조물(장례 탑, 묘총)과 지하 매장 시설로 구성된다.[1][5][6] 묘의 구조는 고구려 양식을 계승하면서도[4]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특징을 보인다.[7] 묘 내부에서는 벽화와 함께 공주의 생애를 기록한 화강암 묘지명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5. 1. 구조
정효공주묘는 793년에 축조된 발해의 고분이다.[4] 이 묘는 벽화를 통해 발해의 예술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다.묘의 구조는 지상 구조물과 지하 매장 시설로 나뉜다. 지상에는 본래 벽돌과 돌판으로 만든 장례 탑과 묘총(봉분)이 있었다.[1] 현재 탑은 기단 부분만 남아 있으며, 원래 크기는 가로 5.5m, 세로 5.65m의 정사각형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5]
묘총 아래 지하에는 입구 통로, 묘 입구, 내부 통로, 매장실로 구성된 매장 시설이 있다. 매장실은 1980년 10월에 발굴되었으며,[6] 크기는 가로 2.1m, 세로 3.1m이다. 벽은 벽돌로 쌓았고 천장은 돌판으로 덮었다. 이러한 돌로 줄지어 쌓은 흙무덤 양식은 고구려 양식의 계승을 보여주는 한편,[4] 출토된 인물들의 정식 의복은 당나라 양식을 따르고 있어, 발해가 당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시사한다.[7]
매장실 내부 통로의 뒷벽과 매장실의 북쪽, 동쪽, 서쪽 벽에는 총 12점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각 벽에는 4점씩 배치되어 있으며, 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보라색, 갈색 등 다양한 색상의 옷을 입은 인물 13명(무사 3명, 시종, 악사, 하녀 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벽화들은 발해인의 모습을 온전하게 보여주는 최초의 자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매장실 안에서는 높이 1.05m, 너비 0.58m, 두께 0.26m 크기의 화강암 비석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비석은 土圭|무이중국어 모양이며, 표면에는 정자체로 쓰인 728자의 한자가 18줄에 걸쳐 새겨져 있다. 비문은 공주의 생애를 기록한 내용과 추모의 글이 결합된 형식이다. 비문을 작성한 발해 학자는 당나라 초기 시 형식을 모방하는 등 당시 중국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5. 2. 벽화

정효공주묘 내부 통로의 뒷벽과 매장실의 북쪽, 동쪽, 서쪽 벽에는 원래 사람들을 묘사한 12개의 벽화가 있었다.[6][4] 매장실은 각 벽에 4개의 벽화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이 벽화들은 발해 예술가들이 제작한 최초의 완전하고 상세한 벽화로 역사학자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된다.[4]
이 벽화들에는 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보라색, 갈색 가운을 입은 전사(3명), 실내 시중, 음악가, 하녀 등 총 13명의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 벽화는 발해 사람들의 모습을 처음으로 완전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6]
5. 3. 묘지명
매장실에서는 높이 1.05m, 너비 0.58m × 깊이 0.26m 크기의 土圭|무이중국어 모양을 한 완전하고 훼손되지 않은 화강암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정효공주의 묘지명이다. 묘지명에는 정자체 스타일로 총 728자의 한자가 18개의 가로줄에 걸쳐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공주의 전체 삶을 연대기 순으로 기록하고, 공주를 추모하는 내용을 함께 담는 전형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묘지명을 작성한 발해 학자는 당나라 초기 시인들의 시구를 본떠 사용할 정도로 전통적인 중국 문학에 능통했음을 보여준다.묘지명에는 정효공주(貞孝公主)가 발해 문왕의 넷째 딸이며, 발해 정혜공주(貞惠公主)의 여동생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묘지명의 내용 중에는 발해가 자신들의 군주를 당나라 황제와 동등하게 여겼음을 보여주는 표현도 포함되어 있다.[8]
묘지명은 또한 공주가 발해 문왕의 연호인 대흥 56년, 즉 서기 792년 7월 6일에 사망했다고 전한다.[9] 이는 기존에 진유부(金毓黻)의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등 이전 기록에서 793년으로 언급했던 것을 바로잡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공주는 809년 겨울(기묘년, 已卯)을 지나 서기 810년 1월 11일(음력 11월 28일)에 서원(西原)의 염곡(染谷)에 매장되었다. '덕스럽고 효성이 지극하다'는 의미의 시호인 "정효(貞孝)"를 받았다. 묘실에서 말의 유해가 함께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공주가 기마민족의 특성을 가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5. 4. 매장된 인물
묘지명에 따르면, 이곳에 묻힌 인물은 정효공주(貞孝公主)로, 발해 문왕의 넷째 딸이자 발해 정혜공주(貞惠公主)의 여동생이다. 묘지명은 발해가 그들의 군주를 당나라 황제와 동등하게 여겼음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8]묘지명에는 공주가 대흥 56년인 792년 7월 6일 월요일에 사망했으며, 809년 겨울(已卯)인 서기 810년 1월 11일 월요일(음력 11월 28일)에 서원(西原)의 염곡(染谷)에 매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덕스럽고 효성이 지극하다는 의미의 시호 "정효"를 받았다. 묘실에서 말의 유해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기마민족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묘지명에 기록된 사망 연도 792년은 진유부(金毓黻)의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등 이전 기록에서 793년으로 잘못 알려졌던 것을 바로잡는 근거가 된다.[9]
고고학자들이 묘를 발굴했을 당시, 이전의 도굴로 인해 뼈들이 묘실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도굴꾼들은 여러 금과 구리 유물, 보석, 도자기, 조각상 등을 남겨두었다. 특히 세 가닥 새 날개를 묘사한 금 장식은 발해가 고구려의 왕관 양식을 계승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여겨진다.[10] 흩어진 뼈들을 복원한 결과, 공주로 추정되는 여성의 유골과 함께 시중을 들었거나 혹은 아이였을 가능성이 있는 남성의 유골도 확인되었다. 다만, 족보 기록에는 공주가 결혼하여 782년에 태어나 787년에 사망한 딸을 두었다는 내용이 있어, 발견된 남성 유골의 신원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참조
[1]
웹사이트
渤海国文物古迹之龙头山古墓群
http://www.jlcbs.cn/[...]
2012-07-16
[2]
웹사이트
Ancient Tombs at Longtou Mountain – Protected National Cultural Artifacts
http://history.cultu[...]
[3]
웹사이트
Tomb Group of Longtou Mountain
http://www.chinacult[...]
2014-06-05
[4]
서적
Korean History in Map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5]
간행물
美術史學硏究
2002
[6]
서적
Pioneers of Korean Studies
Joeun Munhwasa
2004
[7]
서적
Pre-Modern East Asia:A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Cengage Learning
2013
[8]
뉴스
Korea Now
Korea Herald
2004
[9]
간행물
Journal of Northeast Asian History
[10]
뉴스
Find Challenges China's Claim to Balhae Kingdom
http://english.chosu[...]
The Chosun Ilbo
200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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