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펄로 브레이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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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버펄로 브레이브스는 1970년부터 1978년까지 활동한 NBA 확장팀이었다. 1970년 창단되어 1970-71 시즌에 리그에 참가했으며, 밥 코프먼, 밥 맥아두 등의 선수와 잭 램지 감독의 지휘 아래 1973-74 시즌 플레이오프에 처음 진출했다. 1974-75 시즌에는 맥아두가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팀은 1975-76 시즌까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구단주와 지역 사회의 갈등, 선수 매각 등으로 인해 쇠퇴했다. 결국 샌디에이고로 연고지를 이전하여 샌디에이고 클리퍼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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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펄로 브레이브스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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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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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 1970년 |
해체 | 1978년 |
역사 | 버펄로 브레이브스 (1970년–1978년) 샌디에이고 클리퍼스 (1978년–1984년)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1984년–현재) |
경기장 | 버펄로 메모리얼 오디토리움 |
연고지 | 뉴욕주 버펄로 |
상징색 | 검정, 하양, 오렌지, 컬럼비아 블루 |
일반 | |
리그 | NBA |
콘퍼런스 | 동부 콘퍼런스 (1970년~1978년) |
디비전 | 애틀랜틱 디비전 (1970년~1978년) |
구단 정보 | |
구단주 | 존 Y. 브라운 주니어 해리 T. 맹규리언 주니어 (마지막 구단주) |
단장 | 에디 도노반 (1970년–1975년) (마지막 단장) |
코칭 스태프 | |
감독 | 돌프 셰이스 (1970년–1972년) 조니 매카시 (1972년) 잭 램지 (1972년–1976년) 테이츠 로크 (1976년–1977년) 밥 맥키넌 (1977년) 조 멀레이니 (1977년) 코튼 피츠시몬스 (1977년–1978년) (마지막 감독) |
우승 기록 | |
리그 우승 | 없음 |
콘퍼런스 우승 | 없음 |
디비전 우승 | 없음 |
플레이오프 | |
플레이오프 진출 | 3회 1974년 1975년 1976년 |
2. 역사
1970-71 NBA 시즌에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 함께 NBA 확장 팀으로 창단되었다.[6] 초기에는 뉴욕 시의 투자 회사 Neuberger Loeb이 소유했으나, 리그가 팀을 통제하게 되었고, 이후 기업가 폴 스나이더가 400만달러에 프랜차이즈를 인수했다.[6] 버펄로 기념 강당에서 홈 경기를 치렀으며, 버팔로 세이버스, 캐니시우스 칼리지 골든 그리핀스와 경기장을 공유했다.[4] 1971년부터 1975년까지 토론토의 메이플 리프 가든스에서 총 16번의 홈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4] NBA는 이전에 로체스터 로열스와 시라큐스 내셔널스(현재 각각 새크라멘토 킹스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두 팀을 업스테이트 뉴욕에 보유했었다.
초대 헤드 코치는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돌프 셰이스였으며, 첫 스타 선수는 밥 코프먼과 돈 메이였다.[6] 1970년 NBA 드래프트에서 캘빈 머피를 놓치고 존 험머를 지명했다. 첫 시즌은 22승 60패로 부진했지만, 코프먼은 1971년 NBA 동부 컨퍼런스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1972-73 시즌에는 잭 램지 박사를 새로운 헤드 코치로 맞이했지만, 21승 61패로 부진했다.[1] 1972년 10월 20일 보스턴 셀틱스와의 경기에서 4쿼터에 58점을 기록하며 NBA 한 쿼터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다.[1] 같은 시즌, 밥 맥아두를 드래프트했다.[1] 1974년에는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셀틱스에 패했다.[1] 그 시즌, 맥아두는 평균 30.6득점과 15.1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신인 어니 디그레고리오는 NBA 신인상을 수상했다.[1]
1974-75 시즌에 밥 매카두는 NBA MVP를 수상했다.[1] 브레이브스는 1974-75 시즌과 1975–76 시즌 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1]
1976년까지 구단주 스나이더는 팀 매각 압박에 직면했다.[6] 제임스 뎀스케 신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팀 매각을 결정했다.[6] 1976년, 존 Y. 브라운 주니어에게 프랜차이즈를 매각했고, 브라운은 팀을 해체하기 시작했다.[6] 모제스 말론 등을 트레이드했고, 팀은 마지막 2년간 부진한 성적과 관중 수 감소를 겪었다.[6] 존 Y. 브라운은 어브 레빈과 팀을 교환하는 계약을 협상했고, NBA 구단주들은 팀 이전을 허용했다.[9][10] 1977–78 시즌 이후 샌디에이고로 이전하여 샌디에이고 (현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가 되었다.[9][10]
2. 1. 창단과 초기 (1970-1972)
브레이브스는 1970-71 시즌에 경기를 시작한 세 개의 NBA 확장 팀 중 하나였다(다른 팀들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였다). 원래 버팔로와 거의 관련이 없는 뉴욕 시의 투자 회사인 Neuberger Loeb이 소유했으나, 일련의 실수로 인해 팀이 프리시즌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리그가 팀을 통제하게 되었다. 개막일 밤, 당시 33세였던 기업가 폴 스나이더는 Freezer Queen 사업 매각으로 최근 현금을 확보하여 400만달러에 프랜차이즈를 인수했다.[6] 브레이브스는 버팔로 기념 강당에서 홈 경기를 치렀으며, 내셔널 하키 리그(NHL)의 버팔로 세이버스(1970년 창단)와 지역 대학 농구 팀인 캐니시우스 칼리지 골든 그리핀스와도 경기장을 공유했다. 브레이브스는 경기 날짜 선택에서 세이버스와 캐니시우스 칼리지에 이어 세 번째 순위였기 때문에, 1971년부터 1975년까지 토론토의 메이플 리프 가든스에서 총 16번의 홈 경기를 치렀다. 이는 강당의 일정 문제를 해결하고 웨스턴 뉴욕 너머 광역 토론토 지역까지 팬층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이었다.[4] NBA는 이전에 업스테이트 뉴욕에 로체스터 로열스와 시라큐스 내셔널스(현재 각각 새크라멘토 킹스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두 팀을 보유했었다. 2022년 현재, 브레이브스는 뉴욕 시(뉴욕 닉스와 브루클린 네츠 소재)를 제외한 뉴욕주에 기반을 둔 마지막 NBA 팀이다.팀의 초대 헤드 코치는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돌프 셰이스였으며, 프랜차이즈의 첫 번째 스타 선수는 1970년 NBA 확장 드래프트에서 영입된 밥 코프먼과 돈 메이였다. 그러나 1970년 NBA 드래프트에서 버팔로는 나이아가라 대학교 출신의 고향 영웅인 캘빈 머피를 놓치고, 대신 프린스턴 대학교 졸업생 존 험머를 1라운드 지명으로 선택했다. 머피는 결국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첫 해 확장 팀의 전형적인 모습처럼, 브레이브스는 22승 60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확장 동료 팀인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15승 67패로 7게임 차이로 앞섰다. 전년도에 시카고 불스에서 경기당 평균 4.3점을 기록했던 코프먼은 경기당 20.4점으로 버팔로의 득점을 이끌었고, 1971년 NBA 동부 컨퍼런스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2. 2. 잭 램지 감독 시대와 플레이오프 진출 (1972-1976)
1972-73 시즌에 팀은 잭 램지 박사를 새로운 헤드 코치로 맞이했지만, 21승 61패로 약간 부진했다.[1] 1972년 10월 20일 시즌 다섯 번째 경기에서 브레이브스는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4쿼터에 58점을 기록하며 NBA 한 쿼터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1] 하지만, 당시 셀틱스는 이미 브레이브스를 103-60으로 크게 앞서고 있었고, 마지막 쿼터에 교체 선수들을 투입하면서 브레이브스가 반격할 수 있었다.[1] 브레이브스는 셀틱스보다 58-23으로 더 많은 점수를 냈지만, 결국 126-118로 패했다.[1]같은 시즌, 브레이브스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포워드/센터 밥 맥아두를 드래프트했다.[1] 1974년, 브레이브스는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셀틱스와 맞붙었지만 6경기 만에 패했다.[1] 그 시즌, 맥아두는 평균 30.6득점과 15.1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이는 NBA 역사상 한 선수가 한 시즌에 평균 30득점 이상, 15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마지막 사례이다.[1] 또한, 브레이브스의 신인 어니 디그레고리오는 NBA 신인상을 수상했다.[1]
1974-75 시즌에 밥 매카두는 평균 34.5득점, 14.1리바운드, 2.12블록을 기록하고 야투 성공률 51.2%와 자유투 성공률 80.5%를 기록하며 NBA MVP를 수상했다.[1] 브레이브스는 1974-75 시즌과 1975–76 시즌 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1975-76 시즌은 버펄로에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해였다.[1]
2. 3. 혼란과 쇠퇴 (1976-1978)
브레이브스는 당시 코트 안팎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팬 수는 리그 평균에 가까웠고, 방송 시청률도 좋았으며, 꾸준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6년까지 구단주 스나이더는 팀을 매각하고 버펄로에서 내보내라는 압박에 직면했다.[6]브레이브스는 오드(기념 경기장)에서 세 번째 경기 날짜만 배정받았는데, 이 때문에 NBA 전체는 세이버스와 그리핀스가 일정을 확정하기 전까지 일정을 확정하고 텔레비전 계약을 체결할 수 없었다. NBA는 이를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하여 스나이더에게 5년 안에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스나이더는 오드에서 좋은 홈 경기 날짜를 잡기 어렵게 만든 것에 대해 카네시우스 대학 총장 제임스 뎀스케 신부를 비난했다. 스나이더는 뎀스케에게 토요일 밤 경기 날짜를 브레이브스에 넘겨주는 대가로 경기당 12.5만달러를 제안했지만, 뎀스케는 브레이브스가 대학 농구의 리틀 쓰리 라이벌 관계에 위협이 된다고 믿고 거절했다. 5년의 마감 기한이 지나자, 스나이더는 새로운 경기장을 건설하거나 팀을 매각해야 했다. 당시 새로운 경기장을 건설하는 것은 재정적으로 어려웠고, 스나이더는 팀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6]
스나이더는 버펄로의 구 귀족 계층을 대표하는 세이버스 소유주 노스롭과 세이모어 녹스와 갈등을 빚었는데, 반면 스나이더는 ''신흥 부자''였다. 스나이더는 이러한 갈등이 스포츠 구단주로서의 경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하키 경쟁에 대해 더 화해적인 태도를 보였다.[6]
1976년 6월 15일, 버펄로의 ''쿠리어-익스프레스''는 "브레이브스, '하키 타운'을 떠나 플로리다로 가다"라는 헤드라인을 보도했다. 스나이더는 호텔 소유주 어빙 코완에게 팀을 610만달러에 매각하기로 합의했고, 코완은 브레이브스를 마이애미 외곽의 할리우드 스포타토리움으로 옮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버펄로 시는 이 이적을 막기 위해 1,000만 달러의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매각은 무산되었고, 브레이브스와 시는 7월에 새로운 15년 기념 강당 임대 계약을 체결했는데, 어떤 시즌에도 팀이 5,000장의 시즌 티켓을 판매하지 못하면 임대 계약이 무효화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해 여름, 스나이더는 프랜차이즈의 50%를 아메리칸 농구 협회 (ABA)의 켄터키 콜로넬스를 소유했던 사업가 존 Y. 브라운 주니어에게 매각했다. 브라운은 나중에 1976-77 시즌 중 스나이더로부터 나머지 지분을 인수했고, 그 지분을 또 다른 사업가 해리 T. 망구리안 주니어에게 재판매했다.[6]
브라운과 망구리안은 브레이브스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램지는 소유권 변경으로 경력에 피해를 입고 싶지 않아,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로 떠났다. 팀 매각 계약에는 브라운이 브레이브스 선수와의 계약을 매각할 경우 해당 금액은 스나이더에게 돌아가고 구매 가격은 삭감된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 조항에 따라 브레이브스는 시즌 중반에 맥아두를 선수와 현금과 교환하여 뉴욕 닉스로 보냈다. 시즌 첫 경기 전에 브레이브스는 포틀랜드에서 곧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센터 모제스 말론을 영입했지만, 2경기 6분 출전 후 트레이드되었다. 그는 두 개의 드래프트 지명권을 대가로 휴스턴으로 보내졌다. 브레이브스는 다음 두 시즌 동안 테이츠 로크, 밥 매키넌, 조 멀라니 (전 콜로넬스 코치), 코튼 피츠시몬스 등 4명의 헤드 코치를 거쳤다.[6]
팀은 마지막 2년간 부진한 성적(1976–77 시즌 30승 52패, 1977–78 시즌 27승 55패)을 기록했고, 메모리얼 오디토리엄 임대 계약을 파기하려는 의도로 인해 관중 수가 임대 계약 파기 조건 이하로 떨어졌다.[6] 존 Y. 브라운은 당시 셀틱스를 소유하고 있던 어브 레빈과 팀을 교환하는 계약을 협상했다. 브라운은 셀틱스를, 레빈은 브레이브스를 인수하는 조건이었다. 레빈은 캘리포니아 사업가였고, 고향에서 NBA 팀을 소유하고 싶어했다. 그는 NBA가 셀틱스를 이전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브라운의 제안에 긍정적이었다. 이 거래는 당시 NBA 법률 고문 데이비드 스턴이 중개했다. 브레이브스의 마지막 시즌이 웨스턴 뉴욕에서 끝난 후, NBA 구단주들은 21대 1로 팀의 이전을 허용하는 투표를 했다. 레빈이 원했던 대로, 그는 1977–78 시즌 이후 샌디에이고에 있는 팀의 소유주가 되었고, 그 팀은 샌디에이고 (현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가 되었다.[9][10] 이 거래의 일환으로, 두 팀은 로스터에 있는 대부분의 선수들을 교환했다.[10]
3. 역대 홈경기장
경기장 | 사용기간 | 수용인원 | 장소 | 비고 |
---|---|---|---|---|
버펄로 메모리얼 오디토리움 | 1970년~1978년 | 15,280명 | 뉴욕주 버펄로 | |
메이플 리프 가든스 | 1971년~1975년 | 15,000명 | 온타리오주 토론토 | 제2홈경기장 |
브레이브스는 버펄로 메모리얼 오디토리움에서 홈 경기를 치렀으며, 내셔널 하키 리그(NHL)의 버펄로 세이버스와 경기장을 공유했다.[6] 1971년부터 1975년까지는 토론토의 메이플 리프 가든스에서 총 16번의 홈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4]
3. 1. 버펄로 메모리얼 오디토리움
경기장 | 사용기간 | 수용인원 | 장소 |
---|---|---|---|
버펄로 메모리얼 오디토리움 | 1970년~1978년 | 15,280명 | 뉴욕주 버펄로 |
3. 2. 메이플 리프 가든스
브레이브스는 1971년부터 1975년까지 토론토의 메이플 리프 가든스에서 총 16번의 홈 경기를 치렀다. 이는 버펄로 메모리얼 오디토리움의 일정 문제 때문이었는데, 브레이브스는 버팔로 세이버스와 캐니시우스 칼리지 골든 그리핀스에 이어 경기 날짜 선택에서 세 번째 순위였다.[4] 브레이브스는 웨스턴 뉴욕 너머 광역 토론토 지역까지 팬층을 확장하기 위해 국제 경기를 치렀다.[4]4. 역대 시즌별 성적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보스턴 셀틱스에 2–4로 패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