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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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봉산탈춤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가면을 쓰고 춤과 대사로 연극하는 한국의 전통 연희이다. 조선시대 각 지방에서 행해지던 가면극에서 유래하여, 약 200년 전부터 황해도 봉산 지역에서 단오와 하지날 밤에 공연되었다. 7과장으로 구성되며, 사상좌춤, 팔목중춤, 사당춤, 노장춤, 사자춤, 양반춤, 미얄춤 등을 통해 서민들의 삶, 양반 풍자, 파계승 비판, 여성 억압 등을 다룬다. 삼현육각 반주에 맞춰 춤을 추며, 춤사위가 활발하고 경쾌한 것이 특징이다.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여러 기능보유자를 통해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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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탈춤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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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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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국가무형문화재 |
지정 번호 | 17 |
지정일 | 1967년 6월 16일 |
전승 단체 | 봉산탈춤보존회 |
추가 정보 | |
놀이 주체 | 세습되어 온 지방 이속(주로 집사, 장교)이 이 놀이를 대대로 놀았음 |
2. 역사
봉산탈춤은 조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가면극이다. 조선 전기에는 각 지방에서 가면놀이가 행해졌고, 17세기 중엽에는 궁중에서 '산대'라는 무대에서 산대도감극 형태로 공연되었다. 그러나 인조 12년(1634)에 궁중 상연이 폐지되면서 민간으로 퍼져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약 200년 전부터 단오와 하지에 봉산탈춤이 행해졌다. 안초목은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등 봉산탈춤의 개혁을 이끌며 중흥시킨 인물이다. 이후 이속들이 봉산탈춤을 연희하면서 황해도 지방의 대표적인 탈춤이 되었다.
봉산탈춤은 5월 단오날 밤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새벽까지 연희되었다. 단오는 중부 이북 지방의 큰 명절로, 농사일이 바쁘지 않은 시기여서 벽사와 기년 행사, 하지 축제를 하기에 적절했다. 산대놀이가 관의 행사와 관련이 깊었던 반면, 봉산탈춤은 농민과 상인들을 위한 놀이였다. 하지만 고을 원님의 생일이나 부임, 중국 사신 영접 등 관아의 행사에도 공연되었다.
1915년경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옮겨지면서 봉산탈춤도 사리원 경암루 앞 광장에서 연희되었다.[1]
2. 1. 기원과 발전
탈춤은 조선 전기까지 각 지방에서 행해지던 가면놀이였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궁중에서 “산대”라 불리는 무대에서 공연되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형태로 연희되었으나, 인조 12년(1634)에 궁중 상연이 폐지되면서 민간으로 유입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봉산탈춤은 약 200년 전부터 단오와 하지날 밤에 행해졌다.봉산탈춤을 중흥시킨 인물은 약 200여 년 전 봉산의 이속(吏屬)이었던 안초목(安草木)으로, 그는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등 많은 개혁을 주도하였다. 이후 이속들이 주로 봉산탈춤을 연희하면서 해서지방의 대표적인 탈춤으로 자리 잡았다.
봉산탈춤은 연중행사의 하나로 5월 단오날 밤 모닥불을 피워놓고 연희되었으며,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단오는 남부지방의 추석과 맞먹는 중부 이북 지방의 명절로, 곡식의 씨앗을 뿌리고 난 직후 모내기할 때까지의 망중한(忙中閑) 시기여서 벽사와 기년(祈年) 행사, 나아가 하지 축제를 베풀기에 알맞은 때였다. 산대놀이가 비교적 전업화(專業化)된 놀이로서 관(官)의 행사와 관련이 깊었던 반면, 봉산탈춤을 비롯한 황해도 탈춤은 주로 농민과 장거리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놀이였다. 그러나 고을 원님의 생일이나 부임날과 같은 관아의 경사와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놀이로도 연희되었다.
1915년경 행정기관이 사리원(沙里院)으로 옮겨지면서 봉산탈춤도 사리원으로 옮겨져 경암루 앞 광장에서 연희되었다.
2. 2.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1915년경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옮겨지면서 봉산탈춤도 사리원 경암루 앞 광장에서 연희되었다.[1] 1945년 8·15 광복 이후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해 전승되다가 1967년 6월 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1] 월남한 연희자 중 이 놀이의 재현을 위해 힘써 온 김진옥(金辰玉)이 1969년 사망하면서 한동안 전수 위기를 겪었으나, 한국가면극연구회의 노력으로 현재는 전수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1]3. 구성 및 내용
봉산탈춤은 크게 7과장으로 나누어지며, 각 과장은 독립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서민들의 삶, 양반과 파계승에 대한 풍자, 남성의 여성에 대한 횡포 등을 다룬다.
봉산탈춤의 주요 내용은 서민들의 삶, 양반 계층에 대한 풍자, 파계승에 대한 풍자, 여성의 억압된 삶, 벽사와 풍요 기원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 서민들의 가난한 삶과 애환: 봉산탈춤은 당시 서민들의 고달픈 삶과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 양반 계층에 대한 풍자와 비판: 말뚝이를 통해 양반들의 허세와 위선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 파계승에 대한 풍자: 노장과 목중의 타락한 모습을 통해 당시 종교계의 부패상을 비판한다.
- 일부다처제로 인한 여성의 고통: 미얄할멈과 첩의 갈등을 통해 일부다처제 하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통과 억압을 보여준다.
- 벽사(辟邪)와 풍요 기원: 사자춤은 악귀를 쫓고 재앙을 막는 벽사의 의미를, 취발이 놀음에서의 모의적인 성행위와 출산 장면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의미를 지닌다.[1]
양주산대놀이와 비교했을 때 팔목중춤, 사당춤, 사자춤 과장이 다르다는 특징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목중, 노장, 양반, 미얄의 독립된 네 개의 놀이에 사당춤, 사자춤, 원숭이 놀이가 곁들여진 구성을 하고 있다.
3. 1. 과장 구성
봉산탈춤의 과장은 크게 7과장으로 나누어진다. 각 과장은 독립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서민들의 삶과 양반, 파계승에 대한 풍자, 남성의 여성에 대한 횡포 등을 다루고 있다.- 제1과장: 사상좌춤 - 사방신(四方神)에게 배례하는 의식무(儀式舞)이다.
- 제2과장: 팔목중춤 - 팔목중의 춤과 법구놀이로 구성된다.
- 제3과장: 사당춤 - 사당과 거사들이 흥겨운 노래를 주고받는다.
- 제4과장: 노장춤 - 노장이 소무의 유혹에 빠져 파계하는 장면, 신장수가 노장에게 신을 뺏기는 장면, 취발이가 노장으로부터 소무를 빼앗고 살림을 차리는 장면으로 구성된다. 이 중 취발이 놀음은 모의적인 성행위와 출산을 통해 풍요제의적(豊饒祭儀的) 성격을 띤다.
- 제5과장: 사자춤 - 사자를 통해 파계한 노장과 목중들을 징계한다.
- 제6과장: 양반춤 - 말뚝이가 양반 형제들을 희롱하는 장면이다.
- 제7과장: 미얄춤 - 영감, 미얄할멈, 첩의 삼각관계와 미얄할멈의 죽음, 그리고 미얄할멈의 원혼을 달래는 무당굿으로 끝난다.
봉산탈춤은 양주산대놀이와 비교했을 때 팔목중춤, 사당춤, 사자춤 과장이 다르다는 특징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목중, 노장, 양반, 미얄의 독립된 네 개의 놀이에 사당춤, 사자춤, 원숭이 놀이가 곁들여진 구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봉산탈춤은 양주 산대놀이와 동일한 산대도감의 한 분파라고 할 수 있다.
3. 2. 주요 내용 및 주제
봉산탈춤의 주요 내용은 크게 서민들의 삶, 양반 계층에 대한 풍자, 파계승에 대한 풍자, 여성의 억압된 삶, 그리고 벽사와 풍요 기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서민들의 가난한 삶과 애환: 봉산탈춤은 당시 서민들의 고달픈 삶과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 양반 계층에 대한 풍자와 비판: 말뚝이라는 인물을 통해 양반들의 허세와 위선을 신랄하게 폭로하고 비판한다. 말뚝이는 양반 형제들을 조롱하며 그들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 파계승에 대한 풍자: 노장과 목중의 타락한 모습을 통해 당시 종교계의 부패상을 비판한다. 노장은 소무의 유혹에 넘어가 파계하고, 목중들은 춤과 노래로 흥청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 일부다처제로 인한 여성의 고통: 미얄할멈과 첩의 갈등을 통해 일부다처제 하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통과 억압을 보여준다. 영감의 첩 때문에 고통받던 미얄할멈은 결국 영감에게 맞아 죽고, 무당굿을 통해 원혼을 달래는 장면은 여성의 한을 드러낸다.
- 벽사(辟邪)와 풍요 기원: 사자춤은 악귀를 쫓고 재앙을 막는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취발이 놀음에서의 모의적인 성행위와 출산 장면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의미를 지닌다.[1]
4. 연출 및 예술적 특징
봉산탈춤의 연출 형식은 피리, 젓대(대금), 북, 장구, 해금으로 구성된 삼현육각(꽹과리와 징을 추가하기도 한다) 반주에 맞춰 춤을 추고, 몸짓과 동작, 재담, 노래가 곁들여지는 가면무극이다. 크게 가무적 부분과 연극적 부분으로 나뉜다.
봉산탈춤은 전문 탈꾼이나 신명이 좋은 마을 사람들이 장터나 광장에서 연희하며, 길놀이부터 뒤풀이까지 전 과장을 36가지 배역으로 연기한다. 내용은 크게 7과장으로 나뉘지만, 각 과장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고, 각 과장 안에는 주제별 이야기가 나열되어 있다.
하위 섹션에서 가면, 춤사위, 연주, 의상 등 봉산탈춤의 예술적 특징을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연출 형식에 대한 간략한 개요만 제시한다.
4. 1. 연주
봉산탈춤의 연주는 피리, 젓대(대금), 북, 장구, 해금으로 구성된 삼현육각을 기본으로 한다. 경우에 따라 꽹과리와 징을 추가하기도 한다. 염불, 타령, 굿거리곡 등을 연주하며, 춤이 주가 되고 몸짓, 동작, 재담, 노래가 곁들여진다.4. 2. 춤사위
봉산탈춤의 춤사위는 한국 가면극 덧보기춤의 정수로 여겨질 만큼 활달하고 춤폭이 큰 것이 특징이다. 춤사위는 크게 사위춤과 몸짓춤으로 나눌 수 있다.사위춤사위춤은 사상좌, 팔목중, 취발이가 추는 춤으로, 한삼을 휘두르는 동작이 특징이며, 사악한 귀신을 쫓는 벽사(辟邪)의 성격을 띤다. 마치 성난 무사가 칼춤을 추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준다. 사위춤의 종류에는 외사위, 곱사위, 양사위, 만사위, 걸음사위, 등장사위, 발사위, 돌림사위가 있다.
팔먹중춤은 각 춤마다 짜임새가 있어 무용성이 강하며, 개성적인 춤이 끝나면 빠른 타령장단의 사위춤으로 바뀌는 것이 공통적이다. 팔먹중춤은 사방신에게 고하는 의식무(儀式舞)로, 긴 한삼을 사방에 휘날리며 춤을 추는 모습이 오방처용무의 구나무(驅儺舞)와 유사하다.
몸짓춤몸짓춤은 춤과 연기가 결합된 형태로, 춤과 함께 극적인 표현이 이루어진다. 몸짓춤에는 노장춤, 말뚝이춤(두어춤), 취발이춤(깨끼춤), 미얄춤(궁둥이춤) 등이 있다.
- 노장춤: 노장이 파계하는 과정을 춤으로 표현한다.
- 말뚝이춤(두어춤): 말뚝이가 양반을 조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취발이춤(깨끼춤): 취발이가 노장과 대립하며 재물을 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미얄춤(궁둥이춤): 미얄할미가 영감을 찾아 헤매는 과정을 춤으로 표현한다.
4. 3. 가면

봉산탈춤에는 총 26개의 탈이 사용된다. 상좌 4개, 목중 8개, 거사 6개, 사당 1개, 소무 1개, 노장 1개, 신장수 1개, 원숭이 1개, 취발이 1개, 맏양반 1개, 둘째 양반(서방님) 1개, 셋째 양반(종가집 도련님) 1개, 말뚝이 1개, 영감 1개, 미얄 1개, 덜머리집 1개이다.
주요 배역의 탈은 귀면형(鬼面型)의 목탈로, 종이로 만들어진다. 흙으로 만든 틀 위에 종이를 여러 겹 붙여 만든 후, 흰색, 검은색, 붉은색, 주황색 등으로 채색하고 금종이로 장식한다.
각 탈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탈 | 개수 | 특징 |
---|---|---|
상좌 | 4 | 흰 바탕에 검은색으로 머리, 눈썹, 눈 가장자리를 그리고 입술은 붉게 칠했다. 눈과 입은 뚫려 있고, 귀는 없으며 흰 탈보를 달았다. |
목중 | 8 | 주황색 바탕에 검은 반점이 많고, 이마와 미간, 양 볼, 턱 등에 혹이 있으며 혹 위에 금종이를 붙였다. 눈동자가 튀어나왔고, 입은 열려 있다. |
거사 | 6 | 목중탈을 공용하며, 홀아비 거사는 가마니나 거적을 둘러멘다. |
사당 | 1 | 소무탈을 공용한다. |
소무 | 1 | 흰 바탕에 검은색으로 머리와 눈썹, 눈 가장자리를 그렸다. 연지와 곤지를 찍고 입술은 붉게 칠했으며, 눈과 입은 뚫려 있다. |
노장(승) | 1 | 검푸른 바탕에 흰 점과 금색 점을 찍었고, 흰색으로 눈썹을 표시했다. 미간, 볼, 턱에 혹이 있고 금종이를 붙였다. |
신장수 | 1 | 연한 살색 바탕에 눈썹과 수염을 그렸고, 입술은 붉게 칠하고 입을 뚫었다. (목중탈을 겸용하기도 한다) |
원숭이 | 1 | 붉은 얼굴 바탕에 코 밑에 흰 점을 많이 찍었고, 눈은 뚫렸으며 머리 가장자리에 모피를 둘렀다. |
취발이 | 1 | 목중탈과 제작법이 같으나 얼굴이 가장 길고 크다. 흰 털과 쇠꼬리로 만든 누른 털(상투)이 있다. |
맏양반(샌님) | 1 | 흰 바탕에 흰 털 수염과 눈썹을 달고, 콧등에 두 줄로 홈처럼 팬 상처가 있다. |
둘째 양반(서방님) | 1 | 맏양반과 같으나 콧등에서 입까지 한 줄로 째졌다. |
셋째 양반(종가집 도련님) | 1 | 연분홍 살색 바탕에 검은 머리를 그리고, 입이 왼쪽으로 비뚤어졌다. |
말뚝이 | 1 | 황갈색 바탕에 검은 눈썹을 그리고, 입가 전체에 흰 점을 찍어 수염을 나타냈다. |
영감 | 1 | 흰 합죽이 얼굴에 흰 수염과 흰 털 눈썹을 달고, 눈은 금테를 둘렀다. |
미얄 | 1 | 검은 바탕에 흰 점과 붉은 점을 찍었고, 난간이마에 조개턱, 우묵눈이다. |
덜머리집(용산삼개) | 1 | 흰색 바탕에 머리와 눈썹을 검은색으로 그리고, 틀어 올린 머리에 붉은 댕기를 달았다. |
4. 4. 의상
봉산탈춤에 등장하는 배역은 총 34명이지만, 겸용하는 탈이 있어 실제 사용되는 가면은 26개이다. 주요 배역의 의상은 다음과 같다.- 목중: 화려한 더거리에 붉고 푸른 띠를 매고, 소매에는 흰 한삼을 단다. 다리에는 행전을 치고 웃대님을 맨다. 먹중춤은 한삼소매를 휘어잡고 뿌리거나 흩뿌리면서 두 팔을 빠르게 굽혔다 펴는 '깨끼춤'이 기본이 되는 건무(健舞)이다.
- 미얄: 흰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부채, 방울, 붉은 수건 등을 사용한다.
- 양반: 도포, 정자관, 부채, 지팡이 등을 사용한다.
봉산탈춤의 탈은 팔먹중, 노장, 취발이탈과 같은 귀면형(鬼面型)의 목탈이 주요 배역을 맡고 있다.
5. 전승 및 보존
1945년 광복 이후 월남한 몇몇 연희자들에 의해 봉산탈춤이 전해지다가 1967년 6월 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한국가면극연구회의 노력으로 현재는 전수 사업을 활발히 펴고 있으나, 월남한 연희자 중 이 놀이의 재현을 위해 힘써 온 김진옥(金辰玉)이 1969년 사망하면서 한동안 전수에 위기가 있었다.
5. 1. 기능보유자
이름 | 출생년도 | 역할 |
---|---|---|
이근성(李根成) | 1895년 | 목중, 취발이, 사자 |
양소운(梁蘇云) | 1924년 | 사당, 미얄, 무당 |
김용익(金龍益) | 1902년 | 목중, 사자, 마부, 거사 |
윤옥(尹玉) | 1925년 | 상좌무, 돌머리집, 목중 |
5. 2. 현대의 전승
1945년 광복 이후 월남한 몇몇 연희자들에 의해 봉산탈춤이 전해지다가 1967년 6월 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월남한 연희자 중 이 놀이의 재현을 위해 힘써 온 김진옥(金辰玉)이 1969년 사망하면서 한동안 전수에 위기가 있었으나, 한국가면극연구회의 노력으로 현재는 전수 사업을 활발히 펴고 있다.기능보유자는 다음과 같다.
이름 | 출생년도 | 역할 |
---|---|---|
이근성(李根成) | 1895년 | 목중, 취바리, 사자 |
양소운(梁蘇云) | 1924년 | 사당, 미얄, 무당 |
김용익(金龍益) | 1902년 | 목중, 사자, 마부, 거사 |
윤옥(尹玉) | 1925년 | 상좌무, 돌머리집, 목중 |
6. 한국 사회에 대한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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