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코 대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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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나코 대공궁은 모나코 대공의 공식 거처이자 집무 공간으로, 1191년 제노바 공화국이 요새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13세기 말 그리말디 가문이 모나코를 점령한 이후, 16세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조되었으며, 18세기에는 베르사유 궁전 양식을 차용하여 국빈 아파트를 조성했다. 대공궁은 중세 요새와 르네상스 양식의 팔라초, 바로크 양식의 입구 등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외관을 갖추고 있으며, 국빈 아파트, 옥좌실, 거울 갤러리 등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대공궁은 알베르 2세 공의 거처로 사용되며, 여름에는 국빈 접견실이 일반에 공개되고, 몬테카를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야외 콘서트가 열리는 등 모나코의 중요한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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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코 대공궁 | |
---|---|
지도 | |
일반 정보 | |
![]() | |
위치 | 모나코빌 |
용도 | 모나코 대공의 공식 거주지 |
역사 | |
기원 | 1191년 제노바 요새로 건설 |
건설 시작 | 1191년 |
주요 변경 | 15세기, 16세기 |
건축 양식 | |
스타일 | 제노바 양식 (원래) 르네상스 건축 루이 14세 양식 |
재료 | 돌 |
추가 정보 | |
공개 | 일반에 공개 (특정 구역) |
경비병 교대식 | 매일 11시 55분 |
2. 역사
모나코 대공궁의 역사는 1191년 제노바 공화국이 현재 위치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13세기 말, 제노바 내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그리말디 가문은 이 요새를 점령하여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14세기 초 모나코 영주 샤를 1세는 요새를 확장하여 요새화된 집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15세기에는 모나코 영주 람베르토 그리말디와 장 2세가 요새를 3층 건물로 확장하고 주요 방들을 건설하여 점차 궁전의 모습을 갖추게 하였다.
16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모나코의 루시앙 1세, 오노레 1세, 오노레 2세 등의 통치자들은 요새를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으로 변모시켰다. 특히 오노레 2세는 티치아노, 뒤러, 라파엘로, 루벤스, 미켈란젤로 등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여 궁전을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7세기 말, 모나코의 루이 1세는 퐁텐블로 궁전에서 영감을 받아 대공궁 입구와 이중 말굽 계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오노레 3세가 투옥되고 궁전은 약탈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19세기에 오노레 4세가 복위되었으나, 궁전은 심하게 파괴된 상태였다. 오노레 5세와 플로레스탄 1세가 복원을 시작했지만,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으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샤를 3세는 몬테카를로에 카지노를 건설하여 경제를 부흥시키고, 대공궁 복원을 완료하여 궁전을 다시 화려하게 만들었다.
20세기 초, 알베르 1세는 모나코 혁명 이후 헌법을 공포하여 절대 군주제를 종식시켰다. 레니에 3세는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통해 대공궁을 현대적인 모습으로 탈바꿈시켰고, 경공업을 장려하여 모나코의 경제를 다각화했다. 1993년 모나코는 UN에 가입했다.
2. 1. 중세 요새 (12세기 - 15세기)
모나코 대공의 거처는 1191년 제노바 공화국이 모나코의 바위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요새는 황제 헨리 4세가 제노바인들에게 항구와 주변 지역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조건으로 하사하면서 건설되었다. 1215년에는 네 개의 탑과 방어벽으로 구성된 새로운 요새 건설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현재 궁전의 기초가 되었다.[15]13세기 말, 구엘프당과 기벨린당의 대립에서 기벨린당이 승리하면서, 교황을 지지하던 그리말디 가문은 제노바에서 추방되어 프랑스 리비에라 지역에 정착했다. 전설에 따르면 1297년 1월, 프랑수아 그리말디가 수도승으로 변장하여 성에 잠입, 경비병을 살해하고 성을 점령했다고 한다.[4]
14세기 초, 모나코 영주 샤를 1세는 요새를 크게 확장했다. 동쪽 성벽에 건물을 추가하고 바다를 향한 건물을 추가하여 요새를 요새화된 집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1341년 그리말디는 망통과 로크브륀 카프마르탱을 점령하여 권력을 강화하고, 항구와 바위 위의 요새를 더욱 강화했다.[4]
15세기 동안 요새는 계속 확장되고 방어 시설이 보강되어 약 400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주둔지가 되었다.[2] 모나코 영주 람베르토 그리말디와 그의 아들 장 2세는 요새를 3층 날개로 확장하고, 국무 회의실을 포함한 주요 방들을 건설했다. 이 시기부터 요새는 점차 궁전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4]
2. 2. 르네상스 궁전으로의 변모 (16세기 - 17세기)

16세기 초, 루시앙 1세는 요새를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는 본관에 대형 날개를 추가하고 국빈 아파트를 건설하여 궁전의 기능을 확장했다.[6] 오노레 1세는 궁전의 내부 변환을 계속했으며, 특히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방문을 계기로 궁전을 더욱 화려하게 꾸몄다. 안뜰이 재건되었고, 건축가 도미니크 갈로는 두 개의 아케이드를 설계했다. 상층 아케이드는 오라치오 데 페라리가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을 묘사한 장면으로 천장을 장식했기 때문에 ''갈레리 데르큘'' (헤라클레스 갤러리)로 알려져 있다.[1]
오노레 2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하고 궁전을 대대적으로 확장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건축가 자크 카톤에게 궁전을 확장하고, 세례자 요한에게 헌정된 새로운 예배당을 건설하도록 했다.[1] 그는 티치아노, 뒤러, 라파엘로, 루벤스, 미켈란젤로 등의 작품을 수집하여 궁전을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1]
2. 3. 부재 지주와 혁명 (17세기 - 18세기)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모나코는 공식적으로는 독립 국가였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의 한 지방과 같았다.[5] 모나코의 통치자들은 프랑스 궁정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서 흔했던 부재 지주와 비슷했다. 베르사유 궁전의 매력이 그들이 다스리는 나라보다 더 컸다.오노레 2세의 뒤를 이은 손자 루이 1세는 세련된 성격을 지녔으며, 그의 아내와 함께 프랑스 귀족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외국 원수이자 프랑스 귀족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루이 1세는 프랑스 국왕의 궁전에 깊은 인상을 받아 퐁텐블로 궁전을 모나코 대공궁 개선의 영감으로 삼았다. 그는 대공궁의 가장 주목할 만한 두 가지 특징을 만들었는데, 거대한 바로크 아치 위에 그리말디 문장이 새겨진 파괴된 페디먼트가 있는 입구(''삽화 10'')와 퐁텐블로 궁전의 것을 본떠 만든 이중 말굽 계단이 그것이다.[8] 이 계단을 구성하는 30개의 계단은 단일 카라라 대리석 덩어리로 조각되었다고 한다.[9] 새로운 입구의 아치트레이브와 말굽 계단은 모두 코모 출신의 건축가 앙투안 그리호가 디자인했다.[10]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1780년대 후반, 오노레 3세는 프랑스 이웃으로부터 혁명적 사상을 얻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1793년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은 모나코를 합병했고, 오노레 3세는 프랑스에 갇혔으며 궁전을 포함한 그의 재산과 영지는 프랑스에 몰수되었다.
대공궁은 오노레 3세의 백성들에 의해 약탈되었고,[2] 남은 가구와 미술품 컬렉션은 프랑스 정부에 의해 경매에 부쳐졌다.[14] 이후 대공궁은 군 병원 및 빈민원으로 사용되었다.
2. 4. 19세기: 복원과 쇠퇴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오노레 4세가 1814년 모나코 공작으로 복위했지만, 대공궁은 심각하게 파괴된 상태였다.[2] 혁명 기간 동안 궁전의 동쪽 날개 일부와 오노레 2세의 목욕 파빌리온이 철거되었고, 궁전 내부는 약탈당하고 가구와 예술품은 흩어졌다.[14]오노레 4세의 뒤를 이은 오노레 5세와 플로레스탄 1세는 대공궁 복원을 시작했다. 오노레 5세는 궁전의 구조적 복원을 시작했고, 플로레스탄은 그의 작업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플로레스탄 통치 시기 모나코는 사르데냐 왕국의 보호령이 되면서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플로레스탄은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의 아들 샤를 3세에게 권력을 넘겼지만, 망통과 로크브륀카프마르탱이 모나코에서 분리 독립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861년 망통과 로크브륀카프마르탱이 공식적으로 프랑스에 편입되면서 모나코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었다. 샤를 3세는 이 시기를 이용하여 숙부 오노레 5세가 시작한 대공궁 복원을 완료했다. 그는 성 마리아 타워를 재건하고 예배당을 완전히 복원했으며, 경비실을 새롭게 단장했다.[1] 또한 혁명 기간 동안 잃어버린 예술품과 가구를 되찾고 새로운 작품을 수집하여 궁전을 다시 화려하게 꾸몄다.
샤를 3세는 몬테카를로에 카지노를 건설하여 모나코의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 성공했다. 1878년 완공된 샤를 가르니에가 설계한 카지노는 모나코를 부유하고 퇴폐적인 도박 도시로 만들었다.[15] 이로 인해 모나코는 국제적인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2. 5. 20세기: 혁명, 전쟁, 그리고 재건
20세기 초, 알베르 1세는 과학과 평화 연구에 힘썼으며, 모나코 혁명 이후 헌법을 공포하여 절대 군주제를 종식시켰다. 루이 2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중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비시 프랑스 정부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레니에 3세는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통해 대공궁을 현대적인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레니에 3세는 모나코의 재산과 명성을 되살리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대공궁의 복원을 감독했다.[9] 1949년 즉위한 그는 즉시 개보수 및 복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안뜰의 외부 프레스코화는 대부분 복원되었고, 프랑스 혁명 이후 파괴된 남쪽 별관은 재건되었다. 이곳은 통치 가문이 개인 아파트를 사용하는 대공궁의 부분이다.[9] 이 별관에는 나폴레옹 박물관과 기록 보관소도 있다.
헤라클레스 갤러리로 알려진 개방형 아케이드를 장식하는 프레스코화는 레니에 3세에 의해 변경되었으며, 그는 신화와 전설적인 영웅을 묘사한 피에르 프란체스코 마주켈리의 작품을 수입했다.[9] 또한 많은 방들이 재가구 배치 및 재장식되었다.[22] 국가 전용실의 많은 대리석 바닥이 복원되었고, 레니에 3세의 이중 R 모노그램을 포함하는 상감 세공 디자인으로 장식되었다.[2]
그레이스 켈리 왕비와 함께 레니에 3세는 대공궁을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부터 모나코에 경공업을 장려하여 도박 수입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크고 번창하는 사업의 본부로 만들었다.[23] 여기에는 간척 사업, 새로운 해변 개발 및 고층 고급 주택 건설이 포함되었다. 모나코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1993년 레니에 3세의 후계자인 알베르 2세를 모나코 대표로 하여 UN에 가입했다.[24]
그레이스 왕비는 1982년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레니에 3세는 2005년에 사망했을 때, 수세기 동안 그랬던 것보다 더 강하고 안정적인 대공궁과 국가를 남겼다.
3. 주요 특징
모나코 대공궁은 오랜 역사 동안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을 거치면서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궁전 뒤편에는 원래의 중세 요새가 그대로 남아있어(삽화 4) 오랜 역사의 흔적을 보여준다. 궁전 내부에는 국빈 아파트를 비롯한 여러 방들이 있는데, 이 방들은 18세기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양식을 본떠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모나코 대공궁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곳 중 하나는 국빈 아파트이다. 국빈 아파트는 16세기부터 조성되어 18세기에 베르사유 궁전 양식으로 꾸며졌으며, 19세기와 20세기 후반에 걸쳐 대규모 복원을 통해 18세기 스타일이 더욱 강화되었다.
3. 1. 건축 양식
모나코 대공궁은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궁전의 건축 양식은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하고 발전해 왔는데, 이는 대칭의 부재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궁전의 건축 양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각 부분과 건물을 আলাদা আলাদা로 살펴봐야 한다.정면은 여러 시대의 팔라초 양식 테라스처럼 보이지만(삽화 1과 삽화 12), 실제로는 하나의 궁전이다. 이 부분은 공통적으로 러스티케이션 1층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러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은 이전의 요새를 가리는 듯하며, 요새의 탑들은 다양한 고전적인 파사드 뒤에서 솟아 있다. 이 탑들은 대부분 19세기에 재건되었지만, 많은 탑들이 성가장자리와 총안을 갖추고 있다. 궁전 뒤편에는 원래의 중세 요새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삽화 4'')
궁전이 건설된 명예의 뜰에서는 더욱 조화로운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두 개의 층으로 된 프레스코가 있는 열린 아케이드가 있는데, 이는 왕자가 등장할 때 의례적인 발코니 역할을 하며, 궁전의 공식적인 국빈실을 연결하는 국가 입구와 복도로 사용된다.
국빈 아파트들은 16세기부터 조성되었으며 18세기에 베르사유 궁전의 양식으로 개선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 후반에 걸쳐 국빈실에 대한 대규모 복원을 통해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되는 18세기 스타일이 강화되었다. 앙필라드와 옥좌실로 가는 의례적인 경로로 설계된 이 행진 경로는 명예의 뜰에서 헤라클레스 갤러리라고 알려진 개방형 갤러리로 이어지는 외부 말굽 모양의 계단으로 시작된다. 여기에서 손님들은 베르사유의 거울의 방에서 영감을 받은 긴 홀인 거울 갤러리에 들어선다.[2] 이 갤러리는 국빈실 중 첫 번째 방인 장교실로 이어진다. 그곳에서 손님들은 옥좌실에서 왕자와의 알현 전에 궁정 관리들의 인사를 받는다.
장교실에서 앙필라드는 블루룸으로 이어진다. 파란색 브로케이드로 장식된 이 넓은 응접실에는 그리말디 가문의 초상화가 걸려 있으며 샹들리에는 무라노 유리로 만들어졌다. 그 다음 방은 국빈 아파트에서 가장 큰 방인 옥좌실이다. 천장과 프레스코는 오라치오 데 페라리가 제작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항복을 묘사한다. 엠파이어 양식의 옥좌는 금색 왕관이 얹어진 붉은 실크 덮개 아래 연단에 배치되어 있다. 바닥은 카라라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16세기부터 이 방에서 모든 국가 행사가 열렸다.[3]
국빈 스위트의 다른 방으로는 벽이 붉은색 브로케이드로 덮여 있어 그렇게 불리는 레드룸과 얀 브뤼헐 더 늙은이와 샤를 르 브룅의 그림이 있는 넓은 응접실이 있다. 궁전과 마찬가지로 이 방에는 화려한 18세기 프랑스 스타일의 가구가 비치되어 있다. 레드룸에서 요크룸으로 이어진다. 국빈 침실로 가구가 비치된 이 방은 그레고리오 데 페라리가 그린 사계절 그림으로 프레스코화되어 있다. 그 다음 방인 옐로우룸(또는 때로는 루이 15세 침실)은 또 다른 국빈 침실이다.
스위트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방은 마자린룸이다. 이 응접실에는 추기경 마자랭이 프랑스로 데려온 장인들이 제작한 이탈리아식 금색과 페인트 칠된 다색 보아즈리가 늘어서 있다. 추기경 마자랭의 초상화가 벽난로 위에 걸려 있다.
이처럼 궁전의 내부는 18세기 분위기를 물씬 풍기지만, 궁전 자체는 그렇지 않다. 궁전 외관의 대부분은 12세기부터 시작된 오랜 진화의 결과이며,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대대적인 복원 및 재가구화의 영향을 받았다.
3. 2. 국빈 아파트
16세기부터 조성된 국빈 아파트는 18세기에 베르사유 궁전 양식으로 개선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 후반에 걸쳐 이루어진 대규모 복원을 통해 현재 널리 사용되는 18세기 스타일이 더욱 강화되었다. 앙필라드와 옥좌실로 가는 의례적인 경로는 명예의 뜰에서 헤라클레스 갤러리라고 알려진 개방형 갤러리로 이어지는 외부 말굽 모양의 계단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손님들은 베르사유의 거울의 방에서 영감을 받은 긴 홀인 거울 갤러리에 들어선다.[2]거울 갤러리는 국빈실 중 첫 번째 방인 장교실로 이어지며, 이곳에서 손님들은 옥좌실에서 왕자와의 알현 전에 궁정 관리들의 인사를 받는다. 장교실에서 이어지는 앙필라드는 블루룸으로 연결된다. 파란색 브로케이드로 장식된 이 넓은 응접실에는 그리말디 가문의 초상화가 걸려 있으며, 샹들리에는 무라노 유리로 만들어졌다.
그다음 방은 국빈 아파트에서 가장 큰 방인 옥좌실이다. 천장과 프레스코는 오라치오 데 페라리가 제작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항복을 묘사한다. 엠파이어 양식의 옥좌는 금색 왕관이 얹어진 붉은 실크 덮개 아래 연단에 배치되어 있다. 바닥은 카라라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16세기부터 이 방에서 모든 국가 행사가 열렸다.[3]
국빈 스위트의 다른 방으로는 벽이 붉은색 브로케이드로 덮여 있어 레드룸이라 불리는 방과 얀 브뤼헐 더 늙은이와 샤를 르 브룅의 그림이 있는 넓은 응접실이 있다. 궁전과 마찬가지로 이 방에는 화려한 18세기 프랑스 스타일의 가구가 비치되어 있다. 레드룸에서 요크룸으로 이어진다. 국빈 침실로 가구가 비치된 이 방은 그레고리오 데 페라리가 그린 사계절 그림으로 프레스코화되어 있다. 그다음 방인 옐로우룸(또는 루이 15세 침실)은 또 다른 국빈 침실이다.
스위트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방은 마자린룸이다. 이 응접실에는 추기경 마자랭이 프랑스로 데려온 장인들이 제작한 이탈리아식 금색과 페인트 칠된 다색 보아즈리가 늘어서 있다. 추기경 마자랭의 초상화가 벽난로 위에 걸려 있다.
궁전 내부와 외부의 압도적인 분위기는 18세기이지만, 궁전 자체는 그렇지 않다. 그 외관의 대부분은 12세기부터 시작된 오랜 진화의 결과이며,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대대적인 복원 및 재가구화의 영향을 받았다.
3. 3. 기타 시설
세례자 요한에게 헌정된 궁전 예배당은 돔이 설치되어 있으며, 자크 카톤이 건설을 담당하였다. 오라치오 데 페라리는 예배당 천장에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을 묘사한 프레스코화를 그렸다.[1] 샤를 3세 통치 시기에 예배당이 완전히 복원되어 새로운 제단이 설치되고 돔 천장에 프레스코화가 그려졌다.루이 2세가 수집한 나폴레옹 1세 유물을 전시하던 나폴레옹 박물관은 현재 폐관되었다.
4. 현대의 대공궁
오늘날 대공궁은 알베르 2세 공의 거처이다.[9] 국빈 접견실은 여름 동안 일반에 공개되며, 1960년부터 궁전 안뜰은 몬테카를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야외 콘서트를 여는 장소가 되었다.[9]
하지만 궁전은 단순한 관광 명소나 박물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곳은 여전히 모나코 통치자의 완전한 업무 공간이자 본부이며, 입구에서 끊임없이 경비를 서는 보초병이 이를 강조한다. 군주는 헌법에 묶여 있지만, 국가이자 기업으로서 모나코의 일상적인 운영에 관여한다. 오늘날 모나코는 197ha의 면적을 차지하며, 이 중 40ha는 1980년 이후 바다를 간척하여 얻은 것이다.[25]
그리말디 왕가의 결혼식과 출산과 같은 중요한 모나코 행사에서는 궁전 안뜰이 개방되고, 모나코 시민들은 안뜰이 내려다보이는 헤라클레스 갤러리에서 공의 연설을 듣는다.[9] 안뜰은 또한 연례 어린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개최하는 데 사용된다. 이러한 행사를 통해 궁전은 700년 이상 그래왔듯이 공과 그의 신민들의 삶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Glatt, p. 280
[2]
웹사이트
The Prince's Palace of Monaco
[3]
서적
Lisimachio, p. 207
[4]
서적
Lisimachio, p. 203
[5]
문서
Historical Overvie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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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isimachio, p. 204
[7]
웹사이트
Monaco
[8]
서적
de Chimay, p. 77
[9]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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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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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Chimay, p. 210
[11]
웹사이트
Monaco: 1662 to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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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Marie Catherine Brignole
[13]
서적
Lisimachio, p.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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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적
Edwards
[16]
서적
Edwards, pp. 155–157
[17]
서적
Edwards, p. 169
[18]
서적
Baring-Gould, p. 244
[19]
서적
de Fontenoy, p. 87
[20]
서적
Glatt, p. 55
[21]
서적
Taraborrelli, p. 202
[22]
서적
Lisimachio
[23]
뉴스
Obituary...
The Times
[24]
서적
Glatt, p. 247
[25]
웹사이트
History
[26]
웹사이트
モナコ大公宮殿
https://www.cool-wor[...]
2022-09-16
[27]
웹사이트
モナコ大公宮殿とは
https://kotobank.jp/[...]
202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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