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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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량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1382년 장원 급제 후 형조판서, 이조전서, 계림 부윤, 강릉 대도호부사 등을 역임했다. 조선 태종 때 우의정을 지냈으며, 정1품 공신으로 문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강릉 부사 재직 시 백성들이 그의 덕을 기려 사당을 세웠으며, 사후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시호는 충경이며, 후손들은 문화 류씨 충경공파를 이루었다.
고려조 1382년(우왕 8)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1390년(공양왕 2) 형조판서가 되었다.[1]
그의 묘 《류량선생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시우리에 있다. 봉분은 부인 정안 이씨와의 합장묘로 2기가 나란히 놓여 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3단의 계단식 모양인데 맨 윗단에는 봉분과 묘비를, 가운데에는 문인석을, 아래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을 놓았다. 왼쪽 봉분 아래에는 긴 돌을 이용하여 3단으로 둘레석을 둘렀으며 오른쪽 부인의 봉분은 2단으로 둘렀다.[3] 묘역 아래에는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워주는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는데 1959년에 후손들이 만든 것이다. 1984년 9월 12일 경기도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었다.[3]
2. 생애
조선 태조 때에 이조전서, 계림 부윤, 강릉 대도호부사를 지냈으며, 태종 때에 참지삼군부, 예문관 대제학, 우의정을 지냈다. 정1품 공신으로 문성부원군에 봉하여졌다.[1]
강릉 부사로 있었을 때에는 강릉의 백성들이 덕있는 정치에 감동하여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당을 세웠다.[2]
2. 1. 고려 시대
1382년(우왕 8)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1] 1390년(공양왕 2) 형조판서가 되었다.[1]
2. 2. 조선 시대
1390년 형조판서가 되었다.[1] 조선 건국 이후 이조전서, 계림 부윤, 강릉 대도호부사를 지냈다.[1] 강릉 부사로 재직할 당시 백성들이 그의 덕망에 감화되어 살아있음에도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2] 이후 참지삼군부,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태종 때 우의정을 역임하였다.[1] 태종 때 정1품 공신으로 문성부원군에 봉해졌다.[1]
3. 사후
시호는 충경이며 그의 후손은 문화 류씨 충경공파를 이루었다.[3]
4. 가족 관계
참조
[1]
웹사이트
문성 부원군 유양의 졸기
http://www.itkc.or.k[...]
[2]
웹사이트
태종조의 상신
http://www.itkc.or.k[...]
[3]
웹사이트
문화유씨
http://www.encyb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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