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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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광현은 조선 시대의 의관으로, 젊은 시절 낙마 사고로 침술에 입문하여 수의(수의사)로 시작해 침을 이용한 외과 치료를 전문으로 했다. 현종 때 내의원에 들어가 어의가 되었고, 숙종 때 강령, 포천, 금천 현감을 역임했다. 1693년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각기병을 앓는 윤지완을 치료하여 신의로 불렸다. 최종 관직은 숭록대부 지중추부사였으며, 1697년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후대에는 수술의 권위자로 평가받았으며, 드라마 《마의》에서 조승우가 백광현 역을 맡았다.
백광현은 젊은 시절 말에서 떨어져 다친 후 침술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4] 원래 마의였던 그는 의학서에 의존하지 않고 침을 이용한 치료를 했다. 침을 끓여서 소독함으로써 말의 치료 기술을 발전시켰고, 이를 사람의 치료에도 응용하여 효과를 보았다. 이후 끓여서 소독한 침을 사용한 외과 치료를 전문으로 하며 의술을 향상시켰다.[4]
정래교는 "종기를 절개하여 치료하는 방법은 백태의(白太醫)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1]
2. 생애
현종 대에 내의원 의관으로 출사했으며, 1670년(현종 11년) 왕의 병이 회복된 것을 기념하여 내의원 의관들에게 가자(加資)될 때 그 이름이 확인된다.[5] 그는 의관으로서 최종적으로 어의(왕의 주치의)가 되었다.
숙종 대에는 강령 현감, 포천 현감을 거쳐 금천 현감을 지냈다.[4] 1693년(숙종 19년)에는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9] 가자되었다.[10] 1695년(숙종 21년)에는 각기병을 앓던 윤지완을 치료하기도 했다. 《실록》에는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해 많은 기효(奇效: 뛰어난 효험)가 있으니, 세상에서 신의(神醫)라 일컬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1]
최종 관직은 숭록대부 지중추부사(崇祿大夫 知中樞府事)였다.[4] 1697년(숙종 23년) 음력 2월 9일 송현(松峴)에서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3]
2. 1. 초기 생애 및 의술 활동
젊은 시절 말에서 떨어져 다친 후 침술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4] 원래는 마의(현재의 수의사)였으며, 의학서에 의존하지 않고 침을 이용한 치료를 시행했다. 침(절개에 사용하는 의료기구 전반)을 끓여서 소독함으로써 말의 치료 기술이 진보했고, 이것을 사람의 치료에도 응용하여 시술한 결과 효과가 있었으며, 이후에는 끓여서 소독한 침을 사용한 외과 치료를 전문으로 하여 수많은 임상을 경험하며 의술을 향상시켰다.
1663년(현종 4년) 이경석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왔다.[4] 1670년(현종 11년) 왕의 병이 회복된 것을 기념해 내의원 의관들에게 가자(加資)되었는데, 그 이름 중에 백광현이 보인다.[5] 의관으로서는 최종적으로 어의(왕의 주치의)가 되었다.
1684년(숙종 10년) 왕은 그를 강령 현감(康翎縣監)에 임명했다가 이어 포천 현감(抱川縣監)으로 바꾸어 임명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그를 탄핵했지만 숙종은 윤허하지 않았다.[7] 이후 금천[8] 현감(衿川 縣監)을 지냈다.[4]
1695년(숙종 21년) 숙종은 각기병을 앓고 있던 영돈녕부사 윤지완에게 백광현을 보냈는데, 《실록》에는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해 많은 기효(奇效: 뛰어난 효험)가 있으니, 세상에서 신의(神醫)라 일컬었다.”라고 쓰여있다.[11]
2. 2. 내의원 진출과 어의
1663년(현종 4년) 이경석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갔다.[4] 1670년(현종 11년) 왕의 병이 회복된 것을 기념해 내의원 의관들에게 가자(加資)되었는데, 그 이름 중에 백광현이 보인다.[5] 그는 의관으로서 최종적으로 어의(왕의 주치의)가 되었다.
1695년(숙종 21년) 숙종은 백광현을 각병(脚病)을 앓는 영돈녕부사 윤지완에게 보냈는데, 《실록》에는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해 많은 기효(奇效: 뛰어난 효험)가 있으니, 세상에서 신의(神醫)라 일컬었다.”라고 쓰여있다.[11]
2. 3. 지방관 부임과 말년
1684년(숙종 10년) 왕은 그를 강령[6] 현감(康翎縣監)에 임명했다가 이어 포천 현감(抱川縣監)으로 바꾸어 임명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그를 탄핵했지만 숙종은 윤허하지 않았다.[7] 이후 금천[8] 현감(衿川縣監)을 지냈다.[4]
1693년(숙종 19년)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9] 가자되었다.[10]
1695년(숙종 21년) 숙종은 각병(脚病)을 앓는 영돈녕부사 윤지완에게 백광현을 보냈는데, 《실록》에는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해 많은 기효(奇效: 뛰어난 효험)가 있으니, 세상에서 신의(神醫)라 일컬었다.”라고 쓰여있다.[11]
최종 관직은 숭록대부 지중추부사(崇祿大夫 知中樞府事)이다.[4]
1697년(숙종 23년) 음력 2월 9일, 송현(松峴)에서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3]
3. 후대의 평가
장지연은 "우리나라의 절열법(상처를 찢어 치료하는 법)은 백태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백광현을 수술의 권위자로 평가했다.[2]
4. 백광현을 다룬 작품
5. 전기 자료
- 정래교의 《완암집》 권4, 백태의전[1]
- 조현명의 《귀록집》 권14, 백 지사 묘표[2]
- 《지사공 유사》[3]
참조
[1]
서적
조선 최고의 외과의사 백광현뎐 1
시대의창
2012
[2]
문서
'炫'은 '玹'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3]
서적
지사공 유사
[4]
서적
귀록집
[5]
간행물
현종개수실록
1670-08-16
[6]
문서
오늘날 [[황해남도]] [[옹진군]]과 [[인천광역시]] [[옹진군]]
[7]
간행물
숙종실록
1684-05-02
[8]
문서
오늘날 [[서울특별시]] [[금천구]]
[9]
간행물
승정원일기
1693-01-02
[10]
간행물
승정원일기
1693-02-22
[11]
간행물
숙종실록보궐정오
1695-12-09
[12]
서적
귀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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