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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다다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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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즈노 다다유키는 1669년에 태어나 1731년에 사망한 에도 시대의 무사이다. 그는 미즈노 가문의 일원으로서, 1701년 아코 사건 당시 아코 낭사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낭사들을 냉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막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교호 개혁을 지원했고, 로주, 캇테가케 로주 등을 역임하며 재정 개혁을 추진했지만, 백성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1730년에 은퇴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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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다다유키
기본 정보
미즈노 다다유키
미즈노 다다유키의 초상
이름미즈노 다다유키
본명미즈노 다다유키 (水野 忠之)
출생1669년 7월 4일
사망1731년 4월 23일
시대에도 시대 전기 - 중기
이명사이구, 몬도 (통칭)
계명고류인덴 쇼가쿠 겐키 코지
묘소이바라키현 유키시 야마카와신주쿠의 미즈노 가 묘소
관위종5위 하, 다이겐모노, 종4위 하, 시종, 이즈미노카미
막부에도 막부
씨족미즈노 씨
가계
아버지미즈노 다다하루
어머니마에다 도시쓰구의 딸
양아버지미즈노 다다치카, 미즈노 다다미쓰
형제자매다다나오, 다다미쓰, 다다유키, 미즈노 시게토미
배우자마키노 야스시게의 딸
자녀다다테루
경력
이전 직책미즈노 다다미쓰
다음 직책미즈노 다다테루
직책미카와 오카자키번 번주 (미즈노 가)
재임 기간1699년 ~ 1730년
대수4대
이전 직책마쓰다이라 노부쓰네
다음 직책마쓰다이라 다다치카
직책교토 쇼시다이
임기1714년 ~ 1717년
대수14대

2. 생애

1669년 6월 7일 오전 6시경, 미즈노 다다하루의 넷째 아들로 에도 저택에서 태어났다. 1674년 미즈노 다다치카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이었다. 1697년 오쓰카반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니코 메츠케와 니코 후세 부교가 되었다. 1699년에는 친형 미즈노 다다미츠의 양자가 되었고, 다다미츠 사후 가독을 상속받았다.

항목내용
출생1669년 6월 7일, 미즈노 다다하루의 넷째 아들로 에도 저택 출생
가독 상속1674년 미즈노 다다치카의 양자가 됨, 1699년 미즈노 다다미츠의 양자가 되어 가독 상속
초기 관직1697년 오쓰카반 임명, 1698년 니코 메츠케, 니코 후세 부교 임명



이후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 하위 섹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가문 상속과 초기 관직
  • 아코 사건
  • 막부 요직 역임과 교호 개혁

2. 1. 가문 상속과 초기 관직

水野忠之|미즈노 다다유키일본어1669년 6월 7일 오전 6시경에 오카자키 번주 미즈노 다다하루의 넷째 아들로 미즈노 가문의 에도 저택에서 태어났다. 1674년 7월 9일에는 친족인 하타모토 미즈노 다다치카(2300석)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계승했다. 1697년 2월에는 오쓰카반에 임명되어, 푸이(6위에 해당하는 것을 의미) 착용을 허락받았다. 1698년 4월 19일에는 니코 메츠케, 그 후 9월 25일에는 니코 후세 부교가 되었다.

1699년 1월 11일, 친형인 오카자키 번주 미즈노 다다미츠의 양자가 되었다. 다다미츠가 사망한 후인 9월 27일에 가독을 상속하고, 10월 18일에는 종오위하, 다이켄모츠에 서임되었다.

2. 2. 아코 사건

1701년 3월 14일, 하리마국 아코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고케 기라 요시아쓰에게 칼을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아코 번의 철포주 저택으로 가서 소동을 진정시키는 데 힘썼다.[2]

이듬해 12월 15일, 아코 낭사들이 기라 요시아쓰의 목을 베어 막부에 출두한 후, 마 미쓰오키, 오쿠다 유키타카, 야가시라 노리카네, 무라마쓰 타카나오, 마세 마사토시, 카야노 쓰네나리, 요코가와 무네토시, 미무라 가네쓰네, 칸자키 노리야스 9명을 예탁하라는 명령을 받고, 미나토나카 저택에 예탁했다.

세간에서는 “오이시 요시오를 예탁했던 히고 구마모토 번주 호소카와 쓰네토시를 본받아, 낭사들을 칭찬하고 잘 대접했다”고 전해진다.[2] 그러나 쓰네토시가 호소카와 저택에 들어간 후 낭사들 곁으로 곧바로 찾아가 오이시 등과 면담한 것과는 달리, 다다유키는 21일이나 되어서야 낭사들과 면담했다.

또한, 다다유키는 아코 의사들을 사용하지 않는 창고에 들여놓고, 외부에서 문과 창호지를 못으로 고정시켰다. "아홉 명의 무리들을, 마당에 있는 곳에 두고, 대나무 울타리를 둘렀다"라고 되어 있으며, 더욱 이중으로 울타리를 설치하고, 번사들에게 주야를 가리지 않고 창고 안팎을 순찰하게 했다. "날씨가 추워 화로를 내놓지 않았다"는 기록과, 이불을 늘려 달라는 요구에도 "침구를 늘릴 수는 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고 처음 그대로 두었다"라며 냉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미즈노가 예탁 기록』).[3]

2월 4일, 막부의 명령에 따라 메쓰케 구루 마사키요와 시쓰반 아카이 도키유키의 입회하에 아홉 명의 낭사들을 할복시켰다.

그 후 미즈노가에서는 불행이 계속되어, 다다토시에서 다다토모 시대에는 선조 대대로 이어온 300년 동안의 고향인 미카와에서 쫓겨났다. 미즈노 소동에 대한 처벌과 전봉, 니지노 마쓰바라 일치 등에 의한 혼란과 번주 감금, 낭인과 서민에 의한 번저 습격, 그리고 그에 따른 저택 이전[4]으로 인해 다다유키 시대의 유적(낭사들이 할복한 다다미 두 장, 공양탑 등)[5]이 소실되었고,[6] 현재는 새로운 미즈노가 저택 터에 돌등롱("내리는 돌이야 기와가 흩어지는 미즈노의 집"이라는 구절이 있으며, 전 저택이 습격당한 후에 세워진 것), 2개 국어 안내판, 유래가 불분명한 둥근 돌과 나무 벤치가 남아 있다.

2. 3. 막부 요직 역임과 교호 개혁

미즈노 다다유키는 막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1705년에는 奏者番에 임명되었고, 1711년에는 若年寄에 올랐다. 1714년에는 京都所司代에 취임하면서 종사위하 시종 와이젠슈(和泉守)로 승진했다.[4]

1717년, 老中이 되어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교호의 개혁을 보좌했다. 1722년에는 재정 담당인 勝手掛老中에 임명되어, 1723년에는 신전 개발 촉진을 위해 신전 십분의 일의 법을 제정했다. 1725년에는 영지가 1만 석 증가했고, 1728년에는 막부 직할령의 연공을 사공육민(四公六民)에서 오공오민(五公五民)으로 인상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막부 재정은 개선되었지만, 쌀값 폭락과 세금 부담 증가로 백성들의 불만을 사 비판을 받았다.[4]

당시 유행했던 낙서에는 "무리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것, 술 취한 채로 일하는 것과 미즈노 와이젠슈(水野和泉守)"라는 내용이 있을 정도였다.[4]

1730년, 로주직에서 물러나 차남 미즈노 다다테루(水野忠輝)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4]

미즈노 켄모츠 저택 터


미즈노 켄모츠 저택 터 설명판

3. 등장 작품

작품명방영년도배우비고
수도황문 제3부1971년다카노 신지역할명: 미즈노 켄모츠[1]
오오카 에치젠 제3부1972년시미즈 겐[2]
오오카 에치젠 제4부1974년칸야마 시게루[3]
수도황문 제8부1977년미네 유우스케[4]
폭주하는 장군1978년미조타 시게루[5]
폭주하는 장군 III1988년하야카와 유조[6]
오오카 에치젠 제10부1988년스즈키 미즈호[7]
오오카 에치젠 제11부-제13부1990년-1993년코우다 소우마루[8]
폭주하는 장군 V1993년오오데 슌
8대 장군 요시무네1995년이시다테 테츠오원래 타카하시 에츠시가 예정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이시다테가 연기. 타카하시는 다음 해 사망.
오오카 에치젠 제14부1996년다카노 신지
오오카 에치젠2013년시부야 테츠페이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 1615-1867.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3
[2] 문서 당시의 수노가의 후우를 읊는 교가 「호소가와의 물의(수노) 흐름은 맑으나 다만 대해(모리 코우카이모리)의 오키(마츠다이라 오키모리)조 흐리다」가 남는다.
[3] 간행물 충신장 제1권 아카호시 발행
[4] 문서 아카호 낭시 칠복 당시의 미즈노 저택은, 현재의 「미즈노 칸모츠 저택 흔적」보다 북쪽으로 50미터 정도 떨어진 장소에 있었다. 도쿄도 교육위원회
[5] 문서 久松松平家は浪士を罪人として扱い(『波賀清太夫覚書』では「警備には鎖を着込み具足も用意、沙汰がある前から自身を主税の介錯人に定む」)、切腹でも失礼(主税が腹に当てる以前に斬首)、毛利家は部屋をくぎ付けした以外に、自害や反乱を警戒し火気(火鉢・煙草・風呂)厳禁とも伝わる。(『府中侯留書』)
[6] 문서 수노가 문건
[7] 문서 깃본가
[8] 문서 오카자키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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