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로베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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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로베우스 1세는 5세기 중반 살리 프랑크족을 이끌었던 왕으로,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서로마 제국군과 함께 훈족을 격파했다. 킬데리크 1세의 아버지이며,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로 여겨진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으며, 바다 괴물의 아들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신화적인 인물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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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로베우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메로베크 |
다른 이름 | |
직함 | 프랑크인의 왕 |
통치 기간 | 기원후 450년경 – 458년 |
전체 이름 | 메로베크 |
왕조 | 메로베우스 왕조 |
생애 | |
출생 | 기원후 411년경 |
사망 | 기원후 458년경 |
매장지 | 벨기에 투르네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클로디오 |
자녀 | 킬데리쿠스 |
왕위 계승 | |
이전 | 클로디오 |
이후 | 킬데리쿠스 1세 |
2. 이름
"메로베우스"라는 이름은 마르비히/Marwig영어와 관련이 있으며, "유명한 싸움"이라는 뜻이다. 현대 네덜란드어 마러/marenl "소식, 소문", 페르마르트/vermaardnl "유명한" 및 헤페흐트/(ge)vechtnl "싸움"의 -''vech''와 비교된다.
메로베우스 1세에 대해서는 이름과 킬데리쿠스 1세의 아버지라는 사실 외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의 어머니는 튀링겐 출신의 스예스(또는 바신느)라는 여성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메로베우스라는 이름의 남성과 결혼했다가 메로베우스 사후 클로디오와 재혼하였다.[27]
3. 생애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의하면 바신느 혹은 스예스라는 여성이 바다에서 수영 혹은 목욕을 하던 중 바다괴물과 관계하고 그가 태어났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를 임신한 상태에서 바다괴물과 성관계를 하여 메로베크에게는 두 혈통이 흐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451년 로마를 침략한 훈족 아틸라와 싸우는데 참여했다.
서로마 제국군의 사령관을 지냈다는 말이 있다. 그의 실체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프랑크족의 역사〉라는 문헌 등에 단편적으로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투르의 그레고리는 그를 클로도비크 1세의 아버지라고 한 번 언급할 뿐, 클로디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언급했다.[3] 프레데가르 연대기는 메로베우스가 클로디오의 아내가 바다에서 목욕하던 중 바다 괴물을 만난 후 태어났다고 전한다. 프레데가르에 따르면 메로베우스의 아버지가 그 괴물인지, 클로디오인지 불분명하다고 한다.[4][5] 또 다른 이론은 이 전설이 서유럽에서 급부상하는 프랑크족 통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한 신화적 과거를 창조한 것이라고 본다.[6]
클로디오는 448년 아르투아의 비쿠스 헬레나에서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에게 패배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안 S. 우드는 그의 아들의 출생 시기를 5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7]
동시대 로마 역사가인 프리스쿠스는 로마에서 "뺨에 아직 수염이 없고,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긴 금발을 가진 소년"을 목격했다며, "아에티우스가 그를 양아들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프리스쿠스는 아틸라가 프랑크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그들의 왕이 죽고 후계자를 두고 자녀들 간의 의견 불일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썼는데, 맏아들은 아틸라와 동맹을 맺었고, 막내는 아에티우스와 동맹을 맺었다는 것이다. 클로디오는 아틸라의 침공 직전에 사망했으므로, 이는 메로베우스가 사실 클로디오의 아들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8] 역사가들은 메로베가 프리스쿠스의 기록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한 명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프리스쿠스가 언급한 프랑크족 왕자 중 한 명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메로베는 갈리아 벨기카, 즉 브라반트주 지역에 정착하여 투르네에 거주지를 세웠을 것이다.
게오르크 바이츠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메로베가 신화적 인물일 수 있으며, 프랑크족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숭배했던 신이나 반신으로 추정되는 바다의 아들(프랑크어로 ''mari'')이라고 주장한다.[12]
또 다른 주장은 메로베가 네덜란드 강인 메르베데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로마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강의 초기 흐름이 살리 프랑크족이 살았던 지역과 일치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원 연구는 이 이론을 반박하는 것으로 보인다.[13][14]
역사학자 에티엔 르나르는 9세기와 10세기의 두 왕족 계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메로베가 겐일디스의 할아버지가 아닌 가문의 시조 창시자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메로베는 전쟁 행위나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없는, 흔적 없는 인물이다.[15]
메로베우스의 존재는 배제할 수 없다. 629년에서 639년 사이에 수행된 오스트라시아 계보[16]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클로이오는 프랑크족의 첫 번째 왕이다. 클로이오는 글로도보데를 낳았다. 글로드베두스는 메레베오를 낳았다. 메레베우스는 힐브리코를 낳았다. 힐데브리쿠스는 겐니오도를 낳았다. 겐니오두스는 힐데리코를 낳았다. 힐데리쿠스는 클로도베오를 낳았다...[17]
계보학자 크리스티앙 세티파니에 따르면, 이는 그 구성 이후에 확립된 계보가 있는 살리 왕들의 목록일 것이다. 따라서 계보는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18] 클로디온은 클로데보드와 메로베를 낳았다. 메로베는 힐데리크를 낳았다.
그러나 역사가 장-피에르 폴리는 메로베(Merow'ih)가 435년에 결혼한 클로데보드(Hl'udbead)의 아들이라면, 그가 456년경에 왕이 된 힐데리크(Hildrih)를 아들로 두었을 리 없다고 믿는다. 그는 메로베(Merow'ih)가 클로디온(Hl'udio)의 아들인 클로데보드(Hl'udbead)의 별명이라고 추론한다.[19]
포에두스로 로마 제국과 묶여 살리 프랑크족은 451년 카탈라우니아 평원 전투(샹파뉴-아르덴의 샬롱-앙-샹파뉴와 트루아 근처 평원)에서 로마 장군 아에티우스와 함께 싸웠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자료는 누가 그들을 전투로 이끌었는지 명시하지 않는다.[20] 프랑크족은 게피드와의 예비 교전에서 큰 손실을 입었지만,[21] 역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다음 날 전투에서 사망한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1세의 죽음은 기록했다.
5세기 중반에 프랑크족의 살리족을 이끈 왕으로,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서로마 제국군에 종군하여 훈족을 격파했다. 457년경 사망했으며, 아들인 킬데리크 (프랑크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는 클로비스 1세의 아버지)가 뒤를 이었다고 전해진다.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상이며, 후에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 (메로빙거의 어원)로 여겨지며, 해신의 자손으로 하는 전설(''프레데가리우스 연대기'') 등이 유포되었다[25]. 또한 살리 프랑크족의 왕으로 같은 시기에 클로디오/Chlodio영어가 활약했으며, 메로비크스는 클로디오의 가문에서 나왔다고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프랑크족의 역사』에 적고 있지만[26], 확실한 정보는 없다.
3. 1. 출생과 혈통 관련 설화
메로베우스 1세에 대해서는 이름과 킬데리쿠스 1세의 아버지라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어머니는 튀링겐 출신의 스예스(또는 바신느)라는 여성이었는데, 메로베우스라는 남성과 결혼했다가 사별 후 클로디오와 재혼하였다.[27]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바신느가 바다에서 수영하던 중 바다 괴물과 관계하여 메로베우스가 태어났다고 한다. 일설에는 임신한 상태에서 바다 괴물과 성관계를 맺어 메로베우스에게 두 혈통이 흐르게 되었다고도 한다.[4][5] 이 전설은 프랑크족 통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적 과거일 수 있다는 이론도 있다.[6]
투르의 그레고리는 메로베우스를 클로도비크 1세의 아버지라고 언급했지만, 클로디오와의 관계는 모호하게 언급했다.[3] 프레데가르 연대기는 메로베우스의 아버지가 바다 괴물인지 클로디오인지 불분명하다고 전한다.[4][5]
클로디오는 448년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에게 패배했기에, 이안 S. 우드는 메로베우스의 출생 시기를 5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7] 동시대 로마 역사가 프리스쿠스는 로마에서 "뺨에 아직 수염이 없고,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긴 금발을 가진 소년"을 목격했고, 아에티우스가 그를 양아들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프리스쿠스는 아틸라가 프랑크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왕위 계승 분쟁 때문이며, 맏아들은 아틸라와, 막내는 아에티우스와 동맹을 맺었다고 썼다. 클로디오가 아틸라의 침공 직전에 사망했으므로, 이는 메로베우스가 클로디오의 아들이었음을 시사한다.[8] 그러나 메로베우스가 프리스쿠스 기록의 주요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에리히 죌너는 라인강 프랑크 왕국이 아틸라의 침략 경로에 있었기 때문에 이 구절이 라인강 프랑크 왕들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9] 에밀리엔 드무제오는 메로베우스가 451년에 사망한 왕이며 그의 아들 힐데리크가 아에티우스의 양아들이라고 믿는다.[10] 크리스티앙 세티파니는 이 단편이 살리 프랑크족에 적용된다면, 클로디온이 451년에 사망한 왕이고 메로베우스는 로마와 동맹을 맺은 아들이라고 생각한다.[11]
메로베우스가 네덜란드 강인 메르베데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원 연구는 이를 반박한다.[13][14] 게오르크 바이츠는 메로베우스가 프랑크족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숭배했던 신이나 반신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12] 에티엔 르나르는 메로베우스가 가문의 시조 창시자일 수 있으며, 역사적 사건과 관련 없는 인물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15]
메로베우스의 존재는 배제할 수 없다. 629년에서 639년 사이에 수행된 오스트라시아 계보는 클로이오, 글로드보데, 메레베오, 힐브리코, 겐니오도, 힐데리코, 클로도베오 순으로 이어진다고 언급한다.[16][17] 크리스티앙 세티파니는 이를 살리 왕들의 목록으로 보고, 클로디온, 클로데보드, 메로베, 힐데리크 순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8] 그러나 장-피에르 폴리는 메로베우스가 클로데보드의 아들이라면 456년경에 왕이 된 힐데리크를 아들로 두었을 리 없다고 보며, 메로베우스가 클로디온의 아들 클로데보드의 별명이라고 추론한다.[19]
포에두스로서 로마 제국과 묶인 살리 프랑크족은 451년 카탈라우니아 평원 전투(샹파뉴-아르덴의 샬롱-앙-샹파뉴와 트루아 근처 평원)에서 아에티우스와 함께 싸웠다.[20] 자료는 누가 그들을 이끌었는지 명시하지 않지만, 프랑크족은 게피드와의 예비 교전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21]
5세기 중반에 프랑크족의 살리족을 이끈 왕으로,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서로마 제국군에 종군하여 훈족을 격파했다. 457년경 사망했으며, 아들인 킬데리크가 뒤를 이었다고 전해진다.[25] 메로베우스는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로 여겨지며, 해신의 자손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25]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메로베우스가 클로디오 가문 출신이라고 기록했지만, 확실한 정보는 없다.[26]
3. 2. 카탈라우눔 전투 참전
메로베우스 1세에 대하여는 이름 그리고 킬데리쿠스 1세의 아버지라는 사실 외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의 어머니는 튀링겐 출신의 스예스(또는 바신느)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메로베우스라는 이름의 남성과 결혼했다가 메로베우스 사후 클로디오와 재혼하였다.[27]
프레데가르(Fredegar)의 연대기에 의하면 바신느 혹은 스예스라는 여성이 바다에서 수영 혹은 목욕을 하던 중 바다괴물과 관계하고 그가 태어났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를 임신한 상태에서 바다괴물과 성관계를 하여 메로베크에게는 두 혈통이 흐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451년 로마를 침략한 훈족 아틸라와 싸우는데 참여했다.
그의 실체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는 투르의 주교 게르기우스의 〈프랑크족의 역사〉라는 문헌 등에 단편적으로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5세기 중반에 프랑크족의 살리족을 이끈 왕으로,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서로마 제국군에 종군하여 훈족을 격파했다.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상이며, 후에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 (메로빙거의 어원)로 여겨지며, 해신의 자손으로 하는 전설(『프레데가리우스 연대기』) 등이 유포되었다[25] . 또한 살리 프랑크족의 왕으로 같은 시기에 클로디오가 활약했으며, 메로비크스는 클로디오의 가문에서 나왔다고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프랑크족의 역사』에 적고 있지만[26], 확실한 정보는 없다.
3. 3. 기타 기록
메로베우스 1세에 대하여는 킬데리쿠스 1세의 아버지라는 사실 외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의 어머니는 튀링겐 출신의 스예스(또는 바신느)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메로베우스라는 이름의 남성과 결혼했다가 메로베우스 사후 클로디오와 재혼하였다.[27] 프레데가르(Fredegar)의 연대기에 의하면 바신느 혹은 스예스라는 여성이 바다에서 수영 혹은 목욕을 하던 중 바다괴물과 관계하고 그가 태어났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를 임신한 상태에서 바다괴물과 성관계를 하여 메로베크에게는 두 혈통이 흐르게 되었다고도 한다.[4][5] 또 다른 이론은 이 전설이 서유럽에서 급부상하는 프랑크족 통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한 신화적 과거를 창조한 것이라고 본다.[6]
451년 로마를 침략한 훈족 아틸라와 싸우는데 참여했다. 서로마 제국군의 사령관을 지냈다는 말이 있지만, 그의 실체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프랑크족의 역사〉 등의 문헌에 단편적으로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투르의 그레고리는 그를 클로도비크 1세의 아버지라고 한 번 언급할 뿐, 클로디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언급했다.[3]
클로디오는 448년 아르투아의 비쿠스 헬레나에서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에게 패배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안 S. 우드는 그의 아들의 출생 시기를 5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7]
동시대 로마 역사가인 프리스쿠스는 로마에서 "뺨에 아직 수염이 없고,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긴 금발을 가진 소년"을 목격했다며, "아에티우스가 그를 양아들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프리스쿠스는 아틸라가 프랑크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그들의 왕이 죽고 후계자를 두고 자녀들 간의 의견 불일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썼는데, 맏아들은 아틸라와 동맹을 맺었고, 막내는 아에티우스와 동맹을 맺었다는 것이다. 클로디오는 아틸라의 침공 직전에 사망했으므로, 이는 메로베우스가 사실 클로디오의 아들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8] 역사가들은 메로베가 프리스쿠스의 기록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한 명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프리스쿠스가 언급한 프랑크족 왕자 중 한 명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메로베는 갈리아 벨기카, 즉 브라반트주 지역에 정착하여 투르네에 거주지를 세웠을 것이다.
게오르크 바이츠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메로베가 신화적 인물일 수 있으며, 프랑크족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숭배했던 신이나 반신으로 추정되는 바다의 아들(프랑크어로 ''mari'')이라고 주장한다.[12]
또 다른 주장은 메로베가 네덜란드 강인 메르베데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로마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강의 초기 흐름이 살리 프랑크족이 살았던 지역과 일치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원 연구는 이 이론을 반박하는 것으로 보인다.[13][14]
역사학자 에티엔 르나르는 9세기와 10세기의 두 왕족 계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메로베가 겐일디스의 할아버지가 아닌 가문의 시조 창시자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메로베는 전쟁 행위나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없는, 흔적 없는 인물이다.[15]
메로베우스의 존재는 배제할 수 없다. 629년에서 639년 사이에 수행된 오스트라시아 계보[16]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7] 계보학자 크리스티앙 세티파니에 따르면, 이는 그 구성 이후에 확립된 계보가 있는 살리 왕들의 목록일 것이다. 따라서 계보는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18] 클로디온은 클로데보드와 메로베를 낳았다. 메로베는 힐데리크를 낳았다.
그러나 역사가 장-피에르 폴리는 메로베(Merow'ih)가 435년에 결혼한 클로데보드(Hl'udbead)의 아들이라면, 그가 456년경에 왕이 된 힐데리크(Hildrih)를 아들로 두었을 리 없다고 믿는다. 그는 메로베(Merow'ih)가 클로디온(Hl'udio)의 아들인 클로데보드(Hl'udbead)의 별명이라고 추론한다.[19]
포에두스로 로마 제국과 묶여 살리 프랑크족은 451년 카탈라우니아 평원 전투(샹파뉴-아르덴의 샬롱-앙-샹파뉴와 트루아 근처 평원)에서 로마 장군 아에티우스와 함께 싸웠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자료는 누가 그들을 전투로 이끌었는지 명시하지 않는다.[20] 프랑크족은 게피드와의 예비 교전에서 큰 손실을 입었지만,[21] 역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다음 날 전투에서 사망한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1세의 죽음은 기록했다.
5세기 중반에 프랑크족의 살리족을 이끈 왕으로,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에티우스가 이끄는 서로마 제국군에 종군하여 훈족을 격파했다. 457년경 사망했으며, 아들인 킬데리크 (프랑크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는 클로비스 1세의 아버지)가 뒤를 이었다고 전해진다.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상이며, 후에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 (메로빙거의 어원)로 여겨지며, 해신의 자손으로 하는 전설(『프레데가리우스 연대기』) 등이 유포되었다[25]. 또한 살리 프랑크족의 왕으로 같은 시기에 클로디오/Chlodio영어가 활약했으며, 메로비크스는 클로디오의 가문에서 나왔다고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프랑크족의 역사』에 적고 있지만[26], 확실한 정보는 없다.
4. 가계
- 아내 : 베리카(Verica)
- 아들 : 킬데리쿠스 1세
5. 대중문화 속 메로베우스
마이클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 헨리 링컨은 1982년 저술한 ''성혈과 성배''에서 메로베우스 1세에 대한 전설을 새로운 아이디어의 씨앗으로 각색했다. 그들은 "물고기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초기 기독교인들의 상징이 물고기였던 것과 관련하여 메로빙거 가문이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과 결혼했음을 암시한다고 가설을 세웠다. 이 이론은 2003년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소설 ''다빈치 코드''를 통해 더욱 대중화되었다.[22][23] 그러나 메로베우스가 예수의 후손이라는 주장에 대한 증거는 없었다.
로버트 안톤 윌슨의 ''역사적 일루미나투스 연대기'' 두 번째 책인 ''미망인의 아들''의 주요 미스터리 중 하나는 메로베우스의 정체성과 역사성이다. 초기 메로빙거 왕조가 끔찍한 물고기 형상으로 환영 속에 나타나면서 독자들에게 물고기 전설을 처음 소개한다. 윌슨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를 ''크리스티안 로지크로스의 연금술적 결혼''의 신랑과 신부로, 메로베우스를 메이슨 전승에서 명명된 미망인의 아들로 동일시하며, 전체 혈통이 외계인-인간 혼혈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24]
6. 평가
6. 1. 진보/보수적 관점
참조
[1]
서적
'A Companion to Gregory of T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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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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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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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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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eudo-Fredegar, Hist. III,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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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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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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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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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Geschichte des Frankenbis zu Mitte der sechsten Jahrhunde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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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La Formation de l'Europe et les invasions barbares (From the advent of Diocletian (284) to the Germanic occupation of the Roman Empire at the beginning of the 6th century)"
Aubier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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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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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tsche Verfassungsgeschich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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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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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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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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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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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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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jstor.or[...]
1996-07
[20]
서적
If [...] Merovee [...] was the king of the Franks during the Battle of the Catalaunian Plains (451), it is he who was at the head of the Frankish contingent of Aetius.
[21]
서적
Clov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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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22]
기타
'Behind the Da Vinci Code'
History Cha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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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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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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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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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クローヴィス
文庫クセジュ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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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프랑스史【中世】I
論創社
2016
[27]
문서
이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누구냐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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