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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쿠시게도노 (사이온지 킨아키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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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쿠시게도노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 초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사이온지 킨아키의 딸이다. 고다이고 천황의 중궁인 사이온지 기시를 섬기며 궁중 생활을 시작했으며, '미쿠시게도노벳토'라는 중책을 맡아 천황을 보좌했다.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 다카요시 친왕과 결혼했으나, 겐코의 난으로 인해 다카요시 친왕이 유배되기 전 사망했다. 그녀의 삶은 《태평기》와 《신곡》 등에서 묘사되었으며, 특히 《태평기》에서는 다카요시 친왕과의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가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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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쿠시게도노 (사이온지 킨아키의 딸)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미쿠시게도노
원어이름御匣殿 (みくしげどの)
가문후지와라 북가 칸인류 사이온지가
아버지사이온지 킨아키
배우자타카요시 친왕 (고다이고 천황의 1황자)
자녀아들 (모리나가 친왕?)
직책중궁 미쿠시게도노 (고다이고 천황 중궁 사이온지 키시의 최고 간부 중 한 명)
출생일미상 (1300년대 초반 경?)
사망일겐코 원년/겐토쿠 3년 (1331년) 이전
매장지미상 (전승으로는 교토시 사쿄구 타카요시 친왕묘)
미쿠시게도노
그림책 『신곡』 (에도 시대 전기)에서의 미쿠시게도노. 메이세이대학교 소장.

2. 생애

가마쿠라 시대 말기, 우다이진 사이온지 킨아키의 딸로 태어났다. 숙모인 사이온지 기시고다이고 천황의 중궁이 되자, 그녀를 섬기는 뇨보(상급 여관)로서 미쿠시게도노라는 중책을 맡았다. 이는 중궁의 측근 중에서도 핵심적인 위치였다.

이후 고다이고 천황의 첫째 황자인 다카요시 친왕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아들을 낳았다. 다카요시 친왕은 용모가 뛰어나고 와카에도 재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미쿠시게도노가 정비였는지 측실이었는지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두 사람 사이의 아들은 겐코의 난(1331년-1333년) 발발 이전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마스카가미』에 남아 있으며, 이는 사료로서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겐코의 난으로 다카요시 친왕이 몰락한 후, 미쿠시게도노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녀의 아들이 훗날 남조의 황족 모리나가 친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후대에 전해지기도 한다[4].

미쿠시게도노의 사망 시기와 장소는 불분명하다. 『태평기』의 전설에 따라 교토시 사쿄구의 젠린지(에이칸도) 옆에 있는 다카요시 친왕의 무덤에 함께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2. 1. 출생과 배경

그림책 『신곡』(에도 시대 전기)에서 미쿠시게도노. 메이세이 대학 소장.


가마쿠라 시대 말기, 우다이진 사이온지 킨아키의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존비분맥』). 훗날 고다이고 천황의 중궁이 되는 사이온지 기시는 그녀의 숙모에 해당한다.

겐오 원년 8월 7일(1319년 9월 21일), 숙모인 기시가 중궁으로 책립되면서[3], 미쿠시게도노 역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중궁을 섬기는 미쿠시게도노 직책에 임명되었다(『존비분맥』·『마스카가미』「무라 시구레」). 미쿠시게도노는 중궁의 살림 중 재봉 등을 담당하는 부서의 책임자를 의미한다.

당시 중궁을 섬기는 상급 여관인 뇨보 중에서도 중궁 선지, 중궁 미쿠시게도노, 중궁 나이시는 최고 간부로 여겨지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선지가 뇨보의 대표 역할을 했다면, 미쿠시게도노는 실무를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 직책 중 선지가 가장 높고 미쿠시게도노가 다음이었지만, 11세기 후반에는 미쿠시게도노의 지위가 더 높았다는 설도 있을 정도로, 그녀는 중궁 기시의 핵심 측근 중 한 명이었다. 당시 함께 일했던 최고 간부로는 중궁 선지 니조 후지코(니조파의 유력 가인으로 가이라 친왕의 어머니)와 중궁 나이시 아노 렌시(역시 가인으로 고무라카미 천황 등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림책 태평기』 검권(메이지 16년(1883년))에서 다카요시 친왕. 고바야시 세이코 그림.


이후 고다이고 천황의 첫째 황자인 다카요시 친왕과 인연을 맺게 된다. 다카요시 친왕은 궁중 여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될 정도의 뛰어난 외모를 가졌으며(『마스카가미』 "봄의 이별" "구메의 사라산"), 그의 부모인 니조 타메코와 고다이고 천황 모두 니조파를 대표하는 가인이었던 만큼 와카에도 재능이 있었다. 두 사람이 언제 만나 교제를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군기물 『태평기』의 전설에 따르면, 차기 황태자 경쟁에서 고곤 천황에게 밀려 실의에 빠진 다카요시에게 미쿠시게도노가 반했다고 전해지는데[5], 이를 따른다면 만남은 가랴쿠 원년(1326년) 이후의 일로 추정된다.

미쿠시게도노가 다카요시 친왕보다 다소 연상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카요시 친왕은 도쿠지 연간(1306년-1308년) 출생으로 추정되는데, 동료인 니조 후지코는 1300년 또는 그 이전, 아노 렌시는 쇼안 3년(1301년) 출생이다. 만약 미쿠시게도노가 아노 렌시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면 다카요시 친왕보다 5살 이상 많게 된다. 하지만 유력 공가인 사이온지 가문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중궁 뇨보의 간부로 발탁되었을 수도 있으며, 이 경우 다카요시 친왕과 나이가 비슷했을 가능성도 있다.

2. 2. 궁중 생활



겐오 원년 음력 8월 7일(1319년 9월 21일), 고다이고 천황의 정비인 사이온지 기시가 중궁에 책립되었다[3]. 이에 따라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미쿠시게도노는 기시를 섬겨 중궁의 미쿠시게도노 직책에 임명되었다(『존비분맥』·『마스카가미』「무라 시구레」). 미쿠시게도노는 재봉 등을 담당하는 부서와 그 장관(벳토)을 의미하는 직책이다.

중궁을 섬기는 상급 여관인 뇨보 중에서도, 중궁 선지, 중궁 미쿠시게도노, 중궁 나이시는 특히 최고 간부로 여겨지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선지가 '궁의 뇨보'를 대표하는 얼굴 격이라면, 미쿠시게도노는 실무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세 직책 중 서열은 선지가 가장 높고 미쿠시게도노가 다음이었지만, 11세기 후반에는 중궁 미쿠시게도노의 지위가 더 높았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미쿠시게도노는 중궁 기시의 측근 중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동료 최고 간부로는 중궁 선지에 니조 후지코(가이라 친왕의 어머니), 중궁 나이시에 아노 렌시(고무라카미 천황 등의 어머니)가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니조파의 유력 가인이었다.

이후 미쿠시게도노는 고다이고 천황의 첫째 황자인 다카요시 친왕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다카요시 친왕은 궁중 여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될 정도의 미남이었으며(『마스카가미』 "봄의 이별", "구메의 사라산"), 와카에도 재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의 만남과 교제가 시작된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나, 군기물 『태평기』의 기록에 따르면, 차기 황태자 경쟁에서 패배하여 실의에 빠진 다카요시 친왕에게 미쿠시게도노가 연정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5].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다카요시 친왕이 료닌 친왕(고곤 천황)에게 패배한 가랴쿠 원년(1326년) 혹은 그 이후의 일로 추정된다("서장절" 쓰루미 대학 도서관 소장).

미쿠시게도노가 다카요시 친왕보다 약간 연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카요시 친왕은 도쿠지 연간(1306년-1308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미쿠시게도노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동료인 니조 후지코가 1300년 또는 그 이전에 태어났고, 아노 렌시가 쇼안 3년(1301년)에 태어난 점을 고려하면, 만약 미쿠시게도노가 렌시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면 다카요시 친왕보다 5살 이상 연상이다. 하지만 유력 공가인 사이온지 가문 출신으로서 렌시보다 젊은 나이에 중궁 뇨보 간부로 발탁되었을 수도 있으며, 이 경우 다카요시 친왕과 나이가 비슷했을 가능성도 있다.

미쿠시게도노가 다카요시 친왕의 정비였는지 측실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존비분맥』에는 '첩'(측실)으로 기록된 사본과 단순히 '아내'로 기록된 사본(내각문고본)이 모두 존재한다. 『마스카가미』("무라 시구레")에서는 다카요시 친왕에게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언급하지만(다른 한 명은 니조 타메요의 막내딸로 다카요시의 친숙모), 어느 쪽이 정실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미쿠시게도노는 다카요시 친왕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고다이고 천황가마쿠라 막부 사이의 전쟁인 겐코의 난(1331년-1333년)이 발발하여 다카요시 친왕이 로쿠하라 탄다이에 구금되기 이전에 사망하였다(『마스카가미』「무라 시구레」). 이는 『태평기』의 전설과는 다른 내용이지만, 사료로서는 『마스카가미』의 기록이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겐코의 난이 시작되고 가사기 산의 싸움에서 고다이고 천황과 다카요시 친왕이 패배하여 사로잡히자, 고다이고의 10세 이상 황자는 교토에서 추방되었고, 황녀와 10세 이하의 황자는 교토에 남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적절한 인물에게 맡겨지게 되었다(『하나조노 천황 신기』 겐코 2년 4월 10조). 이때 다카요시 친왕의 아들 역시 연좌되어 다른 황족들과 함께 적절한 인물에게 맡겨지게 되었다(동서 동조).

2. 3. 다카요시 친왕과의 만남과 사랑



미쿠시게도노는 고다이고 천황의 첫째 황자인 다카요시 친왕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3]. 다카요시 친왕은 궁정 여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될 정도로 용모가 뛰어난 미남이었으며(『마스카가미』 "봄의 이별", "구메의 사라산"), 부모의 영향을 받아 와카(일본 전통 시가)에도 재능을 보였다.

두 사람이 언제 어떻게 만나 교제를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군기물 『태평기』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차기 황태자 자리를 둘러싼 정쟁에서 패배하여 실의에 빠진 다카요시 친왕에게 미쿠시게도노가 연정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5].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만남은 다카요시 친왕이 료닌 친왕(훗날의 고곤 천황)에게 황태자 경쟁에서 밀려난 가랴쿠 원년(1326년) 이후의 일로 추정된다.

미쿠시게도노가 다카요시 친왕보다 나이가 많았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카요시 친왕은 도쿠지 연간(1306년-1308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미쿠시게도노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동료였던 아노 렌시1301년생인 점을 감안하면 다카요시 친왕보다 5살 이상 연상일 수 있다. 그러나 유력 가문 출신으로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중궁의 고위직에 임명되었을 수도 있으므로, 다카요시 친왕과 나이가 비슷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쿠시게도노가 다카요시 친왕의 정비(정식 부인)였는지 측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존비분맥』에는 '첩'(측실)으로 기록된 사본과 단순히 '아내'로 기록된 사본(내각문고본)이 모두 존재한다. 또한 『마스카가미』("무라 시구레")에서는 다카요시 친왕에게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언급하는데(다른 한 명은 니조 타메요의 막내딸로, 다카요시 친왕의 친숙모에 해당한다), 어느 쪽이 정비였는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이 태어났으나, 이 아들은 겐코의 난(1331년-1333년)이 발발하여 다카요시 친왕이 로쿠하라 탄다이에 의해 교토에서 구금되기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마스카가미』 "무라 시구레").

비록 전설이지만 『태평기』에는 미쿠시게도노와 다카요시 친왕이 죽어서 같은 무덤에 묻히기로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에 기반한다면, 교토시 사쿄구에 위치한 젠린지(에이칸도) 옆의 다카요시 친왕 무덤이 두 사람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었을 것이다.

2. 4. 겐코의 난과 비극적인 결말

다카요시 친왕과의 사이에 아들을 두었으나, 고다이고 천황가마쿠라 막부 사이의 전투인 겐코의 난(1331년 - 1333년) 중 다카요시 친왕이 로쿠하라 탄다이에 구금되기 이전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마스카가미』「무라 시구레」편에 있다. 이는 『태평기』의 전설적인 내용 후반부와는 모순되지만, 사료로서는 『마스카가미』의 기록이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겐코의 난이 시작되고 가사기 산의 싸움에서 고다이고 천황과 다카요시 친왕이 패배하여 사로잡히자, 고다이고 천황의 10세 이상 황자는 교토에서 추방되었고, 황녀와 10세 이하의 황자는 교토에 남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적절한 인물에게 맡겨지게 되었다(『하나조노 천황 신기』 겐코 2년 4월 10일조). 이때 다카요시 친왕의 아들 역시 연좌되어 다른 이에게 맡겨지게 되었다(같은 기록).

미쿠시게도노와 다카요시 친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역사서로서의 신뢰도는 낮지만, 에도 시대에 성립된 『난포 키덴』, 『난초 편년기략』, 『황친계』 등의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 다카요시 친왕이 가네가사키 전투에서 사망한 엔겐 2년/겐무 4년(1337년)에 할아버지인 고다이고 천황의 양자로 입적되어 친왕 선하를 받고 남조의 황족 "모리나가 친왕"이 되었으며, 고와 3년/에이토쿠 3년(1383년)에 출가했다고 전해진다[4]

미쿠시게도노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태평기』의 전설에 따르면, 다카요시 친왕과 같은 무덤에 묻히기로 맹세했다고 하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교토시 사쿄구에 위치한 젠린지(에이칸도) 옆의 다카요시 친왕 무덤이 그녀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2. 5. 사망 후

미쿠시게도노의 매장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군기물 『태평기』의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다카요시 친왕과 같은 무덤에 묻히기로 맹세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만약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무덤은 교토시 사쿄구에 위치한 젠린지(에이칸도) 옆에 있는 다카요시 친왕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3. 《태평기》 속 미쿠시게도노

미쿠시게도노는 군기물어인 『태평기』에서 다카요시 친왕(《태평기》에서는 주로 소량친왕(尊良親王)으로 등장)과의 애절한 연애담의 주인공으로 그려진다.[5] 이 이야기는 『태평기』 유포본 권18 '춘궁환어의 일일궁 어식소의 일'에 실려 있으며[5], 초기 사본들에서는 독립된 이야기로서 권의 시작을 장식하기도 했다.

『태평기』 속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미쿠시게도노의 생존 시기인데, 역사적으로는 겐코의 난(1331년-1333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나, 『태평기』에서는 난 이후에도 살아남아 도사국(고치현)으로 유배된 다카요시 친왕을 찾아가는 등 극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야기 속에서 미쿠시게도노는 온갖 고난을 겪으며 친왕을 만나지만, 결국 겐무의 난 중 가네가사키 전투에서 다카요시 친왕이 전사하자 깊은 슬픔 속에 그의 뒤를 따라 사망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일본사 연구자 모리 시게아키는 이 이야기가 사료로 뒷받침되지는 않지만, 실제 역사 속 미쿠시게도노와 다카요시 친왕이 서로 깊이 사랑했던 부부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러한 사실이 『태평기』의 이야기에 반영되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이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후대에 영향을 미쳐, 다카요시 친왕 등을 모시는 가네가사키 궁(후쿠이현 쓰루가시)은 '사랑의 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가네가사키 사랑 이야기』가 출판되기도 했다.[6] 또한 가네가사키 궁에서는 다카요시 친왕을 부부 원만, 인연 맺기 등을 관장하는 신으로 모시고 있다.[7]

3. 1. 《태평기》 줄거리

미쿠시게도노와 손량 친왕은 군기물어인 『태평기』 유포본 권18 '춘궁환어의 일일궁 어식소의 일'의 연애담 주인공으로 묘사된다.[5] 유포본 계통에서는 '춘궁환어의 일'과 '일궁 어식소의 일'을 묶어 권18의 중간에 위치하지만[5], 그 이전의 사본에서는 '일궁 어식소의 일'의 연애담이 독립된 경우가 많으며, 노지리본, 초순본, 게이초 7년본에서는 권18 하의 권두를, 히오키본, 고세이본, 교토대본에서는 권19의 권두를 장식하는 이야기였다. 다음은 덴쇼본의 줄거리이다.

그림 맞추기에서, 『겐지 이야기』 그림 속 미녀에게 첫눈에 반하는 손량 친왕. 그림책 『신곡』(에도 시대 전기)에서. 메이세이 대학 소장.


고다이고 천황의 첫째 아들인 손량 친왕은 학문과 용모가 뛰어났으며, 곧 황태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호조 도쿠소케의 호조 다카토키의 방해로 인해 다음 황태자는 고니조 천황의 첫째 아들이자 손량의 사촌인 호량 친왕으로 결정되었다.

정쟁에서 패배하여 낙담한 손량은 모든 것이 시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시가와 관현에 빠져 지냈다. 손량이라면 황녀의 딸이든, 섭관가의 딸이든 어떤 여성이든 원하는 대로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마음에 드는 여성이 없었는지 독신으로 지냈다.

어느 날, 손량은 관백 좌대신가(다카쓰카사 후유노리, 다카쓰카사 후유히라)의 그림 맞추기(그림을 가져와 우열을 겨루는 모임)에 참가했다. 도인 좌대장(도인 킨카타로 추정)은 『겐지 이야기』 「하시히메」의 장면 그림을 가져왔다. 그것은 밤에 기둥 뒤에서 비파를 연주하는 우지노 오키미와 우지노 나카키미가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갑자기 밝게 비치자, 연주를 멈추고 기둥 뒤에서 얼굴을 내미는 장면이었다. 그 공주의 얼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럽고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기에, 손량은 그 자리에서 반해 버렸다.

손량은 도인 좌대장으로부터 그림을 받아 매일매일 바라보았지만, 그림 속 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어주지도 않으니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림 속 미인을 포기하려고 해도 포기할 수 없었고, 이전보다 더욱 현실의 여성에게 흥미가 없어졌다.

그림 속 미녀와 똑같이 생긴 미쿠시게도노를 보고 반한 손량 친왕. 그림책 『신곡』(에도 시대 전기)에서. 메이세이 대학 소장.


마음이 울적해진 손량 친왕은 기분 전환을 위해 가모미오야 신사(시모가모 신사)의 다다스노 숲에 참배하러 갔지만, 그래도 그림 속 미녀에 대한 생각은 떨쳐낼 수 없어 눈물로 소매가 젖을 정도였다. 돌아오는 길, 이치조 대로를 지나 서쪽으로 갔을 때, 쓸쓸한 저택에서 비파의 「세이카이하」의 기품 있는 연주가 들려왔다.

손량이 수레를 멈추고 엿보니, 17세에서 18세 정도로 보이는 우아한 몸가짐의 미녀가 가을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시름에 잠긴 듯이 비파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림 속 미녀와 똑같고, 아니 그 이상으로 기품 있는 아름다움에 손량은 정신이 멍해져, 무심코 수레에서 내려 저택에 다가갔다. 그러자, 누군가에게 엿보인 것을 알아차린 여성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손량은 연심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고뇌했다. 거기에 손량이 다다스노 숲에 참배할 때 동행했던 숙부이자 가인인 니조 타메후유는 손량의 마음을 짐작하고, 눈치를 채고 미녀의 신원을 조사해 왔다. 그 미녀는 사이온지 킨아키의 딸이며, 중궁사이온지 키시의 미쿠시게도노를 맡고 있었으나, 토쿠다이지 사다이쇼(토쿠다이지 킨키요로 추정)와 이미 약혼한 상태였다. 타메후유는 조카 손량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해 묘책을 내어, 미쿠시게도노의 아버지 킨아키에게 부탁하여 킨아키의 저택에서 가회(歌会, 와카 모임)를 열게 했다. 일동의 취기가 돌 무렵, 손량은 타메후유의 도움으로 미쿠시게도노의 방에 몰래 들어갔다. 손량은 사랑의 고민을 고백했지만, 미쿠시게도노는 우아하게 침묵하며 거절했고, 그대로 아무 일 없이 밤이 지났다.

궁궐로 돌아간 손량은 자주 미쿠시게도노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수가 천 통에 달하자 미쿠시게도노도 점차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마침, 유학자인 후지와라 히데후사에 의한, 당의 정치학서 『정관정요』의 강의가 있었다. 내용인즉슨, 중국의 명군인 당나라 태종이 어떤 여성을 황후로 맞이하려 했을 때, 현신 위징이 그 여성에게 이미 약혼자가 있음을 지적하며 간언하자 태종이 이를 따랐다는 이야기였다. 이를 들은 손량은 자신의 부족함을 깊이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미쿠시게도노에게 연애편지를 쓰는 것을 그만두고 홀로 더욱 고뇌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토쿠다이지 사다이쇼 측에서 “주상의 첫째 아들이 그토록 마음 아파하시는데, 어찌 연정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라며 미쿠시게도노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다른 여성을 만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공인된 관계가 된 미쿠시게도노와 손량은 사귀기 시작하자마자 마음이 잘 맞아 다정한 부부가 되었고, 훗날 죽어서는 같은 무덤에 묻히기로 맹세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3. 2. 다카요시 친왕, 그림 속 미녀에게 반하다



고다이고 천황의 첫째 아들인 소량친왕은 학문과 용모가 뛰어났으며, 장차 황태자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호조 도쿠소케의 호조 다카토키가 개입하면서 다음 황태자는 고니조 천황의 첫째 아들이자 소량친왕의 사촌인 호량친왕으로 결정되었다.

정쟁에서 패배하여 실의에 빠진 소량친왕은 모든 것에 의욕을 잃고 시가와 관현(管絃)에 몰두하며 지냈다. 그는 높은 신분 덕분에 어떤 여성이든 만날 수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이를 찾지 못해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량친왕은 관백 좌대신가(좌대신 다카쓰카사 후유노리・관백 다카쓰카사 후유히라)에서 열린 그림 맞추기(絵合|에아와세일본어, 그림의 우열을 겨루는 모임)에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도인 좌대장(도인 킨카타)이 『겐지 이야기』 「하시히메」 편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을 내놓았다. 그림에는 밤중 기둥 뒤에서 비파를 연주하던 우지노 오키미와 우지노 나카키미 자매가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밝게 비추자 연주를 멈추고 얼굴을 내미는 순간이 담겨 있었다. 그림 속 공주의 모습이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어, 소량친왕은 그 자리에서 그림 속 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소량친왕은 도인 좌대장에게서 그 그림을 얻어와 매일 바라보았지만, 그림 속 미녀는 말이 없고 웃어주지도 않아 그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림 속 여인을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현실의 여성에게는 더욱 흥미를 잃게 되었다.

3. 3. 미쿠시게도노와의 만남

미쿠시게도노와 소량 친왕은 군기물어인 『태평기』 유포본 권18 '춘궁환어의 일부일궁 어식소의 일'에 등장하는 연애담의 주인공으로 묘사된다.[5]

마음이 울적했던 소량 친왕은 기분 전환을 위해 가모미오야 신사(시모가모 신사)의 다다스노 숲에 참배하러 갔다.[5] 돌아오는 길에 이치조 대로 서쪽의 한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비파 연주 소리를 듣게 되었다. 연주된 곡은 「세이카이하」였다.[5]

소량 친왕이 수레를 멈추고 엿보니, 17세에서 18세 정도로 보이는 우아한 미녀가 가을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비파를 연주하고 있었다.[5] 이 여인이 바로 미쿠시게도노였다. 소량 친왕은 이전에 본 그림 속 미녀와 똑같거나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모습에 첫눈에 반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저택으로 다가갔다.[5] 인기척을 느낀 미쿠시게도노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5]

3. 4. 사랑의 결실

소량은 연심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고뇌했다. 소량이 다다스노 숲에 참배할 때 동행했던 숙부이자 가인인 니조 타메후유는 소량의 마음을 알아채고 미녀의 신원을 조사했다. 그녀는 사이온지 킨아키의 딸로, 중궁 사이온지 키시의 미쿠시게도노를 맡고 있었으나, 이미 토쿠다이지 사다이쇼(토쿠다이지 킨키요로 추정)와 약혼한 상태였다.

타메후유는 조카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해, 미쿠시게도노의 아버지 킨아키에게 부탁하여 그의 저택에서 가회(歌会, 와카 모임)를 열었다. 모두 취기가 돌자 소량은 타메후유의 도움으로 미쿠시게도노의 방에 몰래 들어갔다. 소량이 사랑의 고민을 고백했지만, 미쿠시게도노는 침묵으로 거절했고, 그 밤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궁으로 돌아간 소량은 미쿠시게도노에게 천 통에 달하는 편지를 보냈고, 이에 미쿠시게도노도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침 유학자 후지와라 히데후사가 당나라 정치 서적인 『정관정요』 강의를 열었다. 강의 내용 중에는, 당나라 태종이 약혼자가 있는 여성을 황후로 삼으려 하자 신하 위징이 간언하여 이를 따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를 들은 소량은 자신의 행동을 깊이 부끄러워했다. 그는 미쿠시게도노에게 편지 쓰는 것을 멈추고 홀로 괴로워했다.

그러자 약혼자였던 토쿠다이지 사다이쇼가 "주상의 첫째 아들이 그토록 마음 아파하시는데 어찌 연정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라며 약혼을 파기하고 다른 여성을 만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공인된 관계가 되었고, 서로 마음이 통해 다정한 부부가 되어 죽어서도 같은 무덤에 묻히기로 맹세했다고 한다.

3. 5. 그 후

미쿠시게도노와 다카요시 친왕은 군기물어인 『태평기』 유포본 권18 '춘궁환어의 일부 일궁 어식소의 일'에서 연애담의 주인공으로 묘사된다.[5] 역사적으로는 가마쿠라 막부와의 싸움인 겐코의 난(1331년-1333년) 이전에 미쿠시게도노가 사망했지만, 『태평기』에서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더 길게 이어진다.

도사로 유배된 다카요시 친왕을 쫓아 대모험에 나서 해적과 맞서는 미쿠시게도노. 그림책 『신곡』(에도 시대 전기)에서. 묘조 대학 소장.


태평기』에 따르면, 겐코의 난으로 다카요시 친왕이 도사국(고치현)으로 유배되자, 미쿠시게도노는 그를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건 긴 여정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미쿠시게도노를 해적으로부터 지키려다 가신 하타노 다케후미가 목숨을 잃는 충의로운 이야기도 그려진다. 이후 겐무 신정이 시작되면서 부부는 감격적으로 재회하는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싸움인 겐무의 난에서 다카요시 친왕은 가네가사키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하고, 그의 목은 교토로 보내졌다. 깊은 슬픔에 잠긴 미쿠시게도노는 급격히 쇠약해져 다카요시 친왕의 49재가 지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태평기』는 전한다.

일본사 연구자 모리 시게아키는 『태평기』의 연애 전설이 사료에서 확인되지는 않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도 미쿠시게도노와 다카요시 친왕은 서로 사랑하는 다정한 부부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러한 기억이 『태평기』 이야기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다카요시 친왕과 그의 이복동생 쓰네나가 친왕을 주신으로 모시는 가네가사키 궁(후쿠이현 쓰루가시)은 '사랑의 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미쿠시게도노와 다카요시 친왕의 이야기는 '가네가사키 사랑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쓰루가시 관광 협회에서 출판되기도 했다.[6] 가네가사키 궁의 안내기에 따르면, 미쿠시게도노와 사이가 좋았던 다카요시 친왕은 부부 원만, 가내 안전, 인연 맺기, 사업 번영 등을 관장하는 '화목한 신'으로 숭배받고 있다고 한다.[7]

3. 6. 역사적 평가

일본사 연구자 모리 시게아키는 『태평기』에 묘사된 미쿠시게도노와 다카요시 친왕의 연애 전설이 사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역사적으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다정한 부부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러한 실제 관계가 『태평기』 이야기에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태평기』에서는 역사적 사실과 달리, 겐코의 난 이후에도 미쿠시게도노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도사국(고치현)으로 유배된 다카요시 친왕을 만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먼 길을 떠나는 모험담, 그녀를 해적으로부터 지키려다 목숨을 잃는 가신 하타노 다케후미의 충성, 겐무 신정 이후 부부가 재회하는 기쁨 등이 그려진다. 이후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겐무의 난 중 가네가사키 전투에서 다카요시 친왕이 패배하고 사망하자, 미쿠시게도노 역시 깊은 슬픔에 잠겨 남편의 49재가 지나기 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묘사된다.

다카요시 친왕과 그의 이복동생 쓰네나가 친왕을 주신으로 모시는 가네가사키 궁(후쿠이현 쓰루가시)은 '사랑의 궁'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이곳에서는 미쿠시게도노와 다카요시 친왕의 연애 전설을 바탕으로 한 『가네가사키 사랑 이야기』가 쓰루가시 관광 협회에 의해 출판되기도 했다.[6] 또한, 가네가사키 궁의 안내기에 따르면, 미쿠시게도노와 사이가 좋았던 다카요시 친왕은 부부 화합, 가정 안전, 인연 맺기, 사업 번영 등을 관장하는 '화목한 신'으로 숭배받고 있다고 한다.[7]

4. 《신곡》 속 미쿠시게도노

군기물어 『태평기』 등을 통해 알려진 미쿠시게도노와 다카요시 친왕의 이야기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유행한 고와카마이의 소재가 되었다. 이 중 『신곡』(新曲)이라는 작품은 두 사람의 연애담을 중심으로 다루었으며, 에도 시대에는 이를 바탕으로 한 그림책이나 부채 등이 제작되기도 했다.

4. 1. 《신곡》의 내용

사시로 미쿠시게도노의 요절과 숭량친왕의 죽음으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부부지만, 『신곡』에서는 소의 수레를 넘어 재회하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그림책 『신곡』(에도 시대 전기)에서. 메이세이 대학 소장.


군기물어 『태평기』로 유명해진 미쿠시게도노와 숭량친왕의 연애 이야기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유행한 고와카마이의 소재로도 채택되어, 『신곡』이라는 작품이 만들어졌다. 『신곡』이라는 이름은 가장 나중에 추가된 작품이자 고와카마이 중에서 가장 마지막 시대를 다룬 작품이라는 점에서 유래했다. 역사적 사실이나 『태평기』에서는 숭량친왕이 무장으로서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지만, 『신곡』에서는 숭량친왕의 전투 장면 묘사가 생략되고 순수한 왕조풍 연애 전설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러한 각색이 오히려 문제가 되어, 무가 문화인 고와카마이 안에서는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다.

에도 시대 전기에는 『신곡』의 내용을 담은 그림책도 제작되었다. 2017년 기준으로 메이세이 대학이 소장한 나라 그림책 『신곡』 등 5점이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에도 시대 전기 가노파 화가로 추정되는 인물이 『신곡』을 소재로 한 부채를 제작하기도 했다.

참조

[1] 논문 「とはずがたり」二条の教養 : 引歌をめぐって http://repo.komazawa[...] 駒沢大学国文学会
[2] 웹사이트 A LIFE OF 後醍醐天皇: 3. 皇太子時代 http://kyuukyuu1334.[...] 2003-05-03
[3] 문서 大日本史料』6編1冊136–137頁 https://clioimg.hi.u[...]
[4] 문서 史料綜覧』6編907冊142頁 https://clioimg.hi.u[...]
[5] 서적
[6] 웹사이트 金崎宮 -かねがさきぐう- 「歴史と人物」尊良親王と金ヶ崎 http://kanegasakigu.[...] 金崎宮
[7] 웹사이트 金崎宮は「恋の宮」♪ 難関突破も願えるパワースポット?そのご利益とは【敦賀市 https://dearfukui.jp[...] 2019-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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