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오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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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오카성은 헤이안 시대에 축조된 일본의 성으로,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에 위치해 있다. 센고쿠 시대 후기 난부 노부나오가 축성을 시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난부 도시나오 시대에 완성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폐성된 후 이와테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현재는 모리오카 성터 공원으로 불린다. 성터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06년에는 일본 100대 명성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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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오카성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모리오카성 |
다른 이름 | 고즈카타성 |
로마자 표기 | Morioka-jō |
일본어 표기 | 盛岡城 |
일본어 표기 (가나) | もりおかじょう |
일본어 다른 이름 표기 | 不来方城 |
일본어 다른 이름 표기 (가나) | こずかたじょう |
종류 | 평산성 |
축성 연도 | 1598년 - 1633년 |
축성자 | 남부 씨 |
사용 시기 | 1633년 - 1889년 |
현재 상태 | 국가 사적 |
소유자 | 모리오카시 |
구조 정보 | |
성곽 양식 | 연곽식 평산성 |
천수 구조 | 어삼층 망루 (1842년 이후 천수) 불명 3층 (1633년 축조) 독립식 층탑형 3중 3층 (1676년 재건, 현존하지 않음) |
역사 정보 | |
축성 주도 | 남부 노부나오 |
개축 주도 | 남부 시게나오 |
통치 가문 | 남부 씨 |
폐성 연도 | 1871년 |
문화재 정보 | |
문화재 지정 | 국가 지정 사적 |
잔존 유구 | 석벽 토루 해자 이축 토장 문 |
기타 정보 | |
위치 좌표 | 위도 39°41′59.81″ N, 경도 141°09′0.04″ E |
![]() |
2. 역사
헤이안 시대 때 아베 가문을 무너뜨린 기요하라 다케노리의 조카 다치바나 요리타메가 이 지역을 다스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난부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이 지역을 10만 석에 봉해 받았고, 1591년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을 진압한 후 산노헤 성에서 구노헤 성(후쿠오카 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가모 우지사토와 아사노 나가마사의 조언으로 1592년부터 고즈카타 지역에 새로운 성을 쌓기 시작했다. 1598년 교토에 있던 난부 노부나오는 아들 난부 도시나오에게 축성을 명하고, 군사학자 우치보리 이즈노카미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1600년 난부 노부나오가 사망하고, 난부 도시나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섰기 때문에 영지를 지킬 수 있었다. 1615년 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자, 도시나오는 고즈카타를 '''모리오카'''로 개명했다. 1633년 난부 시게나오 때 성이 완성되었지만, 1634년 화재로 혼마루가 소실되어 후쿠오카 성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다가 1635년 복구 후 다시 모리오카 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모리오카 번의 번청으로 사용되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1871년 폐번치현으로 성은 폐성되었고, 1874년 일반에 매각되어 대부분의 건물이 옮겨졌다. 1890년 성터는 옛 번주였던 난부 가문에 매각되었고, 1906년 이와테 공원으로 개원했다. 1934년 난부 가문은 성터를 모리오카 시에 기증했고, 1937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06년에는 일본 100대 명성에 선정되었다.
2. 1. 초기 역사 (헤이안 시대 ~ 무로마치 시대)
헤이안 시대 초기, 덴노가는 인근에 시와 성을 건설하여 오슈 북부의 중심지로 삼았다. 이 지역은 전 9년 전쟁에서 아베 씨와 기요하라 씨 사이에 분쟁이 있었고, 기요하라 씨가 최초의 요새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1] 이후 북부 후지와라 씨가 기요하라 씨를 멸망시켰고, 가마쿠라 막부의 미나모토 씨에게 멸망당했다. 미나모토 씨의 가신인 구도 씨가 이 지역을 지배했으나, 무로마치 시대에 고다이고 천황과 남조를 지지하다 아시카가 막부와 북조를 지지하는 난부 씨에게 몰락했다.[1]2. 2. 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90년 센고쿠 시대 후기, 난부 노부나오는 오다와라 정벌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다이묘로 인정받았다.[1] 1591년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을 진압하고, 산노헤 성에서 구노헤 성(후쿠오카 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1592년 가모 우지사토와 아사노 나가마사의 조언으로 고즈카타 지역에 새로운 성을 짓기 시작했다.1598년 난부 노부나오는 교토에서 적자 난부 도시나오에게 축성을 명하고, 우치보리 이즈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1599년 난부 노부나오 사망.[5]
2. 3. 에도 시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난부 도시나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안도받았다.[1] 1615년 경 성이 거의 완성되었고, 난부 도시나오는 고즈카타에서 "번영하는 언덕"이라는 뜻의 '''모리오카'''로 지명을 변경했다.성하 마을 건설을 추진하여 나카쓰 강 북쪽 습지를 매립하고, 가미노하시(上ノ橋), 나카노하시(中ノ橋), 시모노하시(下ノ橋)를 가설했다. 1609년에는 가미노하시에, 1611년에는 나카노하시에 청동으로 된 기보시를 장식하여 성하 마을 건설을 기념했다. 현존하는 가미노하시의 기보시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633년 3대 번주 난부 시게나오 시대에 성이 완공되었으나,[1] 1634년 화재로 혼마루가 소실되어 후쿠오카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1635년 성이 수복되어 다시 모리오카 성으로 거처를 옮긴 후 메이지 유신까지 모리오카 번의 번청으로 사용되었다.
2. 4. 메이지 시대 이후
-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에 따라 모리오카 성은 폐성되었다.
- 1874년(메이지 7년) 폐성령에 따라 당초 존치성으로 지정되었으나, 노후화가 심하여 일반에 매각되어 건물 대부분이 해체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이후 육군 용지로 사용된 토지의 건물을 제외하고 옛 번주였던 난부가에 매각되었다.
- 1906년(메이지 39년) 이와테현에 임대되어 나가오카 야스히라의 설계에 따라 "이와테 공원"으로 개원하였다.
- 1934년(쇼와 9년) 모리오카시가 옛 성터를 난부가로부터 매입하였다.[6]
- 1937년(쇼와 12년) 성터가 "호화로운 석벽과 토루가 아직도 잘 남아 있어 옛 규모를 엿볼 수 있다"는 이유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7]
- 1956년(쇼와 31년) 이와테 공원으로 도시 계획이 결정되어 일반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 1980년(쇼와 55년) 종합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 1989년(헤이세이 원년) 일본의 도시공원 100선에 선정되었다.
- 2006년(헤이세이 18년) 일본 100대 명성(6번), 일본의 역사공원 100선에 선정되었고, '모리오카 성터 공원'이라는 애칭이 결정되었다.
3. 구조
모리오카성은 모리오카시 중심부의 화강암 구릉지에 축성된 연곽식 평산성이다. 서쪽으로 흐르는 기타카미강과 남동쪽으로 흐르는 나카쓰강을 천연의 해자로 삼고 있다. 혼마루 북쪽에는 니노마루를 배치하였고, 혼마루와 니노마루 사이에는 빈 해자를 설치하여 다리로 연결하였다. 더 북쪽에는 산노마루를 배치하였고, 혼마루 주변에는 고시쿠루와, 아와지 마루, 사카키야마쿠루와를 두었다. 혼마루에는 천수대를 세웠지만, 막부의 우려로 천수각은 세우지 않고 3층 야구라를 세웠다.
백색의 화강암으로 구성된 석벽은 도호쿠 지방의 다른 성들과는 다른 특징이다. 성의 건물들은 메이지 시대 초기에 대부분 해체되었지만, 성안으로 이축된 도조[18]와 호온지로 이축된 문 등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 문이 정말 성문으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모리오카 성터는 '''이와테 공원(모리오카 성터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이 곳에는 이 지역 출신 시인 미야자와 겐지의 시비와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가비가 있다.
4. 이와테 공원(모리오카 성터 공원) 명칭 변경 문제 및 정비 계획
2006년 이와테 공원이 개원 100주년을 맞아 모리오카 시는 공식 명칭 변경을 발표했으나, 시민들의 반발로 "애칭 설정"으로 변경했다. 애칭은 일반 공모 없이 시가 독자적으로 선정한 "애칭 검토 협의회"에 자문하여 후보를 제시했고, 이는 시민들의 불신을 초래하여 지역 언론에서도 논쟁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모리오카 성터 공원(盛岡城跡公園)"과 "모리오카 오성터 공원(盛岡お城跡公園)" 중 설문조사를 통해 "모리오카 성터 공원"이 선정되어 9월 15일 공식 발표되었다.
도로 표지판, 안내판 등에서는 "모리오카 성터 공원(이와테 공원)"으로 변경이 추진되고 있지만, '''공식 명칭(도시공원법상 명칭)은 '이와테 공원' 그대로'''이다. 법적으로 공원 명칭 변경은 상정되어 있지 않아, 공식 명칭 변경이 아닌 "애칭" 설정에 불과하다. 애칭 대상 범위는 "이와테 공원" 구역(쇼와 31년 종합 공원으로 도시 계획 결정 후 사적 동쪽 인접 지역 포함)으로, "모리오카 성터" 사적 지정 범위 외 구역(건축물, 광장, 주차장 등)도 포함한다.
설문조사에서 "모리오카 성터 공원" 34%, "모리오카 오성터 공원" 22%의 찬성을 얻었지만, 애칭 자체 반대 의견도 29%였다.
"이와테 공원(巖手公園)" 비석, 미야자와 겐지 작품 속 "이와테 공원" 등 명칭의 역사적 가치가 존재하며, "애칭이 공식 명칭보다 길다", "관광객에게 혼란을 준다"는 비판도 있다. 천수각, 성문 등 성곽 복원 없이 공원 명칭 변경으로 성의 존재감을 보여주려는 움직임에는 찬반양론이 있으며, 100년간 사용된 명칭 변경의 명확한 의미와 효과 제시 없이는 문제 해결이 어렵다.
모리오카시는 모리오카 성의 천수각, 누각, 문, 토담, 토굴 목조 복원을 위해 헤이세이 24년도에 "사적 모리오카 성터 정비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자료를 수집 중이다.[8]
4. 1. 명칭 변경 문제
2006년 모리오카 시는 이와테 공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명칭 변경을 발표했으나, 시민들의 반발로 "애칭" 설정으로 변경했다.[8] "모리오카 성터 공원"과 "모리오카 오성터 공원" 중 설문조사를 통해 "모리오카 성터 공원"이 선정되었으나, 애칭 자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많았다.[8]명칭 변경 과정은 모리오카 시민들에게 "뜻밖의 일"이었으며, 일반 공모 없이 시가 독자적으로 선정한 위원회에서 후보 명칭을 제시하여 큰 불신을 초래했다.[8] 지역 언론에서도 이 문제가 다루어지며 논쟁이 되었다.[8]
애칭 선정 이후에도 이시가키 뮤직 페스티벌 등 시 관련 행사에서 "모리오카 성터 공원"이라는 명칭만 사용되고, "(이와테 공원)" 부기는 실시되지 않아 혼란이 있었다.[8] 공원 입구 안내 간판에도 "모리오카 성터 공원"만 단독으로 기재되어 있다.[8]
"이와테 공원"이라는 명칭은 법적 절차를 거쳐 결정되었지만, 법적으로 개설된 공원의 명칭 변경은 상정되어 있지 않아 공식 명칭 변경이 아닌 "애칭" 설정에 불과하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8] 또한, 애칭 대상 범위가 "모리오카 성터" 사적 지정 범위 외 구역도 포함하고 있어 명칭 사용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8]
미야자와 켄지의 작품에 "이와테 공원"이 등장하는 등 명칭 자체의 역사적 가치가 존재하고, "애칭이 공식 명칭보다 길다", "관광객에게 오해를 준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8]
4. 2. 정비 계획
모리오카시는 천수각, 누각, 문 등의 목조 복원을 위한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8] 2019년 4월, 모리오카시는 사적 인접 지역에 민관합동투자사업(PFI) 방식의 상업시설 정비 계획을 발표했으나,[9] [10] [11] 2020년 9월 문화청이 사적으로 지정된 성곽 앞에 전망을 가리는 시설 건립에 난색을 표하며 보조금 지급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혀, 모리오카시는 해당 지역 벌채 계획을 2021년 이후로 연기했다.[12] [13]모리오카성터 정비위원회 위원들은 문화청의 중단 지시에 충격을 표하며, 잔디광장에 매장된 유구에 대한 사전 조사의 필요성과 기본 계획을 무시하는 사업안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다.[13] 일본성곽사학회 모리오카 지부장 카미야마 진은 잔디광장이 시내에 유일하게 남은 무가 저택 터이며, 문화재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고, 다른 연구자들도 잔디광장이 일본 성곽의 '삼의 마루'에 해당하는 중요한 지역이라며 발굴 조사를 촉구했다.[14]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리오카시 도시정비부장 다카하마 야스나리는 시설 건설 후에도 전망이 충분히 확보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시 공원 녹지과는 정비 기본 계획과 PFI 사업 간의 일치성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13] 시 공원 녹지과장 모리 카츠토시는 현재로서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 시설 건설에 문제가 없으며, 민간 사업자에게 문화재 출토 가능성을 전달했고 유적을 손상시키지 않는 건설 기술도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혔다.[14]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PFI 사업 추진 과정의 투명성 확보와 시민 참여 보장을 요구하며, 문화재 보호를 위한 철저한 사전 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5. [[난부 도시나가|난부 도시쇼]] 중위 기마상 대좌
1908년 러일 전쟁에서 전사한 난부 도시쇼를 기리는 기마상이 정관재계 관계자와 구번사들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4년 금속 공출로 동상 본체가 사라지고, 현재는 "난부 도시쇼 중위 기마상 대좌"로 대좌만 남아 있다.[15]
이 대좌는 에도 시대 번주가 거주하던 저택 터에 있으며, 모리오카 시는 문화청의 기준에 따라 "에도 시대 성곽의 역사적 가치"에 중점을 둔 정비를 진행할 방침으로, 사적지 외부의 잔디 광장 등으로 대좌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15][16]
사쿠라야마 신사에는 흉상 부분의 주형이, 말 머리 부분의 주형은 나스가와마치의 보은사에 남아있다.
6. 교통
JR 동일본 모리오카 역에서 이와테현 교통 버스를 이용, "모리오카 성터 공원"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모리오카역 동쪽 출구에서 이용 가능한 버스 노선은 다음과 같다.
승강장 | 노선 |
---|---|
15, 16번 | 모리오카 시내 순환 버스 「덴덴무시」 |
5번 | 210, 218, 252 |
8번 | 406 |
10번 | 219 |
7. 갤러리
참조
[1]
웹사이트
Morioka Castle Ruins
http://kunishitei.bu[...]
2016-03-04
[2]
웹사이트
国指定史跡盛岡城跡保存管理計画【概要版】
https://www.city.mor[...]
盛岡市
2024-03-17
[3]
문서
源頼義父子に加担して安倍氏を倒した。橘頼為は清原氏・源氏連合軍に与力した。
[4]
문서
「方」は「万」の誤記で、「さかしま」と読み、秋田郡方面に比定する説もある。
[5]
문서
糠部郡は寛永11年(1634年)に北、三戸、二戸、九戸の4ヶ郡に分割された
[6]
간행물
盛岡市による盛岡城址の岩手公園買収の経過と背景及び公園の維持管理
http://www.cpij.or.j[...]
公益社団法人日本都市計画学会
2015-08
[7]
데이터베이스
盛岡城跡
[8]
웹사이트
盛岡市は,盛岡城跡の建物復元を目指し,古写真や絵図を収集しています
http://www.city.mori[...]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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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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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北新報オンラインニュース
2019-07-21
[15]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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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miuri.[...]
2024-11-29
[16]
웹사이트
盛岡城跡にある「台座」移設検討 盛岡市、江戸期重視し本丸整備
https://www.iwate-np[...]
2024-12-01
[17]
웹사이트
盛岡城跡公園(岩手公園)
http://www.city.mori[...]
[18]
문서
도난과 화재를 대비하여 사면을 흙이나 옻칠 등으로 칠한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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