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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나오카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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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나오카쓰는 1840년에 태어나 1897년에 사망한 인물로, 지쿠고 국 구루메 번주 아리마 요리노리의 13남으로 태어났다. 가와고에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타카의 사위가 되어 가문을 상속받았으며, 정사총재직을 역임하며 막부 정치에 참여했으나 쇄항 문제로 갈등을 겪고 면직되었다. 이후 마에바시 번으로 본거지를 옮겨 번주로 복귀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 귀순하여 아이즈 번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판적봉환 이후 번지사를 거쳐 은거했으며, 사후 정삼위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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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나오카쓰
기본 정보
씨명섭쓰 아리마 씨 →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
이름마쓰다이라 나오카쓰
이명도미노조 (유명) → 아리마 요리아쓰 (초명) → 마쓰다이라 나오카쓰
계명직지 원전 견성 양산 대거사
묘소도쿄도다이토구야나카의 덴노지
시대에도 시대 말기 (막말) - 메이지 시대
출생덴포 11년 2월 26일 (1840년3월 29일)
사망메이지 30년 (1897년1월 25일)
마쓰다이라 나오카쓰
마쓰다이라 나오카쓰
관직
관위종4위하, 종4위상, 야마토수, 시종, 좌근위소장, 정3위
막부에도 막부정사 총재직
무사시가와고에번 번주 → 고즈케마에바시번 번주
가족 관계
부모아버지: 아리마 요리노리, 양아버지: 마쓰다이라 나오요시
형제아리마 요리나가, 아리마 요리카네, 가메이 고레미, 나오카쓰
배우자정실: 에히메 (마쓰다이라 나오요시의 양녀, 마쓰다이라 가칸의 딸), 측실: 오방 (데라이 씨)
자녀나오유키, 와타나베 나오타쓰, 양자: 나오카타
경력
전임자마쓰다이라 나오요시
후임자마쓰다이라 나오카타
직책에치젠 마쓰다이라가 나오모토계 당주
대수11
임기1861년 ~ 1869년
전임자 (번주)마쓰다이라 나오요시
후임자 (번주)마쓰다이라 야스히데
직책 (번주)가와고에번 번주 (에치젠 마쓰다이라가)
대수 (번주)7
임기 (번주)1861년 ~ 1867년
전임자 (마에바시번주)가와고에 번의 원격 영지(마쓰다이라 도모노리)
후임자 (마에바시번주)마쓰다이라 나오카타
직책 (마에바시번주)마에바시번 번주 (에치젠 마쓰다이라가, 재봉)
대수 (마에바시번주)1
임기 (마에바시번주)1867년 ~ 1869년

2. 생애

덴포 11년(1840년) 2월 26일, 지쿠고 국구루메 번 9대 번주 아리마 요리노리의 13남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1] 아리마 요리노리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지만, 성장한 아들은 4명뿐이었다. 그중 막내였던 나오카쓰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10대 번주가 된 맏형 요리나가의 총애를 받았다.[1]

분큐 원년 12월 6일(1862년), 가와고에 번 6대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타카의 사위 양자가 되어 가문을 상속받았다. 분큐 2년 12월 15일(1863년)에는 종사위하·시종·야마토노카미에 서위·임관되었다.

분큐 3년(1863년) 10월 11일, 마쓰다이라 슌가쿠의 사직 이후 공석이던 정사총재직에 취임하여, 친번 다이묘이면서 막부 정치에 참여했다. 분큐 4년(1864년) 1월에는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함께 상경하여 조정 및 참예회의와 협상에 임했다. 겐지 원년(1864년) 6월, 정쟁에서 패하여 정사총재직에서 면직되어 막부 정치에서 물러났다.

게이오 3년(1867년) 3월, 마에바시 번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게이오 4년(1868년) 3월, 신정부에 귀순하여 조즈케 전토의 진무를 맡았고, 이어서 아이즈 번과 싸웠다.

메이지 2년(1869년) 6월, 판적봉환에 의해 마에바시 번지사에 임명되었지만, 8월 17일에 장남이 유아였기 때문에, 가독을 양자인 나오카타에게 양보하고 은거했다. 메이지 30년(1897년) 1월에 정삼위로 서위되었지만, 1월 25일에 사망했다. 향년 58세.

2. 1. 출생과 가계

덴포 11년(1840년) 2월 26일, 지쿠고 국구루메 번 9대 번주 아리마 요리노리의 13남(세는 나이로 5남으로도 기록됨)[2]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1] 아리마 요리노리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지만, 성장한 것은 요리나가 (4남), 카메이 시칸 (6남), 코고로 (요리시게, 7남), 토미노조 (→ 마쓰다이라 나오카쓰)의 4명뿐이었다. 토미노조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막내였기 때문에 10대 번주가 된 맏형 요리나가에게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1]

요리나가가 병에 걸려 그의 후계자가 논의되자, 범용하다고 여겨진 효고로 대신 총명한 토미노조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6남 요리노리는 이보다 먼저 카메이 가문을 잇고 쓰와노 번주가 되었다[1]). 구루메 번에서는 미토학을 받드는 일파 '덴포학련'이 요리나가에 의해 기용되어 영향을 미치고 있었지만, 덴포학련의 젊은이로 요리나가 측근이었던 무라카미 모리타로와 노자키 헤이하치 등은 만약의 경우에는 우선 효고로를 세우고 토미노조가 15세가 되면 번주의 지위를 잇게 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덴포학련의 지도층에 해당하는 마키 야스오미와 키무라 사부로 등은 이를 알고 장유의 서열을 어지럽히는 것으로 반대했다.[1] 덴포학련은 후계 문제를 계기로 무라카미 등 '내 동지' 파와 마키 등 '외 동지' 파로 분열되어 이후 오랫동안 대립하게 되었다.[1]

2. 2. 가와고에 번 상속과 막부 정치 참여

분큐 원년 12월 6일(1862년), 가와고에 번 6대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타카의 사위 양자가 되어 가문을 상속했다. 분큐 2년 12월 15일(1863년)에 종사위하·시종·야마토노카미에 서위·임관했다.

분큐 3년(1863년) 10월 11일, 전임 마쓰다이라 슌가쿠의 사직 이후 공석이던 정사총재직에 취임하여, 친번 다이묘이면서 막부 정치에 참여했다. 분큐 4년(1864년) 1월에는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함께 상경하여 조정 및 참예회의와 협상에 임했다. 그 후 고메이 천황의 의향에 따라 킨리 어수위 총독 히토바시 요시노부와 함께 요코하마 항의 쇄항을 추진했으며, 요코하마 항 쇄항을 명분으로 거병한 덴구당의 난 진압에도 반대했기 때문에 다른 막료들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겐지 원년(1864년) 6월, 정쟁은 양측 모두 자멸하는 형태로 끝나, 나오카쓰는 정사총재직에서 면직되어 이후 막부 정치에서 물러났다.

2. 3. 마에바시 번 복귀와 메이지 유신

마쓰다이라 아사노리 시대에 마에바시번으로 전봉되었으나, 잦은 톤네가와의 침식 피해로 붕괴 위기에 놓인 마에바시성을 포기하고, 막부의 허가를 얻어 무사시 가와고에성으로 본거지를 이전하였다. 마에바시는 분령으로 파견된 다이칸 지배로 했고, 메이와 6년(1769년)에 마에바시성은 폐성·파각되었다. 그러나 옛 번의 수도인 마에바시령에서는 마에바시성 재건과 번주 마에바시 복귀의 요망이 강했다. 덴포 연간에 군대 봉행인 야스이 마사아키의 지휘 아래 톤네가와의 개수가 진행되었고, 요코하마 개항 후에 마에바시령의 생사의 외국 수출로 재산을 이룬 마에바시 상인들 사이에서 마에바시성 재건·번주 '귀성'을 위해 번에 헌금하는 경제력과 기운이 높아졌다.[1] 나오카쓰는 분큐 3년(1863년), 막부에 청원하여 마에바시성의 재축성을 개시하였고[2], 게이오 3년(1867년) 3월, 마에바시로 본거지를 옮겨 다시 마에바시번이 되었다.

게이오 4년(1868년) 3월, 신정부에 귀순하여 조즈케 전토의 진무를 맡았고, 이어서 아이즈번과 싸웠다. 메이지 2년(1869년) 6월, 판적봉환에 의해 마에바시 번지사에 임명되었지만, 8월 17일에 장남 쓰네노조(후의 나오유키)가 유아였기 때문에, 가독을 양자인 나오카타에게 양보하고 은거했다. 메이지 30년(1897년) 1월에 정삼위로 서위되었지만, 1월 25일에 사망했다. 향년 58세.

3. 영전

1897년 1월 25일 정삼위에 추서되었다.[3]

4. 가계도

관계이름비고
부친아리마 요리노리(1797년 - 1844년)
양부마쓰다이라 나오모토(1839년 - 1861년)
정실혜경원마쓰다이라 요시히로의 딸, 마쓰다이라 나오모토의 양녀
측실데라이 씨
장남마쓰다이라 나오유키(1861년 - 1932년), 백작
차남와타나베 나오타츠(1872년 - 1944년), 와타나베 키헤이의 양자
양자마쓰다이라 나오카타(1858년 - 1907년), 마에다 토시토시의 차남



『헤이세이 신수 구 화족 가계 대성』에는 정실( 마쓰다이라 요시히로 장녀, 마쓰다이라 나오모토 양녀)의 이름이 코(幸)로 기재되어 있다.[1]

4. 1.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 계보

아리마 요리노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불명이다. 마쓰다이라 나오모토를 양부로 두었다. 정실은 마쓰다이라 요시히로의 장녀이자 마쓰다이라 나오모토의 양녀인 혜경원, 혜희, 사치코이다. 측실로는 데라이 씨가 있었다.[1]

장남은 나오유키(1861년 - 1932년)이며, 다른 아들로는 와타나베 키헤이의 양자가 된 와타나베 나오타츠(1872년 - 1944년)가 있다. 양자로는 마에다 토시토시의 차남인 나오카타(1858년 - 1907년)를 두었다.[1]

나오카쓰 이후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의 가독은 나오카타, 모토노리 (마쓰다이라 노리노리 삼남)가 계승했다.[1]

나오카쓰의 친아들 마쓰다이라 나오유키는 1875년에 분가했다가, 1897년에 마쓰다이라 가문에 복적하였다. 1907년에 마쓰다이라 모토노리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아 백작이 되었다.[1]

에도 시대 후기부터 근대까지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의 계승 관계는 다음과 같다.[1]

아리마 요리노리11대14대15대
마쓰다이라 나오카쓰마쓰다이라 나오유키마쓰다이라 나오토미
마에다 도시아키라12대
마쓰다이라 나오카타
도쿠가와 나리아키10대
마쓰다이라 나오토마쓰다이라 야에
8대9대13대
마쓰다이라 나리노리마쓰다이라 노리노리마쓰다이라 모토노리


참조

[1]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 霞会館
[2] 웹사이트 松平直克 https://kotobank.jp/[...] 2014-04-13
[3] 간행물 官報 1897-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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