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화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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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말레이시아 화인 협회(MCA)는 1949년 설립된 말레이시아의 정당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식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말라야 비상 사태에 대응하여 신촌의 사회적 및 복지 문제를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1952년 UMNO와 연합하여 연합당을 결성, 말라야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이후 5.13 사건, 당내 분열과 스캔들을 겪으며 국민전선 내에서 UMNO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당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2000년대 이후 옹 카 팅, 추아 소이 렉, 리우 티옹 라이 등을 거치며 2018년 선거에서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겪었으나, 2020년과 2022년 선거를 통해 다시 정부에 참여했다. 현재 위 카 시옹이 회장으로 있으며, 1MDB 스캔들에 연루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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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화인협회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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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명칭 | 말레이시아 화인 협회 |
원어 명칭 | |
약칭 | MCA / 마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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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일 | 1949년 2월 27일 |
본부 | 8th Floor, Wisma MCA, 163, Jalan Ampang, 50450 쿠알라룸푸르 |
이념 | 말레이시아 화인 이익 사회 보수주의 삼민주의 역사적 이념: 중국 민족주의 |
총재 | 위카시옹 |
사무총장 | 총신운 |
부총재 | 마항순 |
부총재 | 림반홍 탄테이청 위젝셍 로렌스 로 |
여성 책임자 | 웡유퐁 |
청년 책임자 | 링톈순 |
설립자 | 탄청록 |
전신 | 말라야 화인 협회 |
슬로건 | 알 수 없음 |
신문 | 중국보 더 스타 난양시앙바오 신추 데일리 |
청년 조직 | MCA 청년부 |
여성 조직 | wanita MCA |
정치 성향 | 중도우파 |
국제 연대 | 알 수 없음 |
소속 정당 | 연맹 (1952–1973) 국민전선 (1973년 이후) |
상원 의석수 | }} 2 / 70석 |
하원 의석수 | }} 2 / 222석 |
주의회 의석수 | }} 8 / 611석 |
공식 웹사이트 | www.mca.org.my |
![]() | |
색상 | |border=darkgray}} 파란색과 노란색 |
2. 역사
말레이시아 화인 협회(MCA)의 당원은 화인으로 한정되며,[81] 주로 재계 및 중산층의 권익을 대변한다.
독립 이후 말레이계 중심의 말레이 국민 통일 기구(UMNO) 및 말레이시아 인도 국민 회의(MIC)와 연합하여 지속적으로 연립 여당의 지위를 유지해 왔으며, 현재 여당 연합인 국민 전선(BN) 내에서 주요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창립 초기에는 말라야 공산당에 대항하고 중국 국민당의 영향을 받아 반공·보수 성향을 강하게 띠었다.
또한 협회는 사업에도 직접 관여하는데, 대표적으로 말레이시아의 주요 영자 신문인 『스타』(The Star)를 발행하고 있다.[81]
2. 1. 창당과 초기 활동 (1949-1969)

말레이시아 화인 협회(MCA)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식민 행정부의 암묵적인 지원 아래 1949년 2월 27일에 설립되었다. 창립 초기 핵심 목적은 말라야 비상사태 당시 브리그스 계획에 따라 조성된 신촌(New Villages) 거주민들의 사회 복지 문제를 관리하는 것이었다.[8][9]
1951년, 저명한 해협 화인 사업가인 탄 챙 록이 초대 회장을 맡아 MCA를 공식 정당으로 선언하는 문서를 작성했다. 초기 당원은 주로 지주, 사업가 등 부유층이었으며, 신촌의 노동자 계층은 사회주의 전선에 주로 가입했다.[10] MCA의 주요 인사 중에는 말라야 공산당에 반대하는 중국 국민당(KMT) 당원도 많았다. 리옹 유 코는 국민당 소장 출신으로 후에 내각 장관과 믈라카 주지사를 역임했으며, 말레이시아 초대 재무부 장관 헨리 H.S. 리는 국민당 대령 출신이었다. 1952년 MCA에 합류한 급진당 지도자 림 총 유 역시 국민당 의무 대령 출신 의사였다.[11]
1952년 MCA는 쿠알라룸푸르 시 의회 선거를 위해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과 연합하여 동맹당(Alliance Party)을 결성했다. 1954년에는 말레이시아 인도인 회의(MIC)가 합류했으며, 이 연합은 1955년 말라야 총선에 단일 정당으로 참여하여 출마한 52석 중 51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었다.[12] MCA는 할당받은 15석 모두에서 승리했다.[13]
1958년 림 총 유가 탄 챙 록에게 도전하여 회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림 총 유는 중앙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당 헌법 개정을 시도했으나, 이는 근소한 차이로 통과되었음에도 당내 분열을 야기했다.[14] 1959년 말라야 총선을 앞두고 림 총 유는 MCA에 할당될 의석 수를 기존 28석에서 40석으로 늘려달라고 요구했으나, UMNO의 툰쿠 압둘 라만 총리가 이를 거부했다. 결국 림 총 유는 요구를 철회하고 회장직에서 사임했으며, 체아 툰 록이 임시 회장직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일부 당원들이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MCA는 의석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15][16] 결국 MCA는 해당 총선에서 할당된 31석 중 19석을 얻는 데 그쳤다.[17] 림 총 유는 1960년 12월 MCA를 탈당했으며, 훗날 야당인 민중운동당(Gerakan) 창당 멤버가 되었다(1968년).[18]
1961년, 툰쿠 압둘 라만 총리가 선호했던 탄 챙 록의 아들 탄 시우 신이 MCA의 제3대 회장으로 취임했다.[18] 탄 시우 신의 지도 아래 MCA는 1964년 말레이시아 총선에서 할당된 33석 중 27석을 확보하며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19] 1969년에는 정부가 중국어 대학 설립 제안을 거부하자, 대신 툰쿠 압둘 라만 대학 설립을 주도했다.[20]
2. 2. 5.13 사건과 그 이후 (1969-1985)
1969년 말레이시아 총선은 1969년 5월 10일에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말레이시아 화교 협회(MCA)는 주로 화교 유권자를 기반으로 하는 신생 야당인 민주행동당(DAP)과 인민운동당(Gerakan)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MCA는 경쟁한 33개의 연방 의회 의석 중 단 13석만을 확보하는 데 그쳤고, 페낭 주의 주 정부 운영권도 인민운동당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야당의 부상은 말레이시아 내 여러 인종 공동체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이는 결국 5·13 인종 폭동으로 이어졌다. 폭동 직전인 1969년 5월 12일, 당시 MCA 회장이었던 탄 시우 신은 당이 집권 연합인 동맹(Alliance)에서 탈퇴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5월 20일에 이 결정을 철회하고 폭동 이후 의회를 대신하여 설립된 국가운영위원회(NOC)에 참여했다.[21] 화교 사회 내에서 MCA에 대한 지지가 약화되자, 당시 부총리였던 이스마일 압둘 라만 박사는 "MCA가 계속해서 지지를 잃는다면, UMNO는 더 이상 MCA와 협력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언급하며 MCA를 압박했다.[22] 이에 탄 시우 신은 화교 사회의 지지를 회복하기 위해, 과거 부유한 사업가들, 즉 '타우케'(taukeh)의 정당으로 인식되던 당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전문가들을 영입하여 당의 외연을 넓히려 시도했다.[22]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이후 림 켕 야익과 관련된 당내 분쟁으로 인해 당에서 축출되었고, 림 켕 야익 자신도 결국 인민운동당으로 이적했다.[22][23]1969년 선거에서 MCA의 지지 기반이 약화되고, 1972년에는 인민운동당까지 동맹 정당(이후 국민전선(BN)으로 개편)에 합류하면서, 연립 정부 내에서 UMNO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MCA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24] 1973년, 이스마일 압둘 라만 부총리가 사망한 후 내각 개편 과정에서 탄 시우 신은 부총리직을 요구했으나, 당시 총리였던 툰 압둘 라자크가 이를 거절하면서 탄 시우 신과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25] 결국 탄 시우 신은 1974년 말레이시아 총선을 앞둔 1974년 4월 8일,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당과 정부의 모든 직책에서 사임했다.

탄 시우 신의 사임 후 리 산 춘이 임시 회장직을 맡았고, 1975년에 정식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탄 시우 신 시대 이후, MCA에 배분되는 내각 각료직의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으며, 한때 MCA가 맡았던 재무장관직과 통상산업부 장관직을 모두 잃게 되었다.[26] MCA는 1974년 총선에서는 이전보다 나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어진 1978년 말레이시아 총선에서는 다시 부진하여 할당된 28개의 연방 의석 중 17석, 60개의 주 의석 중 44석을 얻는 데 그쳤다. 1979년에는 마이클 첸이 리 산 춘에게 도전하여 당 회장직을 놓고 경쟁했으나 패배했고, 1981년에 MCA 내 반대파를 이끌고 인민운동당으로 이적했다.[27]
그러나 1982년 말레이시아 총선은 MCA에게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야당인 민주행동당(DAP)이 "MCA 지도부는 화교가 다수인 도시 지역구에서 경쟁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비판하자, 리 산 춘은 이 도전을 받아들여 세렘반 선거구에서 현직 DAP 의장이었던 첸 만 힌(Chen Man Hin)과 직접 대결을 벌였다. 리 산 춘은 이 대결에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당 전체를 압도적인 승리로 이끌었다. MCA는 이 선거에서 할당된 28개의 연방 의석 중 24석, 62개의 주 의석 중 55석을 획득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28][29] 하지만 선거 승리로 정치적 경력의 정점에 올랐던 리 산 춘은 1983년,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당 회장직과 내각 직책에서 사임했다.[30] 그의 사임 후 네오 예 판이 임시 회장직을 맡아 1985년까지 당을 이끌었다.
2. 3. 내분과 스캔들 (1985-2003)
1985년, 당에서 해임된 지 1년 만에 탄 쿤 스완은 당 역사상 가장 큰 표 차이로 대표 선거에서 승리했다.[31][32] 그러나 그는 싱가포르에서의 개인 사업과 관련된 형사상 배임 방조 혐의로 기소되어 이듬해 대표직에서 물러났다.[33] 탄 쿤 스완은 또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의 자본 축적을 목표로 하는 예금 취급 협동조합(DTC)을 설립하여 투자를 유치했다. 하지만 이 예금 취급 협동조합 자금의 부실 관리가 드러나면서 스캔들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이 최대 35개 DTC의 자산을 동결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한 총 손실액은 36억말레이시아 링깃으로 추산되며, 예금자들은 예금의 62%만을 회수할 수 있었다.[34]탄 쿤 스완의 뒤를 이어 1986년 부대표였던 링 리옹 식이 대표직을 승계했다. 그는 당내 분파주의가 여전히 심각하고 예금 취급 협동조합 스캔들로 인해 중국계 사회의 신뢰를 잃은 어려운 상황에서 당을 이끌게 되었다.[35] 링 리옹 식은 대표 초기 몇 년간 MCA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으며, 자산 구조 조정을 통해 자금을 마련했다.[36] 그는 비교적 안정적인 시기를 이끌며, 정부 내에서 조용한 접근 방식을 통해 중국계 사회의 이익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37] 또한 기금 모금과 정부 지원을 통해 MCA 소유의 툰쿠 압둘 라만 대학을 확장했으며, 2001년에는 툰쿠 압둘 라만 대학교를 설립하는 성과를 거두었다.[36][37] 링 리옹 식은 1995년 총선에서 MCA를 이끌어 총 34석의 연방 하원 의석 중 30석, 77석의 주의회 의석 중 71석을 확보하며 민주행동당(DAP)을 제치고 중국계 유권자의 과반수 지지를 얻는 역대 최고의 선거 성과를 달성했다.[38][39] MCA는 1999년 총선에서도 좋은 성적을 유지했으며, 연이은 선거 승리는 바리산 나시오날(BN) 연합 내에서 당의 위상을 높였고, 당시 BN 지도자이자 총리였던 마하티르 모하맛과의 개인적인 관계도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36][37]
하지만 당 내부의 권력 투쟁은 계속되었다. 1993년, 당시 부대표였던 리 킴 사이는 링 리옹 식에게 대표직 도전 의사를 밝혔으나 막판에 철회했다.[40] 리 킴 사이는 1996년에 정계에서 은퇴했고, 그의 자리는 림 아 렉이 이어받았다.[41] 1999년, 당은 다시 한번 분열의 위기에 직면했다. 부대표 림 아 렉은 장관직에서 물러날 의사를 밝히며, 1999년 선거 이후 자신의 측근인 찬 콩 초이를 내각에 추천하기로 링 리옹 식과 합의했다. 그러나 링 리옹 식은 이 합의를 어기고 자신의 측근인 옹 카 팅을 장관으로 지명했다. 이 결정은 림 아 렉과 뜻을 같이하는 당원들("팀 B") 사이에서 불만을 야기했고, 링 리옹 식 파벌은 "팀 A"로 불리게 되었다.[37][41]
MCA의 지주 회사인 후아렌 홀딩스(Huaren Holdings)가 중국어 일간지 ''난양 시앙 파우'' 인수를 추진하면서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팀 B는 이를 팀 A가 중국어 언론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시도로 보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들은 중국계 언론인 및 비정부 기구(NGO)와 연대하여 시위를 벌이는 등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37] 2001년 열린 청년 총회에서는 이 문제로 인해 의자가 날아다니는 등 물리적 충돌까지 벌어졌다.[42] 결국 후아렌은 ''난양 시앙 파우'' 인수에 성공했다. 후아렌은 이미 ''더 스타''와 ''차이나 프레스''도 소유하고 있었기에,[43] 이러한 언론 매체 장악은 분열된 당 내에서 심각한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언론 자유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44][45][46]
결국 BN의 지도자인 마하티르 총리가 직접 개입하여 분쟁 해결에 나섰다. 그는 양 파벌 간의 "평화 계획"을 제안했고, 이에 따라 2002년으로 예정되었던 당 선거는 취소되었다. 또한 링 리옹 식과 림 아 렉은 각자의 측근에게 자리를 물려주며 동시에 사임하기로 합의했다.[37]
2. 4. 최근 동향 (2003-현재)
2003년 5월, 예정대로 지도부 교체가 이루어져 당시 부회장이었던 옹 카 팅이 림 리옹 식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고, 찬 콩 초이는 림 아 렉의 뒤를 이어 부회장이 되었다. 옹 카 팅이 이끄는 말레이시아 화인 협회는 2004년 말레이시아 총선에서 국민 전선의 압도적인 승리에 기여했으며, 협회는 40개 하원 의석 중 31석, 90개 주 의석 중 76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47] 2005년 당 선거에서는 A팀과 B팀이 연합하여 부회장 추아 주이 멩 (회장 후보)과 사무총장 팅 추 페 (부회장 후보)의 도전을 쉽게 물리쳤다.[37]옹-찬 지도부는 중국 공동체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유화적인 접근 방식을 유지했으나,[37] 2004년 선거 이후 인종 문제와 관련하여 말레이 국민 통일 기구(UMNO)와의 긴장이 종종 고조되기도 했다.[48] 2008년 초에는 부회장이자 보건부 장관이었던 추아 소이 렉이 조호르의 유력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성 추문에 연루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추아가 한 여성과 성관계를 갖는 DVD가 조호르에서 유포되었고, 이로 인해 추아는 국회의원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직책에서 사임했다.[49] 추아는 자신의 몰락 배후에 당내 정적들이 있다고 암시했다.[50]

2008년 말레이시아 총선에서 말레이시아 화인 협회는 하원 15석, 주 의석 32석을 얻는 데 그쳐 이전 선거 결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에 옹 카 팅은 그해 말 열릴 당 선거에서 새로운 지도부가 선출될 수 있도록 회장직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008년 10월 당 선거는 추아 소이 렉의 복귀와 함께 당내 파벌 재편 양상을 보였다. 옹 카 팅이 지명한 후임자는 부회장 옹 티 키였다.[51] 한편, 추아는 옹 카 팅의 형인 옹 카 추안 등과 경쟁하여 부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결과적으로 옹 티 키는 회장직을 쉽게 차지했고, 추아는 옹 카 추안을 간신히 누르고 부회장으로 복귀했다. 당선 후 옹 티 키는 당의 재건을 위해 개혁을 추진하고 젊은 유권자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다가갈 것을 약속했다.[52]
말레이시아 화인 협회의 당원은 중국계 주민(화인)으로 제한되며,[81] 주로 재계 및 중산층의 권익을 대변한다. 독립 이후, 말레이계 중심의 말레이 국민 통일 기구(UMNO) 및 말레이시아 인도 국민 회의(MIC)와 연합하여 지속적으로 연립 여당의 지위를 유지해왔다. 현재도 여당 연합인 국민 전선(BN) 내에서 제2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2004년 총선에서는 BN 내 다른 정당과의 긴밀한 선거 협력을 통해 31석을 확보했으나, 2008년 총선에서는 여당에 대한 비판 여론 속에 의석수가 15석으로 크게 감소했다.
협회는 본래 중국계 주민 중 좌파 지지 기반이 강했던 말라야 공산당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의 영향 아래 결성된 배경을 가지고 있어, 반공보수 성향이 강하다. 또한, 협회 자체가 사업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말레이시아 최대 영자 신문인 『스타』(The Star)의 발행을 들 수 있다.[81]
3. 역대 총선 결과
(연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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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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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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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집권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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