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비니시오 세레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비니시오 세레소는 과테말라의 정치인으로, 1985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그는 과테말라 시티에서 태어나 산 카를로스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학생 시절부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74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80년대에는 군정 비판에 앞장섰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중앙아메리카 평화 협정을 추진하고, 과테말라 국민혁명연합(URNG)과의 대화를 시도했지만, 쿠데타 시도와 경제적 어려움, 군부의 폭력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퇴임 후에는 중앙아메리카 통합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중앙아메리카 통합 시스템(SICA)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1세기 과테말라 사람 - 리고베르타 멘추
    과테말라 내전 중 가족의 비극을 겪고 자서전을 통해 과테말라 원주민의 고통을 세계에 알린 리고베르타 멘추는 199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키체 마야 원주민 인권 운동가이자 유네스코 친선대사이다.
  • 21세기 과테말라 사람 - 베르나르도 아레발로
    베르나르도 아레발로는 과테말라의 정치인이자 사회학자로, 2024년부터 과테말라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며, 2023년 대선에서 세밀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어 부패 척결과 사회 개혁을 추진하고 대외적으로는 대만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니카라과 및 베네수엘라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 20세기 과테말라 사람 - 리고베르타 멘추
    과테말라 내전 중 가족의 비극을 겪고 자서전을 통해 과테말라 원주민의 고통을 세계에 알린 리고베르타 멘추는 199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키체 마야 원주민 인권 운동가이자 유네스코 친선대사이다.
  • 20세기 과테말라 사람 - 베르나르도 아레발로
    베르나르도 아레발로는 과테말라의 정치인이자 사회학자로, 2024년부터 과테말라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며, 2023년 대선에서 세밀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어 부패 척결과 사회 개혁을 추진하고 대외적으로는 대만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니카라과 및 베네수엘라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비니시오 세레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마르코 비니시오 세레소 아레발로
원어 이름Marco Vinicio Cerezo Arévalo
출생일1942년 12월 26일
출생지과테말라 과테말라 시티
사망일(생존)
배우자라켈 블란돈(2005년 이혼)
정당기독교민주당
직책
직위중앙 아메리카 통합 시스템 사무총장
임기 시작2017년 6월 29일
임기 종료2021년 6월 29일
이전Victoria Marina Velásquez
이후Werner Vargas Torres
과테말라 대통령
대수40대
임기 시작1986년 1월 14일
임기 종료1991년 1월 14일
부통령로베르토 카르피오 니콜레
이전오스카르 움베르토 메히아
이후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
기타 정보
비니시오 세레소 공식 사진
공식 사진, 1986년

2. 생애

세레소는 과테말라 시티에서 태어나 1968년 산 카를로스 대학교(USAC) 법학과를 졸업했다. 재학 시절부터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2년 미구엘 이디고라스 정부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시위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1964년 과테말라 기독교 민주당(DCG)에 합류하여 1970년 당 서기가 되었다. 당시 과테말라는 매우 긴장된 정치 상황이었고, 세레소는 상시 경호를 고용해야 할 정도였다. 1981년 2월에는 세 차례의 암살 시도 중 가장 심각한 공격을 받아 수도 중심부에서 수류탄과 기관총 공격을 받기도 했다.

1974년 DCG는 대통령 후보로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장군을 지지했지만, 부정선거 의혹 속에 리오스 몬트는 패배했다. 세레소는 과테말라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DCG는 14석을 차지하며 야당 내 최대 정당이 되었다.

1978년 DCG 후보인 리카르도 페랄타 멘데스 장군은 페르난도 로메오 루카스 가르시아에게 밀려 2위를 차지했다. 루카스 가르시아 집권 기간 동안 150명의 DCG 당원이 살해되었고, 세레소는 1982년 3월 선거에 나타나 야당 후보 알레한드로 말도나도 아기레를 지지했지만, 그는 공식 후보인 안헬 아닐발 게바라에게 패배했다.

이후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자, 세레소는 처음에는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리오스 몬트 정권의 탄압이 심해지고, 광신적인 복음주의 설교를 하자 세레소는 지지를 철회하고 새로운 선거를 요구했다. 1983년 오스카르 우베르토 메히아 장군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았고, 세레소는 신중하게 이를 지지했다. 1984년 국회 선거에서 DCG는 21.2%의 득표율을 얻어 88석 중 20석을 차지하며 최대 정당이 되었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DCG는 1985년 대통령 선거에 세레소를 후보로 내세웠다. 세레소는 과테말라 국가 혁명 연합(URNG)과의 대화를 추진했다.

1985년 11월 3일 치러진 과테말라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서 세레소는 38.6%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고, 12월 8일 2차 투표에서 68.4%의 득표율로 호르헤 카르피오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DCG는 의회 100석 중 51석을 확보하고 전국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다수당이 되었다. 그는 1966년 이후 처음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자 민간인 대통령이었다. 취임식에서 그는 우익 세력이 공공 질서나 국가를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며, 취임 126일 이내에 과테말라를 변화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대통령으로서 그의 첫 조치 중 하나는 인권 침해 혐의를 받던 로돌포 로보스 사모라를 군에서 강제로 은퇴시키고 하이메 에르난데스 멘데스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한 것이었다.[1]

세레소 정부는 출범 직후 새로운 테러의 물결에 직면했다. 비정부기구(NGO)인 아메리카스 워치(Americas Watch)에 따르면, 1986년에만 매달 100명이 갈등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세레소는 이웃 나라인 엘살바도르니카라과에서 발생하고 있던 내전에 대해 중립을 선언하고, 중앙아메리카 의회 구성을 적극 지지했다. 에스키풀라스에서 열린 두 차례의 중요한 회의를 통해 중앙아메리카 통합에 기여했으며, 특히 1987년 8월 두 번째 회의에서 "확고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위한 절차"를 수립하여 지역 평화 재건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1987년 9월 11일, 세레소는 국가화해위원회(CNR)를 설립하고, 10월 7일 URNG와 정부 간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틀 후 정부가 URNG의 조건을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세레소는 미국의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10월 28일, 의회는 일반적인 정치 사면을 통과시켰다. 세레소에 대한 음모와 암살 시도 가능성에 대한 소문이 돌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무능력하다고 여겼다. 1988년 5월 11일 두 명의 대령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5월 19일 공군은 친소련 국가와의 관계 단절, URNG와의 모든 접촉 중단, 더 많은 자금 지원 등을 요구했다. 세레소는 쿠데타를 피하기 위해 군대의 요구를 일부 수용해야 했다. 8월에는 석유 및 기타 연료의 자유화에 항의하는 3주간의 총파업이 있었다.

1989년에는 정치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상반기에만 1,600건의 암살과 800건의 납치 또는 실종 사건이 발생했다. 5월 9일 또 다른 쿠데타 시도가 실패했고, 8월 1일 DCG 사무총장 다닐로 바릴라스가 암살당했다. 그러나 8월 25일, 세레소는 남은 임기 동안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공공 행정을 개혁하겠다는 새로운 약속을 발표했다.

1990년 5월, 세레소 정부와 URNG는 마드리드에서 중요한 합의에 서명하여 다가오는 선거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세레소는 1951년 이후 처음으로 민주적인 권력 이양을 통해 후임인 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같은 해, 과테말라-러시아 관계 해빙의 일환으로 세레소는 저명한 러시아(Soviet Union) 언어학자이자 비문학자인 유리 크노로조프를 과테말라에 초청하여 훈장을 수여했다. 크노로조프는 마야 상형 문자 해독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그가 마야 문명 유적지를 방문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였다.

1990년 12월 1일, 한 무리의 군인들이 소롤라 주 산티아고 아틸란에서 농민 24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항의가 빗발치자 미국은 과테말라에 대한 군사 원조를 중단했다. 세레소 대통령은 이전 쿠데타로 인해 시골 지역에서 인권 침해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학살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Marco Vinicio Cerezo Arévaloes라는 본명을 가진 비니시오 세레소는 1942년 12월 26일 과테말라 시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마르코 비니시오 세레소 시에라는 대법원 판사였으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가문 출신이었다.[4]

세레소는 콜레히오 살레시아노 돈 보스코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산 카를로스 대학교(USAC)에서 법률 및 사회과학 학위를 취득했다.[7] 1968년에는 변호사 및 공증인 자격을 얻었다.[4] 대학교 재학 중에는 우수한 학생으로 두 번이나 선정되어 상을 받기도 했다.

1967년에는 로욜라 대학교 민주 리더십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7년에는 니카라과 가톨릭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산 카를로스 대학교 재학 시절, 세레소는 법학부 및 사회과학부 학생으로 활동했다. 1962년 3월부터 4월까지 학생 코디네이터의 일원으로 선출되었고, 1966년에는 법대 학생회 총무를 역임했다.

1962년 미구엘 이디고라스 정부에 대한 전국적인 시위에 참여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4년에는 과테말라 기독교 민주당(DCG)에 입당했고, 1968년 USAC에서 사법 과학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DCG가 공식적으로 합법화되면서 1970년 당 서기가 되었다.

2. 2. 대학 시절 및 정치 입문

산 카를로스 대학을 다니면서, 세레소는 법학부와 사회과학부에 들어갔다. 1962년 3월부터 4월까지 학생 코디네이터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1966년에는 법대의 학생회 총무로 일했다.[4]

1968년 법학 학위와 사회과학 학위를 딴 뒤, 변호사와 공증인 자격을 갖고 졸업했다. 대학 시절 두 번이나 우수한 학생으로 칭찬받았으며, 수상하기도 했다.[4]

학생 시절, 세레소의 정치적, 조직적 리더십은 다음 활동에 나타나 있다.

연도활동 내용
1963년문화적 학생 연합(Unión Cultural Estudiantiles)의 공동 창립자이자 발기인이었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담은 대학 논문 발행의 주최자 겸 발기인이었다.
1964년"제1회 중앙아메리카 학생 인권 회의" 주최
1964년-1965년우엘가 데 돌로레스 위원회의 멤버로 당선
1965년법학부위원회 학생대표로 당선
1966년-1967년법대의 학생회 총무로 당선. 이 기간 동안 "우수한 성적을 위한 학생 협력 협정" 달성
대학교 학생회 부의장으로 당선



세레소는 일찍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4] 1958년 혼란 속 선거에서 집권한 과테말라의 군인 출신 대통령이자, 재임 기간 동안 경제 사정이 악화되었고 부패를 만연시킨 장본인 중 하나였던 호세 라몬 이디고라스 푸엔테스 정권에 항거했던 조직을 이끌었다.[4] 그의 정권은 주변으로부터 비난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좌익혁명으로 붕괴되었다.[4] 1963년 3월 국방부장관 엔리케 페랄타 아수르디아 대령이 이끄는 군대가 그의 정부를 전복시켰다.[4] 그는 1962년 봄 USAC의 학생 코디네이터로 선출되었다.[4]

당시 세레소는 대학생들이 진보와 개혁을 해내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4] USAC의 학생협회를 이끈 이후, 세레소는 1968년 자신과 정치관이 잘 맞는 기독교민주당(DCG)에 입당하였다.[4] 1964년 그는 1966년 선거에서 출마가 금지된 과테말라 기독교 민주당(DCG)에 합류했다. 그는 1968년 USAC에서 사법 과학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DCG가 공식적으로 합법화되면서 1970년 당 서기가 되었다.

3. 정치 경력

세레소는 과테말라 시티에서 태어나 1968년 산카를로스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재학 시절부터 활발하게 정치 활동을 했다.

1962년 미구엘 이디고라스 정부에 대한 전국적인 시위에 참여했고, 1964년 과테말라 기독교 민주당(DCG)에 합류하여 1970년 당 서기가 되었다. 1974년 과테말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81년에는 수도 중심부에서 차량에 수류탄과 기관총 공격을 받는 등 세 차례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

1985년 대통령 선거에서 기독교민주당 후보로 출마, 38.6%의 득표율로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고, 2차 투표에서 호르헤 카르피오를 68.4%로 꺾고 당선되었다. 이는 1966년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이 선출된 사례였다.

세레소 정부는 이웃 국가인 엘살바도르니카라과의 내전에서 중립을 선언하고, 중앙아메리카 의회 구성을 지지했다. 1987년 에스키풀라스에서 열린 두 차례의 중요한 회의를 통해 중앙아메리카 평화 재건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1987년 9월, 국가화해위원회(CNR)를 설립하고, 10월에는 과테말라 국가 혁명 연합(URNG)과의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가 URNG의 조건을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세레소는 미국의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세레소의 임기 동안 여러 차례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1988년 5월에는 두 명의 대령이, 1989년 5월에는 약 300명의 군인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90년, 세레소 정부는 URNG와 마드리드에서 중요한 합의에 서명, 다가오는 선거를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세레소는 1951년 이후 처음으로 민주적인 권력 이양을 통해 후임자인 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세레소는 과테말라-러시아 관계 해빙의 일환으로, 마야 상형 문자 해독에 중요한 역할을 한 러시아 언어학자 유리 크노로조프를 과테말라에 초청하여 훈장을 수여했다.

3. 1. 민주화 운동

세레소는 일찍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4] 1962년 봄 과테말라 산 카를로스 대학교(USAC)의 학생 코디네이터로 선출되었고,[4] USAC 학생협회를 이끌었다. 이후 1968년 정치관이 맞는 기독교민주당(DCG, '기민당')에 입당했다.[4]

1978년부터 1982년까지 과테말라에서는 많은 지식인, 지방자치 의원, 학계 인사, 정치인들이 정부에 의해 살해되었다. 여기에는 마누엘 콜롬 아르게타, 알베르토 푸엔테스 모르 등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훌리오 아밀톤 노리에가, 로베르토 메르틴스, 리카르도 갈린도, 비니시오 아길라르, 플로렌시아 히타이 등 기독교민주당 인사들이 포함되었다. 세레소는 1981년 2월 14일 테러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1962년 세레소는 미구엘 이디고라스 정부에 대한 전국적인 시위에 참여했다. 1964년 과테말라 기독교 민주당(DCG)에 합류했고, 1970년 당 서기가 되었다. 1981년 2월, 세 차례의 암살 시도 중 최악의 사건에서 그의 차량은 수도 중심부에서 수류탄과 기관총 공격을 받았다.

1974년 DCG는 대통령 후보로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장군을 지지했으나, 부정선거 의혹 속에 키엘 에우헤니오 라우게르드에게 패했다. 세레소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DCG는 14석으로 야당 내 최대 정당이 되었다.

1978년 DCG 후보 리카르도 페랄타 멘데스 장군은 페르난도 로메오 루카스 가르시아에게 밀려 2위를 차지했다. 루카스 가르시아 집권 기간 동안 150명의 DCG 당원이 살해되었다. 세레소는 1982년 3월 선거에서 알레한드로 말도나도 아기레 야당 후보를 지지했지만, 공식 후보인 안헬 아닐발 게바라에게 패했다.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자, DCG와 세레소는 처음에는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리오스 몬트의 탄압이 심해지고, 광적인 복음주의 설교를 하자 세레소는 지지를 철회하고 새로운 선거를 요구했다. 1983년 오스카르 우베르토 메히아 장군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자, 세레소는 신중하게 이를 지지했다. 1984년 국회 선거에서 DCG는 21.2%의 득표율로 20석을 차지하며 최대 정당이 되었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1985년 대통령 선거에 세레소를 출마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과테말라 국가 혁명 연합(URNG)과 대화할 생각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3. 2. 대통령 당선 (1985)

1985년 과테말라 대통령 선거 1차 투표(1985년 11월 3일)에서 세레소는 38.6%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2차 투표(12월 8일)에서는 호르헤 카르피오를 68.4%의 득표율로 이겼다. 과테말라 기독교 민주당(DCG)은 의회 100석 중 51석을 확보했고 전국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다수당이 되었다. 그는 1966년 이후 처음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자 민간인이었다. 취임식에서 국민들의 큰 기대 속에 그는 우익 세력이 공공 질서나 국가를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취임 126일 이내에 과테말라를 바꾸겠다고 서원했다. 대통령으로서 그의 첫 조치 중 일부는 참모총장이자 인권 침해 혐의자였던 로돌포 로보스 사모라를 군에서 강제로 은퇴시키고 하이메 에르난데스 멘데스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군과의 "의지의 시험"으로 묘사되었다.[1]

1985년 대통령 선거에서 기독교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우파 후보인 호르헤 카르피오 니콜레를 누르고 당선되어 1986년 1월 14일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군인 이외의 인물이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1966년 후리오 세사르 멘데스 몬테네그로 이후 20년 만이었다. 군부는 계속해서 게릴라 진압 및 국방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시민의 정치 참여 기회는 증가했다.

4. 대통령 재임 (1986-1991)

비니시오 세레소는 1985년 과테말라 대통령 선거에서 38.6%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고, 결선 투표에서 68.4%의 득표율로 호르헤 카르피오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과테말라 기독교 민주당(DCG) 소속으로, 당선 당시 의회 100석 중 51석을 확보하고 전국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다수당이 되었다. 이로써 세레소는 1966년 이후 처음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민간인 대통령이 되었다.[1]

세레소는 취임 후, 인권 침해 혐의자인 로돌포 로보스 사모라 참모총장을 군에서 강제 은퇴시키고, 하이메 에르난데스 멘데스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 했다.[1]

1990년 5월, 세레소 정부는 과테말라 국민혁명연합(URNG)과 마드리드에서 다가오는 선거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중요한 합의에 서명했다. 그는 1951년 이후 처음으로 민주적인 정권 이양을 통해 후임인 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같은 해, 과테말라-러시아 관계 개선의 일환으로 세레소는 러시아 언어학자 유리 크노로조프를 과테말라에 초청하여 훈장을 수여했다. 마야 상형 문자 해독에 중요한 역할을 한 크노로조프는 이 훈장 수여를 통해 처음으로 마야 문명 유적지를 방문할 수 있었다.

4. 1. 국내 정책

비니시오 세레소는 1985년 과테말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1966년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취임 당시 국민들의 기대는 컸으며, 세레소는 우익 세력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고 126일 안에 과테말라를 변화시키겠다고 약속했다.[1]

그의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는 군부 내 인권 침해 혐의자를 강제 퇴임시키고 국방장관을 교체하는 등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1] 그러나 그의 임기 동안에도 과테말라 보안군에 의한 초법적 살인이 계속되었고, 1986년에는 매달 100명이 갈등으로 사망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세레소는 이웃 국가들의 내전에 대해 중립을 선언하고, 중앙아메리카 의회 설립을 지지했다. 1987년 에스키풀라스에서 열린 두 차례의 중요한 회의를 통해 지역 평화 재건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1987년, 세레소는 국가화해위원회를 설립하고 과테말라 국민혁명연합(URNG)과의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세레소는 반군 진압을 위해 미국에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그의 임기 동안 쿠데타 시도와 암살 위협이 있었으며, 1988년과 1989년에는 군부에 의한 쿠데타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진압되었다.[2]

1989년에는 정치적 폭력과 납치 사건이 증가하면서 정치 상황이 악화되었다. 1990년, 세레소 정부는 URNG와 중요한 합의에 서명하여 다가오는 선거를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세레소는 1951년 이후 처음으로 민주적인 정권 이양을 통해 후임 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그의 임기 동안 과테말라는 민주주의를 유지해 왔다.

1990년 12월, 군인들이 산티아고 아틸란에서 농민 24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과테말라에 대한 군사 원조를 중단했다. 세레소 대통령은 이전 쿠데타로 인해 시골 지역에서 인권 침해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학살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세레소 정권은 인플레이션과 농산물 가격 하락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사회·경제 개혁은 반대에 부딪혀 충분히 실행되지 못했다.

세레소 집권 기간 동안의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연도사건
1985년과테말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
1986년군부 내 인권 침해 혐의자 강제 퇴임 및 국방장관 교체[1]
1987년국가화해위원회 설립 및 URNG와 협상 시작, 에스키풀라스 평화 협정 체결
1988년군부에 의한 쿠데타 시도 (진압)[2]
1989년군부에 의한 쿠데타 시도 (진압)[2], 정치적 폭력 및 납치 사건 증가
1990년URNG와 선거 불간섭 합의, 산티아고 아틸란 학살 사건 발생, 미국 군사 원조 중단


4. 2. 중미 평화 협정

비니시오 세레소는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평화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86년 과테말라 에스키풀라스에서 열린 첫 회담을 시작으로, 1987년 8월에는 에스키풀라스 II 협정을 통해 "확고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위한 절차"를 수립하여 지역 평화 재건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1] 이 협정은 오스카르 아리아스 산체스 코스타리카 대통령이 제안한 중앙아메리카 5개국의 평화 협정안에 대한 동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세레소는 이웃 국가인 엘살바도르니카라과에서 발생한 내전에서 중립을 선언하고, 중앙아메리카 의회(Central American Parliament) 구성을 적극 지지했다.[1] 특히,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혁명을 타도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에 협력하지 않았다.

또한, 세레소는 과테말라 국민혁명연합(URNG) 게릴라와의 대화를 통한 협상을 시작했다. 1987년 10월 마드리드 회담에서는 큰 진전이 없었지만, 국민화해위원회(CNR) 설립에 합의했다. 1990년 4월에는 오슬로에서 회담을 열어 재계, 종교 등 분야별 회합을 지속적으로 개최하는 데 합의했다.,

4. 3. 게릴라와의 대화

1987년 9월 11일, 세레소 대통령은 국가화해위원회(CNR)를 설립했고, 10월 7일에는 URNG과 정부 간의 협상이 시작되었다.[1] 이틀 후 정부가 URNG의 조건을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지만, 세레소 대통령은 무장 세력의 반란 진압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에 더 많은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1] 10월 28일에는 의회가 일반적인 정치 사면을 통과시켰다.[1]

그때까지 과테말라 정부는 게릴라의 무장 해제를 대화의 전제 조건으로 삼았기 때문에 실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7년 10월 마드리드에서 회합을 열어 큰 진전은 없었지만, 국민화해위원회(CRN) 설립에 합의했다. 1990년 5월, 세레소 정부와 URNG는 마드리드에서 다가오는 선거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중요한 합의에 서명했다.[1] 같은 해 4월에는 오슬로에서 회합을 열어 그 합의에 따라 재계, 종교 등 분야별 회합이 거듭되었다. 그러나 세레소 대통령 집권 중에도 군부에 의한 폭력은 계속되었고, 1990년 12월에는 산티아고 아티틀란에서 주둔군에 의한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 결과 미국은 군사 원조를 중단했다.

4. 4. 쿠데타 시도

1988년 5월 11일, 두 명의 대령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1989년 5월 9일에는 1년 전 쿠데타에 가담했던 인물들을 포함한 약 300명의 반란군이 또다시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진압되었다.[2] 세레소는 쿠데타를 피하기 위해 군대의 일부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고 인정했다. 군대의 요구에는 친소련 국가와의 관계 단절, URNG과의 모든 접촉 중단, 더 나은 장비를 위한 더 많은 자금 지원, 그리고 많은 지역 정치인들의 제거 등이 있었다.

5. 퇴임 이후

세레소는 1991년 중앙아메리카 의회에서 초대 부의장으로 5년 임기를 수행했다. 그는 요르단 섬 매입 사기, 미르나 맥(Myrna Mack Chang) 살인 은폐, 아들 소유 환경단체에 대한 대규모 토지 할당 등 여러 혐의를 피하기 위해 의회와 전 대통령직 면책 특권을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3]

1999년 선거에서 과테말라 기독교민주당(DCG)이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자, 세레소는 당이 얻은 두 국회 의석 중 하나를 차지했다. 2003년 선거에서 재선되어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임기를 수행했으며, 당내 유일한 부의장이었다.[3]

2007년 총선에서 세레소는 국회 의석을 잃었고, 당도 의석을 얻지 못했다. 아들 비니시오 세레소도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1% 미만 득표에 그쳤다.[3]

현재 세레소는 에스퀴풀라스 협정의 '확고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위한 절차'를 따르는 NGO 에스퀴풀라스와 올린다 살게로(Olinda Salguero) 주도의 중앙아메리카 통합을 위한 에스퀴풀라스 III 회의를 이끌고 있다. 정치 컨설턴트로도 활동 중이다.[3]

2017년 6월 29일 코스타리카 산호세 49차 회의에서 중앙아메리카 통합 시스템(SICA) 사무총장 임명이 발표되었다. 2017년 8월 7일 에스퀴풀라스 II 협정 기념일에 과테말라 정부로부터 평화 대사로 임명되었다.[3]

중앙아메리카 통합체(SICA) 사무총장으로서 엘살바도르살바도르 산체스 세렌 대통령과 회담하는 세레소(오른쪽, 2017년)


그 후에도 세레소는 중앙아메리카 평화를 위해 노력하며, "중앙아메리카의 대사"로 알려졌다.

2017년 6월 중앙아메리카 통합체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6. 비판 및 논란

비니시오 세레소는 중앙아메리카 의회 부의장 및 대통령직 면책특권을 이용하여 여러 혐의를 피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주요 혐의는 다음과 같다.[1]


  • 요르단 섬 매입 사기
  • 미르나 맥(Myrna Mack Chang) 살인 은폐
  • 세레소의 아들 마르코 비니시오 세레소 블란돈 소유 환경보호 단체에 대규모 토지 할당


1999년 선거에서 과테말라 기독교민주당(DCG)이 대통령 후보를 내지 못하자, 세레소는 당이 얻은 두 개의 국회 의석 중 하나를 차지했다. 2003년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나, 2007년 총선에서는 의석을 잃었다. 그의 아들 비니시오 세레소도 대통령에 출마했지만 1% 미만의 득표율을 기록했다.[1]

참조

[1] 뉴스 Guatemala President-Elect Prevails; Cerezo Forces Retirement of Key General in Test of Wills With Army http://nl.newsbank.c[...] 1986-01-10
[2] 뉴스 Guatemala Puts Down Coup Attempt https://www.washingt[...] 1989-05-10
[3] 서적 Biografías y Vidas. La enciclopedia biográfica en línea https://www.biografi[...]
[4] 웹사이트 Vinicio Cerezo Arévalo http://www.cidob.org[...] 2012-10-15
[5] 뉴스 과테말라도 軍政종식 세레소大統領 당선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5-12-10
[6] 뉴스 과테말라 11월총선 우익정권 재등장 가능성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90-11-10
[7] 웹사이트 Vinicio Cerezo Arévalo http://www.cidob.org[...] 2012-10-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