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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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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박관준은 여러 명의 동명이인입니다. 다음은 그 목록입니다:
1. 일제강점기 신사 참배 거부 운동가, 장로, 독립운동가 박관준 (朴寬俊, 1875년 4월 13일 ~ 1945년 3월 13일):


  • 평안북도 영변 출생.
  • 1905년 기독교 입교.
  • 의사로 활동하며 제중의원, 십자의원 등을 운영.
  • 개천읍교회 장로.
  •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
  • 조선총독부에 항의 및 건의문 발송.
  • 일본 제국의회에 '국교개종헌의서' 살포.
  • 6년간의 옥고 끝에 사망.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2. 독립운동가 박관준 (朴觀濬, 1873년 ~ 미상):

  • 평안남도 중화군 출생.
  • 1919년 3월 3일 중화군 독립만세시위 참여.
  • 체포되어 4개월간 옥고.
  • 2015년 대통령표창 추서.


각 인물에 대한 추가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신사 참배 거부 운동가 박관준:

  • 초기 생애 및 개종: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재산을 잃고, 아내의 유산, 부모의 별세 등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후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 1905년 "십자가 종교에 들어가라"는 소리를 듣고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2]
  • 의사 활동 및 신앙생활: 1915년 의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의료 활동을 하며 전도에 힘썼습니다. 동네에 소학교와 예배당을 짓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2]
  • 신사참배 반대 투쟁: 1935년 기도 중 "나를 위해 피를 흘릴 자가 누구냐"는 환상을 보고 신사참배 반대 투쟁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총독과 도지사에게 반대 격문을 보내고, 석방 후에도 2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총독에게 충고문을 보냈습니다. 미나미 총독을 직접 찾아가 신사참배 강요 중단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2]
  • 일본에서의 투쟁 및 순교: 1938년 일본 제국의회를 방청하던 중 국교를 기독교로 바꾸고 신사참배를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국교개종헌의서'를 살포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국내로 호송되어 평양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 1945년 3월 1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사흘 만에 사망했습니다.[4]
  • 추모: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추계리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앞에 박관준 장로 순교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5]

2. 독립운동가 박관준:

  • 1919년 3월 3일 중화군에서 열린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습니다.[4]
  • 1919년 6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만국평화회의에서 식민지를 해방하였으니 평등의 권리를 위해 조선 민족인 자로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어느 나라의 민족이 만세를 부를 것인가. 나는 죄가 없다고 믿는다."라며 항의했습니다.
  • 1919년 7월 24일 고등법원은 박관준의 상고를 기각했고, 그는 4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소 후의 생애는 기록이 미비하여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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