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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금동대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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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 금동대향로는 1993년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발견된 백제 시대의 향로이다. 높이 61.8cm로, 용의 받침, 연꽃 몸체, 산악 뚜껑, 봉황 장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봉황, 악사, 다양한 동물과 풍경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불교의 연화화생설과 도교, 동북아시아 전통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되며, 한나라 박산 향로의 영향을 받았지만, 심미성과 정밀함에서 차이를 보인다. 최근에는 불교 문헌을 근거로 도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제시되기도 한다. 이 향로는 백제 왕조 연구에 중요한 유물이며, 실크로드와 동아시아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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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금동대향로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백제 금동대향로
백제 금동대향로
이름백제 금동대향로
한자 표기百濟金銅大香爐
로마자 표기Baekje geumdong daehyangno
문화재 정보
국가대한민국
유형국보
지정일1996년 5월 30일
주소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 국립부여박물관)
모조품 주소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시대백제
소유자대한민국
크기높이 61.8cm, 무게 11.8kg
수량1점
웹사이트국립부여박물관 웹사이트
문화재청 ID11,02870000,34
출토 정보
출토지부여 능산리

2. 발굴 과정

백제 금동대향로는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한 절터 서쪽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능산리 고분군 주차장을 건설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공사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한 작업자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3] 발견 당시 대향로는 진흙 속 구덩이에 다른 유물 없이 단독으로 놓여 있었으며, 주변에서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 그리고 대향로를 감쌌던 것으로 추정되는 섬유 조각이 함께 발견되었다. 대향로가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벽한 형태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진흙 속에 잠겨 외부 공기와의 접촉이 차단된 진공 상태와 유사한 환경 덕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

이후 1995년에 이루어진 정식 발굴 조사를 통해 대향로가 발견된 지점이 백제 시대 왕실의 중요한 사찰 터였음이 밝혀졌다. 특히 발굴된 목탑 터에서 나온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에는 "백제 위덕왕 13년(567년)에 왕의 누이인 정해공주가 사리를 봉안하며 절을 세웠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곳이 단순한 절터가 아닌 왕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곳임을 증명했다.[4] 이러한 발견을 통해 학계에서는 백제 금동대향로가 단순한 향로가 아니라, 백제 왕실의 중요한 의식이나 제사에 사용되었던 신성한 물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4]

백제 금동대향로의 발굴은 20세기 한국 고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백제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향로는 백제인들이 지녔던 높은 수준의 예술적 안목과 정교한 공예 기술, 그리고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 세계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특히 이러한 형태와 복잡한 구조를 가진 향로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어, 백제 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꼽힌다.

한때 백제 금동대향로가 한나라의 박산 향로(博山香爐|박산 향로중국어)를 모방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었으나, 최근 한국 연구팀의 연구 결과, 구조와 디자인, 특히 향로에 새겨진 5명의 악사 모습 등에서 중국의 향로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향로 속 악사들이 연주하는 악기 중 '완함'(阮咸|완함중국어)이라는 악기는 백제가 멸망한 이후인 7세기 당나라에 처음 소개된 악기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신당서 기록에 따르면 이 악기는 8세기에 널리 유행했으며, 쿠차 지역에서 유래하여 키질 석굴 벽화 등에서 초기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백제 금동대향로의 제작 연대와 독자적인 양식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표현된 다양한 도상들을 특징으로 한다. 불교도교적인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를 동북아시아 문화의 보편적인 주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용과 봉황의 등장은 음양 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불교 사찰 터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은 불교적 성격에 무게를 싣는다. 그러나 유물의 독특함과 정교함은 이것이 단순한 종교적 상징물을 넘어, 조상 숭배 의식이나 국가적인 제례 등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시사한다.

3. 구성

백제 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 61.8cm로,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아래에서부터 하늘로 승천하려는 듯한 모양의 받침, 활짝 핀 연꽃 모양의 몸체, 신선 세계를 형상화한 듯한 산악도가 새겨진 뚜껑, 그리고 뚜껑 정상에서 날개를 펴고 있는 봉황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5]

이 네 부분은 각각 다른 주물로 제작되었으며, 특히 봉황 장식과 뚜껑 본체가 별도로 만들어져 총 여섯 개의 주물틀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5] 각 구성 요소의 세부적인 모습과 특징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자세히 다룬다.

3. 1. 몸체

향로의 몸체는 활짝 핀 연꽃 모양을 하고 있다. 연꽃잎에는 물고기, 천상의 짐승, 새 등 26마리의 동물이 옆면에 새겨져 있으며, 이 동물들은 연꽃잎 사이사이와 잎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한쪽 면에는 무예를 하는 인물도 새겨져 있다.[5]

3. 2. 뚜껑

뚜껑은 여러 개의 봉우리가 겹쳐진 산악도 형태로, 얇게 주조된 74개의 산들이 다섯 겹으로 쌓여 꼭대기에 이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5] 뚜껑에는 다양한 인물과 동물, 식물, 풍경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서로 다른 악기를 든 다섯 명의 악사를 비롯하여 신선으로 보이는 인물,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등 총 16명의 인물과, 호랑이, , 사슴, 코끼리, 원숭이, 멧돼지, 낙타 등을 포함한 39마리의 동물이 표현되어 있다.[5] 또한 여섯 종류의 나무와 바위, 오솔길, 폭포, 호수, 불꽃 무늬, 귀면상 등 다양한 자연 경관과 상징물이 새겨져 있어, 마치 도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신선 세계를 보여주는 듯하다.[5]

뚜껑 꼭대기에는 다섯 개의 가장 높은 봉우리 위에 각각 새가 한 마리씩 앉아 있으며, 중앙에는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춤추는 듯한 모습으로 장식되어 있다. 봉황은 마법의 구슬을 물고 있으며, 길고 아름다운 꼬리는 우아하게 위로 뻗어 있다.[5] 뚜껑에는 향 연기가 피어오를 수 있도록 총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봉황의 가슴 부분에도 구멍이 하나 마련되어 있다.

3. 3. 봉황 장식

향로 뚜껑의 가장 윗부분,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는 봉황 모양의 꼭지 장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봉황은 날개를 활짝 펴고 춤추는 듯한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5], 마법 구슬을 물고 있다. 길고 아름다운 꼬리는 우아하게 아치형으로 굽어져 있다. 또한, 봉황의 가슴 부분과 뚜껑의 다른 부분들을 합쳐 총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향로 내부에서 피어오르는 향 연기가 자연스럽게 외부로 퍼져나가도록 설계되었다.

3. 4. 받침

향로의 받침은 한 마리가 입으로 향로의 몸체를 물어 떠받드는 형상이다. 이 용은 발가락이 네 개이며, 몸체를 물고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듯 꿈틀거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5] 용의 주변에는 구름 문양이 장식되어 있고, 아치형으로 휜 꼬리는 받침 전체에 생동감을 더한다.

4. 체계 및 학술적 의미

백제 금동대향로는 20세기 한국 고고학의 가장 중요한 발굴 성과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백제사 연구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 향로는 백제인들의 정교한 공예 기술과 높은 예술적 안목, 그리고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이러한 독창성과 완성도를 지닌 향로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초기에는 향로의 외형적 특징 때문에 중국 한나라의 박산향로( 博山香爐|박산향로중국어 )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 금동대향로는 미적 완성도와 세부 표현의 정교함에서 중국의 그것을 능가하며, 단순한 모방을 넘어선 백제 고유의 창의성이 집약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6] 최근 연구들은 구조, 디자인, 특히 5명의 악사 부조 등 여러 면에서 중국 향로와의 뚜렷한 차이점을 밝혀내며 백제의 독창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향로에 새겨진 다채로운 도상들은 불교, 도교, 그리고 고대 동북아시아의 전통 사상이 복합적으로 융합된 결과로 해석되어 왔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용, 연꽃, 산악 등 도상이 연화화생설에 기반한 불교의 이상 세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며, 봉황, 악사, 동물 등은 도교적 신선 사상이나 백제 사회의 단면을 반영한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불교와 도교의 습합'이라는 해석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향로의 여러 도상들이 실제로는 불교 경전 내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예를 들어, 금시조(가루라) 목의 여의주, 신선들의 기악 연주, 다양한 악기 연주 장면 등이 불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7] 이는 향로의 도상 해석에 있어 보다 신중하고 심층적인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하며, 향후 구체적인 문헌 연구를 통한 근거 확보가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특히 향로에 묘사된 악기 중 완함( 阮咸|완함중국어 )에 대한 연구는 백제가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도 교류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백제 금동대향로가 단순히 동아시아 내부의 영향을 넘어선 국제적 문화 교류의 산물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결론적으로 백제 금동대향로는 백제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예술적 성취이자, 당시 백제가 영위했던 복합적인 사상 체계와 활발한 국제 교류를 증명하는 핵심적인 유물이다. 불교 사찰 터에서 발굴되었다는 점은 불교와의 깊은 연관성을 뒷받침하지만, 그 독특함과 상징성으로 인해 국가적 제례나 왕실 의례에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는 등, 여전히 풍부한 연구 과제를 안고 있는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4. 1. 중국 한나라 박산향로와의 관계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말기부터 서역에서 향품이 전해지면서 악취를 제거하고 부정을 쫓기 위해 향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백제 금동대향로의 기원을 중국 한나라의 박산향로( 博山香爐|박산향로중국어 )에서 찾기도 한다. 이들은 백제 금동대향로가 한나라의 영향을 받아 백제적인 요소가 더해져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길쭉한 받침대 위에 알 모양 몸체를 얹은 박산향로의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일부 유사성을 보일 뿐, 백제 금동대향로는 중국의 박산향로와 비교했을 때 미적인 완성도와 제작 기술의 정교함에서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6]

과거에는 백제 금동대향로가 한나라 박산향로를 모방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의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로 구성된 연구팀은 백제 금동대향로가 구조와 디자인, 특히 부조로 새겨진 5명의 악사 모습 등 여러 면에서 중국의 것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향로에 새겨진 악기 중 하나인 완함( 阮咸|완함중국어 )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악기는 전통적으로 백제 멸망(660년) 이후인 7세기 당나라에 처음 소개되었으며, 8세기경 활동한 연주자 완함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신당서에도 완함이 8세기 당나라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연구 결과, 이 악기는 실제로는 중앙아시아의 쿠차 지역에서 유래했으며, 키질 석굴 벽화 등에서 그 초기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는 '완함'이라는 악기가 당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명명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실크로드를 통해 이미 백제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발견은 백제 금동대향로가 단순히 중국의 영향을 받은 모방품이 아니라, 백제 고유의 독창적인 기술과 뛰어난 예술성이 집약된 걸작임을 뒷받침한다. 또한, 쿠차가 실크로드 교역의 중요 거점이었음을 고려할 때, 이는 당시 백제중앙아시아 지역과도 활발히 교류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된다. 이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 및 무역 네트워크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4. 2. 불교와 도교의 융합

백제 금동대향로는 불교도교 사상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유물로 해석되어 왔다. 향로의 형태적 기원을 중국 한나라의 박산 향로(博山香爐)에서 찾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길쭉한 받침 위에 알 모양 몸체를 얹은 형식적 유사성에 국한될 뿐, 백제 금동대향로의 뛰어난 심미성과 정교함은 중국의 그것과 비교하기 어렵다.[6]

향로의 도상 해석은 다양하다. 불교문화 연구가들은 이 향로가 불교의 연화화생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향로를 받치는 용은 향수해를, 연꽃잎 위의 세계는 비로자나불이 머무는 이상향인 연화장 세계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꼭대기의 봉황은 천계(天界)를, 5명의 악사와 기러기 등은 백제의 5부 체제를 상징하며 고대 동북아의 전통사상이 반영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이는 도교적 세계관과도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도교와 불교의 습합'이라는 해석에 반론이 제기된다. 향로의 여러 도상이 불교 경전 내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가루라(금시조) 목 아래 여의주', '신선들의 기악 연주'(『대반열반경』), '다양한 악기 연주'(『묘법연화경』) 등의 기록이 존재한다.[7] 특히 · 시대 불교계는 도교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으므로, 당시 불교를 격의불교로만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향로 도상에 대한 지나친 추정보다는 구체적인 문헌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또한, 향로에 묘사된 악기 중 '완함(阮咸)'은 백제 멸망 이후인 7세기 당나라에 처음 소개되어 8세기에 널리 사용된 악기라는 점(신당서 기록)도 주목할 만하다. '완함'은 쿠차에서 유래했으며, 키질 석굴에서 초기 형태를 볼 수 있다. 이는 향로가 단순히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서역 문화와의 교류 가능성까지 시사하며 그 복합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종합적으로 볼 때, 백제 금동대향로는 현실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조형미를 보여주며, 불교도교적 요소가 함께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용과 봉황의 조합은 음양 사상을 떠올리게 하며, 불교 사찰 터에서 발굴되었다는 점도 불교와의 관련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향로의 독특한 형태와 정교함은 이것이 단순한 사상의 표현을 넘어, 백제 왕실의 조상 숭배 의식이나 특별한 국가적 제례에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시사한다. 이처럼 백제 금동대향로는 다양한 문화와 사상이 어우러진 백제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동시에, 여전히 많은 연구 과제를 남기고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4. 3. 동북아시아 전통 사상 반영

백제 금동대향로의 기원을 중국 한나라의 박산 향로(博山香爐)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 이는 길쭉한 받침 위에 알 모양 몸체를 얹은 박산 향로의 형식적 유사성에 근거하지만, 백제 금동대향로는 중국의 박산 향로에 비해 미적 아름다움과 제작 기술의 정교함이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6] 백제 금동대향로는 지난 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굴 성과 중 하나로, 백제 왕조 연구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왔으며, 정교한 기술과 높은 안목으로 이상적인 세계를 섬세하게 추구했던 백제인들의 정신을 담고 있다.

불교 문화 연구가들은 이 향로가 불교의 연화화생설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불교의 이상향인 연화장 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있는 광대하고 장엄한 세계를 의미하는데, 이 세계의 맨 아래에는 풍륜이 있고 그 위에 향수해가 있으며, 향수해에 큰 연꽃이 핀 것을 연화장이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은 향수해를, 연꽃잎 위의 세계는 이상 세계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향로 꼭대기의 봉황은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신성시된 천계(天界)를, 몸체에 새겨진 5명의 악사와 기러기는 백제의 5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 금동대향로에는 고대 동북아시아의 전통 사상이 반영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최근에는 백제 금동대향로가 단순히 '도교불교의 습합'을 반영했다는 기존의 견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불교 경전에서 '가루라(금시조)의 목 아래에 여의주가 있다'거나, '신선이 기악을 연주한다', '사람이 북, 퉁소, 거문고, 비파 등을 연주한다'는 기록을 근거로, 향로의 도상을 불교 경전 내에서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7] 특히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 불교계에서는 도교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당시 불교를 단순한 격의불교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따라서 향로 도상에 대한 지나친 추정보다는 구체적인 문헌 근거를 통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된다.

최근까지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로 구성된 한국 연구팀은 백제 향로가 구조와 디자인, 특히 부조로 새겨진 5명의 악사에서 고대 중국의 원형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백제 향로가 한나라의 박산 향로(博山香爐)를 모방한 것으로 널리 믿어졌다. 부조로 새겨진 악기는 또 다른 연구 단서를 제공하는데, '완함'(阮咸)이라는 악기는 백제 멸망 이후인 7세기 당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당서에 따르면 이 악기는 8세기 당나라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백제 향로가 제작된 지 약 100년 후 당나라 시대의 저명한 예술가를 기려 악기 이름이 '완함'으로 명명되었다. '완함'은 쿠차에서 유래되었으며, 키질 석굴에서 이 악기의 가장 초창기 형태를 볼 수 있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표현이 특징이며, 불교도교의 주제를 통합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용과 봉황의 모습은 음양 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향로가 불교 사찰 터에서 발굴되었다는 점은 이러한 해석에 무게를 더한다. 그러나 이 유물의 독특함은 향로가 조상 숭배 의식이나 다른 특별한 의례에 사용되었을 가능성 또한 시사한다.

4. 4. 도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

백제 금동대향로의 도상에 대한 해석은 여러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초기에는 중국 한나라의 박산 향로(博山香爐|박산 향로중국어) 형식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는 길쭉한 받침대 위에 알 모양 몸체를 얹은 형식적 유사성에 근거하지만, 백제 금동대향로는 중국의 박산 향로와 비교했을 때 미적 아름다움과 제작 기술의 정교함에서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6]

불교 문화 연구가들은 이 향로가 불교의 연화화생설과 관련이 깊다고 본다. 불교의 이상향인 연화장 세계는 비로자나불이 머무는 광대하고 장엄한 곳으로, 가장 아래에는 바람(풍륜)이 있고 그 위에 향기로운 바다(향수해)가 있으며, 이 바다에 거대한 연꽃이 핀 모습(연화장)으로 묘사된다. 이 해석에 따르면, 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은 향수해를, 연꽃잎 위의 세계는 이상 세계를 상징한다.

또한, 향로 꼭대기의 봉황은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신성하게 여겨진 하늘 세계(천계)를 나타내고, 5명의 악사와 기러기 등은 백제의 5부 체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 고유의 전통 사상이 반영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최근에는 향로의 도상이 도교와 불교가 혼합된 결과라는 기존의 견해에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불교 경전에서 향로 도상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가루라(금시조)의 목 아래에 여의주가 있다'는 기록이나, 『대반열반경』의 '신선이 기악을 연주한다', 『묘법연화경』의 '사람들이 북, 퉁소, 거문고, 비파 등을 연주한다'는 구절 등이 제시된다.[7] 이는 향로의 도상이 불교 경전 내에서도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 불교계에서는 『홍명집』 등을 통해 도교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으므로, 당시 불교를 단순히 도교와 융합된 '격의불교'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향로 도상에 대한 지나친 추측보다는 구체적인 문헌 근거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한편, 백제 금동대향로가 중국 한나라의 박산 향로를 모방했다는 기존의 통설은 최근 한국 연구팀의 연구를 통해 반박되고 있다. 연구팀은 향로의 구조와 디자인, 특히 부조로 새겨진 5명의 악사 모습이 고대 중국의 원형과는 다르다는 점을 밝혀냈다. 또한, 악사들이 연주하는 악기 중 '완함(阮咸)'은 백제가 멸망한 이후인 7세기 당나라에 처음 소개된 악기라는 점도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신당서 기록에 따르면 완함은 8세기 당나라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그 이름은 백제 향로가 만들어진 지 약 100년 후의 유명한 연주가 완함의 이름을 딴 것이다. 완함 악기는 쿠차 지역에서 유래했으며, 키질 석굴 벽화에서 그 초기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백제 금동대향로의 독창성을 뒷받침한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현실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조형미를 보여준다. 불교도교의 요소가 함께 나타나지만, 일부에서는 용과 봉황 등을 통해 음양 사상과 같은 동북아시아 고유의 문화적 주제를 상징한다고 보기도 한다. 향로가 불교 사찰 터에서 발굴되었다는 점도 이러한 해석에 힘을 싣는다. 그러나 이 유물의 독특함은 단순히 종교적인 상징을 넘어, 조상 숭배 의식이나 다른 특별한 국가적 의례에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시사한다.

참조

[1] 웹사이트 "[Visual History of Korea] The Baekje Empire of East Asia distilled in gilt-bronze incense burner" https://www.koreaher[...] 2023-04-21
[2] 저널 중국 박산향로에 관한 고찰 국립중앙박물관 1994
[3] 서적 HISTERICA 한국사 고구려+백제
[4] 서적 역사스페셜 (원작 KBS 역사스페셜) 효형출판
[5] 서적 백제금동대향로 도서출판 학고재
[6] 서적 중국 박산향로에 관한 고찰 국립중앙박물관 1994
[7] 저널 A Re-examination of the Top of Baekje Incense Burner Icon- The Possibility of Being Interpreted as Garuḍa - http://dx.doi.org/10[...] 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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