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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네빌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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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뤼네빌 조약은 1801년 2월 9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주도한 일련의 협상 끝에 이루어졌다. 이 조약은 오스트리아가 바타비아 공화국, 헬베티아 공화국, 치살피나 공화국, 리구리아 공화국의 독립을 재확인하고, 프랑스가 라인 강 좌안 지역을 합병하는 것을 승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뤼네빌 조약은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재확인하며, 토스카나 대공국을 프랑스에 할양하고, 치살피나 공화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등 이탈리아 지역의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라인강 동쪽 독일 영토를 잃은 군주들에게 보상하는 내용과 제국 대표단 최종 결의를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을 재편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2. 조약 체결까지의 협상 과정

나폴레옹과 뤼네빌 조약을 기리는 메달


1799년 12월 25일, 보나파르트프란츠 2세에게 평화를 제안하는 편지를 썼으나 황제의 답장은 지연되었다. 1800년 1월 20일, 오스트리아와 영국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 협약을 체결했고, 1월 25일, 오스트리아는 보나파르트의 제안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보나파르트가 마렝고 전투 이후 제안을 다시 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협상 개시 전에 1800년 6월 15일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리아 협약과 7월 15일 독일의 파르스도르프 휴전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1798년에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북이탈리아와 라인강 방면으로 침공했지만, 1800년에 마렝고 전투호엔린덴 전투에서 프랑스에 패배하면서 강화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후 세 차례의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호엔린덴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협상은 더욱 진전되었다. 최종 협상은 주로 이탈리아의 경계와 배상에 관한 것이었으며, 토스카나 대공국이 주요 문제였다. 조약은 1801년 2월 9일 오후 5시에 서명되었다.

2. 1. 1차 협상 (1800년 7월 ~ 8월)

1799년 12월 25일, 보나파르트프란츠 2세에게 평화를 제안하는 편지를 썼으나 황제의 답은 늦어졌다. 1800년 1월 20일, 오스트리아와 영국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 협약을 체결했다. 1월 25일, 오스트리아는 보나파르트의 제안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보나파르트가 마렝고 전투 이후 제안을 다시 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협상 개시 전에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리아 협약 (1800년 6월 15일)과 독일의 파르스도르프 휴전 (7월 15일)의 두 차례 휴전이 있었다.

요제프 폰 장-쥘리앙 백작은 1800년 7월 21일 파리에 도착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7월 22일부터 24일, 27일에 프랑스 외무 장관인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를 만났다. 7월 28일, 두 사람은 캄포 포르미오 조약의 대부분을 복사한 예비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주요 차이점은 오스트리아 가문이 독일이 아닌 이탈리아의 영토로 손실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7월 30일, 장-쥘리앙은 프랑스 전권 대사인 제로드 뒤로크와 함께 비엔나로 떠났지만, 프랑스는 최종 조약을 파리에서 체결할 계획이었다.

뒤로크는 오스트리아 측을 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장-쥘리앙은 8월 5일 비엔나에 도착했지만, 그의 예비 평화 조약은 황제에 의해 거부되었다. 8월 13일, 뒤로크는 여권을 거부당하고 앵글로-오스트리아 동맹의 설계자인 오스트리아 외무 장관 요한 아마데우스 폰 투구트의 탈레랑 앞으로의 서한을 받았다. 뒤로크는 8월 20일 파리로 돌아왔다. 파울 크라이 장군의 사령부에 머물면서 파악한 오스트리아 군대의 상태에 대한 그의 보고서가 9월에 나폴레옹이 새로운 공세를 시작하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뒤로크가 오스트리아의 답변을 전달한 직후, 장-쥘리앙은 투옥되어 권한 없이 조약을 체결한 혐의를 받았다.

2. 2. 2차 협상 (1800년 9월)

1799년 12월 25일, 보나파르트는 프란츠 2세에게 평화를 제안하는 편지를 썼지만, 황제의 답장은 지연되었다. 1800년 1월 20일, 오스트리아와 영국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 협약을 체결했다. 1월 25일, 오스트리아는 보나파르트의 제안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보나파르트가 마렝고 전투 이후 제안을 갱신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후 세 차례의 협상이 이어졌다.

협상 개시 전에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리아 협약 (1800년 6월 15일)과 독일의 파르스도르프 휴전 (7월 15일)의 두 차례 휴전이 있었다.

생쥘리앙(Saint-Julien) 실패 이후, 투구트는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함께 협상하기를 원했지만, 나폴레옹은 평화 회담이라는 아이디어를 거부했다. 영국은 이에 프랑스의 별도 강화 조약 제안을 거부했다. 9월 7일, 영국의 외무 장관 그렌빌 경은 파리에 해군 휴전을 제안하는 반대 제안을 보냈다. 이 제안은 9월 10일에 접수되었고, 나폴레옹은 이 제안을 고려하기 위해 휴전을 1주일 연장했지만, 결국 거부되었다. 그 결과, 1800년 9월 20일의 호엔린덴 휴전 협정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휴전을 한 달 연장하는 대가로 울름, 필립스부르크, 잉골슈타트 요새를 프랑스에 양도했다. 9월 25일, 투구트는 오스트리아 외무 장관직에서 사임했다.

2. 3. 최종 협상 (1800년 10월 ~ 1801년 2월)

루트비히 폰 코벤츨 백작이 오스트리아 전권대사로 임명되어 뤼네빌에서 협상이 진행되었다. 프랑스는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을 모색하며 영국 대표 수용을 거부했다. 호엔린덴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협상은 더욱 진전되었다.

최종 협상은 주로 이탈리아의 경계와 배상에 관한 것이었다. 토스카나 대공국이 주요 문제였다. 12월 30일, 황제는 교황령을 유지하는 경우 이탈리아 영토의 경계로 오글리오강을 받아들이고, 모데나 공작은 독일이 아닌 이탈리아에서의 손실에 대해 보상하겠다고 제안했다. 뤼네빌에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이탈리아에서 전투가 계속되었으므로, 코벤츨은 프랑스가 이탈리아에서 진격함에 따라 그의 요구 사항을 동쪽으로 계속 조정해야 했다. 1월 5일까지 그는 키에제 강을, 1월 9일까지 민치오 강을, 1월 15일까지 아디제 강과 Fossa Maestra|포사 마에스트라it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1월 16일,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령관은 트레비소 휴전을 체결하여 만토바 요새를 오스트리아 손에 남겨두었다. 코벤츨은 1월 25일 조제프 보나파르트와의 여섯 번째 공식 회의 당시 그것을 알지 못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 휴전을 대가로 만토바, 페스키에라 델 가르다, 레냐노, 페라라안코나 요새의 양도와 토스카나 대공의 이탈리아 추방을 요구했다. 슈타이어 휴전이 만료되었으므로 양측은 그것을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만토바는 오스트리아에게 빼앗겼다.

2월 1일, 프랑스는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의 대표가 협상에 참여하도록 허용하라는 오스트리아의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마지막 주는 라인강 좌안과 제국 문제로 채워졌다. 오스트리아는 제2차 라슈타트 회의와 같은 또 다른 회의를 열어 제국을 위한 평화를 만들기를 원했다. 나폴레옹은 프란츠가 자신, 자신의 영토,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을 대신하여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조약은 마침내 1801년 2월 9일 오후 5시에 서명되었다.

3. 조약의 주요 내용

1800년 마렝고 전투호엔린덴 전투에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게 승리하면서 뤼네빌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고, 영국만이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뤼네빌 조약은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재확인하는 내용이었다. 조약 당사자들은 "이제부터 영원히 평화, 우호, 상호 이해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3. 1. 영토 변화

오스트리아는 바타비아 공화국, 헬베티아 공화국, 치살피나 공화국, 리구리아 공화국의 독립을 재확인했다. 프랑스는 라인 강 좌안 지역(라인란트)을 합병했으며, 토스카나 대공국은 프랑스에 양도되어 에트루리아 왕국이 되었다. 치살피나 공화국의 영토가 확장되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포함한 라인강 왼쪽 제방 전체가 프랑스에 할양되었다. 제국 이탈리아 또한 제국으로부터 할양되어 프랑스와 새로운 이탈리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3. 2. 기타 합의 사항

나폴리 왕국에서 왕정이 복귀되었다. 영토를 잃은 군주들은 독일 영토로 보상받을 예정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베네치아 테라페르마, 베네치아 달마티아, 그리고 모든 이스트라 획득이 확인되었다.

4. 제국 대표단 최종 결의 (1803년)

이 조약은 3월 7일 제국 의회에서 수용되었다.

보상 문제는 제국 대표단(독일어: ''Reichsdeputation'')에 맡겨졌다. 프랑스러시아는 제국 대표단의 협상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프랑스는 나중에 동맹이 되기를 희망하며 더 큰 새로운 영토를 형성할 것을 촉구했고, 러시아는 "더 전통적인 균형"을 선호했다. 결국, 제국을 재편성하는 최종 문서인 ''Reichsdeputationshauptschluss''(제국 대표단 최종 결의)가 1803년 2월 25일에 서명되었다. 이 결의는 제후들의 보상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것 이상으로, 마인츠 선제후국을 제외한 모든 교회령을 세속화함으로써 제국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했다. 거의 모든 자유 제국 도시가 주권을 잃었다. ''Reichsdeputationshauptschluss''는 1806년 해체 이전 신성 로마 제국 역사상 마지막 주요 법이었다.

5. 조약의 영향

오스트리아1798년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북이탈리아와 라인강 방면으로 침공했지만, 1800년 마렝고 전투호엔린덴 전투에서 프랑스에 패배하여 강화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 강화 조약으로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고, 영국만이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바타비아 공화국, 헬베티아 공화국, 치살피나 공화국, 리구리아 공화국의 승인을 재확인하고, 프랑스의 라인란트 합병을 승인했다. 기본적으로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재확인하는 내용이었으며, 패전국인 오스트리아에게는 관대한 내용이었다. 또한 토스카나 대공국을 프랑스에 양도하고(이후 대공국은 폐지, 에트루리아 왕국 성립), 치살피나 공화국의 영토를 확장했으며, 나폴리 왕국의 왕정 복귀 등 이탈리아의 여러 문제에 관해서도 동시에 합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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