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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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콕 왕궁은 1782년 차크리 왕조의 라마 1세가 수도를 방콕으로 옮기면서 건설을 시작한 태국의 왕궁이다. 짜오프라야 강 동쪽에 위치하며, 에메랄드 불상 사원, 프라 마하 몬티엔 건물군, 차크리 마하 프라삿 건물군, 시왈라이 정원 등 다양한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왕실 행사, 국빈 방문, 관광 명소로 사용되며, 1932년 입헌 군주제 전환 이후에는 행정적 기능이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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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1세는 차크리 왕조의 창시자이자 초대 국왕으로, 탁신 왕 휘하의 맹장에서 왕위에 올라 방콕 천도, 버마의 침입 격퇴, 관료 제도 정비, 문학 작품 복원, 왓 프라깨오 건립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방콕 왕궁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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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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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Phra Borom Maha Ratcha Wang |
의미 | 숭고한 대왕궁 |
위치 | 프라나콘구, 방콕, 태국 |
기본 정보 | |
종류 | 역사적 건축물 |
소유주 | 와치랄롱꼰 |
면적 | 218,415.047 m2 (2,351,000 sq ft) |
웹사이트 | 왕궁 공식 웹사이트 |
역사 | |
착공일 | 1782년 5월 6일 |
완공일 | 1925년 |
건축 | |
상태 | 국왕의 사유 재산 |
2. 역사
1782년 붓다 요드파 출라로께 왕(라마 1세)은 딱신 대왕을 숙청하고 차끄리 왕조를 열면서, 시암의 수도를 짜오프라야강 서쪽 톤부리에서 동쪽 방콕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왕은 새로운 수도에 자신의 거주지와 집무실로 사용할 왕궁을 건설하기로 했다. 왕궁이 들어설 자리는 중국인 상인들이 점유하고 있었는데, 왕의 요청으로 이들은 현재의 야오와랏 지역으로 이전했다.[5]
1782년 5월 6일 왕궁 건설이 시작되었다. 초기 왕궁은 여러 개의 목조 건물과 길이 1,900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면적은 218400km2였다. 곧 왕은 왕실 사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에메랄드 부처 사원》을 만들도록 명령했다. 1785년 왕궁이 완공되자 왕은 대관식을 거행했다.[9]
라마 1세는 아유타야의 옛 수도에서 자재를 가져와 왕궁 건설에 사용하도록 했다. 아유타야는 버마와의 전쟁으로 파괴된 상태였는데, 왕은 부하들에게 건물들을 해체하고 벽돌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다만, 사원의 벽돌은 가져오지 못하게 했다. 가져온 벽돌은 바지선을 통해 짜오프라야 강을 따라 운반되어 방콕 성벽과 왕궁 건설에 사용되었다.[13][10]
왕궁의 배치는 아유타야 왕궁을 따랐다.[13][14] 두 왕궁 모두 강과 가까이 있었고, 왕실 배 행렬을 위한 상륙장 위치도 비슷했다. 왕궁 북쪽에는 '퉁 프라 멘'(현재 사남 루앙)이라는 큰 밭이 있었는데, 왕실 의식과 열병식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북쪽 길은 시암 부왕의 거주지인 프런트 팰리스로 이어졌다.[19][15]
왕궁은 외궁, 중궁, 내궁, 에메랄드 불상 사원으로 나뉜다. 외궁은 왕실 사무실과 정부 부처가 있던 곳이고, 중궁에는 왕의 국빈실과 즉위장이 있었다. 내궁은 왕의 첩실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여성만 출입할 수 있었다.[17][18]
푸타로엣라 나팔라이(라마 2세) 통치 기간 동안 왕궁은 남쪽으로 확장되어 면적이 218400m2로 늘어났다. 새로운 성벽, 요새, 문이 건설되었다.[19][20]
몽꿋(라마 4세) 통치 기간에 왕궁은 '프라 보롬마 마하 랏차 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는 1851년 왕의 동생 핑클라오 왕자가 제2왕으로 임명되면서, 왕궁을 제2왕의 궁전과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21]
1920년대에 왕이 사용할 새로운 궁전들이 건설되면서 왕궁의 행정적 기능은 점차 축소되었다. 1932년 혁명으로 절대 군주제가 입헌 군주제로 바뀌면서 왕궁은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오늘날 왕궁은 여전히 의식과 군주제의 중심지로 사용되며, 박물관과 관광 명소로도 기능한다.[23]
왕궁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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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차크리 왕조의 군주 (인포박스)
차크리 왕조의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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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왕궁의 건축물은 태국 전통 양식과 유럽 양식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특히 차크리 마하 프라삿은 태국 전통 건축 양식과 19세기 유럽 양식(특히 르네상스)이 결합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62][63]
3. 건축물
라마 5세는 싱가포르와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의 자바를 여행한 후, 영국인 건축가 존 클루니치와 그의 조수 헨리 C. 로즈를 통해 차크리 마하 프라삿 즉위식 홀을 설계하고 건설하도록 했다.[57][64] 처음에는 돔이 있는 완전한 유럽식 건물을 원했지만, 총리 씨 수리야봉세(추앙 부나그)의 주장으로 금박을 입힌 첨탑과 태국식 지붕을 추가했다.[63][65]
방콕 왕궁 내에는 왓 프라깨우(에메랄드 불상 사원), 두싯 마하 프라삿, 차끄리 마하쁘라사드 홀(어전), 에메랄드 불상 사원 박물관 등 다양한 부속 건축물들이 있다.[142]
3. 1. 지리
방콕 왕궁은 짜오프라야강 동쪽 강가에 자리 잡고 있으며, 길이 1,900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체 면적은 218400m2이다. 왕궁은 방어를 위해 설치된 성벽 바깥쪽의 운하 때문에 섬처럼 보이는데, 태국에서는 이를 랏따나꼬신이라고 부른다.
3. 2. 부속 건축물
3. 3. 외전 (Outer Court)
왕궁의 외곽 정원(เขตพระราชฐานชั้นนอก, Khet Phra Racha Than Chan Nork)은 궁궐의 북서쪽에 위치하며, 비셋차이사리 문(Visetchaisri Gate)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는 왕궁 본부와 안내 센터, 왕실 재산국(Bureau of the Royal Household) 등 여러 공공 건물들이 있다.[18]
정원 내부에는 중요한 접견과 회의에 사용되는 '살라 사하타이 사막홈'(ศาลาสหทัยสมาคม, Sala Sahathai Samakhom)이 있다. '살라 룩쿤 나이'(ศาลาลูกขุนใน, Sala Luk Khun Nai)는 왕실 재산국의 여러 부서가 있는 사무 건물이다. 태국 왕립 연구소(Royal Institute of Thailand)의 본부도 이전에 이곳에 있었다. 외곽 정원에는 왕실 훈장, 왕실 장식 및 동전 전시관(Pavilion of Regalia, Royal Decorations and Coins)이라는 작은 박물관도 있다. 피만차이사리 문(Phimanchaisri Gate)은 차크리 마하 프라삿 즉위장(Chakri Maha Prasat Throne Hall)으로 바로 통하며, 외곽 정원에서 중앙 정원으로 들어가는 주요 통로이다.[18][25]
역사적으로 이 정원은 '파이 나'(ฝ่ายหน้า, Fai Na, 문자 그대로 '앞쪽')로 불렸으며, 왕실 정부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925년까지 모든 정부 기관과 직원들은 이곳을 떠났고, 모든 건물은 왕실 재산국에서 사용하도록 개조되었다.[18]
3. 4. 에메랄드 불상 사원 (Temple of the Emerald Buddha)
왓 프라깨우는 왕궁 내에 있는 왕실 예배당으로, 승려가 거주하는 공간은 없다.[142] 이곳에는 에메랄드 불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건물은 태국 전통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3. 5. 중전 (Middle Court)
중정(中庭) 또는 '켓 프라 라차 탄 찬 클랑'(เขตพระราชฐานชั้นกลาง)은 왕궁 중앙에 위치하며, 가장 중요한 주거용 건물과 관청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구역은 왓 프라깨우의 주요 부분으로 여겨지며, 동서로 가로지르는 아몬위티 로드(Amornwithi Road)가 앞쪽에 있다. 중정은 프라 마하 몬티엔 건물군, 차크리 마하 프라삿 건물군, 프라 마하 프라삿 건물군과 시왈라이 정원 구역으로 나뉜다.[28]
3. 5. 1. 프라 마하 몬티엔 (Phra Maha Monthien) 건물군
프라 마하 몬티엔(พระมหามณเฑียร|프라 마하 몬티엔th) 건물군은 방콕 왕궁 중심부에 위치하며, 전통 태국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곳은 역대 국왕들의 거주지이자 침소였기 때문에 왕궁 내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여겨진다.[29] 낮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건물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일반 접견실, 의식홀, 거주 공간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9][30]
라마 2세 이후 모든 태국 국왕의 즉위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29] 1785년 라마 1세의 명령으로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차크라팟 피만 왕좌홀과 파이산 탁신 왕좌홀만 있었다. 이후 라마 2세는 아마린 위닛차이 왕좌홀과 부속 건물들을 추가 건설했다. 라마 3세는 건물 이름을 '차크라팟 피만'(차크라바르틴의 거처)에서 '마하 몬티엔'(대왕의 거처)으로 바꾸고 대대적인 개보수를 했다. 라마 4세는 북쪽과 서쪽 담에 두 개의 아치형 통로를 추가했고, 라마 6세는 아마린 위닛차이 홀의 동쪽과 서쪽에 현관 확장 공사를 했다.[31] 현재 아마린 위닛차이 왕좌홀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다.[9][30]
테바피발 문은 홀의 중앙 입구이지만, 중앙 출입구는 국왕 전용이며, 다른 사람들은 양쪽에 있는 다른 두 개의 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이 문은 중국식 조각상, 신화 속 전사와 사자상 등으로 지키고 있다. 문 위에는 중국식 도자기로 덮인 세 개의 태국식 첨탑이 있다.[29][32]
프라 틴낭 아마린 위닛차이 마하이수라야 피만(พระที่นั่งอมรินทรวินิจฉัยมไหสูรยพิมาน|프라 틴낭 아마린 위닛차이 마하이수라야 피만th) 또는 프라 틴낭 아마린 위닛차이(พระที่นั่งอมรินทรวินิจฉัย|프라 틴낭 아마린 위닛차이th)는 마하 몬티엔 건물들 중 가장 북쪽에 있으며, 외국 사절을 접견하고 국사 및 의식을 거행하는 왕실 접견실로 사용되었다.[33][34]
넓은 왕좌홀은 높이 50cm의 기단 위에 있으며, 지붕은 녹색과 주황색 기와로 덮여 있다. 박공에는 인드라 신을 묘사한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홀 안에는 두 줄로 된 사각형 기둥들이 있으며, 태국 꽃무늬 디자인으로 장식되어 있다. 천장에는 유리 모자이크 별로 장식되어 있다.[33][34]
홀 뒤편에는 부사복 말라 마하 짝라팟 피만 왕좌 (พระที่นั่งบุษบกมาลามหาจักรพรรดิพิมาน|프라티낭 붓사복 말라 마하 짝끄라팟 피만th)가 있으며, 양쪽에는 금박을 입힌 7층 우산 두 개가 놓여 있다. 왕좌는 배 모양을 하고 있으며, 중앙에는 첨탑 모양의 정자 (''부사복'')가 있다. 이 정자는 불교와 힌두교 우주론의 중심인 수미산을 나타낸다.[33] 왕좌는 여러 가지 색깔의 에나멜과 돌, 그리고 데바와 가루다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왕좌는 한때 왕실 접견에 사용되었다.[34][35]
왕좌 앞에는 풋탄 깐짠싱핫 왕좌 (พระที่นั่งพุดตานกาญจนสิงหาสน์|프라티낭 풋탄 깐짠싱핫th)가 있는데, 9층 왕실 우산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는 태국 왕권의 중요한 상징이다. 각 층은 왕의 권력과 위신을 나타내며, 8방위(4방위와 4사방위)로 뻗어 나간다. 이 왕좌는 각 왕의 통치 기간 첫 번째 왕실 접견과 매년 생일 기념 행사 및 기타 왕실 접견에 사용되었다. 라마 2세는 1821년 이 왕좌에서 존 크로퍼드 (약 200년 만에 최초로 시암에 파견된 영국 사절)를 접견했다.[32][34]
이러한 국립 건물 외에도 프라 마하 몬티엔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개의 작은 구조물과 정자가 있다.[44][45]
북서쪽 벽 옆에는 ''프라 티낭 두시다피롬''(พระที่นั่งดุสิตาภิรมย์|프라 티낭 두시다피롬th)이 있다. 높은 플랫폼 위에 지어진 1층짜리 홀은 왕이 가마 또는 코끼리를 타고 궁전에 도착하거나 떠날 때 옷을 갈아입는 방으로 사용되었다.[46] 서쪽에는 코끼리 등장대가, 북쪽에는 가마 등장대가 있다. 처음에는 개방된 정자였으나, 벽은 나중에 라마 3세 왕에 의해 추가되었다. 입구는 동쪽에 위치하며 아마린 위닛차이 옥좌당에서 이어지는 계단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홀은 대왕궁 내에서 외부 장식이 있는 유일한 구조물이다. 금빛 래커와 청색 유리 모자이크에는 칼을 든 천사들이 묘사되어 있다.[44][47]
남동쪽에는 라마 6세 재위 시절 야외 접견실로 지어진 태국식 정자인 프라 띠낭 라차루디(พระที่นั่งราชฤดี|프라 띠낭 랏차르디th)가 있다.[48] 이 정자는 특히 국왕의 생일 축하 행사에 사용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원래 라마 4세는 2층짜리 유럽식 건물을 건설했었지만, 낡자 라마 5세는 이를 대체했다. 현재의 정자는 크기가 12x이다. 박공에는 흰색 모자이크 배경에 가루다 위에 앉은 나라야나(나라야나)의 금박을 입힌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49][50]
동북쪽에는 호 사스트라콤(หอศาสตราคม|호 사뜨라콤th) 또는 호 프라 파릿(หอพระปริตร)이 있다. 이 건물은 두시다피롬 홀과 같은 크기이며, 동시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전통에 따라 이 건물은 몬 승려들이 성수를 만들어 매일 저녁 궁궐 경내에 뿌리도록 짓도록 했다. 이 관행은 라마 7세 시대에 재정적 이유로 중단되었다. 현재는 왓 차나 송크람의 몬 승려들이 불교 성일에만 의식을 거행한다. 이 건물은 두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다. 북쪽 방은 승려들의 기도와 의식을 위한 방이며, 벽에는 종교 경전을 보관하는 벽장이 있다. 남쪽 방은 불상과 종교 유물을 보관하는 창고이다.[53][54]
전쟁 중에는 특별한 의식을 통해 성수로 무기의 위력을 강화했다. 그런 다음 무기와 특별한 부적을 전투 전에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기능으로 인해 건물의 창문과 문에는 고대 무기의 묘사가 장식되어 있다.[49][53]
파이산탁신 홀 양쪽에는 불상을 모신 전각이 있다. 동쪽에는 '호 수랄라이 피만'(หอพระสุราลัยพิมาน|호 프라 수랄라이 피만th)이 있으며, 이는 두싯사다 문으로 이어진다. 호 수랄라이 피만은 태국식 건축 양식의 작은 건물로, 짧은 복도를 통해 파이산탁신 홀과 연결되어 있다. 이 전각에는 중요하고 귀중한 불상과 조각상들이 모셔져 있으며, 짜끄리 왕조의 각 왕조를 대표하는 불상들도 포함되어 있다. 일부 부처의 사리 또한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36][55]
'호 프라 탓 몬티엔'(หอพระธาตุมณเฑียร|호 프라 탓 몬티엔th)은 파이산탁신 홀 서쪽에 위치하며, 반대편의 수랄라이 피만과 대칭적으로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프라 탓 몬티엔 전각에는 왕족 조상들의 화장한 유골을 모신 작은 금박 탑들이 여러 개 있다. 원래 호 프라 차오(Ho Phra Chao)라는 이름이었으나, 1812년 라마 2세가 귀중하고 오래된 불상들을 안치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라마 3세와 라마 4세 또한 이곳에 자신의 불상을 안치하고 내외관을 대대적으로 개수하였다.[36][56]
3. 5. 2. 차크리 마하 프라삿 (Phra Thinang Chakri Maha Prasat) 건물군
차크리 마하 프라삿 건물군은 라마 5세 때 건설되었으며, 태국 전통 양식과 유럽 양식(특히 르네상스)이 혼합된 건축 양식을 띄고 있다.[62][63] 싱가포르와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의 자바를 여행한 후인 1875년, 라마 5세는 차크리 마하 프라삿 즉위식 홀의 설계 및 건설을 위해 영국인 건축가 존 클루니치와 그의 조수 헨리 C. 로즈를 데려왔다.[57][64] 건설은 1876년 5월 7일에 시작되었다. 처음에 국왕은 돔이 있는 완전히 유럽식 건물을 원했지만, 그의 총리인 씨 수리야봉세(추앙 부나그)의 주장에 따라 국왕은 금박을 입힌 첨탑과 태국식 지붕을 추가하기로 결정했다.[63][65]
차크리 마하 프라삿 건물군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마하 몬티엔 홀과 유사한 구조로 배열된 9개의 주요 및 부속 홀로 구성되어 있지만, 두 건물 그룹의 스타일은 크게 대조된다.[57] 과거 이곳에는 11개의 다른 주거용 홀과 정자가 있었지만, 2012년에는 완전히 재건된 3개만 남아 있다. 차크리 마하 프라삿 즉위 홀, 문 사탄 보롬 아드 홀, 솜무티 테바라지 우파밧 홀이 그것이다.[60][61]3. 5. 3. 프라 마하 프라삿 (Phra Maha Prasat) 건물군
프라 마하 프라삿(พระมหาปราสาท, Phra Maha Prasat) 건물군은 중앙 안뜰의 서쪽 끝에 있다.[78] 이 지역의 주요 건물들은 라마 1세 시대의 것으로, 방콕 왕궁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전체 왕좌 건물군은 담으로 둘러싸인 포장된 안뜰 안에 있다. 다른 두 건물군과 마찬가지로 마하 프라삿 건물들은 역대 국왕들의 통치 기간 동안 건설, 장식 및 보수되었다. 건물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으며, 정면에는 공개 왕좌홀이 있고 그 뒤에는 거주용 홀이 있다. 주변에는 국왕과 그의 신하들이 사용하는 기능이 낮은 홀과 정자들이 있다.[79][80]
방콕 왕궁 건설 후, 라마 1세는 고대 프라 티낭 산펫 마하 프라삿(Phra Thinang Sanphet Maha Prasat)의 복제 건물을 같은 장소에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이 홀은 원래 15년 전에 파괴된 아유타야의 옛 궁전에 있었다.[10][11] 이 새로운 왕좌홀은 프라 티낭 아마린타라 피섹 마하 프라삿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건설은 1782년에 시작되어 1784년에 완료되었다. 이곳은 라마 1세가 그의 대관식을 거행한 곳이다. 그러나 1789년에 건물이 낙뢰를 맞아 전소되었다. 라마 1세는 다른 디자인과 이름으로 새로운 홀을 건설하도록 명령했다.[79][81]
그 후 두 개의 새로운 홀, 즉 두싯 마하 프라삿과 피만 랏타야가 각각 의식 또는 거주 용도로 건설되었다. 그 이후로 그 안에서 대관식이 거행된 적이 없다. 라마 1세가 사망했을 때, 이 홀은 그의 공식 국장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로 국왕, 왕비 및 왕실 고위 구성원들의 유해를 공식적인 애도 기간 동안 이 홀에 안치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79][81][84]
이 건물군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담의 북쪽 끝에 있는 세 개의 문 중 하나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문들은 꽃무늬의 중국 도자기로 장식되어 있다. 두싯 마하 프라삿 왕좌 홀만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85]
두싯 마하 프라삿은 마하 프라삿 건물군을 지배하는 건물이다. 대칭적인 십자형 평면으로 지어졌으며, 지붕에는 높이 솟은 금박으로 장식된 첨탑이 있다. 이 건물은 전통 태국 건축의 이상적인 예로 여겨진다. 외부 장식의 모든 면면에는 상징성이 깃들어 있다. 이 건물은 우주의 신화적인 중심인 메루산(Mount Meru)을 나타내는 높은 산의 형태로 지어졌다.[78][85]
첨탑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기단은 트라이품 불교 우주론에 따라 각각 천국의 한 단계를 나타내는 일곱 개의 층이 겹쳐서 이루어져 있다. 중간 부분은 종 모양으로, 네모난 모양을 만들기 위해 납작하게 만들어졌다. 이것은 부처의 유골이 안치된 탑(stupa)을 나타낸다. 맨 위 부분은 탑(chedi)의 꼭대기와 비슷하며, 뾰족한 연꽃봉오리나 수정 이슬 방울을 묘사하여 윤회(Saṃsāra) 또는 환생의 순환으로부터의 탈출을 상징한다. 첨탑은 네 면 각각에 가루다에 의해 지탱되는데, 가루다는 왕권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메루산을 둘러싼 히마반타(Himavanta) 숲의 신화적인 생물을 나타낸다.[81][85]
박공에는 가루다를 타고 있는 힌두교 신인 나라야나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왕을 나라야나와 연관시키고 그의 권위를 더욱 나타낸다. 전설에 따르면, 나라야나는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인간의 형태로 천국에서 내려왔다. 그는 이상적인 왕의 모든 자질을 대표한다. 옥좌는 볼록하고 오목한 몰딩이 있는 높은 기단 위에 서 있다. 태국 신앙에 따르면, 가장 아래층은 사자의 발을 닮았는데, 사자는 부처의 가족을 상징하며 부처 자신의 왕족 유산을 암시한다.[78][86]
이 옥좌홀의 가장 특이한 특징은 건물 정면에서 돌출된 작은 현관이다. 이 현관 아래에는 부삽복 말라 옥좌가 있는데, 그 첨탑은 홀 자체의 첨탑과 비슷하다. 이 옥좌의 높은 기단은 기도하는 신들의 모형으로 둘러싸여 있다. 라마 1세 통치 기간 동안에는 왕이 그의 속국 대표들 앞에 나타날 때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특정 의식에 사용되었다. 홀의 두 개의 문은 옥좌의 양쪽에 위치해 있다.[78][86]
이 옥좌홀의 내벽은 기하학적 패턴으로 배열된 연꽃봉오리 디자인으로 칠해져 있다. 기도하는 신들이 봉오리 안에 앉아 있는데, 이것은 성지와 종종 관련된 일반적인 태국 모티프이다. 첨탑 바로 아래에 있는 팔각형의 천장은 유리 모자이크 별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천상의 거처에 있는 듯한 인상을 강화시킨다. 문과 창문 셔터의 내부 패널에는 서로 마주 보고 무기를 들고 왕을 위한 경호원으로 서 있는 신들이 묘사되어 있다. 벽의 두께는 벽과 셔터 사이의 공간을 중국식으로 나무를 묘사한 벽화로 칠할 수 있도록 한다.[78][87]
홀의 날개에는 다양한 왕실 행사에 사용되는 옥좌가 있는데, 여기에는 홀 중앙, 네 개의 날개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진주 옥좌가 포함된다. 왕실 9단 우산[87][88]으로 덮인 이 정사각형 옥좌는 전적으로 진주로 상감되어 있으며 라마 1세 통치 시대의 것이다. 1789년에 불타 버린 아마린타라 피섹 마하 프라삿에서 구출되었다.[11][78]
동쪽 횡단부에는 진주 침대가 있는데, 이것은 진주 옥좌와 어울리도록 만들어졌다. 한때 왕의 개인 침대였으며 프라 티낭 피만 랏타야 안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더 이상 사용되지 않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이 침대는 여러 층과 꼭대기로 이어지는 작은 계단이 있는 높은 플랫폼 형태를 취한다. 홀 안에서 왕실 의식이 거행될 때, 왕족들은 남쪽 횡단부에 자리를 잡고, 정부 관리들은 북쪽에, 불교 승려들은 동쪽에 앉고, 장례 항아리는 서쪽에 놓인다. 그러한 경우 옥좌와 침대는 부처의 형상을 위한 제단으로 사용된다.[87]
진주 옥좌 뒤에는 프라 반촌 부삽복 말라 옥좌가 있다. 이 반 옥좌는 옥좌홀의 남쪽 벽에서 돌출되어 창문처럼 열린다. 그 스타일은 외부 현관에 있는 부삽복 말라 옥좌와 비슷하다. 라마 4세 통치 기간 동안 만들어졌는데, 궁녀들이 창문을 통해 중요한 의식에 참석하지만 외부에서 온 남성들과 분리된 스크린 뒤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89]
프라 티낭 피만 랏타야는 두싯 마하 프라삿 즉위장 바로 뒤에 위치해 있다. 라마 1세 국왕의 주요 궁전으로 지어진 주거용 궁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러한 용도로의 사용이 감소하여 결국에는 끝났고, 현재는 의식 장소로만 사용된다. 전통적인 직사각형 태국식으로 지어졌다. 궁전의 동쪽, 서쪽, 남쪽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건물 자체는 두 개의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라마 6세 재위 시절에는 왕족 구성원들의 회합 및 행사장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왕족 구성원이 국가 훈장 및 훈표를 수여하는 서임식 장소를 제공하기도 했다. 현재 이 궁전은 두싯 마하 프라삿과 함께 국장의 주요 장소로만 사용된다.[85][90]
프라 티낭 아폰 피목 프라삿은 라마 4세가 마하 프라삿 건물 동쪽 벽에 있는 플랫폼 위에 지은 개방형 정자이다. 국왕이 마하 프라삿에 들어갈 때 왕실 의복을 갈아입는 장소이자, 왕실 가마를 타는 승강장으로 사용되었다. 이 정자는 비례, 스타일, 세부 사항에서 태국 전통 건축의 최고의 특징을 보여주는 전형으로 여겨진다. 1958년 1958 브뤼셀 세계 박람회에 소형 복제품이 전시되었다.[91][92]
이 정자는 북쪽과 남쪽 끝이 더 긴 십자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붕에는 5층짜리 첨탑이 있어 '마하 프라삿'(7층)이 아닌 프라삿이다. 첨탑은 전통적인 가루다 대신 백조가 받치고 있다. 동쪽 박공에는 한쪽 발을 들고 왼손에는 칼을, 오른손은 축복하는 자세로 서 있는 힌두교 신 시바가 묘사되어 있다.[93] 정자의 기둥은 꽃무늬 금은 유리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으며, 기둥의 주두는 긴 연꽃잎 모양을 하고 있다.[89][92]
프라 틴낭 라차카라냐 사파는 동쪽 담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다. 폐쇄된 직사각형 건물로, 국왕과 그의 장관들이 사용하는 의회 회의실로 설계되었다. 1897년, 라마 5세가 유럽을 처음 방문했을 때, 사오바 파퐁시 왕비를 섭정으로 임명했고, 그녀는 이곳에서 국무원회의를 주재했다. 1956년 시리킷 왕비는 라마 9세가 잠시 승가에 입적했을 때 섭정으로서 다시 국무원회의를 주재했다. 이 건물은 여전히 국왕이 사적인 접견을 위해 가끔 사용한다. 아유타야 시대에 일반적이었던 지붕선 위의 돌출된 박공은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94][95]
홀 플릉 크르엉은 마하 프라삿 건물군 서쪽 벽에 위치한 폐쇄된 정자이다. 라마 6세가 옷을 갈아입는 방으로 건설하였다. 이 건물은 2층짜리 태국식 직사각형 건물이며, 윗층에서 두싯 마하 프라삿 즉위식 전당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96]
3. 6. 시왈라이 정원 (Siwalai Garden)
시왈라이 정원(สวนศิวาลัย, *Suan Siwalai*)은 중궁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며, 왕실 거주지와 종교 건물이 포함되어 있다. 라마 4세 때 조성되었으며, 라마 5세 때부터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99] 이 정원은 다른 국가 건물 및 즉위장과는 별개로 간주된다.[28]
처음에 라마 1세는 이 정원을 *Suan Kaew*(สวนแก้ว) 또는 '수정 정원'이라는 개인 휴양지로 조성하였다. 라마 2세는 이름을 *Suan Khwa* 또는 '오른쪽 정원'으로 바꾸고,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 내궁 거주민들을 위한 유희 정원으로 만들었다.[99]
라마 4세 통치 기간에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정원 전체가 새로운 주거용 궁전으로 바뀌었다. 왕의 사용을 위해 다양한 스타일과 크기의 여러 상호 연결된 건물로 구성된 이 건물 단지는 *Phra Abhinaowas Niwet*(พระอภิเนาว์นิเวศน์)이라고 불렸다. 동쪽에는 접견실, 서쪽에는 거주실이 있었으며, 건물들은 태국과 서양 스타일이 결합되어 지어졌다.[100]
라마 5세는 이 지역을 다시 내궁이 사용하는 개인 정원으로 만들고 현재의 이름을 붙였다. 새로운 정원에는 옛 건물과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Suan Tao* 또는 '거북이 정원'이라는 작은 잔디밭과 같은 새로운 건물이 포함되었다.[100] 시왈라이 정원의 배치는 현재까지 대부분 변하지 않았다.[101][102]
시왈라이 정원 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정원 북쪽 끝에 위치해 있다.[103][104] 2층짜리 신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은 라마 5세 통치 시대인 1897년부터 1903년까지 건설되었다. 태국의 첫 번째 왕세자였던 마하 와지룬히스 왕자를 위한 선물로 계획되었으나, 왕세자는 건설이 완료되기 전 16세의 나이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완공 후 궁전은 다음 왕위 계승자인 마하 와지라우드 왕세자에게 넘겨졌고, 그는 1910년 라마 6세로 즉위하여 궁전의 이름을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105][106]
독일 건축가 C. 산드레츠키를 비롯한 외국 건축가들의 감독 하에 건설되었으며, 대왕궁 내에서 가장 현대적인 건물이자 마차와 자동차를 수용하도록 설계된 최초의 건물이기도 했다.[107] 외벽은 필라스터와 정교한 석고 장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삼각형과 반원형의 페디먼트는 회반죽으로 된 꽃 모티브로 장식되어 있다. 궁전의 독특한 망사르 지붕은 짙은 회색 슬레이트 타일로 덮여 있으며, 건물 정면의 주요 중앙 페디먼트에는 왕세자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106][108]
건축 양식과 외부 장식은 완전히 서양식이지만, 내부 장식은 완전히 태국식이다.[103] 돔 아래에 있는 중앙 홀은 인드라, 바루나, 아그니, 야마 신의 벽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모두 태국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아래에는 라마 6세가 직접 쓴 태국어 비문이 있다.[106][109]
라마 7세는 1925년 즉위 전 며칠 동안 이 궁전에 머물렀고, 아난다 마히돈(라마 8세)은 1945년 12월 스위스에서 태국으로 돌아온 후 이 궁전을 주거지로 삼았다. 그는 이 궁전에서 그의 동생인 푸미폰 아둔야뎃 왕자(후에 라마 9세)와 그의 어머니인 스리나가린드라 공주와 함께 살았다. 1946년 6월 9일 아침, 이 궁전에서 그의 신비롭고 설명할 수 없는 총격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103][110] 라마 9세는 나중에 궁전을 개조하고 남쪽으로 확장하는 별관을 추가했다.[101][106]
현재 이 궁전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방문하는 국가원수와 그 수행원을 위한 공식 게스트 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104][108][111] 보롬피만 궁전의 남동쪽에는 국가 방문객 수행원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 두 채가 있다.[106]
시왈라이 정원과 마하 몬티엔 건물 사이 벽 위에 세워진 작은 정자이다. 몬돕(มณฑป) 양식의 지붕과 금박을 입힌 첨탑을 가지고 있으며, 유리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라마 4세가 자신의 아버지인 라마 2세를 기리는 기념물로 건립하였으며, 완공 후 라마 2세의 유골이 이곳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라마 4세 사후 유골은 호 프라탓 몬티엔 불상전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현재 이 정자에는 여러 불상들이 모셔져 있다.[112][113]
시왈라이 정원의 남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101][114] 7층 몬돕(Mondop) 양식 첨탑을 가진 태국식 건축물이다. 1869년에 주조된 전임 국왕 4명의 금속상을 모시기 위해 라마 5세 치세인 1878년에 건립되었다. 왕실의 영묘로 사용될 예정이었으며, 이곳에서 전임 군주들의 삶을 기리고 숭배하려 했다.[115] 이후 라마 6세는 이 상들을 에메랄드 불상 사원 경내 프라삿 프라 텝 비돈에 안치하여 대중에게 더 접근 가능하게 했다. 1918년 4월 6일 첫 번째 숭배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이 의식은 매년 계속되고 있다. 상들이 옮겨진 이후로 시왈라이 마하 프라삿은 비어 있는 상태로 남아 있다.[116]
라마 6세가 지은 작은 목조 누각이다. 보롬피만 궁전 남쪽 잔디밭 북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누각은 금칠한 검정 칠로 장식된 불꽃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박공에는 라마 6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국왕은 이 누각을 휴식처이자 정원 파티 중 좌석으로 사용했다.[101]
시왈라이 정원 중앙에 위치한 프라 우보솟(ordination hall, 승당)이다. 짬파삭(Champasak, 占巴塞)(라오스)에서 가져온 프라 붓다 붓사야랏 짝라팟 핌롬 마니마이(พระพุทธบุษยรัตน์จักรพรรดิพิมลมณีมัย)라는 불상을 모신 사당이다. 라마 4세에 의해 이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회색 돌로 지어진 우보솟은 2층의 녹색 기와 지붕을 가지고 있으며, 정면에는 기둥으로 된 현관이 있다. 우보솟의 외부에는 기둥이 있는 개방형 회랑이 있다. 과거에는 이곳에서 종교 의식이 거행되었다.[101][117]
3. 7. 내전 (Inner Court)
내전(Inner Court) 또는 '켓 프라 라차 탄 찬 나이'(เขตพระราชฐานชั้นใน)는 '파이 나이'(ฝ่ายใน)라고도 불리며, 방콕 왕궁 단지의 최남단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국왕과 그의 후궁(첩)들을 위한 공간으로, 일반인들에게는 '금단의 여성' 또는 '낭 함'(นางห้าม)으로 불렸다.[17][18] 내전에는 국왕의 자녀들과 시녀, 하인들이 함께 거주했다. 국왕의 왕실 후궁들은 시암의 왕족과 귀족, 조공을 바치는 국가의 통치자 딸들 중에서 선발되었다.[83][118]
라마 6세는 일부다처제 가정을 거부하면서 왕실의 일부다처제는 사실상 종식되었고, 라마 7세는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람바이 바르니 왕비 한 명만을 맞이하면서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이후 내전 거주자 수는 점차 감소하여 완전히 사라졌다.[42][119]
역사적으로 내전은 자체적인 상점, 정부, 학교, 창고, 법률 및 법원을 갖춘 도시와 같았다. 여성 경비원들의 감시하에 특별한 수리 작업을 하는 남성들과 의사들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국왕의 아들들은 사춘기에 이를 때까지 내전에서 살다가 삭발식 후 궁 밖으로 보내졌다.[42] 현재 내전에는 거주자가 없고 건물들은 사용되지 않으며,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다.[120]
내전의 인구는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규모가 컸다.[121] 각 왕비는 200~300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가정을 이루었고, 시녀들은 귀족 가문 출신이거나 하인들을 거느린 공주들이었다. 각 첩(เจ้าจอม, Chao Chom)은 큰 가정을 이루었고, 국왕의 아이를 낳으면 후궁 어머니(เจ้าจอมมารดา, Chao Chom Manda)로 승격되어 가정 규모가 더욱 커졌다. 각 왕족 여성은 계급과 지위에 따라 별도의 거처를 가졌으며, 내전 인구는 약 3,000명에 달했다.[122]
내전은 한때 정원, 잔디밭, 연못으로 둘러싸인 작은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19세기 후반 새로운 주택들이 건설되면서 과밀해졌다. 남아 있는 건물 대부분은 라마 5세 재위 기간에 서구 양식, 주로 이탈리아풍으로 건설되었다.[123] 주택의 크기는 다양하며, 왕실 별장('프라 탐낙', พระตำหนัก), 별장('탐낙', ตำหนัก), 주택('루엔', เรือน)의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각 주택은 계급과 지위에 따라 거주자에게 배분되었다. 내전은 궁궐 내부에 있는 벽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분리되어 있었고, 중전과 내전을 연결하는 문들의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124] 중전의 세 건물 그룹은 남쪽에 위치하여 궁궐 생활과 내전 여성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다.[125] 주거용 홀 뒤에는 숙후말라 마라스리 왕비와 사방 와다나 왕비와 같은 고위 후궁들의 왕실 별장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다라 라스미 공주 후궁과 같은 다른 후궁들의 소규모 별장들이 있었다. 최남단에는 중하위 계급 후궁들을 위한 연립 주택('타오 텅', แถวเต๊ง)이 있었다.[123] 이 주택들은 내전 가장자리에서 이중 감시 역할을 했다.[126]
내전은 궁궐법(กฎมนเทียรบาล)으로 통치되었으며, 일부 법률은 아유타야 왕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부분의 법률은 여성의 계급과 지위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법률은 여성의 행동과 처신에 관한 것이었다.[127] 거주자들의 질서와 규율은 여성 경비대(กรมโขลน)에 의해 시행되었다. 이 경비대는 출라 차크라봉세 왕자에 의해 "강인해 보이는 아마존 여전사들"로 묘사되었다.[42] 이 기관의 수장은 '아티보디 파이 나이'(อธิบดีฝ่ายใน) 즉, 내전의 책임자로 알려져 있었고, 그녀의 지휘 아래 다양한 관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내전 내 삶의 모든 측면과 관련된 책임을 맡았다. 그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남성이 그 지역에 들어온 후 그들과 함께 있다가 떠날 때까지 동행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전의 통행을 통제하고 정규 군인처럼 훈련을 받았다. 밤에는 등불이나 횃불을 들고 거리를 순찰했다.[121] 부인들의 잘못된 행동이나 무분별한 행위는 여성과 남성 모두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128] 1859년 불륜을 저지른 한 젊은 귀족과 첩에게 이러한 처벌이 내려졌다.[129]
국왕의 자녀만이 내전에서 태어날 수 있었다. 왕실 자녀의 출생에 대한 모든 세부 사항은 출생 시간을 포함하여 기록되었으며, 이는 나중에 궁정 점성가가 그들의 점성술을 계산하는 데 사용되었다. 왕실 자녀의 출생과 통과 의례에 관한 의식은 내전의 벽 안에서 거행되었다. 왕실 자녀의 출생은 내전의 거리를 따라 소식을 알린 여성들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여성으로 구성된 내부 오케스트라와 남성으로 구성된 외부 오케스트라가 조개 껍질 나팔 소리로 공식적인 선포를 했다. 아이가 왕자라면 승리의 공을 세 번 쳤다. 아이들은 각자의 어머니와 함께 살며 내전 내 특별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128]
'안쪽' 여성들은 외부 여성들과 같은 수준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지만, 내전의 삶은 불쾌하지 않았고, 외부보다 삶이 더 쉬웠으며 대부분의 필수품이 제공되었다. 여성들은 보통 소녀로 궁궐에 들어와 일생 동안 그곳에 남았다. 소녀 시절에는 시종으로 특정 임무를 맡았고, 나이가 들고 아내가 어머니가 되면 가정을 돌보았다. 라마 4세 재위 시절, 궁궐 여성들은 처음으로 궁궐을 나갈 수 있었지만, 먼저 책임자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엄격하게 보호를 받았다.[124] 1914년부터 1919년까지 사오바파 퐁스리 왕비의 주치의였던 말콤 아서 스미스는 "그들이 자유를 갈망하거나 주변 환경에 불행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라고 적었다.[130]
4. 방어 시설
방콕 왕궁의 성벽은 1782년 라마 1세 재위 시절에 건설되었다. 이후 라마 2세 재위 시절 왕궁과 성벽은 남쪽으로 확장되었다. 원래 대포 설치대는 경비 초소로 대체되었고, 운율이 맞는 이름이 붙여졌다. 성벽의 총 길이는 1910m이며, 북쪽 410m, 동쪽 510m, 남쪽 360m, 서쪽 630m이다. 외벽에는 12개의 문이, 외벽 주변에는 17개의 작은 요새가 있다. 왕궁 내부에는 22개가 넘는 문과 미궁 같은 내벽이 있었지만, 일부는 이미 철거되었다.[5][19] 산암차이 로드(Sanamchai Road)에 면한 동쪽 성벽에는 두 개의 즉위식 홀이 있다.
4. 1. 문 (Gates)
방콕 왕궁에는 네 벽면을 따라 각각 세 개씩, 총 열두 개의 문(ประตู, ''Pratu'', 문이라는 뜻)이 있다. 이 거대한 문들은 벽돌과 시멘트로 지어졌으며, 쁘랑 스타일의 첨탑으로 장식되어 있다. 모든 문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거대한 붉은색 문짝이 달려 있다. 이러한 외문들은 각각 운율을 맞춘 이름이 붙여졌는데, 북서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시작된다.[19][135]
방위 | 문 이름 | 태국어 표기 | 원문표기|발음표기th |
---|---|---|---|
북쪽 벽 | 피만 데베스 | ประตูวิมานเทเวศร์ | ประตูวิมานเทเวศร์|Wiman Thewetth |
위셋 차이시리 | ประตูวิเศษไชยศรี | ประตูวิเศษไชยศรี|Wiset Chai Sith | |
마니 노파랏 | ประตูมณีนพรัตน์ | ประตูมณีนพรัตน์|Mani Noppharatth | |
동쪽 벽 | 스와스티 소파 | ประตูสวัสดิโสภา | ประตูสวัสดิโสภา|Sawatdi Sophath |
데바 피탁 | ประตูเทวาพิทักษ์ | ประตูเทวาพิทักษ์|Thewa Phithakth | |
삭디 차이싯 | ประตูศักดิ์ไชยสิทธิ์ | ประตูศักดิ์ไชยสิทธิ์|Sak Chaisitth | |
남쪽 벽 | 위치트 반종 | ประตูวิจิตรบรรจง | ประตูวิจิตรบรรจง|Wichit Banchongth |
아농카 락사 | ประตูอนงคารักษ์ | ประตูอนงคารักษ์|Anongkharakth | |
피탁 보본 | ประตูพิทักษ์บวร | ประตูพิทักษ์บวร|Phithak Bowonth | |
서쪽 벽 | 수톤 티사 | ประตูสุนทรทิศา | ประตูสุนทรทิศา|Sunthon Thisath |
데바 피롬 | ประตูเทวาภิรมย์ | ประตูเทวาภิรมย์|Thewaphiromth | |
우돔 수다락 | ประตูอุดมสุดารักษ์ | ประตูอุดมสุดารักษ์|Udom Sudarakth |
4. 2. 요새 (Forts)
방콕 왕궁의 성벽은 라마 1세 재위 시절인 1782년에 건설되었다. 이후 라마 2세 재위 시절 왕궁과 성벽은 남쪽으로 확장되었다. 대포 설치대는 경비 초소로 대체되었고, 운율이 맞는 이름이 붙여졌다. 북쪽 성벽은 410m, 동쪽은 510m, 남쪽은 360m, 서쪽은 630m이며, 총 길이는 1910m이다. 외벽에는 12개의 문이 있다. 왕궁 내부에는 22개가 넘는 문과 미궁 같은 내벽이 있었지만, 일부는 이미 철거되었다. 외벽 주변에는 17개의 작은 요새도 있다. 산암차이 로드(Sanamchai Road)에 면한 동쪽 성벽에는 두 개의 즉위식 홀이 있다.[5][19]대왕궁 성벽을 따라 17개의 요새(ป้อม|Pomth)가 있다. 원래는 10개였으나, 나중에 추가되었다. 이 작은 구조물들은 대개 작은 흉벽에 대포 배치와 망루가 있는 형태이다. 요새들은 운율이 맞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19][17][135]
방위 | 요새 이름 (태국어) | 요새 이름 (한국어 발음) |
---|---|---|
북쪽 성벽 | ป้อมอินทรรังสรรค์|인쏜 랑산th | 인 랑산 |
ป้อมขันธ์เขื่อนเพชร|칸 쿤펫th | 칸 쿤 펫 | |
ป้อมเผด็จดัสกร|파데지 두사콘th (모서리 요새) | 파뎃 닷사콘 (모서리 요새) | |
동쪽 성벽 | ป้อมสัญจรใจวิง|산촌 자이윙th | 산촌 차이 윙 |
ป้อมสิงขรขันฑ์|싱 콘칸th | 싱콘 칸 | |
ป้อมขยันยิงยุทธ|카얀 잉윳th | 카얀 잉 윳 | |
ป้อมฤทธิรุดโรมรัน|리티 루크롬룬th | 릿티 룻 롬 란 | |
ป้อมอนันตคีรี|아난다 키리th | 아난타 키리 | |
ป้อมมณีปราการ|마니 프라칸th (모서리 요새) | 마니 프라칸 (모서리 요새) | |
남쪽 성벽 | ป้อมพิศาลสีมา|피산 시마th | 피산 시마 |
ป้อมภูผาสุทัศน์|푸파 수탓th (모서리 요새) | 푸 파 수탓 (모서리 요새) | |
서쪽 성벽 | ป้อมสัตตบรรพต|순타 반팟th | 삿타 반폿 |
ป้อมโสฬสศิลา|솔로스 실라th | 솔롯 실라 | |
ป้อมมหาสัตตโลหะ|마하 산타 로하th | 마하 삿타 로하 | |
ป้อมทัศนนิกร|타사나 니콘th | 탓사나 니콘 |
5. 옥불사 박물관 (Museum of the Emerald Buddha Temple)
옥불사 박물관(พิพิธภัณฑ์วัดพระศรีรัตนศาสดาราม)은 외전과 중전 사이에 위치하며, 원래 왕립 조폐국(โรงกษาปณ์สิทธิการ) 건물이었다. 1982년 마하 차크리 시린톤 공주에 의해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136][137]
2층 건물은 직사각형 모양이며, 현관에는 이오니아식 기둥이 있다. 외벽은 회반죽 벽돌로 만들어졌고, 상단 창문은 반원형 프랑스식 창문이다.[137]
박물관 1층에는 여러 차례 개보수 과정에서 제거된 건축 요소, 돌로 만든 불상, 중국식 조각상, 라마껭의 인물들, 흰 코끼리의 뼈 등이 전시되어 있다.[136][137] 흰 코끼리는 왕권의 중요한 상징이었다.[138][139]
2층에는 대왕궁 건축 모형 2개, 불상, 기념 주화, ''프라 태엔 송 사바이''(작은 진주 조개 좌석), ''프라 태엔 마낭실라'' 옥좌, 자바 양식의 불상 4점, 옥불의 계절 의복, 시바 대관식을 묘사한 칠기 병풍, 다양한 예술품과 불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138][140]
6.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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