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공방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바르셀로나 공방전은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일어난 전투로, 부르봉 왕조의 펠리페 5세에 대항하여 카를 대공을 지지하던 카탈루냐가 1714년 9월 11일 부르봉 군대에 항복하면서 종결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카탈루냐는 자치권을 상실하고 스페인에 완전히 통합되었으며, 카탈루냐의 독자적인 법률과 제도가 폐지되었다. 이 사건은 카탈루냐의 정체성과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매년 9월 11일 카탈루냐 국경일로 기념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바르셀로나 공방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분쟁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날짜 | 1713년 7월 25일 – 1714년 9월 11일 |
장소 |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공국 (스페인) |
결과 | 부르봉 왕가의 승리. 바르셀로나 항복.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파일:Flag of Spain (1701–1760).svg|25px]]부르봉 왕가 스페인 [[파일:Pavillon royal de France.svg|25px]]프랑스 왕국 |
교전국 2 | [[파일:Flag of Spain (1506).svg|25px]]합스부르크 왕가 스페인 [[파일:Flag of Catalonia.svg|25px]]카탈루냐 공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국 1 지휘관 | [[파일:Flag of Spain (1701–1760).svg|25px]]포폴리 공작 [[파일:Pavillon royal de France.svg|25px]]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 |
교전국 2 지휘관 | [[파일:Flag of Catalonia.svg|25px]]안토니 데 비야로엘 [[파일:Flagicon image|Bandera santa eulalia.jpg|size=25x26px|link=Barcelona]]라파엘 카사노바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정규군 40,000명, 대포 80문, 곡사포 20문 |
교전국 2 병력 | 카탈루냐 군 정규군 20,000명, 코로넬라 민병대 4,700명, 포병 약간 |
사상자 규모 | |
교전국 1 사상자 | 사망 또는 부상 10,000명 |
교전국 2 사상자 | 사망 또는 부상 13,000명 |
2. 서막
18세기 초, 자녀가 없던 스페인의 샤를 2세가 1700년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는 그가 선택한 후계자인 부르봉 가문의 펠리페 5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잉글랜드,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대동맹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카를 대공을 스페인의 샤를 3세로 지지하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년)을 일으켰다.[1]
1713년 7월 25일, 레스타이노 칸텔모-스튜어트(Restaino Cantelmo-Stuart), 포폴리 공작(Duke of Popoli)이 지휘하는 부르봉 군대가 바르셀로나를 포위했지만, 포병 부족으로 공격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2] 1714년 4월~5월, 부르봉 군대는 2만 명의 증원군을 지원받았다. 제임스 핏제임스(James FitzJames), 버윅 공작(1st Duke of Berwick)의 지휘하에 공격이 재개되었다. 프랑스산 고성능 대포의 도착으로 부르봉 군대는 바르셀로나 시를 체계적으로 포격하기 시작했는데, 목표는 도시의 방어 시설이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주택과 시민들이었다.[3]
1714년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 대한 대공 지지 군대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2세기에 걸친 카탈루냐의 자치권은 억압되었다. 도시의 수비병들은 9월 11일이면 카탈루냐인들이 모이는 포사르 드 레스 모레스(Fossar de les Moreres)에 매장되었다.[4]
바르셀로나 공방전은 2세기에 걸쳐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억압한 것을 상징한다. 바르셀로나 공방전에서 도시의 수비병들은 포사데레스모레레스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으며, 이곳은 카탈루냐인들이 매년 9월 11일에 모이는 대광장이 되었다.[1]
[1]
문서
Catalonia was fighting unilaterally by decision of its Junta de Braços since 9 July 1713
카탈루냐 공국은 초기에 펠리페 5세와 카탈루냐 의회 간의 오랜 협상 끝에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총독 프란시스코 데 벨라스코의 억압적인 조치와 국왕의 권위주의적인 결정, 그리고 경제 정책과 프랑스 절대주의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카탈루냐는 합스부르크 가의 편으로 돌아섰다.[1]
1705년 8월 22일, 카를 대공의 함대가 바르셀로나 항구에 정박하여 상륙 작전을 펼쳤고, 도시를 포위했다. 이후 이 군대는 몬주익 요새를 점령하여 10월 9일 포격을 가해 도시를 항복시켰다. 카탈루냐 공국과 아라곤, 발렌시아, 마요르카 등 아라곤 왕관의 다른 영토들은 곧 샤를 3세를 새로운 군주로 받아들였다. 샤를은 역사상 마지막 카탈루냐 의회를 소집했다.[1]
3. 전투
1714년 9월 11일 새벽 4시 30분, 부르봉 군대는 공격을 시작하여 승리했다. 8월 30일 도시 진입 시도는 실패했었다. 성벽이 여러 곳에서 무너졌고, 코로넬라(Coronela)(바르셀로나 시민군)의 최고 사령관이자 최고 의원인 라파엘 카사노바(Rafael Casanova)가 전투 중 부상을 입었다. 거리에서의 격렬한 전투는 카탈루냐 군 총사령관 안토니 드 비야로엘(Antoni de Villarroel)의 지휘하에 이어졌으며, 그 역시 부상을 입었다. 마침내 카탈루냐 지도자들은 항복을 결정하고 항복 협상을 시작했다. 필리프 5세가 어떠한 합의 없이 주민들을 처벌하려 했기 때문에 협상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지만, 버윅 공작은 장기간의 투쟁을 우려하여 바르셀로나 시민의 생명을 존중하기로 공식적으로 합의했다.[3]
4. 영향
카탈루냐의 패배는 카탈루냐 공국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독립적인 제도와 법률은 억압되고 카스티야의 것으로 대체되어 절대주의가 수립되었다.[4] 이 사건은 현재 매년 9월 11일 카탈루냐 국경일(카탈루냐어: ''Diada Nacional de Catalunya'')로 기념되고 있다. 1714년 대공파 세력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 대한 항복은 전쟁의 종식일 뿐만 아니라 2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유럽 대륙 여러 군주국의 중앙 집권화 과정의 한 단계이기도 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면서 스페인은 여러 국가로 구성된 복합 군주국에서 중앙 집권적인 왕국으로 발전했다.
도시의 수비대는 현재 포사르 드 레스 모레스(카탈루냐어: 광장)라고 불리는 묘지에 매장되었는데, 카탈루냐인들은 매년 9월 11일, 카탈루냐 국경일(''라 디아다'')에 이곳에 모인다. 옛 시장 건물인 메르카트 델 보른은 1714년 카탈루냐의 패배 이후 철거된 바르셀로나의 라 리베라 지구의 일부였던 고고학적 유적지를 덮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합스부르크파 수비대가 버림받았다는 주장은 전쟁 후 영국 의회에서 로버트 할리에 대한 탄핵 과정에서 그의 반대자들이 제기한 비판 중 하나였다.
5. 카탈루냐 독립 운동과의 연관성
참조
[2]
harvard
[3]
harvard
[4]
서적
Felip V i Catalunya
Barcelona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