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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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크 홀든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가수, 배우, 프로듀서, 방송인, 변호사이다. 1974년 음악 경력을 시작하여 1970년대 후반까지 "Never Gonna Fall in Love Again" 등의 히트곡으로 인기를 얻었다. 이후 프로듀서로 전향하여 다양한 아티스트와 작업했으며,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안 아이돌 심사위원을 맡아 방송 활동을 펼쳤다. 2001년 법학 학위를 취득하고 변호사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2014년에는 댄싱 위드 더 스타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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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홀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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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 이름 | 마크 로널드 홀든 |
출생일 | 1954년 4월 27일 |
출생지 | 애들레이드, 남호주, 오스트레일리아 |
직업 | 가수 작곡가 음반 프로듀서 음악가 배우 텔레비전 진행자 변호사 |
활동 기간 | 1974년–현재 |
레이블 | EMI 뮤직 스코티 브라더스 레코드 카사블랑카 레코드 소니 뮤직 오스트레일리아 |
웹사이트 | 마크 홀든 카운트다운 아카이브 |
2. 초기 생애 및 경력
마크 로널드 홀든은 1954년 4월 27일 노스 애들레이드의 칼버리 병원에서 헬렌(결혼 전 성은 킹)과 론 홀든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 론은 건축가였고, 어머니 헬렌은 교사였다.[3]
1960년대 중반, 홀든은 형에게서 기타를 물려받아 음악을 시작했다.[4] 웨스트민스터 스쿨 재학 중 학교 밴드를 결성하고, 작곡을 시작했으며, 루이스 데이에게 클래식 성악 레슨을 받았다.[3] 1972년 애들레이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했다.[3]
같은 해, 이웃의 권유로 어니 시글리가 진행하는 지역 텔레비전 쇼 ''애들레이드 투나잇'' 오디션을 보았다. 노스 애들레이드의 틴트 스트리트에서 열린 공개 오디션에서 자작곡과 "I'll Walk with God"를 불러 합격했고, 여러 번 쇼에 출연했다. 1973년 시글리가 멜버른에서 ''어니 시글리 쇼''를 시작하면서 홀든을 초청했고, 홀든은 멜버른과 애들레이드를 오가며 음악 활동과 학업을 병행했다.[4]
2. 1. 어린 시절 및 교육
마크 로널드 홀든은 1954년 4월 27일 노스 애들레이드의 칼버리 병원에서 헬렌(결혼 전 성: 킹)과 론 홀든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 쪽 가족은 홀든과 슬로게츠 이동 서커스에 관여했지만, 론은 건축가가 되었고 헬렌은 교사였다.[3]1960년대 중반, 홀든은 형 크레이그로부터 기타를 물려받은 후 음악에 참여하게 되었다.[4] 웨스트민스터 스쿨에 다니며 학교 밴드를 결성했고, 노래를 쓰기 시작했으며 루이스 데이와 함께 클래식 성악 레슨을 받았다. 2010년 ABC와의 인터뷰에서 홀든은 "우리는 밴드 연습을 위해 계단 아래 방을 받았습니다."라며 밴드가 격려를 받았다고 말했다.[3] 1972년, 애들레이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법학을 공부했다.[3]
1972년, 이웃의 권유로 어니 시글리가 진행하는 지역 텔레비전 쇼 ''애들레이드 투나잇''의 오디션을 보았다. 노스 애들레이드의 틴트 스트리트에서 열린 공개 오디션에 참석하여 자작곡과 "I'll Walk with God"를 불렀고, 성공하여 여러 번 쇼에 출연했다. 1973년, 시글리는 멜버른으로 이주하여 자신의 쇼 ''어니 시글리 쇼''를 시작했고, 홀든을 멜버른으로 초청하여 이 쇼에서 공연하게 했다. 1973년 한 해 동안, 홀든은 음악과 법학 학위를 병행하며 멜버른과 애들레이드를 오갔다.[4]
2. 2. 초기 활동 (1972-1974)
마크 로널드 홀든은 1954년 4월 27일 노스 애들레이드의 칼버리 병원에서 헬렌(결혼 전 성: 킹)과 론 홀든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 쪽 가족은 홀든과 슬로게츠 이동 서커스에 관여했지만, 론은 건축가가 되었고 헬렌은 교사였다.[3]1960년대 중반, 홀든은 형 크레이그로부터 기타를 물려받은 후 음악에 참여하게 되었다.[4] 홀든은 애들레이드의 웨스트민스터 스쿨에 다녔으며 학교 밴드를 결성했다. 그는 노래를 쓰기 시작했고 루이스 데이와 함께 클래식 성악 레슨을 받았다. 2010년 ABC와의 인터뷰에서 홀든은 밴드가 격려를 받았다며 "우리는 밴드 연습을 위해 계단 아래 방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3] 1972년, 애들레이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법학을 공부했다.[3]
같은 해, 이웃의 권유로 어니 시글리가 진행하는 지역 텔레비전 쇼 ''애들레이드 투나잇''의 오디션을 보았다. 노스 애들레이드의 틴트 스트리트에서 열린 공개 오디션에 참석하여 자작곡과 "I'll Walk with God"를 불렀고, 성공하여 여러 번 쇼에 출연했다. 1973년, 시글리는 멜버른으로 이주하여 자신의 쇼 ''어니 시글리 쇼''를 시작했고, 홀든을 멜버른으로 초청하여 이 쇼에서 공연하게 했다. 같은 해, 홀든은 음악과 법학 학위를 병행하며 멜버른과 애들레이드를 오갔다.[4]
3. 음악 경력
1960년대 중반, 홀든은 형에게서 기타를 물려받아 음악을 시작했다.[4] 웨스트민스터 스쿨 시절 밴드를 결성해 작곡을 시작했고, 루이스 데이에게 성악 레슨을 받았다. 2010년 인터뷰에서 홀든은 학교가 밴드 활동을 지원했다고 밝혔다.[3] 1972년 애들레이드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했다.[3]
같은 해, 이웃의 권유로 어니 시글리의 TV쇼 ''애들레이드 투나잇'' 오디션에 참가, 자작곡과 "I'll Walk with God"를 불러 합격했다. 1973년 시글리가 멜버른에서 ''어니 시글리 쇼''를 시작하며 홀든을 초청했고, 홀든은 음악과 학업을 병행하며 멜버른과 애들레이드를 오갔다.[4]
1976년 TV 연속극 ''영 닥터스''에서 그렉 메이슨 역을 맡았고,[6] 1977년 ''블루 파이어 레이디''와 ''뉴스프론트'', 1978년 ''리치 포 더 스타스''와 케이스 포 디 디펜스에 출연했다.[6][7]
1977년 로지상에서 홀든은 호주 TV 십대 인기상과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고, 1978년 로지상에서도 호주 TV 십대 인기상을 받았다.
3. 1. 전성기 (1974-1979)
1974년, 홀든은 네트워크 9에서 방송된 텔레비전 재능 쇼인 ''쇼케이스 '74''에 출연하여 자신의 포크풍 노래를 불렀다. 홀든은 이 경연에서 5위를 차지했다. 에섹스 뮤직의 존 브롬웰은 홀든에게 시드니로 이주하도록 권유했고, EMI 뮤직의 레코드 프로듀서인 피터 도킨스와의 만남을 주선하여 홀든과 계약을 맺게 했다.[4] 1975년에는 홀든의 데뷔 앨범 ''어둠 속의 새벽''이 발매되었으며, 홀든은 앨범의 모든 트랙을 작사 또는 공동 작사했다.1975년부터 1976년까지 홀든은 시드니의 시모어 센터에서 열린 호주 초연 ''요셉 어메이징 테크니컬러 드림코트''에서 요셉 역을 맡았다. 그는 세계 최초로 이 역할의 주연을 맡은 팝 스타였다.
1976년 4월, 홀든은 에릭 카르멘의 "Never Gonna Fall in Love Again"을 커버하여 발매했다. 이 곡은 호주 켄트 뮤직 리포트에서 13위에 오르며 히트를 기록했다. 같은 해 8월에는 "I Wanna Make You My Lady"를, 11월에는 "Last Romance"를 발매했으며, 두 곡 모두 11위에 올랐다.[6][5] 홀든은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나를 사랑하게 해줘''를 발매했다. ''TV Week'' 킹 오브 팝 어워드 1976에서 그는 가장 인기 있는 신인으로 선정되었다.[6]
1977년, 홀든은 2월에 "Hey, My Love"를 발매하여 32위에 올랐고, 8월에는 "Reach Out for the One Who Loves You"를 발매하여 17위에 올랐다. 홀든의 세 번째 앨범 ''만남''은 1977년 9월에 발매되었다. ''나를 사랑하게 해줘''와 ''만남''은 각각 5만 장 출하를 기록하며 더블 골드 인증을 받았다.[6][5]
3. 2. 로스앤젤레스 활동 (1979-1983)
1979년, 홀든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미국 레이블 스코티 브라더스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 이 레이블에서 발매한 그의 첫 곡은 글로리아 스클레로브와 공동 작곡한 "Stay"였다. 이 곡은 차트에 오르지 못했지만, 존 슈나이더가 1981년 앨범 ''Now or Never''에서 커버했다. 마크는 로저 앳킨스와 공동 작곡한 "Scintillating Lady"를 녹음했고, CBS에서 이 곡을 라이브로 공연하며 미국에서의 경력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연 직전, 사랑니를 발치해야 했고, 그는 통증과 부어오른 입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 곡은 호평을 받지 못했고 발매되지 않았다. 홀든과 스코티 브라더스 레코드는 결별했다.[4]1983년, 홀든은 네 번째 정규 앨범 ''마크 홀든''을 카사블랑카 레코드에서 발매했으며, 모든 트랙을 공동 작곡했다. 이 앨범은 차트에 오르지 못했고 홀든은 작곡과 프로듀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3. 3. 프로듀서 활동 (1984-1996)
마크 홀든은 가수 활동 실패 후 작곡가 겸 음반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데 집중했다.[6] 그는 앤서니 커티스, 댄 윌슨과 함께 멀티미디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10년 동안 더 템테이션스의 핫 R&B/힙합 송 차트 10위권 곡 두 곡을 공동 작곡했는데, 해당 곡은 "Lady Soul"(1986년 6월)과 "Look What You Started"(1987)이다.[8][9] 트레이시 스펜서, 조이 로렌스, 윌 도닝과 히트곡을 만들었으며, 캐시 슬레지와는 댄스 차트 1위 곡을 작업했다. 벨린다 칼라일, 섹스 피스톨스의 스티브 존스, 더 매너튼스, 도니 오스몬드, 호세 펠리치아노, 플리트우드 맥, 데이비드 하셀호프, 스칼렛 앤 블랙, 브랜포드 마살리스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그의 곡을 커버했으며, 그 수는 50곡이 넘는다. 그는 EMI 레코드를 위해 모델이자 배우인 밀라 요보비치(''제5원소'')를 발굴하고 프로듀싱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발매된 그녀의 데뷔 앨범은 미국 10대 포스트 모던 히트를 기록했고, ''롤링 스톤'' 지에서 별 3개 평점을 받는 등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4]1992년부터 1995년까지 3년 동안 홀든은 데이비드 하셀호프와 함께 그의 앨범, 라이브 프로모션, TV용 음악 프로젝트를 프로듀싱하고 조정했다. 특히 데이비드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 Wir Zwei Allein Heut Nacht|함께 오늘 밤de를 포함하여 여러 번 플래티넘을 달성하는 성공을 거둔 유럽에서 두드러졌다. 이 곡은 마크가 데이비드 하셀호프와 함께 작곡한 곡이다.[10] 데이비드 하셀호프의 아들 역을 맡았던 배우 제러미 잭슨은 마크 홀든의 프로덕션 회사와 계약했고, 네덜란드에서 5위 안에 든 "You Can Run"을 포함하여 유럽에서 두 개의 히트곡을 냈다.
1995년, 홀든의 둘째 아이 케이티가 태어났다. 1990년대 초 로스앤젤레스의 폭력 사태가 증가하는 가운데, 홀든과 그의 파트너 안나는 1996년 9월 호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4]
3. 4. Marjac Productions (1996-2007)
1996년, 홀든은 법학 학위를 재개했고 1997년에는 다시 음악 사업에 복귀하고 싶어했다. 그는 1970년대 초부터 알고 지냈고, ''헤이 헤이 잇츠 새터데이''에서 레드 페이시스의 프로듀서였던 잭 스트롬과 팀을 이루었다. 두 사람은 여러 데모를 들은 후 카네기에 있는 러시아 식당을 방문하여 15세의 바네사 아모로시를 만났다. 그들은 그녀와 계약을 맺고 1999년에 그녀의 경력을 시작했다.[4] 아모로시의 데뷔 앨범 ''The Power''는 1위에 올랐고 호주에서 4번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11] 2001년 APRA 뮤직 어워드에서 아모로시의 "Shine"은 홀든이 공동 작사한 가장 많이 연주된 호주 작품상을 수상했다.[12] 스트롬과 홀든은 마르작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노래를 쓰고 델타 구드럼, 니키 웹스터, 소피 몽크의 경력 시작을 도왔다.2004년 홀든은 ''아이돌'' 출신 비트박서인 조엘 터너와 계약을 맺고 매니지먼트를 담당했다. 조엘 터너 앤 더 모던 데이 포이츠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그들의 첫 싱글 "디즈 키즈"는 ARIA 차트에서 1위에 올랐고 더블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그들의 동명의 앨범은 2004년 말에 발매되어 역시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2004년, 마크의 가족 그룹인 더 홀든스는 첫 번째 CD인 ''텍스 모턴에 대한 헌정''을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전설적인 컨트리 가수 텍스 모턴이 유명하게 만든 노래들이 수록되었다.
2005년 말, 아모로시는 마르작과의 7년 계약을 종료하고 랄프 카 매니지먼트와 계약을 맺었고, 소니 BMG는 델타 구드럼과 관련된 홀든과의 분쟁이 있었으며, 터너는 2006년까지 홀든을 법적 분쟁에 휘말리게 하면서 마르작과의 계약을 해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4]
4. 방송 경력
마크 홀든은 1976년 TV 연속극 ''영 닥터스''에서 그렉 메이슨 역을 맡으며 방송 경력을 시작했다.[6] 1977년에는 ''블루 파이어 레이디''와 ''뉴스프론트''에 출연했고, 1978년에는 ''리치 포 더 스타스''와 케이스 포 디 디펜스에 출연했다.[6][7]
1996년, 홀든은 법학 학위를 재개했고 1997년에는 다시 음악 사업에 복귀했다. 그는 잭 스트롬과 팀을 이루어 바네사 아모로시를 발굴하고, 델타 구드럼, 니키 웹스터, 소피 몽크의 경력 시작을 도왔다.
1999년, 홀든은 퀸비언에서 "호주 음악 100년" 쇼를 공연했고, ''카운트다운''의 실버 주빌리 에디션 진행을 맡았다. 2002년에는 ''This Is Your Life''에서 영예를 안았다.
2008년 1월부터 5월까지 홀든은 ''Shout! The Legend of The Wild One''에서 리 고든 역할을 맡았다. 2010년, Sea Patrol 시즌 5에 의사 윌리엄스 역으로 게스트 출연했다. 2010년부터 2011년까지 891 ABC 애들레이드에서 주간 오후 쇼 임시 진행자를 맡았고, 2011년 초에는 전국 ABC 로컬 라디오 임시 진행자를 맡았다. 2012년 초, ''토니 델로이와 함께하는 나이트라이프'' 임시 진행자를 맡았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홀든은 외삼촌 아돌퍼스 홀든의 순회 서커스 관련 정보를 연구, 정리하여 5편의 단편 영화를 제작했다. ''홀든 브라더스 여행 서커스'' 다큐멘터리와 사운드트랙은 2014년 9월 아이튠즈에서 출시되었다.
2014년 1월, ''Celebrity Come Dine With Me Australia''에 출연했다. 2020년 9월, 홀든과 그의 딸 케이티는 ''The Idol Archives'' 팟캐스트를 시작했다.[21]
4. 1. 오스트레일리안 아이돌 (2003-2007)
2003년, 홀든은 ''오스트레일리안 아이돌'' 첫 시즌의 심사위원을 맡아 2007년까지 5시즌 동안 활동했다. 홀든은 바네사 아모로시와 공동 작사하고 ''오스트레일리안 아이돌''의 "최종 12인" 캐스트 CD에 수록된 "Rise Up"을 총괄 프로듀싱했는데, 이 곡은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하고 ARIA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13] 그의 "터치다운"이라는 문구는 참가자들에게 최고의 찬사로 여겨졌다. 코시마 데 비토는 콜드 치즐의 "웬 더 워 이즈 오버"를 불러 처음으로 터치다운을 받았다. 2003년, 홀든은 ''캐스 & 킴''에 카메오로 출연했다.2004년 홀든은 ''아이돌'' 출신 비트박서 조엘 터너와 계약을 맺고 매니지먼트를 담당했다. 조엘 터너 앤 더 모던 데이 포이츠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그들의 첫 싱글 "디즈 키즈"는 ARIA 차트 1위에 오르고 더블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그들의 동명의 앨범은 2004년 말에 발매되어 역시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2005년, 홀든은 존 리드, 케이트 세베라노와 함께 ''The X Factor'' 첫 번째 시즌 심사위원으로 출연했다. 그가 쇼 동안 멘토링한 R&B 그룹 Random이 우승하여 세계 최초의 그룹이 되었다.[15]
2005년 6월 14일, 홀든은 네트워크 텐의 오전 프로그램 ''굿 모닝 오스트레일리아''(GMA)에서 버트 뉴턴을 대신하여 게스트 호스트 중 한 명이었다.
2007년 ''오스트레일리안 아이돌'' 다섯 번째 시즌이 끝날 때, 홀든은 더 이상 쇼에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4]
4. 2. The X Factor (2005)
2005년, 홀든은 존 리드 및 케이트 세베라노와 함께 ''The X Factor''의 첫 번째 시즌 심사위원으로 출연했다. 그가 쇼 동안 멘토링한 R&B 그룹인 Random이 우승하여 세계 최초의 그룹이 되었다.[15]2005년 6월 14일, 홀든은 오전 프로그램 ''굿 모닝 오스트레일리아''(GMA)에서 버트 뉴턴을 대신하여 게스트 호스트 중 한 명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안 아이돌과 GMA는 모두 네트워크 텐에서 방송되었다.
2005년 말, 바네사 아모로시는 마르작과의 7년 계약을 종료하고 랄프 카 매니지먼트와 계약을 맺었고, 소니 BMG는 델타 구드럼과 관련된 홀든과의 분쟁이 있었으며, 조엘 터너는 2006년까지 홀든을 법적 분쟁에 휘말리게 하면서 마르작과의 계약을 해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4]
4. 3. 댄싱 위드 더 스타 (2014)
2014년 8월 28일, 홀든은 9월에 시작하는 ''댄싱 위드 더 스타'' 시즌 14에 참가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16] 홀든은 초창기 시즌에 출연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었다. 그는 이것을 ''홀든 브라더스 여행 서커스''를 홍보할 기회로 보았고 채널 세븐은 12월에 이 쇼를 방영하는 데 동의했지만,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댄싱 위드 더 스타'' 첫 주에 홀든은 40년 전 "카네이션 키드"에게 춤을 바쳤다. 둘째 주에는 비틀즈의 "그녀는 집을 떠났네"에 맞춰 왈츠를 췄다. 홀든은 춤 실력 부족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과 관객으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셋째 주에 홀든은 광대 보보로 분장하여 춤을 췄다. 어린 시절의 광대에 대한 오마주로 의도되었지만, 이 공연은 사람들에게 "댄스 플로어의 재앙", "내가 본 것 중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 "열차 사고"라는 비난을 받았다.[16] 홀든은 40점 만점에 4점(최저 점수)을 받았고 쇼에서 탈락했다.
홀든은 이후 그의 행동에 대해 "내가 불쾌하게 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채널 세븐, DWTS의 모든 참가자, 그리고 심사위원들에게 사과하고 싶다."라고 말했다.[17]
4. 4. 기타 방송 활동
Australian Idol영어과 The X Factor영어(호주판) 심사위원을 맡았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는 Australian Idol영어 심사위원을 맡아 5시즌 동안 활동했다. 참가자들에게 최고의 찬사로 여겨지는 "터치다운"이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코시마 데 비토가 콜드 치즐의 "웬 더 워 이즈 오버"를 불러 첫 터치다운을 받았다.[13] 2005년에는 존 리드, 케이트 세베라노와 함께 The X Factor영어 첫 번째 시즌 심사위원으로 출연했다. 그가 멘토링한 R&B 그룹 Random이 우승했다.[15]2007년에는 The Starter Wife영어와 Pizza영어에 출연했다. 라디오 경력으로는 칼 윌슨과 함께 The Drive Home영어 공동 호스트로 참여했고, 2007년에는 노바 FM에서 The Dicko, Holden and Chrissie Show영어를 진행했다.
5. 개인사
마크 로널드 홀든은 1954년 4월 27일 노스 애들레이드의 칼버리 병원에서 헬렌(결혼 전 성은 킹)과 론 홀든 사이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 쪽 가족은 홀든과 슬로게츠 이동 서커스에 관여했지만, 론은 건축가가 되었고 헬렌은 교사였다.[3]
1960년대 중반, 홀든은 형 크레이그로부터 기타를 물려받은 후 음악에 참여하게 되었다.[4] 웨스트민스터 스쿨을 다녔으며 학교 밴드를 결성했고, 노래를 쓰기 시작했으며 루이스 데이와 함께 클래식 성악 레슨을 받았다. 2010년 ABC와의 인터뷰에서 "밴드 연습을 위해 계단 아래 방을 받았습니다."라며 밴드가 격려를 받았다고 말했다.[3] 1972년, 애들레이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법학을 공부했다.[3]
1972년, 이웃의 권유로 어니 시글리가 진행하는 지역 텔레비전 쇼 ''애들레이드 투나잇''의 오디션을 보았다. 노스 애들레이드의 틴트 스트리트에서 열린 공개 오디션에 참석하여 자작곡과 "I'll Walk with God"를 불렀고, 성공하여 여러 번 쇼에 출연했다. 1973년, 시글리는 멜버른으로 이주하여 ''어니 시글리 쇼''를 시작했고, 홀든을 멜버른으로 초청하여 이 쇼에서 공연하게 했다. 1973년 한 해 동안, 음악과 법학 학위를 병행하며 멜버른과 애들레이드를 오갔다.[4]
20세에 아버지가 되었으며, 아들 케인은 1974년에 태어났다. 두 번째 자녀 케이티는 1995년에 태어났다.
2001년 애들레이드 대학교에서 법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모나쉬 대학교에서 원격으로 이수했다.[22] 1974년 음악 경력이 시작되었을 때 학위 취득을 거의 완료했다. 2009년 11월, 빅토리아 변호사 명부에 서명하고 변호사 윌리엄 리와 함께 변론했으며, 현재 빅토리아 변호사 협회에서 전임으로 활동하고 있다.[23]
골다공증으로 여러 번 골절을 겪었으며,[24] 세븐 네트워크에서 진행된 인식 개선 광고에 출연했다. 2010년에는 갑상선암을 앓았고, 2015년 9월 암이 재발했다고 발표했다.[25]
애들레이드 풋볼 클럽의 오랜 지지자이며, 2006년 클럽 홍보대사로 임명되었다.[26] 암에 걸린 남성을 지원하는 단체인 블루 셉템버의 홍보대사이다.
6. 음반 목록
마크 홀든은 1975년 데뷔 앨범 ''어둠 속의 새벽''을 발매했고, 1976년에는 ''나를 사랑하게 해줘'', 1977년에는 ''만남''을 발매했다. ''나를 사랑하게 해줘''와 ''만남''은 각각 5만 장 출하를 기록하며 더블 골드 인증을 받았다.[6][5] 1983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앨범 ''Mark Holden''을 발매했다.
홀든은 1976년 에릭 카르멘의 "Never Gonna Fall in Love Again"을 커버하여 호주 켄트 뮤직 리포트에서 13위에 올랐으며, 같은 해 "I Wanna Make You My Lady"와 "Last Romance"를 발매하여 각각 11위에 올랐다.[6][5] 1977년에는 "Hey, My Love"(32위)와 "Reach Out for the One Who Loves You"(17위)를 발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